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은 여주의 괜찮다는 말을 여러 번 듣고서야 여주의 안색을 살피다 다시 제 이야기를 조금 더 꺼내 들었다. 석진이 조금이라도 웃긴 이야기를 하면 유쾌한 듯 웃어 보이는 여주 덕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다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번 보러 왔어요. 도우미는 어때요. 괜찮아요?”
의사와 간호사가 상태를 확인할 겸 들어와 물었다. 간단한 안부를 묻는 말과 석진을 가리키며 물어오는 말에 여주가 장난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반장도 했었어요!”
한번 밖에 하지 않았던 반장을 계속해 말하는 여주에 석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장이란 말에 의사와 간호사의 시선이 석진에게로 쏠렸다.
“아, 안녕하세요.”
제게로 쏠린 시선에 석진이 붉은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당황해하는 석진의 모습에 여주가 배를 잡고 웃었다. 짜증이 났을 상황이건데 여주가 웃는 것은 어쩐지 나쁘지 않아 석진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웃다 제 손목의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가야할 시간이었다.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내일 또 올게.”
“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일 빨리 와. 반장.”
가본다는 말에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늦게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익살스런 행동에 웃은 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멨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는 석진의 뒤로 여주가 따랐다.
“안 나와도 돼.”
“내 맘이야.”
“…내일 또 올게.”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석진의 말에도 기어코 제 발에 슬리퍼를 끼워 넣은 여주가 병실 문을 열고 등을 보이며 가는 석진의 뒤로 손을 흔들었다. 석진이 두 걸음쯤 가다 멈춰서 뒤를 돌았다. 뒤돌아 본 곳엔 여전히 여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손짓을 따라 석진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여주는 석진의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석진이 보이지 않자 여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석진은 가고 없음에도 여주는 한동안 문 앞에 서있었다. 텅 빈 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놓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온 것이었는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도 전에 새로운 것이 손에 들어와 놓고 싶지 않았다.
“휴….”
하지만 계속 복도에 서 있을 수는 없었기에 크게 숨을 들이 쉰 여주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섰다. 불빛 아래 환한 병실이 쓸쓸해 보였다. 슬리퍼를 질질 끌어 침대 앞에 선 여주가 슬리퍼를 대충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위로 보이는 천장이 쓸쓸함에 외로움을 더했다. 조용한 병실에 혼자 있으니 우울한 생각에 잠겨 질식할 것 같았다. 여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이라도 생각을 해야 했다.
“여전히 잘 생겼네.”
그래서 여주는 석진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좀 전에 봤던 석진의 얼굴과 열일곱의 석진의 얼굴이 그려졌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얼굴이었다. 열일곱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주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거슬러 올라갔다. 스물셋을 지나 스물을 지나 열여덟, 열일곱.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선명하게 제 앞으로 열일곱의 제가 그려졌다. 약간 헐렁한 교복을 입은 제가 눈으로 누군가를 좇고 있었다. 두 볼에는 붉은 홍조가 새겨져 있었다.
여주는 열일곱 저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의 끝에는 열일곱의 석진이 있었다. 심부름 중인지 한 팔에는 프린트 물이 잔뜩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무거울 법 한 대도 석진은 힘든 기색 없이 이반, 저반을 돌았다. 열일곱의 저는 그 모습을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다 흘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하는 눈빛이었다. 석진의 몸이 한 번씩 흔들거릴 때면 제 몸도 같이 들썩였다.
“그럴 거면 나가서 같이 도와주지.”
하지만 열일곱의 저는 도와주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때의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으니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석진은 도움 없이도 심부름을 무사히 끝냈다. 홀가분하게 교실로 들어오는 석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중 열일곱의 저와 열일곱의 석진의 눈이 맞닿았다. 열일곱의 저가 갑작스레 맞닿은 시선에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열일곱의 석진이 살짝 웃었다. 열일곱의, 지금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 놀랐네.”
과거 회상에서 깨어난 여주가 가슴 위를 더듬어 뛰고 있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위로 느껴지는 것은 없었으나 귓가로 커다란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커다란 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다 잊었다고, 포기했다고 생각한 감정의 소리와 느낌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어쩌겠다고….”
이제 와서 뛰는 심장 뭐 어쩌겠다고.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을 어쩌겠다고 다시 느껴버린 건지. 여주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느끼지 마. 생각하지도 마. 그냥 가볍게 웃는 걸로 끝내. 결국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더 만들지 마. 제발.
“제발, 놓자, 놓자, 놓자.”
여주는 이미 수백 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 말을 간절하게 되새겼다.
기나긴 밤을 묶어도 계속 풀리는 다짐과 씨름하며 보냈다. 풀리는 매듭을 힘겹게 묶고 잠든 꿈에서도 여주는 바람결에 날리는 다짐을 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잠을 설친 탓으로 이른 아침 눈을 뜬 여주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해가 뜨지 않아 아직은 차가운 하늘이 창에 비춰졌다. 오늘은 오전이 무척이나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에이 씨-.”
벌써 세 번째 몸을 들썩 거리고 있었다. 여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몸을 손으로 꾹 눌렀다. 하지만 몸을 가만히 두기 위해 손으로 누른 것이 무색하게 밖에서 또 다시 들려오는 발소리에 들썩 거리는 몸에 여주가 자포-자기 한 얼굴로 벌러덩 누웠다.
“언제와!”
병에 걸린 후로 혼잣말이 많아졌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함께 걸어줄 사람 없이 혼자 걸어야 하기에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혼잣말이 많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대충 언제 올 건지는 말해주고 가야지!”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이토록 기다리는 것은 네가 보고 싶어서가 아닌 외로움 때문이니 부디 네가 이런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
“…아, 안녕하세요.”
“네. 잠은 잘 잤어요?”
“그럭저럭요.”
석진이 언제 올까-. 무릎을 감싸 안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발소리도 듣지 못했던 터라 여주가 살짝 놀란 얼굴로 문을 보자 간호사가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석진이 온 줄 알고 붕 떴던 기분 좋은 감정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환자 체크를 하러 온 간호사는 잠을 못 잤다는 여주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어디 아팠어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잠을 설친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아침을 많이 남겼던데 배가 안 고팠어요?”
“네. 딱히 배고프진 않아요.”
“영양제 맞고 있으니까 덜 먹어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괜찮으려면 밥을 먹는 게 좋은 거 알죠?”
간호사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의 끄덕임에 간호사가 나중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간호사가 나간 홀로 남은 병실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여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병실 문으로 향했다.
“진짜 언제 오냐, 반장아.”
얼른 와서 오늘 있었던 일 말해줘. 그러면 조금 괜찮아 질 것 같아. 나도 모르는 내 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 같아. 그러니-
“빨리 와줘라. 김석진아.”
입술 사이를 흘러간 석진의 이름에 여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일까. 이건 어디로부터 오는 눈물인걸까.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오는 눈물일까 아니면 나의 아픔으로부터 오는 눈물일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히 알 것 같은 건 가장 나약해 있을 때 네가 나타난 건 하늘의 장난이라는 거다.
p(´∇`)q
안녕하세요! 침벌레님과 함께 글을 쓰고 있는 셋째홍일점 입니다!
유명 작가님과 함께 하게되어 너무 기쁘고 떨립니당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세요! (ง •̀_•́)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