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 임영민, 들이댐이 능숙한 정세운, 그리고…… 멍하니 임영민과 정세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나까지.
나만 느낄 수 있는 요상한 조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영민과 정세운 저들도 느낀 것이 있는지 서로를 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정적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나른한 시선으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는 임영민, 그에 반해 조금 전 아기새처럼 재잘대던 정세운이 한 번에 입을 다문 것도. 그것들 전부가 평범하기 그지없던 잔잔한 내 일상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정세운이 느릿한 고갯짓과 함께 임영민에게 시선을 박았다. …… 형.
" ……. "
" …… 영민이 형? "
" …… 엉? "
" 안 들어가요? "
안 들어가요? 들어가, 왜 안 들어가? …… 넌 뭔데.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과 더불어 압박이 잔뜩 들어간 듯한 목소리에는 강단이 실려 있었다. 제 트레이드 마크라고 생각될 만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정세운의 선공이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임영민의 정신이 깨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다시금 시야를 되찾은 임영민은 반문했다. 안 들어가냐고? 네, 형. 즉각 튀어나온 정세운의 대답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 어, 들어가야지. "
" ……. "
" 세운이 넌? "
" 아, 전 누나 좀 데려다주고 다시 오려고요. "
누나, 고작 한 번 튼 호칭을 잘도 사용해대는 정세운은 아무리 봐도 선수에 가까웠다. 무언가, 묘한 기분. 혼자서 들이켰던 술기운이 그제야 다시금 올라오는 듯 몽롱해지는 기운에 고개를 두어 번 세차게 저었다. 선배, 괜찮아요? 그런 내 모습을 발견이라도 한 듯 임영민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즉각 내게로 보이는 정세운은, 그러니까…… 영악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정세운의 목소리와 더불어 임영민의 시선 또한 내게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 …… 안녕히 가세요, 선배. "
" …… 아, 네. "
안녕히 가세요, 선배. 마지막에서야 내게 허락된 임영민의 음성은 그것이 전부였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허락되는 흔한 인삿말.
# ㅡ 01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금방이라도 헛구역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염병할……. 그놈의 구남친 하나 본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술을 그리 퍼부어댔을까. 다시금 회상되는 어제의 기억과 더불어 섣불렀던 행동들은 후회로 다가왔다. 아아. 목도 잠긴 듯한 기분에 괜히 목을 풀었다. 시간표에는 차있는 화요일 2교시는 내게 언제나 공강인 시간이었다. 학점을 채우기 위한 교양, 그에 따라 교수님도 오로지 과제로만 성적을 평가한다고 유명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교양의 법칙에 따라 자체적으로 휴강을 때리기가 한 달, 벌써 과제를 부여할 날짜가 다가와 화요일인 오늘,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도착했다.
ㅡ 너 오늘 사랑의 기술 과제라며.
" 어어, 그래서 일교시부터 죽겠다. "
ㅡ 어제 많이 마시긴 하더라, 괜찮냐?
" 졸라 안 괜찮음. "
동기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 인사를 나눴다. 야, 이따 될 수 있으면 보자. 어어, 안녕. 한가롭고도 따분한 인사와 함께 저 멀리 사라지는 동기를 빤히 바라보기를 한참, 곧 강의가 있을 구양관으로 몰리는 학생들에 놓았던 정신을 붙잡고 걸음을 빨리 했다. 제법 모여든 학생들을 파고들어 겨우 두 좌석이 남은 빈 자리 한 곳을 찾았다. 내 왼쪽엔 심플한 검은색의 크로스백이 하나 놓여있었고, 오른쪽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듯 비어있을 뿐이었다.
" …… 또 보네요, 선배. "
" …… 아아. "
시끌벅적한 학생들 틈으로 내 눈에 든 건 다름 아닌 임영민이었다. 금방 손을 씻은 듯 이리저리 물기를 털어대며 강의실로 들어선 놈은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위치했고, 곧장 왼쪽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젠장……. 심플한 모양의 크로스백이 놈의 것이었던 듯싶었다. 제 자리에 착석해 제 핸드폰에 시선을 박는 놈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놈은, 내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굳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라 놈에게 박은 시선을 들킬까 무서워 고개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또 보네요, 선배. 나지막이 떨어진 놈의 목소리에 놀라 곧장 고개를 틀어 놈을 바라보니 제 핸드폰에 여전히 시선을 박은 모습이었다.
" ……. "
" ……. "
놈에게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존댓말을 이틀이나 내내, 그것도 선배라는 거북한 호칭과 함께 듣자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거북한 속이 또 한 번 제 위용을 마음껏 드러냈다. 불편한 기분에 놈에게 던졌던 시선을 차마 거두지 못하기를 한참, 이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트는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할 말 있습니까. 단조롭게 흘러나온 음성이 무심했다. …… 모르는 척하는 건가, 왜? 설마, 날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애써 뒷전으로 미뤘다.
" 아, 아니……. "
괜히 말끝을 흐려댔다. 마구잡이로 그어진 선은 나를 자꾸만 뒤틀리게 만들었다. …… 짜증 나, 임영민.
" 어? 선배, …… 영민이 형? "
하나님,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주세요, 씨발.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가혹하디 가혹한 운명은 어느덧 내게 성큼 다가왔다. 강의의 시작을 아슬아슬하게 2분 남긴 시간, 강의실로 들어서는 익숙한 인영이 하나 있었다. 대면식이 있었던 어제, 저도 적지 않게 마신 것 같았는데 어째 2교시부터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댄디한 스타일을 즐겨 입는 듯 어제와 비슷한 듯 다른, 그러니까 스트라이프 셔츠에서 하얀색 셔츠로 바뀐 오늘. 반듯한 모습의 정세운이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옆에 앉은 임영민을 잔뜩 의식하던 내가 눈에 띈 것인지 곧장 내게 다가오며 선배, 하고 부르던 정세운은 제 바로 옆에 앉은 임영민에게 곧장 시선을 돌렸다.
" 세운이 왔냐. "
" …… 어어, 그. 안녕? "
" 형이랑, 누나. …… 아는 사인가? "
" ……. "
" …… 어, 아니? 그. "
옆에 꼭 붙어앉은 저희가 이상하긴 이상한 것인지 곤란하디 곤란한 질문을 해 오는 정세운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좋을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띤 정세운은 그럼 여기 좀 앉을게요. 괜찮죠, 선배? 하며 거절할 수 없는 웃음을 보내왔다. 그러니까, 지금, 내 왼쪽은 임영민, 오른쪽은…… 정세운이라, 이거 아니야.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괴상한 장면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아, 골이야. 아득해져오는 정신을 부여잡기도 전에 강의는 시작됐다.
ㅡ 오늘부터 과제 기간인 거 아시죠, 여러분.
ㅡ 과제는 3인 1조로 진행합니다. 과목이 이렇다 보니까 남자와 여자 비율은 2;1, 혹은 1:2.
ㅡ 여러분들이 과제로 해야 할 일은 사랑과 관련된 영화 세 편을 보시면 되는데, 한 번은 세 분이서 함께, 또 한 번은 둘이서, 마지막 한 번은 다른 파트너와 둘이서 감상하면 됩니다.
ㅡ 그 후 느낀 감정들을 여자와, 남자. 그리고 상대방의 파트너로서 레포트에 그대로 작성하시면 됩니다.
ㅡ 기간은 오늘부터 한 달 드립니다. 참고로 조는 지금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셋씩 자를 거니까 불만 없었으면 합니다.
아아, 교수님.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아우성들에 사람 좋게 웃어 보이신 교수님은 한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강의를 끝마쳤다. 맞다, 과제 끝날 때까진 조로 뭉친 세 분끼리 매 강의 출석하셔야 합니다.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그를 끝으로 강의실을 나서는 교수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둘 중 한 명이라도 같은 조를 피할 수 있을까 싶어 앉아있던 줄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셋, 셋, 셋, 그리고…… 임영민, 정세운을 포함한 셋.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조합은 내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 누나, 같은 조네요? "
" …… 어? 아, 그러네. "
" …… 영민이 형까지 같은 존데, 아는 사이라서 다행이다. "
그쵸, 누나. 예의 생글거리는 인상은 버리지 않은 정세운의 도발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말을 트고, 번호를 교환하며 저들끼리 무리를 뭉친 다른 학생들이 나간 강의실은 썰렁함 그 자체였다.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그렇다고 자리를 뜨지도 않는 상황에서 중간에 끼인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야, 나 디질 것 같애. 의미 없는 카톡들을 대화창에 열심히 띄우고 있었을까, 곧 왼쪽에서 내밀어지는 핸드폰에 놀라 임영민을 바라보았다.
" 번호, 주셔야죠. "
" 아, 그렇죠. "
" ……. "
사실 놈과 헤어지기 전부터 줄곧 고집해오던 전화번호를 바꾼 적은 놈과 헤어지고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게 번호를 묻는 놈의 행동이 3년의 공백을 말해 주는 듯싶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어 전화번호를 찍어냈다. 한 자, 두 자 늘어가는 숫자들과 더불어 열한 자리를 모두 쳐내자 뜨는 번호는 놀랍게도 이미 저장된 내 번호의 주소록이었다. ㅇㅇ, 정돈되지 않은 상황을 싫어하는 놈의 핸드폰에 모든 번호는 이름 석 자였고, 그 기준을 깨 버린 건 다름 아닌 현재 저장된 내 번호였다. 성을 뺀 이름 두 글자로만 저장된.
" 아, 여기요. "
" ……. "
" 누나, 저도. "
아직까지 임영민의 핸드폰에 정갈히 저장된 내 번호 열한 자리를 보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훅 치고 들어오는 정세운은 진실로 내게 벅찬 존재임이 틀림 없었다. 당황도 잠시 빠르게 정세운의 핸드폰에 번호 열한 자리를 찍어냈다. 어어, 여기. 마찬가지로 정세운에게 핸드폰을 건네자 예의 그 해사한, 그러니까…… 누구든 정신 못 차릴 듯한 미소를 띤 정세운이 가볍게 대꾸했다. 고마워요, 선배. 다정한 목소리에 퍽 놀랐을까, 그건 저뿐만이 아닌지 왼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다시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세운은 눈치가 빨랐다. 아니, 빠른 건가? 빠른 것 같다. 책상에 턱을 가만히 괸 정세운이 나와 임영민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누나. 나긋하게 떨어진 목소리에 조용한 강의실을 가득 메울 정도로 침을 꼴딱 삼켰다. 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허밍을 하던 정세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밥 먹을래요? "
" …… 어? "
" 영민이 형이랑, 셋이서. "
친해져야 하잖아요, 우리. 정세운이 곁들여 들먹인 같잖은 이유는 꽤 그럴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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