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니 침대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충격이었다. 석진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위로 손을 덮었다.
석진이 그렇게 저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을 제 손으로 가려버렸을 때 여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여주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제 앞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 여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제가 미처 졸업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자퇴서를 내야만 했던, 학교였다.
자의라기에는 몸이 너무 자유롭게 저절로 움직이고 있어 제가 꿈속에 있다는 걸 더 명확하게 해주었다. 동편 현관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제가 다녔던, 그리고 석진이 있는 그때의 제 반이 나타났다. 꿈인걸 알면서도 조금은 들떠버린 여주가 두 뺨이 상기된 채로 교실 문 앞에 섰다. 숨을 몰아 내쉬는 사이 교복 위로 덧입혀진 남색 가디건과 검정색 가방도 제가 들이쉰 숨만큼이나 흔들거렸다.
“…꿈이어도 좋네.”
이런 꿈은 처음이라, 꿈인걸 알면서도 멍한 상태의 여주가 입 밖으로 목소리를 부러 냈다. 불투명한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이 확실히 지금보다 훨씬 덜 아플 때의 모습인 게 보여서 어색해질 무렵이었다.
“김여주, 안 들어가고 왜 거기 서있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주가 어깨를 떨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제가 늘 기다리고 있던 석진이었다. 어쩐지 뒤를 돌면 꿈이 깰 것만 같아 한참을 그 상태 그대로 멈춰서있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왜 그래, 여주야?”
한참이나 미동이 없는 저에 걱정이 묻어나는 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웃음이 나와 여주는 고개를 돌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가장 밝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꿈이니까, 꿈이라면. 내가 가장 너에게 예뻐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그런 여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석진이 연하게 웃어보이곤 여주의 등을 살짝 밀며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고등학교 1학년. 석진과 다소 멀리 떨어진 제 자리가 보였다. 제 자리가 어딘지 까먹지 않고 용케 제 책상위로 가방을 올린 여주가 의자에 앉자 석진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주의 책상 앞에 선 석진이 책상에 제 턱을 괴며 한손을 여주의 이마위로 올렸다. 여주가 제게 갑자기 닿아온 석진의 손에 움찔거렸을 때도 그는 여주의 이마에 손을 여전히 올려둔 채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너 어디 아파? …열은 없는데.”
“…나 안 아파.”
그 말에 손을 떼며 그래, 그럼 하고선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린 석진이 제 교복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여주의 손위로 올려두곤 눈가를 찡긋거렸다.
“기운 차려.”
“응….”
석진이 준 사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주가 사탕껍질을 벗겨 제 입안에 넣고 도르륵 굴렸다. 어쩐지 그때 자판기에서 석진이 저를 위해 뽑아준 얄궂은 과일주스 맛이 났다.
그러니까, 그때와 같지만 그때와는 다른. 석진은 고등학교 시절도 변함없이 제게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거나 친한 척 성을 떼고 이름을 불러오는 경우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주는 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꿈이어서, 네가 나에게 유달리 다정한 거라면. 꿈이어도 좋아. 너랑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정말 꿈만 같아.
꿈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석진만이 제게 말을 걸어왔다. 쟤들한테는 내가 안 보이나,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다가도 뒤를 돌아 간간히 저를 확인하는 듯 한 석진의 행동에 양 볼을 손으로 감싼 여주가 고개를 숙였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오래도록 머물러 있어서 여주는 온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안 보인다는 것을 말해주듯 석진과 단둘이 식판을 들고 나란히 마주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억지로 삼켜야만 겨우 넘어가던 음식들도 웬일인지 술술 넘어갔다.
마치 아프지 않은 것처럼.
숟가락에 밥을 퍼 올리자, 어느새 식사를 마친 석진이 팔을 괴고 여주를 바라보다 제 젓가락을 집었다. 여주가 그런 석진의 행동을 바라보자 그가 젓가락으로 이내 반찬을 집어 그녀의 숟가락위로 단정하게 올려주었다.
…어, 이거.
석진이 어제 제게 반찬을 올려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는 원래 이렇게 다정하구나, 반장.
“고마워.”
“잘 먹으니까 보기 좋다.”
꿈속의 석진은 어쩐지 지금의 제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굴어 여주는 마음이 쓰이다가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았다. 모든 것이. 제게 유독 다정하게 굴어오는 그가, 제가 신경 쓰여 제 시선 안으로 넣으려는 듯 구는 그의 행동이, 마치-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았다.
“매점 갈래?”
점심을 다 먹고 물어오는 석진에 여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그의 옆에 제 발걸음을 맞췄다. 크지 않은 보폭으로 석진을 따라가자 그가 여주의 보폭에 발을 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제 보폭에 맞춰 걷는 석진을 보며 작게 웃음 지은 여주가 먼저 매점으로 들어선 그를 따라 매점으로 들어섰다. 뭘 마시겠냐며 물어오는 석진에 여주가 이번만큼은 제가 먹고 싶었던 딸기우유를 골랐다. 고심 끝에 고르는 게 눈에 보여서인지 그가 저를 향해 웃는 것도 같았다.
딸기우유에 빨대를 꽂아준 석진을 따라 쫄래쫄래 나서는 게 꿈속에서나, 꿈밖에서나 어쩐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건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주가 제 입에 물린 딸기우유를 힘주어 빨아 당겼다.
석진을 따라 자리를 옮기자 보이는 풍경은 학교의 교정이었다. 날이 따뜻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추운 것도 아니어서 여주와 석진은 나란히 교정에 앉았다. 깨끗한 하늘,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여주가 눈을 감았다.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는 아프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제가 좋아한 그때의 석진이 있었으니까.
너무나 행복한 꿈이었다. 여주는 절로 지어지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배시시 웃는 여주를 본 석진이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건드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여주의 눈이 커졌다.
“뭐가 그렇게 좋아?”
“응?”
“웃으니까 예쁘네.”
석진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여주가 놀라 커진 눈을 더 크게 뜨며 석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얼굴이 뚫어져라 살펴도 그의 얼굴에선 눈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석진이 웃으며 제 볼을 잡고 있는 여주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왜.”
“아니- 우는 줄 알았어.”
“응. 나 울고 있어.”
“…어디?”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눈동자로 울고 있다 말하는 석진에 여주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가리키는 곳을 보자 대학생의 석진이 보였다. 석진이 미래의 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돌아가.”
“응? 어떻게?”
“꿈에서 깨면 되지. 얼른 가.”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안 돼. 저기 봐. 나 지금 울고 있잖아. 가서 달래줘야지.”
조금만 더 있을게-! 여주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듯 정신이 훅 들어왔다. 여주가 눈을 번뜩 떴다.
비축분이...!
비축분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슬프군요...
땅위님, 잠만보님, 열렬님, 츄파춥스님, 디즈니님
감사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