장난처럼 말하자고 생각했는데도 정작 나오는 목소리에는 질투가 가득 담겨있어 여주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얼결에 제 주스까지 마시는 석진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석진은 저와는 달리 늘 주위에 친구들도 많았고,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많았던 것 같고. 제 주스까지 마시고 있는 석진을 보던 여주가 대뜸 제게서 나온 질투어린 말투에 놀라 입을 다물고 한참을 석진을 바라보다 제 볼품없는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석진이 주스를 다 마실 때까지 서로에게선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석진은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를 풀어보려 부러 헛기침을 했다. 그런 석진의 노력이 한눈에 보여서 결국 작게 웃어버린 여주가 그제야 시선을 올려 석진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인기 많구나.”
“그건 아닌데.”
참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여전했다. 저가 늘 다른 이들에게 선망 받고, 두터운 신임을 받음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여주에게 아니라고 이야기 해오는 표정이 낯설지 않아서 여주는 제 마음을 뒤로 한 채 한껏 웃어버렸다. 질투를 해서 뭘 어쩔거냐며 저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스스로를 달래다보니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와 여주는 괜한 곳에 화풀이 하듯 말했다.
“나는, 사과주스 싫어해.”
사과주스가 괜히 싫어졌다. 그깟 사과주스가 뭐라고. 이렇게 질투의 대상이 돼버린 건지 알 턱이 없었다. 유치하다고 놀릴지도 몰라도, 이제 사과주스 같은 건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했다. 사과주스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다시 쳐다보면 석진은 한껏 당황한 채로 여주를 바라보다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해왔다.
“아…. 그래? 그럼 다음엔 좋아하는 주스로 사올게.”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그냥….”
그제야 저 때문에 곤란해져버린 석진이 보여 조금 미안해졌다. 이럴 때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려야 하나. 병에 걸린 후로는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어보기만 했지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어 여주는 이런 상황이 어려웠다. 결국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석진이 분위기를 환기 시키듯 말해온다.
“산책 갈래? 네가 좋아하는 주스 사줄게.”
“…푸흐- 그래. 가자, 산책.”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석진은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푸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네가 좋아하는 주스 사줄게,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화 풀자. 알았지? 석진이 뒷말을 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제 귀에는 그런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별건 없었다. 혼자서도 많이 누비고 다녔던 병원내의 작은 산책길을 걷다 멀리 보이는 자판기에 달려가 뒤따라오는 석진을 기다렸다.
“너 이거 진짜 좋아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과일주스를 부러 고르자 석진이 몇 번이고 재차 물어왔다. ##여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버튼을 눌러 주스를 뽑았다. 침전물이 잘 섞이도록 흔든 주스 병을 건네받고 가만히 들고 있자, 그가 깜빡 했다는 얼굴로 병의 뚜껑을 열어 다시 여주에게 조심스레 건네며 말했다.
“진짜 좋아하는 거 맞지?”
"응, 이거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거야.“
혹시 제 얼굴에 싫은 기색이라도 비쳤나 싶어 활짝 웃은 여주가 한 번도 제 돈 주고 사먹어 본적 없는 얄궂은 맛의 과일주스를 제 목으로 넘겼다. 목으로 이도저도 아닌 맛이 느껴졌다. 인상을 쓰고 싶었지만 꾹 참아내며 그 자리에서 주스를 다 비워냈다. 빈 병을 들고 살랑 흔들자 석진이 그게 뭐냐며 함께 웃었다.
이제부터, 제일 좋아하는 주스야. 아마도. 너도 이 주스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
두툼한 입술을 끌어올려 웃던 석진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여주의 어깨에 걸쳤다. 순식간에 어깨 위로 걸쳐진 적당한 무게의 차콜색 코트를 바라보던## 여주가 그를 올려다보자 석진이 여주의 머리를 작게 헝클이다 웃으며 말했다.
“추워 보여서.”
“나 추위 잘 타는데. 역시 우리 반장!”
과장되게 엄지를 석진 쪽으로 치켜세운 여주가 코트에서 나는 석진 특유의 향에 몰래 숨을 깊이 들이쉬길 반복했다.
좋다. 이러니까, 네가 안아주는 것 같아 따뜻해.
산책길을 걷다 석진과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제가 도망치듯 자주 오던 옥상정원이었다. 옥상정원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밖이 내려다보이는 정원의 가장자리로 향한 여주를 따라 석진이 발걸음을 뗐다. 간간히 지나가는 색색의 차들과,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여주를 흘끔 쳐다본 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엔 밖에 같이 놀러가자.”
“…그래. 이거 데이트 신청이지, 반장?”
석진의 말에 여주가 잠깐 숨을 멈췄다는 걸 석진은 모를 것이 분명했다. 세상과 격리된 듯 딴 세상인 듯한 바깥을 다시 바라본 여주가 제가 저 세상 속에 낄 수 있는 시간이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그래, 영화도 보고, 밥도 먹자.”
“응. 꼭, 가자. 꼭.”
확신도 없음에도 흔들림 없이 이어오는 석진의 말에 여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옥상정원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병실로 다시 돌아왔을 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그런데도 석진은 여직 갈 생각이 없어 보여 여주는 모처럼 제 침대에 앉아 외롭지 않다 느꼈다. 간이의자에 앉자 저에게 조근 조근 말을 건네 오는 석진에 간간히 대꾸해주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아까처럼 시간이 더디게 가길 바랐다.
“저녁 먹을 시간이에요, 여주씨.”
평소 식사에 생각이 없었던 터라 저녁 시간인지도 잊고 있었다. 짧은 노크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고 저를 담당하는 간호사가 식사를 들고 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침을 별로 먹지 않던 게 신경 쓰였던지 굳이 식사를 들고 온 간호사를 보며 고개를 아무렇게나 끄덕인 여주 앞으로 석진이 일어났다.
“가려고, 반장?”
“어? 아니. 보조식탁 세워주려고.”
석진이 일어나는 모습에 시계를 흘낏 본 여주가 운을 떼자,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 흘러나왔다. 제 앞에 보조식탁을 세워주자 간호사가 저녁식사를 올려두곤 별다른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식탁 위로 올려 진 식사를 봐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석진의 시선이 어쩐지 제 엄마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여주가 웃어버렸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웃었더니 석진이 놀란 눈으로 여주를 바라보다 왜? 하고 물어왔다.
“우리 엄마 같아서.”
“아.”
여주의 말에 석진이 저도 이해되었다는 듯 웃어 보이다, 장난스럽게 말해왔다.
“아가, 맘마 먹을 시간이야. 어서 먹자.”
“네에….”
뭔가 유치한 장난이 되어버렸지만, 석진의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숟가락을 힘주어 잡았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젓가락을 잡은 석진이 반찬을 숟가락위로 골고루 올려주는 게 좋아서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을 속으로 넣고 또 넣었다.
“잘 가.”
“응. 내일 또 올게.”
“그래. 오늘은 졸려서 마중 못 나갈 것 같아.”
“괜찮으니까 누워있어. 갈게.”
너무 많이 먹었다. ##여주는 금방이라도 다 쏟아낼 것 같이 울렁이는 속을 몇 번이고 가라앉혔다. 침대에 누운 여주는 나가는 석진의 뒤로 손을 흔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석진이 나갔고 문 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침벌레님의 탁월한 사진 선택 능력!
너무 대단하지 않나요?
크흡ㅠ_ㅠ
이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암호닉 신청해주신
'열렬'님 너무너무너무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