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ues.
"백지호 화백, 연락 어떻게 됐어요?"
"연락이 왔는데요, 1점당 13억 8천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십니다."
"곧 죽어가는 새끼가 돈은 참 잘 밝히네요. 거래 취소하겠다 하세요."
"그러면 이번 1관부터 3관까지의 테마인 전통 미술사의 주제가 흐려질 것 같습니다.."
"거래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돈을 안 주면 그 늙은이 쫄려서 가격을 낮추고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나머지 건은 직원분들과 상의해서 해봅시다."
역시 인간은 탐욕으로 채워진 동물이라 좋게 대우를 해 주면 자신의 지위가 더욱 상승된 것처럼 느끼며 태도를 바꾼다. 하지만 정작 바뀐 것은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날아다니는 먼지 한 톨보다 없을 텐데 말이다. 지수는 백지호 화백과의 거래에 대한 얘기를 대충 마무리를 지은 후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잠시 공상에 빠져들어갔다.
두 달 후에 개최될 한국 전통 미술 주제를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빠듯하여 매일 밤을 새우며 지냈더니 지수에게 약간의 일탈이 필요할 시기였다.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계획을 지수가 남몰래 새울 즈음에 동료 큐레이터인 승철이 지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수 씨, 오늘 혹시 시간 되세요?"
오늘 시간은 남는 참이지만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부르는지 잘 모르겠는 터라 지수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질문을 무마시켰다. 승철은 그것을 느낀 것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나온 학교에서 졸업 전시회를 한다는데 아는 후배가 초대를 했더라고요.. 유능한 인재라서 작품을 같이 보면 어떨까 하는 맘에 여쭤봤습니다."
"음, 승철 씨 어디 출신이셨죠?"
"한예종 미술이론과 나왔어요. 그 후배는 미술과고 순수미술 전공하고 있어요."
때마침 다음 테마에 맞는 사람들의 4할 정도가 출신이 한예종이라 그 한예종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긴 했다. 지수는 태어날 때부터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다니다가 어머니가 한국에 있는 미술관의 박물관장이 되시고, 지수 또한 어머니와 같은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를 하게 되어 가족들과 같이 한국에서 살게 된지라 한국의 대학교들이 어떤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지 잘 몰라 시간 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졸업전시회를 가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저 오늘 집에 가서 쉬겠다는 계획을 지수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좋아요, 평소에 한예종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네요."
"지수 씨! 그럼 같이 가주시는 거 맞죠? 진짜죠? 고마워요."
"아니에요, 한예종에 대해서 궁금한 참이었거든요."
"후배가 졸전에 8시 정도에 오면 된대요. 7시에 퇴근하고 가봅시다."
밀려있어 진행되는 것같이 안 보이는 일을 조금 손대자 벌써 7시쯤이 되어있었다. 최근 화가들의 활동 내역과 대여가 가능한 작품의 예상 가격 따위가 적힌 산더미 같은 서류를 지수는 대충 한 곳으로 모아둔 후 벗어두었던 재킷을 입었더니 와이셔츠 속으로 차가운 한기가 맴돌았다. 겨울이 한창 인터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승철에게 눈빛을 보내자 이내 눈치를 채고선 준비를 부랴부랴 끝내 같이 박물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수석에 승철을 두고 차를 30분 정도 운전하자 금세 한예종에 도착하였다. 졸업전시회 덕분에 한예종에는 나름 사람들이 붐벼 있었다. 겨우 전시회 안에 들어가 작품들을 감상하며 이 작품이 과연 졸업을 해도 되나 싶은 작품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학교 수준답게 잠재력이 돋보였던 것 같다.
"지수 씨, 이제 제 후배 작품 보실래요?"
"그러게요. 어디 있는데요?"
여기 온 목적이 승철이의 후배를 위해 온 것이라는 본질적인 이유를 망각한 것이었다. 승철이가 지수를 이끌어 보여준 작품은 특대형 캔버스 작품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이라면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는 그런 심도 있는 작품이었다.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작품에 홀려 멍하니 바라볼 때쯤엔 심해 속에 박혀있던 깊은 우울감을 발굴할 수 있었다.
지수는 과거 예민하게 달아오른 사춘기 시절에는 정신병원에서 종종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받곤 했었다. 지금도 가끔씩 우울해질 때면 그때의 기억이 회상되곤 하는 지수였다. 정신을 차려 작품을 다시 곱씹어 보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프러시안블루 색상을 주로 사용했지만 간간이 그와 대비되는 밝은 계열의 색상을 썼음에도 작품 속 우울감은 치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림을 전공하면서 미술관의 높은 직급을 맡을 때까지 지수는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본 적이 없는데 그러한 면에서는 이 학생이 지수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
"이 작품 학생 마음에 아주 드는데요."
"제가 애정 어린 관심으로 돌본 후배예요. 재능이 아주 남다르죠."
"혹시, 이 명함 저 학생에게 줄 수 있어요? 아니, 너무 느리겠다. 그냥 그 학생에게 제 전화번호 문자로 보내줘요."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돌발스러운 행동이었지만 후회스럽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승철의 핸드폰으로 학생에게 연락을 보내었고 그 후에도 지수는 그 작품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치 작품이 혼자 있는 자신을 구원해주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에서 해야 할 업무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이 흠뻑 젖어있는 발소리는 지수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퇴근길에는 막히지 않다가 갑자기 숨 막힐 정도로 차가 막혀 지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겨우 도착한 집 또한 오늘따라 적막한 것이 씁쓸했다. 지수는 적막함을 달래기 위하여 보지 않는 티비를 대충 틀어놓은 채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켜 업무에 열중하였다. 티비는 혼자 열심히 연예 이야기를 뱉어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지수 눈에 들어올 때쯤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은 지수의 심박수를 자유자재로 바꿔버렸다. 곧장 문자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보낸 문자였지만 단번에 학생이 보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업무상 수많은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때문에 지수는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지만 곧장 학생의 번호를 저장했다. 이름 석자부터 몰라 그저 gorgeous student라고 저장해두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일을 끝내고 2시간의 쪽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지수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일어나자마자 출근 준비를 분주하게 하고 나서 미술관을 향해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일적인 생각을 하곤 했겠지만 오늘은 어제 보았던 그림이 지수 눈에 아른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 지수는 학생에게 학생, 그림 너무 잘 봤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지수의 뇌가 학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업무를 위해 핸드폰 잠금 버튼을 누르고 백지호 화백에게 이메일이 왔나 확인하자 역시나 한 통이 와 있었다. 제 뜻대로 된 것이었다.
제 작품 10점을 대여하지 않는다고 하신 연락 잘 받았습니다. 무슨 사유로 제 작품을 대여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포기하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깊게 고려해보니 당신의 미술관에서 전통 미술사를 나타내는 것에 제 그림을 사용하시는 것은 나쁘지 않은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제 작품의 대여 가격을 낮추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점당 12억 원으로 낮춰 1년간 빌려드리지요. 생각을 많이 해보시고 답장 주시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메일을 천천히 읽어보자 늙은이는 상당이 자존심이 센 것 같았다. 자신이 쫄렸다는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은 채 돌려서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피식하고 코웃음을 지으며 대충 알겠다는 답장을 서둘러 보내었다. 정말로 백지호 화백의 그림을 거절하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이것으로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지수가 제시한 조건인 11억 3천만 원과 비슷한 금액이니 지수의 이득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출근하자마자 자신을 맞이한 좋은 소식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핸드폰을 다시금 확인하니 아, my blues요? 그거 버렸어요.라는 충격적인 문자가 와 있었다. 당황함을 숨기지 못 해 사무실에서 나와 화장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전화기 속에는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그 그림 왜 버렸어?"
"그림 그리는 게 싫으니까요."
"난 말이야, 작품 하나를 그냥 봐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 그저 이 작품이 내 미술관과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심사할 뿐이야. 하지만 네 작품들은 예술이야. 내가 확신하지."
지수는 그림이 그리기 싫다는 학생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넸다. 갑자기 조용해진 핸드폰이 혹시 그가 전화를 끊었을까 싶어 한 번 확인해보자 여전히 통화 시간은 증가되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어 포기하고 다른 화백들의 거래를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층 더 어두워진 상대의 목소리는 지수를 초대하는 것에 대한 거절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지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제 작업실 오실래요? 어차피 졸업할 거라서 치워야 되거든요. 가져가실 거면 가져가도 상관없으니까요."
"학생 내가 오라 하면 올 정도로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
"아니었다면 저한테 전화를 걸 수도 없었겠죠."
지수에게 반격하는 말에 지수는 당돌한 학생임을 확인했다. 까칠하게 굴어오는 모습이 미국에서 키우던 고양이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작업실에 초대해준다는 일은 흔치않을 것 같아서 오늘 밤에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수는 전화를 마무리 지은 후 업무 속에 흘러들어갔다. 세 달후면 메인 분야인 전통 미술과 각 주제들의 개최가 될 것이라 상당히 바쁜 시간이었다. 그런 바쁜 업무 속에서 오직 학생과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어쩌고 저쩌고 |
작년 초에 썼던 글인데 지름글이라서 1화만 있어요///// 장편으로 하고 싶은데 느리게 연재될 것 같네요. 1년에 한 번일 수도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