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언니, 언니는 근데 임영민 씨랑 사이가 왜 그렇게 안 좋아요?
제 헤어를 담당하는 디자이너의 질문 아닌 질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뜨겁게 달궈진 고데기를 이용해 제 긴 머리를 연신 말아대던 그녀가 한순간 눈을 반짝이며 제게 물었다. 따뜻하게 닿아오는 고데기의 감에 노곤했던 몸이 한순간에 긴장을 되찾았다. 평소에도 숱하게 들어오던 그 질문이, 오늘따라 제 맥을 풀리게 만들더라. 임영민과 제 사이는 주위 사람 그 누가 봐도 나쁘다, 느낄 정도의 사이였고. 그리고 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새끼랑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냐고?
" 글쎄…. "
실은 저도 잘 모르겠다, 왜 사이가 안 좋은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해 저 또한 답답할 뿐이었다. 진정 궁금하다는 듯 화장대 거울을 통해 절 빤히 바라보는 그녀에게 김이 새는 답을 전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투정 어린 어투에 어색하게 짧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대답에 그게 뭐냐며 혀를 내두르던 그녀는 더이상의 흥미는 보이지 않은 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단절된 뒤에도 떠날 줄 모르는 임영민의 짙은 잔상이 제 머릿속을 헤집었다.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는 생각은 곧 회상으로 루트를 틀었다. 그의 생각으로 깊게 지배된 머릿속이 복잡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그렇게.
# ㅡ 01
아, 열받아. 잘해보자며 개같은 호칭과 함께 말을 뱉은 임영민은 그렇게 제 속만 뒤집은 채로 전화를 끊었다. 것도, 지 할 말만 마치며. 아니,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자존심이 퍽 상했다. 마치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챙겨보기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제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난 그저,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라고? 아무리 진정을 시켜도 진정이 되지 않아 제 손에 고이 쥐어진 폰의 홀드를 열었다. 곧장 전화번호부로 들어가 개싸가지라 저장된 그의 번호로 다이얼을 걸었다.
단조로운 컬러링이 3초 정도 흘렀을까.
" 어, 자기야. "
" ……. "
" 전화를 처걸었으면 아가리를 열어야지, 자기야? "
와, 이 새끼 염병도 이런 염병이……. 나름 금방 걸린 전화에 혼자 만족하며 입을 열려던 저를 간파했는지 그는 먼저 선수를 치며 말을 꺼냈다. 이 새끼는 지금 이 연애가 재미있고, 이 쇼윈도짓이 즐거운 거다. 공개연애인지 뭔지, 것도 꽤 자신의 흥미를 당기는 듯싶었고. 그러니까, 예의 여자친구… 보다도 역겨운 호칭을 입에 담으며 제게 입을 열었다. 뭐, 자기야?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차마 막을 새도 없더라. 황당 반, 당황 반의 감정이 제 몸속을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저 혼자 당황에 차 있을 쯤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아가리 봉합했냐? 말 안 할 거면 끊는다. "
… 아, 씨발. 소파 멀리 핸드폰을 던지며 욕을 뇌까렸다. 아, 아... 임영민 씹새끼, 개새끼, 엿같은 새끼……. 아무리 욕을 지껄여도 가라앉지 않는 흥분에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그러니까, 지금… 존나 K.O를 당했다, 이거지. 예전부터 저를 놀리는 데에 한 획이라도 그은 듯 자연스럽던 그였는데 그 성격이 어디 가겠냐고. 그걸 망각했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알면서도 그에게 또 한 번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리고 그때, 다시금 울리는 핸드폰에 솟구치는 짜증을 담은 채 전화를 받았다. 아, 씨발. 또 뭐, 미친 새끼야.
ㅡ …… 오빠가 너한테 뭐 잘못했니?
아, 뭐 됐다.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울리는 전화에 당연스레 임영민이라 생각한 저는 여보세요라는 예의 차린 대답 대신 그에게 뱉고 싶었던 욕을 뱉어냈다. 그러자 들려오는 자신의 책임을 묻는 매니저 오빠의 말에 아차 싶은 기분이 들어 삐딱했던 자세까지 바로잡으며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힉, 오빠 미안.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그 다른 사람이 임영민이라는 건 얘기해 봤자 득이 될 게 없어 보여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제 해명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매니저 오빠가 이내 용건이 생각났는지 큰 소리를 내며 제게 입을 열었다.
ㅡ 너 내일 화보 촬영 있다고, 인터뷰도 같이.
" …… 이렇게 갑자기? "
ㅡ 어, 그게…….
언제나 스케줄은 적어도 2주 전에 잡히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특히 휴식을 퍽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안이었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갑작스레 잡힌 화보 스케줄은 제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임에 분명했다. 너 열애설 터진 것 때문인 것 같던데, 아무튼…. 이어지는 매니저 오빠의 대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그럼. "
ㅡ … 괜찮아?
" 어쩔 수 없지, 뭐. "
나 지금 그 새끼랑 연애 중인 거잖아. 오늘도 또 한 번 받아들인 제 운명은 가혹했다.
" …… 네가 여긴 왜. "
이른 아침 기상에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도착한 샵은 분주했다. 제 머리를 감기고, 말리고, 스타일링하고. 그와 동시에 행해진 메이크업까지. 어느 누구 하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샵의 풍경은 익숙했다. 애써 공들인 화장이 무너지기라도 할까 저 또한 바짝 긴장한 채 나머지 작업을 받고 있었을까. 시계의 초침이 11이라는 숫자를 막 지나고 있었다.
샵이 달라 애초에 마주칠 일 없는 놈이, 그러니까 임영민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퍽 이질적인 장면이 제 시야를 가로막았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히죽이며 다가온 그가 어느덧 제게 다다랐다. 그리고 제 어깨에 자신의 손을 슬쩍, 올린 그가 절 빤히 바라보다 이내 제 귓가로 자신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멘트 하나. 야, 이러는 나도 짜증 나니까 알아서 잘해라. 사람 많으니까 장단 잘 맞추라고.
" 가자. "
" … 어딜? "
그러니까, 내가 왜 너랑. 가야 하냐고……. 채 다 잇지 못한 말끝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 빌어먹을 타이밍은 또 뭐 이리 잘 맞는 건지, 어느덧 마무리 작업까지 끝난 제 자신이었다. 그것마저 확인한 그가 제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으니 그가 짧게 사과하며 제 손목을 쥐었던 힘을 살짝 풀어냈다. 그대로 끌려나가면서도 저는, 제가 지금 왜 끌려나가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 … 뭐? "
" 오늘 그 화보, 우리 같이 찍는 거라고. "
" …… 허. "
갑갑한 공기가 가득 찬 차 안은 조용했다. 제게 그 사실을 뱉지 않은 게 미안했는지 제 눈치를 한껏 보고 있는 매니저 오빠, 예의 그 웃음을 입꼬리에서 지울 줄 모르는 놈, 그리고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한 저까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스타일리스트에 남은 셋은 묘한 정적을 유지했다. 와, 씨발…….
" 나 얘랑 못 찍어. "
" ……. "
" 개인 스케줄로 언급하는 거? 그래, 그렇다 쳐. 근데 같이 화보를 찍고 같이 인터뷰를 하라고? 그것도 같은 장소에서? "
" ……. "
" 미쳤어? 돌았어? "
임영민, 너 미쳤지? 그래, 몰랐던 나는 그렇다 쳐. 너라도 거절을 했어야지. 따박따박 쏟아지는 제 짜증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였다. 웬일이냐, 네가? 어느덧 제 머릿속에 띄워진 의문도 잠시, 이내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놈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일으키곤 저를 빤히 바라봤다.
" 내가 왜 그래야 되냐? "
" ……. "
" 이딴 반응일 거 뻔해서 얘기 미리 안 했다, 왜. "
진심이 가득 담긴 매서운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는 놈에게서 시선을 차츰 떼어냈다. 언제나 제게 닿아오는 따가운 그 시선은 적응이 가질 않았다. 짜증 나, 진짜…….
ㅡ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잘 어울리네, 두 사람.
" 아, 하하… 감사합니다, 감독님……. "
억지로 잡은 손은 이내 애틋한 깍지로 바뀌었다. 어색하디 어색한 스킨십과 함께 도착한 촬영장에 들어서 보이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참이었다. 저들을 보고 다가온 감독님의 한 마디는 이내 큰 파장을 일으켰고, 저희에게 슬쩍 한 번씩 시선을 던지던 스태프들도 이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ㅡ 오늘 촬영 잘 부탁해. 영민 씨랑, ㅇㅇ 씨.
" 네, 감독님. "
ㅡ 실제 커플이라 아주 기대하고 있으니까, 알았지?
네, 네. 그 말은 예의 농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반짝이는 눈으로 저희를 바라보는 감독님께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본격적인 촬영 전 진행된 인터뷰였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저희 커플에 관한 질문만 수두룩 내놓는 여자였다. 그 질문들에 퍽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대답들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까. ㅇㅇ 씨, ㅇㅇ 씨께 질문 하나 드릴게요. 눈치 하나는 끝장나네. 인터뷰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발견한 여자가 제게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한 번 더……. ㅇㅇ야, 부르시는데.
" … 끕, 네? 뭐, 라고, 흡. "
ㅡ 어, 갑자기 딸꾹질을…….
제 어깨를 살짝 감싸쥐며 퍽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놈의 태도에 저도 제어할 새 없이 터져나온 딸꾹질이었다. 당황한 여자와, 멈출 줄 모르는 딸꾹질을 뱉어내는 저까지. 그러니까, 다정한 임영민은, 꽤나 적응하기 힘들다.
한 시간 남짓의 인터뷰가 끝났다. 고작 반 정도의 인터뷰가 끝났을 뿐인데 제 체력은 어느덧 한계에 도달한 듯 몽롱해지더라. 지친 저희를 알았는지 촬영 후 인터뷰를 재개하겠다는 여자의 말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ㅡ 영민 씨랑 ㅇㅇ 씨 좀만 더 붙자, 어? 싸운 커플이 주제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남자와 단둘이 찍는 화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단지 그 상대가 임영민이라는 사실 하나가 제 마음에 걸렸을 뿐. 퍽 어색하게 포즈를 취하는 저희 둘이 답답했던 감독님이 이내 한 마디를 뱉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어 컷의 촬영이 끝났을까,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을 알리듯 더욱 노골적은 포즈를 원해오는 감독님이 퍽 원망스럽기도 하더라. 하아… 내가 이 새끼랑 이딴 짓을 하고 있다니.
ㅡ 이번엔 백허그 한 번만 해 보자, 그림 예쁠 것 같은데.
어, 어. 그렇지. 감독님의 요구에 망설임 없이 제 뒤에 선 그가 이내 제 어깨를 두 팔로 살짝 감싸안았다. 순식간에 훅 끼쳐들어오는 놈의 체향이 제 속을 뒤집었다. 익숙한 향이 제 코끝을 파고들었다. 저 또한 그에게 살짝 제 몸을 기대니, 꽤 자연스러워진 포즈가 감독님 마음에 드셨던지 엄지를 세우며 촬영을 이어갔다. 저를 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는 그 때문에 제 몸이 완전히 놈에게 넘어갔다. 퍽 빨라진 심장박동에 갖은 긴장이란 긴장은 다 삼키고 있는 마당이었다.
곧 포즈를 취하는 양 제 어깨에 자신의 고개를 살포시 떨군 놈이 제 귓가에 속삭였다.
" 너 나 좋아하냐? "
" … 미쳤냐? 내가 널 좋아하게. "
살다살다 별 소릴 다 듣겠네, 진짜……. 제 귓가에 떨어진 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장난기를 가득하게 담고 있었다. 어이없게 떨어진 놈의 한 마디에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런 제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은 실소를 터뜨린 그가 길게 늘어트린 제 머리카락을 길쭉한 자신의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 심장은 거의 고백 중인데, 나 좋다고. "
뭐래, 진짜. 화끈해진 볼의 기운이 곧 제 온몸을 휘감았다. 나른한 분위기가, 오늘따라…… 놈을 놈이 아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 또 나 놀리는 거네, 이 새끼.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ㅡ 뭔가 적고 보니까 밝다, 밝다...! 완전 밝다...! 이게 바로 로코? 이런 분위기는 안 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예쁘게 봐 주세요...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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