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ids) 04
w.규닝
04. 빨간 동그라미
성열의 손에 들려있던 펜이 삐끗했다. 그렇게 좆같은 분위기로 먼저 자리를 뜨고 난 다음날 아침, 해장도 못하고 찾은 강의실에 남우현은 그림자도 내비치질 않고 있었다. 이미 열번도 넘게 한 연락은 무참히 씹히고 있는 마당에 출석 차례는 점점 가까워져만 오고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이 웬수새끼. 이를 으득 간 성열이 쓰린 속을 움켜쥐고 씨발, 씨발이라 적어가면서ㅡ애꿎은 글씨로 화풀이를 해대고 있을 때였다.
톡,하고 뒷통수에 날아든 종이 공에 뒤를 돌아본 성열이 나란히 앉아 있는 호원, 동우와 눈이 마주쳤다. 동우가 또박또박한 입모양으로 말해왔다. '남.우.현.은.?'
나보고 이제 과생활은 끝났다며 비웃은 놈들이 남우현 학점은 챙겨주는 꼴 봐라. 성열이 동우 쪽으로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들려온 저의 이름에 네,하고 대답한 성열이 다시금 머리를 정면으로 향했다. 내 이름이 불렸으면 이제 곧 남우현이 불릴텐데. 이 뭣같은 웬수새끼, 어제 일만 생각하면 절교해도 마땅찮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워낙 못난 녀석이라 지금까지도 출석 점수는 엉망이었으니까. 오늘도 결석처리되면 니새끼 학점은 C를 면치 못할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성열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허리를 숙인채 뒷자리로 이동했다. 방금까지 저가 엿을 날린 동우의 옆쪽에 착석한 성열이 뭐냐는 듯한 동우의 표정에 한숨쉬듯이 대답했다. 대출 해줘야지 어쩌겠어. 그런 성열의 대답에 호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눈물나는 우정이구만. 결혼해라 둘이.
"남우현."
"네!"
호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들려온 우현의 이름에, 평소 제 목소리보다 한 톤 낮은 음으로 대답한 성열이 티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야 했으므로. 우현의 목소리를 꽤나 잘 흉내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고개를 들려고 한 순간이었다. 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던 교수가 성열 쪽을 쳐다보았다.
"남우현?"
"…네, 네?"
회 떠지는 날생선처럼 퍼득거리며 놀란 성열이 얼떨결에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에 띄게 굳어버린 성열의 얼굴과 교수의 의아한 얼굴이 마주보게 되었다.
"자네는 이성열인가? 남우현인가?"
덤덤한 표정으로 물은 교수가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인격이 두개가 아니라면 한가지만 하게."
남우현 때문에 망쳐버린 것은 과 생활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어제부로 끝인 줄로만 알았던 불행의 연장선인 것이 분명했다. 불과 이틀 사이에 과 생활과 학점까지 모두 쫑내버린 성열이 아직까지도 묵묵부답인 핸드폰을 힐끗 쳐다보다가 고개를 책상 위로 박았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호원과 동우의 킥킥거리는 비웃음을 고스란히 들으면서 성열은 생각했다. 씨팔, 그냥 군대나 일찍 갈걸.
* * * * *
애초에 술병을 깔 때부터 이건 정말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커튼이 젖혀진 방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두 눈을 찡그리며 받아내는 와중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낯선 냄새가 가득 배인 침대와 이불, 베개. 그 모든 것에 둘러싸인 우현이 제 눈을 따갑게 만드는 햇빛때문에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으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속 쓰려. 한 숨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머릿속으로 얼핏 얼핏 떠오르는 어젯 밤의 깡소주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이 곳이 천사의 방 안임을 알 수 있었다. 살짝이 열려진 방 문 너머로 누군가가 요리하느라 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해장거리는 김치찌개인가보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면서 기지개를 켠 우현이 늘어져 있는 상체를 일으켰다. 오랜만에 떡이되도록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가뿐한 기분은 뭐지. 천사의 방에는 그런 효과도 있나보다. 저절로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거나, 뭐 이런 신비스러운거.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럴지도 모른다,하고 생각한 우현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었다. 중증인가보다. 이건 인정. 침대 밖으로 나와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막을 길은 없었다. 이미 말도 안되게 빠져버렸다. 이것도 인정. 천사가 만들고 있는 김치찌개 냄새를 따라 문을 연 우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현의 인기척에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성규쪽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찌개를 뒤적이다 말고 통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성규가 이윽고 나타나더니 지레 화들짝 놀라서는 다시 숨는 우현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냐, 꽁트하는 것도 아니고.
"왔으면 식탁에 앉아. 이거 다 됐으니까."
성규가 우현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옆에 놓아뒀던 숟가락으로 간을 봤다. 심지어 그것마저 예뻐보여.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던 우현이 흐뭇하게 웃고나선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나 먼저 씻고 올래."
"그러든가. 나도 꾀죄죄한 새끼랑 마주보고 먹기 싫어."
"야."
우현이 부엌 쪽으로 좀 더 몸을 뺐다.
"어제 내가 술 마셔준 뒤로 너 마셨어?"
성규의 모습을 마주하자마자 번뜩 든 생각이었다. 내 천사가 간암으로 죽는 건 용납할수가 없지. 그런 일념 하나로 못하는 술을 세 병이나 깠던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헤 벌어졌던 입을 짐짓 꾹 다문 우현이 저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찌개에만 집중하고 있는 성규를 노려보았다. 야, 너 마셨냐고? 재차 물은 우현이 다물었던 입을 삐죽였다.
"진짜 마신 건 아니지? 내가 뭐 때문에 어제 그렇게 떡이 됐는데."
"……."
"아, 김성규."
"기억 못해?"
제 물음을 잘라먹고 성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그저 안 마셨다는 말 한 마디만을 기다리고 있던 우현이 기습적인 질문에 되려 고개를 갸웃했다. 필름 끊겼냐고? 어느새 찌개를 뒤적이던 손을 거둔 성규가 묘하게 찡그린 표정으로 우현을 돌아다 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규를 보던 우현이 종래에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는데. 잔뜩 쏘아붙이던 아까의 상황과는 역전된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필름이 끊겨버린 다음 날, 지인에게서 듣는 기억 못하냐고 물어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꺼림칙하고 엿같다. 무엇인가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우현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하나도?"
"……."
"…씻고 오기나 해. 개새끼야."
그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인 우현에 어금니를 문 성규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미친 새끼.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런 이상한 말이나 지껄인 주제에, 쓰러지듯 잠에 빠져놓고 이제 와 하는 소리가 기억이 안 난다니. 성규가 애꿎은 보글보글 끓어오는 찌개를 노려보면서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뱉었다.
외롭지 말란 소리에 심난해 한 나만 병신이지. 애초에 개같은 새끼의 왈왈거리는 말 따위 듣지 말았어야 했나보다. 평상에서 멋대로 입이나 맞춘 주제에, 그 짓 안하면 안되냐고 물어오던 목소리도, 죽지 말라고 덧붙여 오던 목소리도. 만취 상태로 쓰러져버린 우현을 침대에 뉘이는 순간까지 이상하게도 머리속을 찌르듯이 뱅뱅 돌게 만든 어젯밤의 말들 모두 다 그저 짖어대는 소리였나보다.
우현이 화장실 쪽으로 사라진 후에도 굳은 표정 그대로 찌개를 끓이던 성규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마악 끄려고 했을 때였다. 아! 나 입술 터졌어! 화장실 쪽에서 들려오는 우현의 비명소리에 표정 하나 풀지 않고 찌개를 식탁으로 옮기던 성규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팼으니까 터졌지. 병신.
하지만 성규의 대답을 듣지 못한 모양인지 그저 쓰라린 표정으로 입술을 손으로 매만지던 우현이 쿵쾅쿵쾅, 발에 묻은 물기를 닦지도 않고 화장실 안에서 나와 손에 들린 두개의 칫솔을 성규의 면전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전에도 물었잖아. 누구 같이 살아?"
찌개를 세팅하던 성규가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칫솔 두개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치워."
"너 아직 대답 안했어."
"내가 대답을 왜 해?"
웃긴 새끼네. 뜨거운 찌개에서 손을 뗀 성규가 그렇잖아도 불편한 심기 때문에 날카로워진 눈을 치켜떴다.
"내가 왜 너한테 이 집에 누구 산다, 보고해야돼?"
"야, 나는 내 천사가ㅡ"
"흰색은 내꺼니까 파란색 써."
또 나왔다. 천사 운운하는 쓸데없는 말. 길어지려는 말꼬리를 단칼에 자른 성규가 몸을 돌려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떽떽거리는 말투를 보아하면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아올려다가 집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싶었지만, 적어도 어제 제게 키스한 것이 의도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으니까. 성규가 속에서 쓰게 올라오는 침을 삼켰다. 애가 좀 촐랑거리긴 해도, 저런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다른 새끼들처럼 뭔갈 바라고 온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술버릇이 스킨십이라던가, 스킨십이라던가, 키스라던가 스킨십이라던가…. 그럴 수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 애써 속으로 우현에 대한 화를 삭히던 성규가 찌개를 올려두고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에는, 그나마 어느정도 풀려 있던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히익."
입 안 가득 거품을 물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양치질을 하고 있는 우현의 손에 들린 것은ㅡ 제가 쓰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흰색 칫솔이었기에.
"아! 기어으 담ㄲ, 나 이거 홈 뱉,"
이것 좀 뱉고! 라고 말하려던 우현의 등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화장실 바깥쪽으로 떠밀려졌다. 저의 면전에 대고 쾅!하는 굉음과 함께 닫히는 문을 본 우현이 화장실 옆 벽면을 발로 찼다. 아오!씨, 왜 하필 이 때 들어와서. 저의 만행을 들켜버린 게 짜증이 난 우현이 뾰루퉁하게 칫솔질을 마저 했다. 그러게 누가 이 때 들어오래? 아까의 성규의 말에 빈정이 상해 순간적으로 저지른 심술이었다. 성큼성큼 부엌쪽으로 간 우현이 퉤,하고 싱크대에 거품을 뱉었다. 부글부글 입 안을 헹구면서 무언가 번뜩,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옥탑방 나이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씨발! 너 진짜 죽여버린다 씨팔새끼야?"
화장실 쪽으로 빠르게 달려간 우현이 화장실 불을 광속으로 껐다,켰다를 반복했다. 딸칵딸칵거리는 소리와 재밌는 듯 웃어대는 우현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반면에 화장실 안에서는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씨발 진짜!
"똥도 못싸게 지랄이야 개새끼가!"
하여간 천사가 입은 거칠어요. 험악하게 들려오는 성규의 목소리에 들으라는 듯이 웃어제낀 우현이 스위치를 눌러대는 손에 더욱 빠른 스피드를 가했다. 즐거운 모닝똥 되시길 바랄게요! 여전히 클럽 디제이에 빙의한 우현이 화장실 안에서는 한참 구겨져 있을 성규의 표정을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지금쯤이면 분명 한참 짜증이 났, 악!
"진짜 뒤져볼려고 환장을 했지, 니가?????"
인기척조차 없던 문이 순식간에 열리면서 튀어나온 성규가 언제 집어든건지 모를 샤워타올을 도망가려는 우현의 목에 걸어 당겼다. 아! 김성규! 잠ㄲ, 급하게 몸을 돌리려던 우현이 샤워타올에 목이 졸려 켁켁거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천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죽여버린다면 정말 죽여버리는 게 천사의 화법이었다. 거침없이 목을 조여오는 샤워타올에 짤짤짤 몸이 흔들리면서 우현이 깨달은 것은 그것이었다.
*
"우현이 아직도 전화 안받아?"
"어. 이성종한테만 존나 온다. 전화."
"니 동생? 뭐라고 하는데?"
"엄마가 죽여버린대."
외박했다고. 성열이 무거운 머리통을 정류장 뒤 쪽으로 기대면서 말했다. 나는 왜 어제부터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고 저쪽에서도 치이냐. 모든 일에 원흉인 새끼는 인신매매라도 당했는지 전화도 안 받고. 성열이 낮게 욕을 읊조리면서 여전히 먹통인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왜 대출을 했어. 우현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래 내가 벼엉신이니까 그랬다, 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자책하는 모습이 불쌍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프리썬을 빨던 동우가 측은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강총회에서부터 성열의 처지를 지켜보던 동우였기에 지금 성열의 심정은 누구보다 이해가 가는 터였다. 힘 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힘내란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동우가 몸을 돌려 저만치 뛰어갔다. 야, 야! 어디 가는데? 성열이 급히 불러 세우자 동우가 작게 뒤돌아봤다.
"나 호원이가 미팅 시켜준대서."
갈게! 꼭 저같이 얄미운 모양의 백팩을 꾹 잡아 쥔 동우가 다시 몸을 돌려 빠른 발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는 미팅이고 누구는. 게다가 자꾸만 오는 성종의 카톡에 짜증이 훨훨 나는 것만 같은 기분에 눈살을 찌푸린 성열이 다시금 우현의 번호를 찾았다.
「뭐하길래 전화도 안 받냐? 당장 전화해」오후2:06
씨팔롬아. 하고 덧붙이려던 글씨를 가까스로 지운 성열이 머릿속엔 계속해서 참을 인을 새겨넣었다.
그러던 성열이 그 앞을 지나가던 남자와 무심코 부딪힌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자는 성열의 쭉 뻗고 있던 다리에 걸린 모양이었고 주춤한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 장면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 성열이 죄,죄송합니다.라고 하는 순간 두개의 핸드폰이 바닥에 엉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똑같은 기종의 핸드폰 두 개. 아, 액정에 기스 나면 안되는데. 핸드폰을 떨어트린 직후,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가 살벌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충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를 한 성열이 덩달아 떨어진 제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우현에게 보낸 카톡을 보아하니 이 핸드폰이 제 것이라고 확신한 성열이 주머니 안으로 그것을 집어넣으려고 할 때였다.
"그게 내껀데요."
이게 그쪽꺼고. 상당히 거친 손동작으로 성열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간 남자가 다른 것을 성열의 품에 던져 넣었다. 얼떨결에 남자가 던진 대로 핸드폰을 안듯이 받은 성열이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액정을 확인 했다.
뭐하길래 전화도 안 받냐고 남우현에게 추궁하듯이 보낸 카톡이 그대로 쓰여진 걸 보아하니 제 것이 맞다. 의아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니, 불쾌하기 짝이없단 눈빛으로 성열을 내려다보던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피곤해서 잘못 봤나. 아까 저 폰에도 똑같은 카톡이 있었던 거 같은데. 성열이 여전히 동그래진 눈으로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그렇고, 참 인정머리 없게도 생겼다. 뒤늦게서야 혀를 내두른 성열이 쯧쯧쯧,하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
「뭐하길래 전화도 안 받아? 당장 전화해」오후2:05
전쟁같은 식사를 치르고 나서야 핸드폰을 집어든 성규의 액정에 떠오른 건 살벌하기 그지없는 카톡이었다. 2시면 벌써 한시간 전에 왔던 카톡…. 지친 몸을 뉘이듯 소파에 앉았던 성규가 상체를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도착 할 시간인가보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할지 고민하던 성규가 액정을 껐다. 일단 남우현부터 보낸 다음에 연락해도 늦지 않지.
"이거 뭐야?"
마침 녀석의 생각을 하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레 놀란 성규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해장을 하고나서 제 등살에 못이겨 나갈 채비를 하던 우현이 벽에 걸린 달력을 무심코 뒤지다가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세장쯤 달력을 걷어내던 우현이 의아한 눈으로 달력 쪽에 고갯짓을 했다.
"저번에도 봤었는데, 이 빨간 동그라미."
매일이 특별한 날이야? 왜 모든 칸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는건데? 우현이 바로 어제까지도 그려 넣어져 있는 빨간색 동그라미를 손으로 가리켰다.
부엌 옆쪽에 걸린 작은 달력에는 얼핏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동그라미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특별한 날에만 표시해두기 마련인 빨간색 동그라미가 매일같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것은 일종의 표식같은 느낌도 들게 했다. 응? 왜 맨날 맨날 빨간 동그라민데. 성규의 대답이 없자 손가락으로 짚은 달력이 머쓱해진 우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을 재촉했다. 방금 전 온 카톡 때문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성규가 귀찮은 기색을 띠며 대꾸했다. 아무 뜻 없으니까 빨리 좀 갈래? 어제부터 계속, 남우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진거라 생각해 퉁명스럽게 나온 말투였다. 그러나 아직 깨지않은 술기운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면서 현관쪽으로 걸어가려던 성규의 발걸음이 뚝 멈춘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럼 오늘꺼 내가 그려도 돼?"
무심하게 던졌던 성규의 대답따라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해온 우현이 달력 앞에 있는 펜을 쥐어들었다. 휘적휘적 걸어가던 발걸음을 딱딱하게 굳힌 성규가 미처 다 뒤돌기도 전에 찌이익,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겉부분이 매끈한 달력에 힘주어 원을 그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박혔다. 그려도 되냐고 물어봐놓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우현이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성규를 돌아다보았다. 오늘꺼 날짜에 내가 그렸어. 펜을 내려두고 성규 쪽으로 걸어오는 동안에도 신이 난 듯 보이는 우현이 촐랑거리는 행동거지로 신발을 구겨 신었다.
현관에 쭈그려 앉은 우현이 제 신발을 갖춰 신는 동안에도 성규의 눈은 우현이 그려 넣은 빨간 동그라미에 향해 있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린 동그라미. 22라고 적힌 숫자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동그라미의 형태에 넋을 빼고 멍청히 서있던 성규가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갈게."
성규와 눈이 마주치자 문고리를 잡은 우현이 비실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내일, 찾아오지 마."
성규가 살짝 열려진 문틈 사이로 우현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내일은 오지 말라고? 갑작스레 저를 미는 성규의 손에 눈썹을 꿈틀거렸던 우현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온다는 말은 안했는데, 또 오길 바라나봐?"
"온다는 말 없었어도 올 새끼라서 말한거다."
현관 옆 쪽으로 버리듯이 널어져 있는 우현의 겉옷을 주워든 성규가 던지듯이 우현의 품 안으로 옷을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옷을 떠안은 우현이 저를 밀치는 강한 힘에 의해 의도치 않게 문 밖으로 밀려났다. 밀지 마, 나 넘어ㅈ…. 우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낡은 철문은 꽝,하는 소리와 함께 매정하게도 닫혀버렸다. 물론, 뒤이어 까탈스럽게 뱉어진 성규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남긴 채.
"내일 진짜 오지마. 주말엔 아예 얼씬도 하지 마."
내일은 토요일. 오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성규의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ㅡ 그래도 저 말은 주중에는 와도 된다는 소리잖아. 하루 사이에 제법 쌓인 눈길을 헤치며 배실배실 웃은 우현이 어젯밤 보았던 성규의 얼굴이 떠올라 가뿐한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왔다.
* * * * *
우현은 한동안 성열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한 한 주를 보냈다. 천사의 집에 다녀온 이틀동안, 시키지도 않은 짓들만 죄다 벌여놓은 주제에 그게 전부 제 탓이라나 뭐라나. 과 생활과 학점을 동시에 잃어버린 성열은 계속해서 칭얼대며 우현의 심기만 건드려대고 있었다. 저 때문에 군대나 가게 생겼다며 투덜대던 성열은 급기야는 셔틀이라도 둔 것처럼 우현을 부려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리를 비운 3일 새에 호원과 동우는 나란히 여자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저를 빼고 다녀온 미팅.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되면 우현이 분명 역정을 낼 거라 생각했던 호원과 동우기에 담담한 우현의 반응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던 새끼가, 왜 저래? 저희들의 미팅 사실을 알고 나서도 어깨를 으쓱하고 만 우현의 모습에 눈을 맞춘 호원과 동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저러긴, 미친 게 틀림 없어.
그러나 나는 미친 게 아니다. 나에겐 이미 천사가 있는데 여자들이 무슨 소용이야. 저의 머리를 쿵쿵 치며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니냐고 물어오는 호원에게 그저 씨익 웃어보인 우현이 도리질을 쳤다. 니들이 뭘 알겠어. 그렇게 우현은 강의 시간 내내 종이에 천사와 함께 했던 옥탑방의 모습만 그려넣었다. 오늘도 달력엔 새로운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겠지. 화분 청소한다더니, 오늘 아침엔 화분 청소 했으려나. 빙글거리며 펜을 놀리던 우현이 옥탑방 위로 오밀조밀한 화분들도 그려넣기 시작했다.
우현은 성열을 따라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제 곧 방학이고, 주중에는 매일 천사의 집에 출근도장을 찍을 생각이니 할 일은 생긴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말에는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천사의 말마따나 주말이라도 뭔가를 하자 싶어 찾게 된 아르바이트였다. 그렇게 하면 최대 5일 내내 천사를 볼 수 있다. 느닷없이 실실거리는 웃음을 짓는 것은 그 날 이후로 생긴 무서운 습관이었다. 제 옆에서 졸기 바쁜 성열과 동우에 반해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깨어 있는 우현이 종이 옥탑방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좁지만 좋았던 낡은 평상. 재떨이마냥 꽁초가 쌓여있는 작은 화분들. 악어 모양 낙서가 새겨진 왼쪽 벽(물론 김성규가 했을 리는 없지만), 다 떨어져나가는 창살이 달린 조그만 화장실 창문. 아, 나 화가 해도 되겠다. 어느새 완성된 옥탑방의 그림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우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성규는 거의 아침을 거르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강의가 없는 날 아침이면 새벽같이 옥탑방으로 달려간 우현이 일찍이 깨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규를 깨워 아침밥을 먹이는 것도 4흘째로 접어들었다. 사실은 아침밥 뿐만이 아니라 모든 끼니가 그랬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랐지. 김치찌개를 대령하던 그 날 아침과는 다르게 요리라면 질색하는 성규를 억지로 식탁으로 끌어다 앉혀 밥을 먹이던 우현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설거지까지 마쳤다.
4일 내내 천사를 관찰한 끝에 얻은 것은 꽤나 있었다. 어두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날 이후로도 종종 화장실 불을 몰래 끄고서는 도망가는 짓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하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씩씩거리며 화장실에서 뛰쳐나오던 성규가 장난스레 우현의 목을 졸라오면서도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화를 내곤 했으니까. 진짜 하지 마. 무섭단 말이야. 짐짓 진지하게 들려오는 무섭다는 말에 마냥 낄낄대던 우현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도 그 탓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천사는 정말이지 덜컥, 우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청소도 싫어한다. 첫 날에 봤던 깔끔함은 어디로 가고 날이 갈수록 어질러져 있는 집안 꼴에 경악을 한 우현이 입을 떠억 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티비 보는 걸 좋아한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이면 곧장 달려간 옥탑방에선 어김없이 티비를 보던 성규가 무심한 눈으로 저를 맞이하곤 했으니까. 의외로 귀여운 것을 좋아하더라. 이것만큼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렇다. 동물 특집같은 걸로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면 입을 헤 벌리고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성규의 옆모습은 동물들 그 이상으로 백만배는 더 귀여웠다. 아니 정정한다, 아마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꺼져 있는 티비 전원을 무심코 켜 보면 바로 틀어지는 채널이 어김없이 투니버스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일주일 내내 성규의 옆에 살다시피 한 우현이 미처 풀지 못했던 의문의 진범은 어느 한 순간 밝혀지게 되었다. 내일은 오지 마. 일주일 전 했던 말처럼 금요일 저녁에 어김없이 당부한 성규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 천사의 옥탑방에 노크를 한 순간 우현은 깨달았다.
"뭐야."
두 손 가득, 아침거리가 들린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들려왔다. 아마 저의 직감이 맞다면 그랬다.
양치 컵에 나란히 담겨 있던 두개의 칫솔, 그 중에 파란색 칫솔의 주인인 모양이라고. 우현은 열려진 문 너머로ㅡ 저 쪽 끝에 멍청히 선 성규와 눈이 마주쳤다.
앙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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