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게 언 볼을 스치는 칼바람에 반대 서서 빨간 손으로 배춧잎 여러장을 세는 민석의 얼굴이 밝았다. 무려 사십만원이나 수중에 들어왔다. 민석은 두툼한 봉투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얼른 구겨넣었다. 겨우 일주일 만이었다. 힘들지만 일주일만 나와주면 두둑히 챙겨준다는 아는 형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게 일주일 전이란 말이다. 주소부터가 유흥가 냄새가 풍기던건 지옥의 향이었을까. 민석은 콧물이 살짝 흐르려는 코를 훌쩍였다. 은은히 들어오는 뜨끈한 오뎅 냄새에 민석은 주머니 속 봉투를 만지작거렸다.-요점부터 말하자면 민석은 돈이 필요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혼자가 아닌 댓가로 나갈 선물 비용 때문이었다. 갖고 싶은거 있어? 있냐? 있냐니까? 없어? 민석이 삼십통 쯤 카톡을 날린 끝에야 루한은 수줍게 축구화가 새로 나왔다고 말했다. 차마 말로못할 발끝부터 올라오는 귀여움의 시발점은 어디였을까. 민석은 침대에 누워 떡진 머리를 하고는 몸을 베베 꼬았다. 역시나 받기만 할 순 없는 법. 그건 남자로서 존심 안 서는 일이었다. 루한도 질세라 요상한 맞춤법과 함께 갇고싶은거 있어? 응? 민석아. 민석아? 너 자꾸 못본척 할레?식의 카톡을 날렸다. 루한이 외국인인 점을 감안한다면 알바는 무리일것 같아 민석은 그냥 따뜻한 모자 하나를 달라고 답했다. 루한이 바보가 아닌이상 축구화와 모자가 천지차이라는걸 모를린 없었다. 당장이라도 다른거 다른거!를 외쳤을 루한은 응 알앗어라며 간단한 말을 했다. 아까까진 한없이 주고만 싶은 부모의 마음이 엥?하는 의문이 드는 시점이었다. 참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지. 그러나 민석이 다시 기분좋게 몸을 베베 꼴 수 있었던건 일분 뒤에 온 한마디였다.근대 늦게 줘도 돼지?맞춤법 따위에 눈 갈 틈이 없었다. 눈치 하나는 백단인 민석이었다. 딱 보니 만들어 줄 모양이었다. 루한이 서툴게 뜨개질이나 하고있을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고 기분이 들떴다. 그리고 나서 보니 루한이 새로 나왔다며 말하던 그 축구화가 양심적으로 비싸도 너무 비싼게 문제였다. 끙 이십만원은 족히 들어가네. 그러다 수소문 끝에 찾은 단기 알바 자리였다. 참 술 마시면 뭐 된다더니 그말이 딱 근 일주일간 쓰일 말이었다. 술에 취한건지 일부러 그러는건지 사내새끼 엉덩이는 뭘 그리 토닥이는지 집에 갈때마다 맞은 엉덩이가 얼얼했다. 자리를 소개 시켜준 형은 잠시 집에 내려갔다 온다더니 감감무소식이고 아저씨들은 주정이고 사람은 많고. 그렇게 번 돈 사십만원이었다. 이 돈이 그냥 맛난거 사먹고 말 돈이었으면 민석은 첫날 진즉 때려쳤을게 분명했다. 첫날이 엉덩이가 제일 얼얼한 날이었으니까."아, 형 이거 이상해요!""원래 술 마시면 다 그래. 눈에 뵈는게 없다니까.""진짜 많이 안주면 형부터 신고할꺼에요.""걱정마."워낙 인상자체가 포근한 형이라 민석은 아무런 의심도 앞날에 대한 걱정도 없이 계속해서 일을 나갔다. 루한에게 걸린것은 딱 마지막을 이틀 앞둔 토요일이었다."루한, 나 이제 집 가봐야 겠다.""여덟시 밖에 안됐는데?""피곤해서. 미안해."민석이 주섬주섬 옷을 입자 루한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종종 자신의 뜻과 다르게 흘러갈때 하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보통 민석에게 직빵으로 먹혔지만 알바시간까지 술집에 도착하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도저히 그런 애교에 넘어갈 겨를이 없었다. 민석이 거들떠도 안보자 루한은 계속해서 갈꺼야? 정말? 나 두고?라고 말하며 칭얼거렸다."미안해."민석이 정말 그 무엇보다도 더 미안할 수 없다는듯 웃어보이자 루한은 그제야 잘가 하며 손을 흔들었다. 거기까진 아주 아름다웠다만. 민석이 나가자 마자 루한이 제 겉옷을 챙겨입은게 미스였다. 마치 히틀러가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아찔한 순간처럼.민석이 종종 걸음으로 가게문을 열자마자 루한은 불쑥 나타나서 다짜고짜 민석의 팔을 잡아끌었다."어, 어!"미끄러운 빙판길에 민석이 휘청거리자 루한은 그 상황에서조차 민석을 받아냈다. 민석의 두팔을 단단히 잡은 루한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보였다. 덜컹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민석은 눈을 깜빡거려 보았지만 역시나 현실."루하안.."민석의 말꼬리가 흐지부지 늘어졌다. 슬쩍 곁눈질 한 루한의 표정은 정말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꽉 잡힌 팔이 아프다고 생각될때 루한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민석, 여기 왜 왔어?"아까까진 그렇게 귀엽던 얼굴하며 목소리까지 싹 바뀐것도 정신없는 와중에 민석은 선물 얘기가 꺼내기 싫어 얼버무렸다."그, 나 알바..""거짓말. 왜 했어?"민석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민석이 가게 문 근처에서 들어오질 않으니 안에선 얼른 들어오라는 외침이 들렸다. 안절부절하던 민석은 멍청하게도 루한의 팔을 뿌리치곤 도망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미안하다고 수천번쯤 되뇌인것 같았다.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루한은 예상외로 더이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역시나 이곳저곳 얼얼하게 일을 하는동안 민석은 내내 굳은 루한의 얼굴을 생각했다. 정말 많이 화났나. 정신을 놓고 있다가 취한 아저씨에게 등짝을 시원하게 맞기도 했다. 존나게 때리고 싶게 생겼다나. 가뜩이나 루한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차에 맞기까지하니 민석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손님에게 가져다주기전 안주를 몰래 집어먹었을까. 하여튼간에 민석도 나름대로 화가 많이 나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삼일 앞둔 22일의 밤이었다.-민석은 일이 끝날때까지 루한을 보지 못했다. 일은 오늘까지로 잡혀있었고 민석의 손에는 루한이 갖고싶다던 그 축구화가 들려있었다. 화가났거나 말거나 일단 목표였으니까 샀지만 민석은 영 찝찝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브날은 같이 있고 싶었는데. 쇼파에 벌러덩 누워서 의미없는 티비채널만 휙휙 넘기다가 민석은 뜬금없이 가요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시끌벅적한 여자애들 비명과 비슷비슷한 일렉트로닉속에서 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한이랑 닮았네. 머리색도 비슷한 모습에 민석은 한참을 집중했다. 코가 좀 별로네. 루한이랑 달라. 루한은.."에이씨!"민석이 탁자를 쿵 내리쳤다."어?"쾅하는 소리와 함께 민석은 순식간에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자를 내려치던 그 굉음 속에서 맑은 띠리링소리는 분명 현실이었다. 누구세요? 루한? 민석이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건 아까 티비속 그 갈색머리를 한 루한이었다. 민석이 자주가는 제과점 봉투를 한손에 들고 살짝 굳은 표정을 한 루한은 말 없이 신발을 벗었다. 당황스러운 등장에 민석은 루한이 탁자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손을 씻고 나올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앉아."이뭐주? 이건 뭐 주객전도도 아니고. 제 집이지만 고분고분하게 루한이 지정해준 자리에 착하게 앉은 민석은 먼저 제과점 봉투에 관심을 보였다."민석아.""어, 어?"루한이 슬쩍 제과점 봉투를 탁자 아래로 옮겼다. 봉투를 따라 눈이 움직이던 민석은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뭐 하러 간거야?"덤덤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민석은 주눅이 들었다. 속부터 울리며 귓가에 산들바람처럼 남는 루한의 목소리가 그렇게 미안할 수 없었다."알바하러 간거야..진짜로.""근데 왜 비밀 했어?""그게.."참 뭐라 변명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금 줘버리자하는 생각에 민석은 쇼파 밑에 넣어두었던 축구화를 꺼냈다. 귀찮아서 포장도 매장에서 해준 그대로였다. 그냥 팔만 슥 뻗었는데 루한은 또 아무 생각없는 특유의 멍을 잡았다. 멀뚱히 상자를 바라보는게 아마 놀란 얼굴인것 같았다."왜?..별로야?..받아 얼른. 민망해."민석은 남은 오른쪽 손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 루한은 기쁜것도 화간것도 아닌 오묘한 얼굴로 민석이 건넨 상자를 받았다."민석아..""어?"루한은 예쁜 형광색의 신발상자를 옆에 내려놓고 앞에 놓인 탁자위로 올라갔다."뭐, 뭐해?"잠깐 휘청이는듯 보이던 루한은 무릎으로 서서 건너편에 앉은 민석에게로 쓰러졌다."민석아아아아!"한편으론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를 내며 다짜고짜 엎어지는것을 민석이 겨우 받아냈다."아, 민석아. 우리 햄스터.""무거워. 좀.""싫어, 이렇게 안하면 부끄러워."루한은 자꾸만 얼굴을 치대며 꼬물거리더니 결국 온몸으로 탁자를 건너왔다. 팔힘만으로 힘겹게 받아내던 민석도 순간적으로 힘이 탁 풀려 뒤로 넘어갔다. 방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긴 했지만 거기엔 신경도 안쓰일만큼 루한은 온몸을 부대꼈다."미안해. 내가 화내서 미안해.""응, 응. 무거워.""많이 무거워?"루한은 얼른 몸을 일으키다 무릎으로 민석의 허벅지를 콱 찍었다. 순간적으로 악!하고 비명을 지른 민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한은 다시 어쩔 줄 몰라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 그날밤 이렇게 소란스러웠던적도 없었던것 같을 정도로. 한참만에야 참을 정도로만 얼얼한 허벅지를 문지르며 둘은 조용해졌다. 탁자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혼이 쏙 빠진듯 입을 헤 벌리고 있던 민석은 불현듯 루한이 들고온 봉투를 가리켰다."저거 뭐야? 빵?""이거.."루한은 수줍은 얼굴로 봉투를 탁자위에 올렸다."그게 별거 아닌데..다 못만든거야. 어..이거..색깔은.."민석이 봉투를 뒤집자 하얀색 털뭉치가 가볍게 떨어졌다. 뭐 모양이야 원초적인 털 뭉치의 모습과 흡사했지만 나름 노력한듯 실 상태가 좋지 못했다. 꼬이고 풀린 실가닥들을 보자 열심히 손을 놀렸을 루한이 생각났다. 민석이 뚫어져라 뭉치만 보고있자 민망해진 루한은 민석의 어깨를 툭툭치며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내가 제대로 만들어서 줄께, 우리 딴거하자.""루한, 고마워."잉? 루한이 잘못들은 줄 알고 귀를 후비적거리다가 민석을 보는데 민석은 심지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루한은 귀를 후비적거리던 손으로 다시 눈을 세게 비볐다. 엥?"민석, 왜 울어."루한이 측은한 투로 어르자 민석은 입꼬리가 추욱 쳐지며 울상을 지었다."왜에, 왜 울어. 울지마, 울지마.""루한, 너, 진짜 연락 안하는, 줄 알았잖아. 근데 이거 만들고 있었구나."루한이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만들긴 뭘. 십분도 안만진건데. 침을 꼴딱 삼키고 나서 루한은 하하 웃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민석이 착하다."루한은 하얀 털뭉치를 들어다 민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무슨 다섯살배기 어린 애도 아니고 애완 고양이도 아니었건만. 다행히 민석은 그걸 꼭 껴안은 뒤 루한도 꼭 껴안았다."루한, 이건 기적이야."으, 응? 민석은 당황스러운 한마디를 툭 내 뱉고 기분 좋은듯 루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어쨌든 루한은 털뭉치가 축구화로 바뀐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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