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학번 임영민, 17학번 ㅇㅇㅇ. 나란히 놓인 이름과 더불어 앞에 붙은 수식어는 우리의 사이를 정의해 주기 알맞았다. 같은 과 선후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사이. 사실 처음부터 선배에게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 동기들 사이에서 인싸인 임영민과, 17학번 사이에서 나름 인싸로 불리는 나. 그랬기에 갔던 모임들에서 선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임영민은 같은 과 선배일 뿐이었다.
" 어, 얘들아. 하이. "
ㅡ 안녕하세요, 선배.
" ……. "
그러니까 그날은, 4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임영민이 제 트레이드 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 빨간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고 학교에 등장했던 그날, 어이없게도 까만 머리의 임영민을 보자마자 난 반해 버렸다. 그러니까, 씨발.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빨간 머리의 선배를 마주할 때마다 별 생각이 든 적 없었는데, 왜……. 임영민의 뒤에 후광이라도 비추는 듯, 나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듯한 감정을 느꼈다. 사랑이냐? 그래, 사랑이다. 상황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 선배, 밥은요? "
" 어어, 나 지금 애들이랑 먹으러 가려고. "
" 헉, 저도 가도 돼요? "
" 어? 아니, 그게. "
ㅡ 데리고 가, 뭐 어떠냐.
어어. 그 뒤로 눈에 띄게 달라진 내 행동을 버거워 하는 건 임영민 하나뿐이었다. 워낙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편이라 흑발을 하고 학교에 등장한 선배를 본 그날 이후로 저는 임영민 껌딱지로 불릴 만큼 선배를 졸졸 쫓아다녔다. 이런 내가 영 이상한 건 아니었는지 원래 인기가 많았던 선배였지만, 염색한 후 선배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경영과 임영민 여자친구 있어요? 등 대나무숲에 올라오는 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임영민은, 엄청난 철벽을 보였다. 선배가 철벽남이라는 것은 경영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배, 동기, 후배들을 가릴 것 없이 적당한 선에서 쳐내기 마련이었으니까. 허나 이런 식으로 엄청난 관심을 표하는 건 내가 처음이었던지 선배는 간혹 귀엽고, 깜찍한 행동들을 보였다. 마치 이런 내 행동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이.
" 선배, 선배. "
" 어? "
"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
하지만 임영민은.
" 안 돼. "
철옹성과도 같은 철벽을 지닌 남자였다, 씨발.
" 민현 오빠, 밥 먹었음요? "
ㅡ 아직, ㅇㅇ 넌 먹었냐?
" 노노, 오빠 저 밥 주세여. 영민 선배 기다리는데 배고파 디짐……. "
ㅡ 어, 그럴까? 어? 야, 임영민.
그 뒤로도 선배를 쫓아다니는 짓을 관두지 않았다. 그런 날 보며 동기들을 비롯한 선배들이 그랬다지. 와, 쟤 졸라…… 끈질기다고. 그런 가십들은 내 의지를 더욱 불태워 주기 충분했다. 뭐, 선배의 행동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던 질문에 단호하게 노, 를 외쳤던 선배도 내게는 별 신경이 쓰일 일은 아니었다. 여즉 선배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면 그만이었으니까.
" 헉, 선배. 수업 한 시에 끝나는 거 아니었어요? "
" 교수님이 일이 있으시대서, 휴강. …… 근데 너네 왜 같이 있냐? "
ㅡ 같이 있으면 안 되냐?
" 아, 맞어! 선배, 같이 밥 먹어여. 민현 오빠가 밥 사준댔는데 선배도 같이 고고? "
" ……. "
아, 선배. 저 여기서 선배 기다리다가 민현 오빠 만난 거란 말예요, 어? 같이 먹어요. 내 재촉에도 답이 없던 선배가 이내 미간을 구겼다. 무언가,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인데…… 왜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 이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선배가 곧, 민현 오빠의 재촉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야, 너 가. "
" …… 넹? "
" 아니, 황민현. 너 두 시에 수업 있지 않냐? "
ㅡ 어, 근데 지금 열두 신데……. 아, 가야겠다. 하하. 야, 내가 옹성우랑 약속 있는 걸 깜박했다. 후배, 미안?
" 에? 오빠, 어차피 밥 먹을 거면 성우 오빠도 같이 밥. "
ㅡ 어어, 아니야. 영민이한테 밥 사달라고 하고, 오빠 간다?
그리고 그런 민현 오빠가 떠난 자리를 하염없이 노려보는, 선배가 내 눈에 띄었다.
" 선배, 있잖아여. 그래서 제가. …… 선배? "
" ……. "
" 듣고 있어요? "
선배와 학식을 먹었다. 이럴 거였으면 왜 굳이 둘이 먹었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밥을 먹자마자 선배와 조금이라도 더 있겠다는 핑계와 함께 카페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체리에이드와, 레몬에이드 한 잔씩을 시킨 저희는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곤 딱 하나였다. 제 말에 간간이 답을 주던 임영민이, 오늘따라 입을 꾹 다문 채 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
" 야. "
" …… 넹? "
" 황민현이랑 옹성우는 왜 오빠냐? "
" …… 에? "
" 그럼 난 뭔데. "
" 선배는, …… 선배죠? "
하하. 잔뜩 굳은 표정의 임영민이 제 앞에 놓인 체리에이드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런 제 대답에 한참이나 말이 없던 선배가 곧 턱을 괴며 날 빤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걔네는 오빠고, 난 선배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귓가에 박혔다. 아니, 씨발. 언제는 자기가 오빠라고 하지 말라면서? 그런 선배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며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아, 선배가 오빠라고 하지 말라면서요……!
" 그건 과거고. "
" …… 에? "
" 앞으로 걔넨 선배, 난 오빠. "
" ……. "
" 알겠냐? "
…… 그러니까, 이거, 질투 맞지? 선배. 아니, 오빠. 졸라 귀여운 거 알고 그래요? 선배의 귀가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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