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무려 4년을 만난 남자친구가 존재한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고 캠퍼스 안에 발을 들인 대학교 1학년, 그리고 넓디넓은 캠퍼스를 거닐며 행복하던 시절의 로망을 일찍이 접은 대학교 2학년. 그쯤에 만난 남자친구, 그 이름 석 자 권현빈 되시겠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연애의 시작과 함께 홀연히 입대해 버린 놈을 기다린 것이 1년 8개월 남짓, 그 이후 모든 대학 생활을 놈과 함께 보냈으며 저는 졸업, 놈은 복학을 한 뒤에도 우리의 연애는 나름 순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연애의 4년을 맞은 오늘, 놈은 저를 번화가에 위치한 한 호텔로 불렀다. 4주년 기념 이벤트라도 해 주려는 건가, 싶어 그가 부른 2102호로 향하자 제 눈에 보인 낯뜨거운 장면 하나.
ㅡ 오, 빠, 잠깐... 만. 천천히 좀, 응?
얇디얇은 슬립 하나를 걸치곤 벽에 기댄 채 제 앞에서 자신의 목에 입술을 박은 남자를 밀어내는 듯 다시금 목을 감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박고는 깊게 파고들어가면서 동시에 급하게 넥타이를 풀어낸 듯 던지며 얇은 와이셔츠와 바지만 겨우 걸친 남자. 그러니까, 권현빈이 저를 부른 장소에는 남자와 여자에 낯 뜨거운 장면이 노출되고 있었다, 이 말이다. 그런데 저 뒷모습은 아무리 봐도 권현빈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분홍색으로 가볍게 물든 권현빈의 머리와는 다르게 남자의 머리는 흑색 그 자체였다.
이게 뭔 엿같은 상황이냐고, 내 말은.
ㅡ 오, 빠. 저기 사람.
뭐? 당혹감에 취해 가만히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봤을까, 이내 인기척에 저를 발견한 여자가 제 몸을 탐하던 남자에게 속삭였다. 아, 씨팔. 이거 좆된 거 맞죠? 그러자 급한 몸짓을 멈춘 남자가 이내 여자에게서 떨어져 제게 시선을 박았다. 뭡니까, 그쪽. 딱딱하게 떨어진 말과는 다르게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묘한 미소를 띈 남자의 안면이 제게 닿자 저도 모르게 놀라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아, 씨팔... 잘생겼다. 남자를 본 제 무의식에는 남자가 잘생겼단 생각이 지배했고.
" 아, 저 그... 여기 2102호 아닌가...끕, 요... "
" 뭐요? "
그게, 여기가... 2102호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여자와, 여즉 유한 미소를 띄운 채 절 바라보는 남자. 그 네 개의 눈동자를 견디기 힘들었던 제 목소리는 더욱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런 제 말에 반문한 남자는 이내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게 입을 열었다.
" 여기는 2103호, 그쪽이 찾는 건 옆 객실인 것 같은데. "
" 뭐? "
남자의 발언에 실례를 범한 기분에 휩싸여 죄송하단 한 마디와 함께 황급히 빠져나온, 그러니까... 2102호의 옆 객실 2103호. 황급히 마음을 추스르곤 2102호의 문을 열자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보이는 권현빈과, 화려하게 꾸며진 객실 안. 놈과 짧지 않은 연애를 해오면서 이렇게 큰 이벤트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들어서기가 무섭게 보이는 놈의 모습에 한 걸음, 한 걸음 놈에게로 다가섰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놈이 제게 시선을 박았는데, 어째... 굳은 표정이, 만만치가 않은 게.
ㅡ 헤어지자고.
"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
ㅡ 어, 그런 말을 4주년인 오늘 하는 거 미안하게 생각하고, 이건 마지막 선물. 너 이런 이벤트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며. 고마웠다, 잘 지내고.
헤어지잔다, 그것도 4주년인 오늘, 이렇게 꾸며놓은 4주년 이벤트를 기념하는 방에서.
" 야, 야! 권현빈! "
ㅡ ...
" 잠깐 서 봐, 어? 개새끼야! 이 나쁜 놈아. "
그렇게 미련 없이 저를 두고 객실을 나서는 권현빈이었다. 그대로 놈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고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내 울어대며 놈을 불렀다. 누가 보면 헤어진 줄 알, 아... 나 헤어졌지, 염병... 그리고 그렇게 울어제끼며 생성된 소음은 객실 밖을 나선 권현빈으로 인해 고요한 호텔 복도까지 흘러나갔다. 그러니까, 앞뒤 분간 안 가는 제가 놈을 따라 나선 거지. 눈물은 채 닦아내지도 못한 채로.
" 야아... 이 나쁜, 놈아... "
" 애인이랑 헤어졌나 봐요. "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뜬 권현빈을 바라보며 문 닫힌 객실 앞 복도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이내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 뭐야, 진짜 헤어졌어? "
" ... "
" 설마 차였나. "
조금 전, 그러니까 제가 헷갈려 잘못 들어간 객실 안에서 여자와 이렇고 저런 짓을 하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유한 웃음을 띄운 채로, 저를 보며. 정작 저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절 바라보는 남자가 꽤나, 그러니까... 꽤 말이다.
" ...뭐예요. "
" 아니, 누가 밖에서 나쁜놈을 찾아가며 막 울어대길래. "
재수없다, 것도 존나게.
아, 존나 싫다.
그렇게 권현빈과 헤어진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렇게 떠나간 권현빈은 그 이후로 얼굴은 커녕 연락 한 번 닿지 않았고, 그날 잠시 마주한 그 남자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튼,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골골대는 제가 불쌍했는지 친구는 저에게 소개팅을 권유했다. 그리고 난 자연스레 거절했는데, 왜...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친구야, 미안하다! 너 그러고 있는 거 내가 못 보겠다고 ㅠㅠ 그쪽 남자도 아마 친구 대타로 나오는 것 같으니까 넘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만나 봐 알겠지? 사랑한다]
아부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주세요. 얠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요? 친구와 약속 장소로 나오기가 무섭게 도착한 문자 한 통, 그리고... 약속시간은 7시인데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상대방. 그래도 친구가 마련한 자리를 박차고 비우는 건 친구에게나, 상대방에게나 할 짓이 아닌 듯싶어 기다릴 수 있을 만큼은 기다리려는데 이건... 심하잖아.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상대방을 기다린 지 30분이 지났을까, 이건 아니다 싶어 자리를 비우려고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을 적어내려가는 순간.
야, 나 간다 아무리 기다려도...
" 늦어서 죄송합니다. "
" 죄송한 걸 알긴 아시나 봐요. 어차피 그쪽도 대타로 나온 거라고 들었고, 저도 원했던 자리 아... "
왜 저 남자가 여기에 있냐고, 씨팔...
" 어? 맞죠, 그때 나쁜놈. "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 두 달 전, 권현빈과 헤어지던 날 마주쳤던 그 2103호 그 남자가 제 앞에 앉아있었다, 이 말이다.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그날보다 차려진 정신으로 그 남자를 다시금 빤히 바라보자 확실히 주위에선 보기 힘든 깨나 말짱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래도 그렇지, 씨팔. 이건 무슨 우연인지, 인연인지, 악연인지. 하필 대타로 나와도 이 남자가 나올 게 뭐냐고.
두 달 전과 다를 것 없이 묘한 웃음을 띄며 절 바라보는 남자에게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그나저나 이 남자는 두 달 전이나, 지금이나 느끼는 거지만 사람 쳐다보는 시선이 묘하게... 친절해 보이면서도 기분이 나쁘다. 아, 씨팔... 제 앞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실대며 절 빤히 바라보는 남자에게 제가 하려던 말을 다시금 꺼냈다.
" 저, 그러니까... 저도 원해서 나온 자리 아니고, 그쪽도 원해서 나온 자리 아니잖아요. "
" 김종현이요. "
" 그러니까, ...예? "
" 내 이름입니다, 김종현. "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제 말에는 대꾸도 않은 채, 정확히 말하자면 이어질 제 말이 무색해질 만큼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던지는 그에 반문했더니 자신의 이름이라며 다시금 이름 석 자를 입밖으로 꺼낸다. 아니, 이름인 걸 누가 모르냐고. 그러니까, 이름은 왜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두 달 전, 객실 안에서 절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금 저와 눈을 맞췄다. 아, 씨팔... 거 존나게 잘생기긴 했네.
" 내가 지금 그쪽한테 관심이 생겨서요. 없던 일로 하자, 뭐 그딴 말 같지도 않은 말 뱉는 거 방지하려고. "
그리고 남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 하자는 거냐고... 아부지, 저 어떡하죠?
ㅡ 저번 편 초록글, 댓글, 추천, 스크랩 등 관심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ㅡ 원하시는 단편 소재가 있으시다면 언제나 댓글로 신청 바랍니다. 짧게만 적어 주셔도 스토리 생각나는 대로 적어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