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만하자, 걍. "
뭐? 야, 임영민. 네 발언에 놀라 숙였던 고개를 바로 드니 절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너와 눈이 곧바로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저와는 달리 확고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너에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제 앞에 서 자신의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제게 이별을 고하는 놈이 바로 내 애인이다. 지금은 아니지,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애인이었던 놈이 바로 이 새끼다, 이 말이다.
" 아, 씨팔. "
" ... "
" 안 지겹냐? 난 너랑 싸우는 거 진짜 지겹다, 그러니까 그만하자고. "
흔히들 말하는 소꿉친구였던 임영민과의 연애는 순탄할 리 만무했다. 남녀사이에 친구는 없다, 란 옛말이 우습다는 듯 10년을 친구로 지내오던 우리도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연애를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지났을까. 주위에서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와 다혈질의 만남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조화는 더욱 큰 화를 불러왔고.
그러니까, 이런 싸움은 평소에도 빈번히 발생했었다. 눈 맞으면 입 맞추고, 맘 맞으면 키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우리는 눈만 맞으면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그리고 그런 다툼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화해를 하곤 했다.
" 야, 임영민. 말 다 했냐? "
그런데 오늘은.
" 어, 다 했는데. "
예감이 심상치 않다.
" 헤어지자고. "
아아... 이별하기 좆도 아름다운 날이에요, 염병.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듯, 헤어지자는 폭탄발언과 함께 각자의 길로 돌아선 우리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서로의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첫째로 내려간 페이스북 연애중, 놈의 짓이 뻔해 확 가라앉는 기분에 저 또한 배사, 프사를 비롯한 임영민에 관한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 놈의 흔적을 지웠다. 핸드폰에 저장된 낯간지러운 애칭 또한 임영민 세 글자로 바뀐 지 오래였고, 단축번호 1번에 저장돼있던 임영민의 이름이 내려가 그 자리가 빈 것도 오래였다. 그런 제가 단 하나 지우지 못한 것은 바로 갤러리 속 가득한 놈의 사진이었다. 그래, 이건 뭐... 정리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지우지 않은 거라고, 그렇다고 치자.
ㅡ 야, 임영민 진짜 걔랑 썸 탄대?
우리가 헤어졌다는 소식은 파다하게 흘러나갔다. 그리고 무성히 피어난 또 하나의 소문. 임영민이 자신네 반 여자아이와 썸에 뛰어들었다, 뭐 이 정도 되시겠다. 아아, 염병... 헤어진 지 고작 2주 남짓 지났을 뿐인데 그딴 개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퍽 상했던 저인데, 요즘 들어.
" 아, 몰라... "
ㅡ 여자애 난리도 아니라던데.
야, 임영민이 안 내친다는 소문도 있고? 하나, 둘 들려오는 소문 아닌 소문들에 이젠 저까지 임영민 썸녀의 존재 유무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임영민이, 나를 두고, 아... 아니지. 나와 헤어지고, 2주 만에 새로운 여자를 만들었다. 그 괴상한 소문은 어느덧 기정사실화 되어 항간에 떠돌았고, 요즘 교내 뜨거운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엿같다. 엿같은 임영민, 엿같은 썸녀, 엿같은 구남친. 그리고... 엿같은 내 미련.
ㅡ 저기, ㅇㅇㅇ... 맞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놈을 마주한다면 저는 폭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놈을 붙잡고 이것, 저것 따지고 들겠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퇴가 답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결국 임영민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점심을 거른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차였다. 오늘도 저를 붙드는 친구들을 겨우 떨어뜨리곤 혼자 남은 교실에 엎드려 잠이라도 청하려는 찰나, 똑똑히 제 이름 석 자를 불러오는 낯선 목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ㅡ 나, 이예나라고 하는데.
그렇다, 요새 항간에 떠도는 임영민의 썸녀라는 분이 직접 행차하셨더라.
그 계집, 그러니까 그년과 제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돌았다. 저를 먼저 불러온 그 계집도, 그 계집에게 이름을 불린 저도.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위치상 저를 깔보는 듯한 계집의 시선에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다시금 제 이름을 불러온 계집에 의해 제 짜증을 억지로 한풀 꺾었다. ㅇㅇ야.
ㅡ 너 영민이 전 여자친구... 맞지?
" 어, 맞는데. "
얘 임영민이랑 진짜 친한가? 퍽 친숙하게 성을 떼고는 놈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에 제 기분은 더욱 상했다. 얼마나? 몹시, 매우, 많이, 엄청나게, 완전.
ㅡ 너... 혹시 영민이 못 잊었어?
" ...뭐? "
ㅡ 그런 거면, 조심 좀 해 줘라... 나 영민이 좋아하구, 영민이도 나.
" 야. "
ㅡ 아니, 아무튼... 너한테 응원 안 바라, 그래두 방해는 말아 줬으면 해서. 너 영민이한테 차인 거라며? 차였는데도 그렇게 구질대는 거 좀 그래.
점점 도를 지나치는 여자아이의 말이 슬슬 끝을 볼 참이었다. 임영민 얘는 어떻게 된 애가 이딴 년을 썸녀라고. 자신의 앞에서 잔뜩 미간을 구긴 저는 보이지도 않는지 제가 할 말만을 잔뜩 늘어놓는 여자아이에게 무어라 한 마디 던지려는 찰나.
ㅡ 아무튼, 조심 좀 해 달라구. 안 그래도 너 차인 거 애들도 다 아는...
" 누가 차였대. "
익숙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 하나가 저희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제 앞에 계집도, 저도 놀라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비트니 보이는 건.
" 너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다, 내가 차였는데. "
교실 벽에 기대어 저희를 빤히 바라보는 임영민이 있었다.
ㅡ 어, 영민아. 그게,
" ㅇㅇㅇ가 차인 게 아니라 내가 차인 거야. 내가 너무 못해 줘서, 그래서 차였어.
ㅡ ...
예나야, 왜 말이 없냐. 잔뜩 굳은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놈과, 그런 놈을 바라보지 못하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붉어진 얼굴로 우물대는 년과. 퍽 대비되는 상황에 재미를 느끼던 찰나였다. 야, 이예나. 낮게 울린 놈의 목소리가 다시금 텅 빈 교실을 울렸다.
" 가서 애들한테 전해라. 임영민이 차였고, 미련에 찌들어서 ㅇㅇㅇ 다시 꼬시는 중이라고. 썸이고 나발이고 그딴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알겠냐? "
오... 지져스... 엿같은 구남친이 다시 현남친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ㅡ 저번 편에서 주셨던 관심과 초록글, 댓글, 추천, 스크랩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저번 편 외전 많은 분들이 바라셨는데 아직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ㅡ 원하시는 단편 소재와 주인공이 있으시다면 언제나 댓글로 신청 바랍니다. 짧게만 적어 주셔도 스토리 생각나는 대로 적어올게요.
ㅡ 댓글 달고 포인트 다시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