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3년 남짓 사귄 남자친구 하나가 존재한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만나 갖은 풍파를 함께 겪으며 고등학교 졸업까지도 함께 보낸 놈이다. 그런 놈과의 연애는 퍽 설렜다, 이렇게 가끔 개싸움이라도 난 듯 죽어라 싸울 때를 제외하면. 놈과 저는 누구 하나 뒤지지 않는 다혈질이었다. 그래서 3년간 만나며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그 싸움들은 언제나 끝이라도 볼 것처럼 저들을 물고 뜯기 바빴다.
그리고 오늘도.
" 아, 니 또 와 그라는데. "
놈이 화났다. 고향이 부산인 놈은 서울로 와 한동안 사투리를 뗀 채 서울말을 달고 살았는데, 그런 놈이 가끔 사투리를 뱉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 요즘 들어 놈을 쫓아다니는 계집 하나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입학한 새내기 중 한 계집이 놈을 노린다, 뭐 이런 소리쯤 되겠다. 같은 학교임에도 과는 달라 그렇게 자주 볼 수 없는 놈이기에 그런 계집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마냥 안심만 되지는 않더라.
" 걔 싫다고, 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
" 갸가 나 좋다는데 왜 니가 난리를 치노. "
뭐? 임영민의 한 마디에 맥이 풀렸다. 저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놈을 추궁하고 드는 건 아니었다. 그 계집은 여자친구가 존재하는 놈에게 까대기를 수도 없이 쳐왔고, 그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들까지 씹어대고 다녔다는 것이 팩트였다. 놈이 곧 저와 헤어질 거라는 둥, 자신에게 밥 먹자고 했다는 둥……. 물론 모두 다 계집이 뱉은 개소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 야, 너 말 다 했어? "
" 아, 씨발. 그게 아이고. "
놈이 뱉은 한 마디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퍽 남에게 지려 않는 성격 탓에 앞뒤 가릴 것 없이 홧김에 뱉은 말이라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저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이 채이는 그 상황에서 놈의 상황까지 살필 여력이 되지 못했다. 자신도 당황한 듯 제게 손을 뻗는 놈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눈빛으로 절 빤히 바라보며 손을 뻗어오는 놈에게 뱉어냈다.
" 그래, 니 좋다는 걔랑 지지고 볶고 다 해라. "
ㅡ 야, 밖에 임영민.
놈과의 이번 싸움은 꽤나 오래 흘렀다. 벌써 놈과 말은 커녕 눈빛 하나 섞지 않은 게 사흘이었다. 그리고 제가 놈에게 냉랭한 사흘 동안 놈은 꾸준히 저를 찾았다. 지금처럼. 같은 건물이 아님에도 자신의 점심시간, 제 점심시간 혹은 공강이 뜰 때면 항상 꾸준히 제가 머무는 곳에 찾아와 빤히 저를 들여다보고는 한참 만에 자리를 뜨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전처럼 자리를 뜰 줄 알았던 놈이 이내 제가 자리 잡고 있던 자리로 다가왔다.
" 야, ㅇㅇㅇ. "
" … 어? "
아, 망할…. 평소처럼 저를 바라보고만 있다 사라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제게 성큼 다가와 말을 건네는 놈의 행동으로 오히려 당황한 건 저였다. 제 이름 석 자가 흘러나오는 놈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이내 멍청한 대답을 한 마디 내놓았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멍청했다, 이거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절 응시하는 놈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뜻밖이었다. 마치 절 달래기라도 하는 듯 한참 약해진 목소리로 다시금 제 이름을 불러오는 놈이었다.
" 니 진짜 내랑 말 안 할 기가. "
" ……. "
" 하…. "
놈의 깊은 한숨이 제 귓가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답을 안 한 게 아닌데. 사근사근하게 절 설득하듯 뱉어내는 목소리가 퍽 당황스러웠고, 여태 별것도 아닌 걸로 네게 화를 낸 자신도 당황스러웠고, 네 마지막 한 마디까지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던 찰나였다. 낮은 한숨을 뱉어낸 놈이 이내 제게서 뒤돌았다.
아, 염병……. 그렇게 뒤돌아 제 길을 간 놈이 신경 쓰였다. 종일 고민을 해 봐도 도무지 나올 줄 모르는 답에 제 속만 더욱 답답해질 뿐이었다. 사과하고 싶다, 말 걸고 싶다, 연락하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결국 저는 인터넷의 힘이라도 빌려볼까, 싶어 흔한 커뮤니티 하나에 접속했다. 저, 그러니까 제가 남자친구랑 싸웠는데요……. 정직하게 작성된 발단을 시작으로 꽤나 자세한 저희의 얘기를 적었다. 얘랑 화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ㅜㅜ 라는 간절함이 담긴 한 마디를 덧붙이며 글을 마쳤고.
ㅡ 걍 연락하셈, 뭐가 걱정임?
ㅡ 22 ㄱㄴㄲ 걍 연락하면 끝날 일임
ㅡ 남친이 아까 왔었다면서? 그러면 끝임 ㅡㅡ
ㅡ ㅇㅈ
그러니까, 그 연락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고……. 제 답답한 속내를 모르는 듯 말로만 쉬운 해답을 내놓는 사람들의 댓글을 뒤로하고 잽싸게 뜨는 카톡 미리보기를 눌렀다. 너 판에 글 올림? 저와 임영민의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의 연락이었다. 티 나냐? 저인 것을 인정하는 짧은 답을 보낸 저는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다시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잠하던 핸드폰이 터질 듯 커뮤니티의 알림으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제가 작성한 글에 들어가니, 수많은 좋아요를 받은 베스트 댓글이 하나 있었다.
ㅡ 나 임영민인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얼른 나와라, 보고 싶다 ㅇㅇㅇ
…… 어, 그러니까. 작성한 지 20분이 채 넘지 않은 댓글이었다. 그 댓글이 진정 놈이라는 듯 미리보기로 뜬 친구의 카톡이 하나 있었다. 님 판에 글 올린 거 제가 임영민한테 말함 ㅈㅅ 헉, 어쩌지? 당황스러운 감정도 잠시, 놈이 정말 제 집 앞에 있을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던 참이었다. 이내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발신자를 확인하니 낯간지러운 애칭으로 저장된 놈의 번호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여보세여…. 잔뜩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 댓글 봤으면 얼른 나오지, 보고 싶은 거 진심인데. "
헉, 지금 나가! 나 완전 빨리 나갈 수 있어! 영민아, 사랑해! 두서 없이 터져나온 고백은 진심이었다. 사랑한다, 임영민.
ㅡ 간만에 단편 하나 가져왔습니다. 글 적으면서 느끼는 건데 영민이는 진짜 뭐 하나 빠짐없이 잘 어울리는 완벽함의 모먼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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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 암호닉
언제나 내 마음속 첫 번째였고, 첫 번째일 영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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