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연애는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의 연애에 있어서 이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헤어져, 그래, 다시 만나자, 그래. 홧김에 시작된 연애는 항상 홧김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길어야 고작 일주일, 일주일 안에 내게 무조건 돌아오던 임영민을 기대했고, 기다렸다. 굳이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아도 항상 먼저 연락을 취해오던 임영민은 3주가 지나도록 내게 연락 한 통 보내지 않았다.
ㅡ 야, 임영민 공슬아한테 번호 따였는데 줬대.
" …… 하하, 그래? "
ㅡ 임영민 여고 조서원 소개 받았다며, 그건 뭔데?
" …… 씨발. "
진짜야? 요즘 들어 여자에 눈을 뜨기라도 한 것인지 이것저것 들려오는 소문들에 심기가 불편해지던 찰나였다. 그런 내게 불이라도 붙이듯 놈이 다른 여자를 소개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와, 씨발……. 임영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 순식간에 나락을 향하는 기분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꼭 화가 날 때면 나오던 내 버릇 아닌 버릇이 그것이었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열이 순식간에 머리 끝으로 치솟았다. 임영민, 개새끼. 씹새끼. 나쁜 새끼.
허나 아무리 임영민을 욕해 봐도 임영민에게 난, 그저 본인을 차 버린 구여친 1일 뿐이겠지.
임영민이 옆 여고에 다니는 조서원과 연락을 한다는 사실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 이유라 하면, 꽤 오랜 시간 잘도 만나던 우리 둘의 연애가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가 됨과 더불어 나름 여신이라고 불리며 이 일대를 장악한 조서원의 화제성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 시기쯤, 아이들은 내게 동정 어린 시선을 마구 던져왔다. 그런 시선들에 대꾸할 힘도 없었던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고.
ㅡ ㅇㅇㅇ, 빨리 나오셈. 너 오늘 방송 안 해?
" 아 ,어……. "
일주일에 두어 번 꼴로 돌아가며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어 주는 것이 방송부원의 할 일이었다. 방송이라는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다시금 생각나는 놈이 한껏 더 미워지고 말았다. 씨발, 할 일만 좆도 많은 방송부. 이 동아리를 들게 된 것도 전적으로 놈의 탓이었다. …… 그러니까,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놈의 탓이라기보단 나를 피곤하게 했던 놈의 인기 탓이겠지. 그 새끼는 지금 조서원이랑 행복하겠지? 돌고 돌아 정착한 생각의 끝은 놈과, 조서원이었다. 마구 오르는 열을 애써 무시하며 교실을 나섰다.
ㅡ 널 너무 모르고,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좋니... 야, 미쳤냐? 이걸 재생하겠다고?
" 안 돼? "
ㅡ 아주 나 ㅇㅇㅇ예요, 임영민한테 까였어요. 광고하냐?
" …… 으앙, 그럼 나더러 뭐 어쩌라고. "
그날의 방송을 틀 수 있다는 것은 그날의 재생목록 또한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는 뜻이었다. 평소 귀찮음에 멜론 차트 1위부터 다섯 곡을 틀어대는 게 주된 업무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냥, 그저…… 우울한 내 기분을 표출이라도 하겠다는 듯 정해 제출한 재생목록들이었다. 물론 한 번에 까임을 당했고. 급격히 우울해진 기분에 방송부장인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 그럼 좋니라도 틀어라... "
ㅡ 야, 진짜.
" 임영민 씨발 그 새끼한테 들려 주고 싶다고! 좋으니, 사랑해서? 어? 좋냐고 씨발, 물어보고 싶다……. "
애잔하다는 듯 동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부장을 애써 무시하며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그런 내 시간을 방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어째서인지 평소 귀찮다며 핸드폰을 등한시하는 친구의 연락이었다. …… 무슨 일 있나? 급하게 홀드 버튼을 눌러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대니.
ㅡ 너 미쳤냐?
" … 씨발, 이 년은 받자마자 지랄이야. "
ㅡ 마이크 꺼, 너.
" 뭔 마이크. "
ㅡ 아, 뭔 마이크겠냐. 방송부 마이크 끄라고, 미친년아. 지금 니 목소리 전교에 울려. "
" …… 말이 되는, 머? "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는다 생각하며 친구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번쩍 드는 정신에 곧장 즐비한 장비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범 방송을 위해 방송부만을 향해 켜져 있다고 생각한 장비는 전교에 울리도록 설정돼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마이크 또한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크게 울린 친구의 목소리 탓에 좆됐다, 는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한 부장 또한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듯싶었다.
" 야, 실화냐……. "
ㅡ 어, 실화고 애들 듣고 지금 난리 났거든? 아, 임영민도 들었겠다.
" ……. "
ㅡ ㅇㅇㅇ 좋겠다, 야. 임영민 들려 주고 싶었던 좋니 들려 줄 수 있어서.
벙찐 상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본 부장이 급하게 장비의 전원을 내렸다. 힘없이 붙든 핸드폰을 통해 내게 쏟아지는 질책의 목소리 또한, 내게 들릴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짧게 또 한 번 울린 핸드폰 진동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는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 잘 들었다, 고해성사 ]
[ 좋니 들을 테니까 꼭 틀어라 ]
발신인 임영민, 정갈하게 날아온 그 문자 두 통에 정신은 다시 한 번 내게서 탈출했다. 자퇴냐, 유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공개적으로 뱉어낸 고해성사와 함께 내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퍽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게 3년 개근이라는 목표는 우습다는 듯 조퇴를 선택하곤 집에 돌아와 우수수 쏟아지는 연락을 감당하기 버거워 핸드폰을 꺼둔 지 어느덧 16시간이 지났다. 날이 밝은 뒤 그래도 등교는 해야겠다, 싶어 학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교실에 짱박혀 있었다. 그랬는데, 그러면 뭐 하냐고……. 등교하기가 무섭게 내게 다가온 아이들은 박수를 쳐댔다, 교실이 떠나가도록.
ㅡ 고해성사의 주인공 ㅇㅇㅇ 씨 아니냐, 박수로 모셔라.
ㅡ 진짜 대단하다, 너도. 어제 학교 종일 난리였어.
" …… 쌉쳐라, 또 조퇴하기 전에. "
ㅡ 임영민이 어제 너 찾으러 우리 반 왔었다?
" ……. "
ㅡ 너 조퇴했다는 거 듣고 아프냐고 묻던데, 아프겠냐고 했더니 존나 빠개면서 나가더라.
" 씹새끼네. "
" 씹새끼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줄 알고 뒷담을 까냐? 어제 많이 아프셨나 봐요, 3년 개근 받으시겠다는 분이 조퇴를 다 하시고. "
아, 짜증 나. 뒷문을 열어제끼며 대차게 등장한 임영민에 정작 무덤덤한 나를 두고는 자기들끼리 난리인 아이들을 한 번, 제 앞에 선 놈을을 한 번 바라보았다. 뭐, 왜. 시비 걸려고 온 거면 그냥 가지? 놈의 얼굴을 보기가 창피해 투정 어린 투정을 부리니 그런 내 모습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놈이 이내 내게 말했다.
" 야, 오늘 방송 내가 트는 거 알지. "
" 알면, 뭐. "
" 들으라고, 그거. "
" …… 조퇴할 건데? "
어쭈, 토 달지 말고 들어라. 나 간다.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 교실을 나서는 놈을 보며 꿍얼댔다. 왜 들으래, 이제 방송만 생각하면 치가 다 떨리는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간은 금방 흘렀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고, 점심시간의 반을 지나자 오늘의 방송입니다, 하는 짧고 간결한 놈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으라는데, 뭐... 안 들을 수도 없고, 그렇지? 그러한 이유들로 애써 위안을 삼으며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놈도 저와 함께 멜론 차트의 노래를 무작위로 틀었던 것 같은데 익숙치 않은 노래들이 흘러나옴에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어느덧 다섯 곡의 노래가 끝나고, 이상으로 오늘의 점심 방송 마칩니다. 란 음성과 함께 방송도 끝을 내렸다. 이걸 왜 들으라고 한 거지. 잔뜩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도착한 카톡이 눈에 밟혔다.
[ 오늘 재생목록 ]
[ 지금 간다, 너 보러 ]
[ 반에 있어 ]
발신자로 찍힌 이름 석 자는 볼 것도 없이 임영민, 놈이었다.
- 너무나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읍니다... 저를 매우치세요... 현생과 덕질에 치이느라... ㅜㅜ 절 기다려 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송합니다.
아무튼 제가 오지 못 하는 시간 동안 영민이는 데뷔를 했네요. 너무나도 기쁘고, 또 기쁘고... 요새 행복한 영민이 보면 저 또한 행복하고... 독자님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절 이해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애정합니다... 오랜만에 글을 적고 싶어서 이렇게 급하게 한 편 가져왔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 ㅡ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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