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놓고 말하자면 놈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아예 없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저와 임영민이 같은 소속사라 친해졌다고 알려진 것은 순 거짓이었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쉽게 말해 엄마 친구 아들이었던 그와는 자꾸만 겹치는 동선에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저 덕분에 그와 밖에서는 별 접점이 없었기에 그 사실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뿐이고.
어릴 적 그를 생각해 보자면 지금의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의 성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또래 남자아이들 같이 개구쟁이 같은 면모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은 퍽 다정했으니까. 그 다정은 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순진하고 착한 성격은 어디 안 간다는 듯 어른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아왔던 그였고, 그런 성격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정함으로까지 흘러갔다.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오랜 시절을 함께 보낸 제게도 그의 다정은 퍽 자연스러웠다. 제게 주어지는 그 다정은 제가 인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익숙한 일이었다.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줄로만 알았지.
" …… 좋아해, ㅇㅇㅇ. "
그렇다 할 사랑은 커녕 연애도 제대로 해 보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날은 아마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스케줄이 없었던 날을 이용해 그와 약속을 잡았다. 평소 트레이닝복을 즐겨 입는 그가 웬일인지 평소엔 불편하다며 잘 입지 않는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나왔던 날, 그날. 그리고 제가 그에게 선물했던 향수까지 진득하게 뿌린 것인지 제가 좋아하던 그 향기까지 온몸에 달고 왔던 날.
" 너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고백 안 하려고 마음먹고 또 먹었는데, 그냥……. "
제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 말을 잇던 그가 자신의 머리를 두어 번 흩뜨렸다. 제 코에 닿아오는 익숙한 체향에 순간 마음이 설레었다. 아직 한 마디도 뱉지 않은 저인데 이미 차이기라도 한 듯 잔뜩 표정을 굳힌 채 제 앞에 있던 그에게로 한 발짝 성큼 다가섰다. 저와 한 뼘은 차이나는 키에 살짝 까치발을 들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 아마 내가 더 좋아할걸? 장난스레 웃으며 뱉은 말과 함께 제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득 담은 그가 이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 고마워, 진짜. 낮은 목소리가 제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러니까 놈은, 제 첫사랑이었다.
# ㅡ 02
ㅡ 영민 씨 기분 좋은 일 있어? 갑자기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르네.
장난스레 뱉어진 말과 함께 잔뜩 긴장만 한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감독님이 뱉은 한 마디에 제 뒤에 서 아직까지도 절 품에 끌어안은 놈을 흘겼다. 감독님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는지 짓궂은 미소를 안면에 가득 담은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 아, 씨발…. 절 골렸다는 사실이 그리도 기쁜지 미소를 달고 있는 그와의 눈맞춤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재밌냐, 재밌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놈을 마주하자 절 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가 퍽, 짜증 났다.
" 수고하셨습니다! "
" 수고하셨습니다. "
ㅡ 어어, ㅇㅇ 씨랑 영민 씨도 수고 많았어. 이제 인터뷰만 남은 건가?
네, 감독님. 바야흐로 길고 길었던 촬영의 끝이었다. 새벽이 다 돼서야 끝난 촬영은 저희를 포함한 현장 사람들 모두를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뒤로도 난감한 포즈들을 저희에게 원하셨던 감독님 덕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남은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이동하던 참이었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 세 개는 퍽 단조로운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촬영 후 바로 진행된 인터뷰라 짧게 핏된 치마가 신경 쓰여 다리를 꼬던 찰나였다.
" 야. "
" …… ? "
제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트니 자신이 입고 있던 수트 자켓을 벗어 제 다리에 얹는, 그러니까…… 던졌다는 표현이 조금 더 알맞겠다. 삐딱한 자세로 서 예의 그 싸가지 없는 표정은 유지한 그가 자켓을 제 다리 위로 던졌다.
" 뭐 어쩌라고. "
" 보기 싫으니까 덮으라고. "
" …… 뭐? 야. "
" 다른 사람들 눈 생각하자, 자기야. "
곱게 좀 주면 덧나냐? 제 다리에 던지던 행동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놈이 말을 뱉는 본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엿같은 호칭까지 한 번에 입에 담은 그의 태도에 저 또한 무어라 대꾸라도 하려는 찰나 도착한 여자에 의해 저희의 기싸움은 종료됐다. 어머, 이 자켓 영민 씨 거 아니에요? 너무 다정하다, 진짜. 여자의 말에 다시 한 번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와, 저 싸가지……. 진짜 어떻게 엿 먹이지?
다시금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질문은 저희를 겨냥한 질문들뿐이었다. 저희 둘의 인터뷰이기에 당연한 이치이기는 했지만 그게 제 마음에 들 리가 있나. 허나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고 싶은 마음에 인터뷰어의 질문이 저들에게 날아오는 족족 꽤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피셜대로 오래 만나기라도 한 연인인 것처럼, 저희는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ㅡ ㅇㅇ 씨에게 질문 하나 더 드릴게요. 영민 씨한테 반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어, 그게……. 요새 한참 활동 중인 그에게는 여러 번 갔던 질문의 순환이었다. 간혹 광고를 찍고, 화보를 찍는 게 전부였던 제 스케줄상 이런 질문을 받을 기회가 많이 없었기에 제게 던져진 질문은 퍽 당황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옆에서 절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애써 고개를 틀었다. 어, 그러니까……. 무어라 대답해야 알맞은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를 빤히 바라보며 시간을 주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여자 덕에 긴장은 풀린 탓인지 재빠르게 뛰던 심장의 박동이 차츰 줄어갔다. 그때까지도 제게 박은 시선을 뗄 줄 모르는 놈이었다. 그런 그에게로 저 또한 시선을 돌리자 단번에 마주친 눈이 밝게 빛났다. 그러니까, 저는…. 굳게 닫았던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 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사람이 되게 다정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 꼬박꼬박 해 주고, 저 걱정시킬 일 안 만들고. 친구로 지낼 때도 그랬어요. "
" ……. "
" … 제 첫사랑이거든요, 영민이. 어려서부터 갖은 풍파 다 겪으면서 살아온 제가 영민이 앞에서는 유일하게 순수해질 수 있었거든요. "
" ……. "
" 그렇게 만들어 줬어요, 영민이가. 영민이 앞에 서면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해지는 게 좋았어요. "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물든 것 같아요, 서로한테.
진심이 가득 묻어 나온 대답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던 제 생각과는 다르게, 제게서 튀어나온 대답은 뜻밖의 진심이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을 거듭하던 제가 입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거짓으로 꾸며낸 대답이 아닌 제 마음 있는 그대로였다. 제 첫사랑인 그가 제게 미쳤던 영향, 그 전부였다. 남들보다 일찍 뛰어든 사회는 제 생각보다 삭막했고, 그런 저를 일으켜 준 사람이었다.
ㅡ 생각보다 더 예쁜 사랑 중이신 것 같아요, 두 분.
그때까지도 그는 말이 없었다. 놀란 표정으로 빤히 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어색한 미소를 잠깐 지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진심인데, 뭐……. 그 앞에서 제 진심을 꺼냈다는 창피함을 억지로 소화시켰다.
" 와, 열받아……. "
원치 않았던 놈과의 퇴근이었다. 퇴근길에서도 시작된 그의 농락은 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인터뷰에서 제가 했던 말들까지 끄집어내며 저를 놀리던 그가 생각나 제 입안 가득한 얼음을 생으로 씹었다. 와그작, 소리를 내며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얼음들로 겨우 몸에 오른 열을 식힐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틀어놓은 에어컨과 선풍기가 눈에 들었다. 요즘 들어 열이 많아지는 기분이 드는 게,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다 이거지.
어떻게 놈을 골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제 뇌리에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곧장 인터넷 기사를 뒤지니 이번에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 한창 촬영에 열심이라는 놈의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거다. 와, 나 천잰가? 아니, 이 머리면 아이큐 140 넘는 거 아니야? 멘사나 들어갈걸 그랬나. 도를 넘는 자화자찬과 더불어 곧장 실행에 옮기고 싶은 마음에 잽싸게 핸드폰을 들어 익숙한 번호 하나를 눌렀다.
" 어, 오빠. "
ㅡ 안 자고 뭐 하냐…….
" 오빠, 나 내일 임영민 촬영장 갈 거니까 밥차고 음료수고 싹 다 준비해 줘. 알겠지? "
뭐? 야, 야! 부탁할게, 오빠. 얼척이 나갔다는 듯 잠에서 깬 목소리로 절 불러대는 매니저 오빠의 부름을 애써 무시하곤 다시 한 번 부탁한다는 멘트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건 존나 기밀이지, 그치? 내일 촬영장에서 절 마주쳤을 때의 놈의 표정이 절로 상상이 가 콧노래가 나왔다. 아, 얼른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
다행스럽게도 제가 주문한 밥차와 음료수는 제대로 배달된 듯싶었다. 그것들에 놀라 기웃거리고 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다가가 인사하자 다들 놀란 듯 절 바라보는 게 기분이 묘하게 좋더라. 그러니까, 임영민이 날 엿 멕일 때 이런 기분이라 이거지? 절로 퍼지는 웃음에 자연스러운 미소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타이밍이 좋았던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시끄러워졌다 이 말이다.
ㅡ 영민 씨 응원 온 거야? 야, 영민 씨 덕에 ㅇㅇㅇ 씨도 실제로 보고.
" 뭘요, 저희 영민이 잘 부탁드려요. "
아, 이 새끼는 왜 안 와. 좀 전보다 열기를 더해가는 덕에 배가 된 시끌벅적함이었다. 그럼에도 얼굴 하나 비추지 않는 놈을 두리번거리며 찾기 바빴던 찰나, 그런 저를 알았는지 제 앞에 서있던 스태프 한 분이 입을 열었다. 영민 씨 부르러 갔어요, 곧 올 거야. 아, 감사합니다. 예의 미소를 띤 채 답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보이는 그는 퍽 당황한 듯 보였다.
" 야, 너……. "
그러니까, 그런 그의 표정은…… 꽤나 볼 만했다, 이거다. 놀란 표정으로 절 바라보는 그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자기야, 밥은?
ㅡ 오늘 드디어 영민이와 여주의 진짜... 사이... 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예... 부족한 글이지만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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