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입학을 앞둔 갓 스물을 넘긴 파릇파릇한 새싹들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캠퍼스 커플은 하지도, 가까이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지겨운 그 한 마디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해 같잖은 패기가 넘치는 이들에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적합한 말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막 스물을 넘겼던 그때의 나에게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CC, 하고 싶다. 나만 없어, 씨발. 캠퍼스 커플, 그거 졸라, …… 씨발이라고.
ㅡ 야, 니네 그거 들었냐? 김재환 선배, 또 헤어졌다며.
" 미친, 또? "
ㅡ 어, 이번에는 어째 오래간다 싶었다. 근데 이번에 사귄 애 우리 과 후배 아니었냐?
" 어어, 16학번이었을걸. "
ㅡ 어쩌려고 그랬대, 씨씨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 선배가.
그러게나 말이다. 가십처럼 떠들어대는 캠퍼스 내 커플들의 얘기는 언제나 우리 주변을 떠날 줄 모르고 맴돌았다. 그런 얘기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잠시, 이내 흥미를 잃고는 다음 주제로 넘어간 동기들에서 창문으로 시선을 옮기며 앞에 놓인 에이드를 빨대로 두어 번 휘저었다. 곧 진하게 가라앉았던 에이드가 마구잡이로 뒤섞이며 본래의 제 색깔을 찾아갔다. 이번 16학번들 중 누가 썸을 탄다, 이 교수는 어떻다, 오늘 날씨는 어떻다. 제각각 변해가는 주제들에 지루함을 느끼며 턱을 괴었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동기의 한 마디가 귓가를 세게 울렸다. 야, 난 근데 씨씨 한 번쯤 해 보고 싶더라.
" 절대 하지 마. "
ㅡ …… 에? 야, 니도 해 본 적 없으면서 왜 그럼? 누가 보면 씨씨로 3년 사귀다 헤어진 줄 알겠네.
" 아, 그냥. 학교 2년 다녀보니까 알겠다. "
씨씨, 진짜 씨발인 거. 설렘이란 설렘은 가득 안고 캠퍼스에 처음 발을 들였던 1학년을 지나 술과 과제에 찌들어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피폐한 생활을 했던 2학년을 지나 어느덧 3학년이 된 내게 더이상 캠퍼스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넓은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제는 힘에 부쳤고, 진득하게 취해 집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 이제는 일상이 돼있었다. 씨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진상을 부려대는 그들을 보며 느낀 것은 하나였다.
씨씨 그거, 안 하길 잘했다고.
# ㅡ 00
벚꽃이 만개한 4월의 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제 위치를 굳게 다져나갔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에 찌들어 캠퍼스에 대한 로망을 차츰 잃어갔던 나에게도 예외로 적용하는 것이 바로 4월, 벚꽃이 필 무렵이었다. 퍽 넓은 캠퍼스 안을 가득 메운 분홍빛 향연들을 마주할 때면 왜 이리도 기분이 좋은 걸까,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이유였지만 굳이 찾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개한 벚꽃들에 감탄과 함께 다음 강의가 있는 건물을 찾았다.
" …… 아, 뭐야. "
기분전환을 위해 샀던 신발을 개시했다. 그에 맞춰 나름 꾸민답시고 아주 오랜만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여성스러운 원피스까지 꺼내 입었는데. 이게, 씨발. 뭐 하자는 거지? 성큼 갈 길을 찾아가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남자도, 여자도, 그 무엇도 아닌 껌이었다. 진득한 느낌과 더불어 들어 올린 신발에는 끈적하게 녹아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달라붙은 껌들이 나를 반겼다.
" 염병……. "
그렇다, 이건…… 개같을 오늘을 암시해 주는 신호가 틀림없었다.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는 적신호에 골이 울렸다.
" 아, 지루해. "
야, 좀만 참아. 그래도 이번 17학번에 상큼이들 개쩐다던데? 잔뜩 업된 음성으로 17학번 상큼이들을 주제로 떠들고 있는 동기들과 내 관심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애초에 캠퍼스 안에서의 연애는 커녕, 씨씨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내게 17학번에 상큼이가 존재하든, 시큼이가 존재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다른 과보다 유독 느린 선후배 화합의 장이라 쓰고 죽어라 마시는 술 파티라 부르는 대면식이 오늘인지 또한,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빠지고 싶은 자리였지만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깠다는 듯 억지로 이 자리에 앉게 한 옹성우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옆 테이블에서 이죽이고 있더라. 아, 저 새끼 때문에 내가…….
" 야, 옹성우. "
ㅡ 쉿, 친구야. 널 꼭 보고 싶어 했던 순진한 어린 양이 이 자리에 있으니 그 입 다무시길.
순식간에 뻗치는 열에 옹성우 이름 석 자를 낮게 불렀건만, 그런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제 검지로 가볍게 내 입을 짓누른 옹성우가 답했다. 날 보고 싶어 했던 사람? 인싸도 저런 인싸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인싸였던 옹성우는 대면식을 채 시작도 않은 오늘, 그 훨씬 이전부터 후배들과 안면을 트고 지냈다. 그랬기에 날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 그러한 후배들 중 하나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근데 날 왜? 순식간에 끼어드는 생각들이 이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곤 가볍게 턱을 괴었다. 이 자리가 지루한 것은 유독 나 하나뿐인지 어느덧 대면식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ㅡ 자자, 대면식의 하이라이트. 17학번 쌍큼이들의 자기소개가 있겠습니다, 박수.
와아아. 술집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와 함성에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흥미를 가져보려야 가져지지 않아 한숨을 폭, 내쉬고 있었을까. 17학번 후배들의 인사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갑작스레 조금 더 큰 소리로 터진 함성에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함성의 주인공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퍽 키가 큰 것이 보나 마나 얼굴 깨나 반반한 남학생의 등장이겠다, 싶어 관심을 끄려던 찰나였다. 익숙한 피어싱에 감았던 눈을 떠 자세히 들여다보니.
" 안녕하세요, 22살 17학번 임영민입니다. "
" ……. "
" 잘 부탁드립니다. "
…… 쟤가 왜 여기 있어?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주친 시선은 서로를 진득하게 쫓았다. 3년 전, 퍽 개같은 끝을 마주했던 구남친과의 재회였다.
꽤 강렬한 첫인상, 그러니까 3년 만에 마주한 임영민의 인상은 떠날 줄 모르고 내 머릿속에 깊은 잔상을 새겼다. 꽤 멀리 떨어진 자리였기에 자기소개 때 마주친 순간을 빼고는 놈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 쟤가 왜? 왜 여기 있는데? 군대 갔다며, 벌써 제대했나? 떠날 줄 모르고 맴도는 생각들과 함께 아까부터 혼자 기울이던 술잔을 다시금 들었을까, 이내 잔이 빈 게 느껴져 앞에 놓인 소주를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그런 내 손을 제지하는 큼지막한 손 하나가 눈에 들었다.
" …… 뭐예요? "
" 정세운인데요. "
누가 그걸 물었나. 조금 전 자기소개 시간 임영민과 함께 큰 환호성을 받았던 후배라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그다지 기억에 남지도, 그렇다고 언제 본 적도 없는 초면의 후배가 선배의 행동을 제지한다? 퍽 우스운 상황이 연출된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아 다시금 앞에 앉은 그에게 빤히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퍽 강단 있는 한 마디에 맑은 미소를 띤 정세운이 답했다.
" 진짜 오셨네요, 선배. 성우 형이 선배는 이런 데 매번 빠지신다길래, 오늘도 못 보나 했거든요. "
" …… 넌가 보네요, 옹성우 그 새끼가 말한 게. "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요상한 말투로 그에게 답을 던지니 제 말투가 웃긴 것인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실소를 터뜨리는 정세운이었다. 오, 오른쪽 얼굴은 합격. 퍽 반반한 페이스에 능글맞은 말투까지. 내 앞에 앉아 여자들이 환장한다는 그 미소를 띤 정세운을 봤을 때의 첫인상은 그것들이 전부였다. 여자를 잘 다루는구나, 얼굴 믿고 깝치네. 묘한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공중에서 맞닿은 시선과 함께 긴장이 찾아오는 기분에 시선을 피했다. 아, 씨발. 취했나.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내 옆에 놓여진 핸드백과 핸드폰을 챙겨들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 옹성우. 나 간다. 곧장 나를 따라 일어서는 정세운은 어느덧 신경 밖이었다.
" 선배, 왜 벌써 가요. "
" ……. "
" 선배, 대답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
강아지마냥 술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내 뒤에서 벗어날 줄 모르며 자리를 지킨 정세운은 대답이 없는 내게 포기 않고 말을 걸어왔다. 선배, 선배. 평소 후배들과의 교류가 없는 내게는 퍽 어색한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속이 울렁이는 기분에 얼른 바람을 쐬고 싶어 갑갑한 술집을 벗어났다. 술집을 벗어나는 순간에도 잽싸게 제 뒤를 쫓은 정세운이 이내 다시금 적막을 깨고 뛰어들었다.
" 선배. "
" ……. "
" 누나. "
" …… 뭐? "
" …… 진짜 매력 쩌네요, 누나. "
툭. 선배, 선배. 잘도 뱉어내던 정세운이 곧 누나, 라며 퍽 발칙한 호칭을 뱉었다. 그 호칭을 듣기가 무섭게 줄곧 정면만을 향하던 시선을 뒤에 바짝 붙은 정세운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담배꽁초를 떨어뜨린 듯 툭, 하고 울리는 소리에 놀라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그러니까.
" 어, 영민이 형. "
" …… 어, 세운아. 뭐 하냐? "
" ……. "
제가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꽁초를 신발로 지지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저희를 바라보는 임영민이 있었다. 묘하게 어긋난 시선들이, 그러니까, …… 이게 무슨 조합이냐?
ㅡ 심 상 치 않은 사이의 대접전이 펼쳐질 그러한 글입니다, 넹... 말 그대로 구남친 임영민 X 캠퍼스물에 관심 없는 여주 X 불도저 정세운이 만들어 갈... 그런...
ㅡ 초록글, 댓글, 추천, 스크랩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__) ~ 항상 빠짐없이 댓글 읽고 있으니 글에 관한 내용, 피드백, 질문 모두 자유롭게 남겨 주셔도 괜찮습니다. ㅎㅎ
ㅡ 암호닉 신청은 따로 신청글을 올려 그 글에서 받도록 하겠읍니다. 정리가 조금은 필요한 듯싶어 결정하게 된 일이니 믿고 암호닉 신청을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