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병신 머저리다.
"나 너 좋아해."
"....뭐?"
"나는 너 친구 이상으로 좋아한다고."
고등학교 3학년의 지옥같은 시간이 다 끝나고 졸업식이 다가온 날, 나는 고백을 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6년이라는 시간동안 열렬한 내 짝사랑은 좀처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주둥이는 이런 나의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남자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담스럽고 무서운 존재였다. 여중, 여고를 다닌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이성을 매우 두려워했다. 옆에만 다가오면 온 몸이 굳어가는 것 같았고 애들과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순식간에 벙어리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내 곁에서 있어준 남자는 다름 아닌 강다니엘이었고 내가 평소에 느꼈던 '이성'이라는 것과 달리 그는 참으로도 친절하고 멋있었다. 차라리 얼굴이라도 잘생기지나 말던가, 웃을 때마다 휘어지는 그의 눈두덩이에 나는 깔려서 뒤지고 싶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껄이고 다녔다. 비록 그의 앞에서는 그런 말은 죽어도 못했지만.
"미안해."
그리고 나의 열렬한 짝사랑은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차이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모태솔로로 살아온 내게 처음으로 차이는 슬픔을 겪게 해준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 하는건가. 눈이 수북하게 쌓여서 집으로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던 그 날에 나는 쓰디쓴 소주의 맛을 알게 되었고 그보다 더 쓴, 나 혼자만의 이별을 감당해야 했다. 그 결과 나는 남들은 다 놀고 먹고 쉬는 황금 같은 휴일에도 죽어라 알바를 했다. 알바를 하고 되도 않는 운전면허를 땄고 말로 다 하기도 힘든 자격증까지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겉돌았던 나의 성격 때문에 친구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할 일이 잔뜩이었다. 나의 스무살의 인생은 비참하게 시작이 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신은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을 주신다고. 내 삶은 그렇게 빛나지도 찬란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아싸로서의 살아가는 이 삶이 나름 또 견디고 보면 괜찮아서 더도말고 이만큼만 같아라, 하고 바랬다. 그런데.
"ㅇㅇㅇ?"
신은 나를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비참하게 나를 차버린, 6년간의 나의 친구이자 내 짝사랑의 주인공이었던 강다니엘이 내 앞에 서있을 수는 없었다.
[강다니엘/옹성우]
LOVE CIRCLE
W.LIGHTER
"다음 시간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영문학 구절 하나씩을 써서 독후감으로 제출하세요."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수님은 입이 마르도록 열심히 진행한 강의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듯 듣고 있었더니 이미 수업은 끝나있었다. 당장 있을 기말고사부터 내 학점이 매우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도 앞서 내 인생이 중요했다. 왜 그는 내 앞에 나타났고 하필이면 도대체 왜,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것인가. 사실 그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어서 죽어라고 공부를 했던 사람은 나였다. 그다지 좋지도 않은 머리를 부여잡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를 한 결과가 이 학교였다. 단지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나 살기도 바빠서, 이후에는 그에게 차인 것이 서럽고 더럽게 수치스러워서 그가 어느 학교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에 다니는 줄 알았으면 나는 수능을 다시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피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재수 할까, 아니면 편입을 준비해야 하나. 이 순간만큼은 남자가 되어 군입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ㅇㅇ야, 아까 왜 인사도 안하고 갔어?"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며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을까 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김없이 보이는 얼굴은 강다니엘이었다. 얘랑 강의도 같이 듣는 거였다니. 진짜 재수라도 해야 하나봐.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더 잘생겨지고 더 멋있어졌을 뿐이다. 학교에서도 딱히 아는척을 할 만한 사람은 없어서 후드를 뒤집어 쓰고 다니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 남자다워진 강다니엘을 보니 그 놈 주위에는 이미 여자들이 들끓고 있었다. 여고를 다녀 남자라고는 쥐뿔도 몰랐던 나는 남자와 손 한 번 잡는 것도, 아니 서로 마주보는 것도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이 놈은 연하, 연상, 동갑, 두루 알고 다닐만큼 여자들이 차고 넘쳤고 또 사귀기도 많이 사겨댔다. 웬만한 여자라면 가는 여자 막지 않고, 오는 여자 안 막는다면서 나는 도대체 왜 까인 것일까 하고 고민도 해보았지만 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나는 지금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처럼 갓 스물의 청춘을 빛내고 꾸미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사랑스러운 몸짓이나 익살스러운 말투도 없었다. 그래, 나는 이 놈이 생각하는 웬만한 여자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안녕."
"내가 이공계열이어서 못 알아봤나봐. 이렇게 같은 학교인 줄 알았으면 같이 밥도 먹고 그랬을 텐데."
너랑 나는 이제 친구도 뭣도 아닌데 무슨 밥을 같이 먹니. 너랑 먹으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구만. 차라리 그 때 그를 향해 맘껏 욕이라도 날렸으면 후련하지는 않았을까. 6년의 시간동안 그의 누나보다, 그의 친구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던 나였지만 그에게 마음을 전하고 난 이후로 번호도 바꾸었고 그와 연락을 해본 적은 기필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 사이라는 것이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이 우정이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 산산조각 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으니. 하지만 나는 나를 째려보다시피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과 생글생글 웃어대는 강다니엘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았고 안녕이라는 인사조차도 절어버리는 사람이었다.
"너 인문학 동아리라며? 나도 그 동아리 들었는데."
"아, 그...그래?"
"오늘 7시에 동아리 회식 있다고 하니까 꼭 나와."
알았지? 제 할 말만 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 놈의 넓은 등짝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여적 주변에서 나를 흘깃거리고 있는 여자들은 알까. 그들이 전혀 경계할 필요가 없을만큼 저 놈은 나를 여자로 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오늘 강의가 더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할 줄이야. 밤새 레포트를 쓰고, 시험 공부를 하고, 알바까지 해도 끄덕없던 내 체력이 현저히 바닥을 치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집에 가면 바로 잠이나 자야지. 강다니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다 사라지고서야 나는 뒤늦게 강의실을 나올 수가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핸드폰을 울려대는 톡들은 아까 그 놈이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오늘 회식 장소부터 잊지 말고 나오라는 당부까지 단톡방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오늘 회식 빠지면 진짜 너흰 사람도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잘나가는 윤지성씨,라고 톡의 이름마저도 심상치 않은 사람이 보낸 톡은 왠지 모르게 웃겨서 그깟 사람 안하고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학번이 있고 선후배의 관계가 남아있는 이 대한민국의 시대에 대놓고 나설 정도로 나는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네'라고 대답하면서도 혹여라도 그 놈이 볼까 속으로 전전긍긍 하고 있는 나는 한낱 소심한 소시민 나부랭이였단다.
* * *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죽기 보다도 싫었던 동아리의 회식에서도 내가 맨 처음 다짐했던 것은 절대 강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리라, 하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들어왔다면서 언제 저렇게 사람들이랑 친해졌는지 이미 내 학번의 동기들과 여자 선배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그 놈이 존재했다. 그래서 내가 눈 딱 감고 피신처라고 온 곳은 복학한 화석들과 군대를 이제 막 제대한 남자 선배들이 우글거리는 테이블이었다. 저들끼리 군대 얘기로 열을 올리고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와중에도 자꾸만 따라주는 술잔들을 무던히 비우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질 듯했다. 지금 먹은 안주거리부터 낮에 먹은 것들까지도 되새김질 하려는 모양인지 계속 차오르는 헛구역질에 가까스로 밖으로 나오자 장마가 시작되는지 눅눅한 바람은 시원하지도 않았다. 아, 집에 가고 싶어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술집 문밖에 주저 앉자 순간 내 옆에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서 뭐해?"
탁,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낯선 남자의 손짓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어김없이 내 콧 속으로 들어왔다. 스무살의 인생 동안 이리도 직접적인 간접흡연은 처음인지라 본의 아니게 자동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술 깨려고 잠깐 나온거예요, 다시 들어갈 예정입니다만.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찬찬히 바라본 남자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친숙했다. 어디지, 어디서 보았더라. 때에 맞지도 않게 생각에 잠겨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담뱃재를 짓이기며 실없게 웃어대는 모습은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생겼다. 내 인생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강다니엘, 그 놈이 다 인줄 알았는데 세상은 넓고 잘생긴 남자는 많았다.
"아, 그 옹...옹성...뭐였는데."
"옹성우."
"맞다! 선배 되게 유명하잖아요. 우리 과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내가 신입생으로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복학한 그는 학교에서 꽤나 유명했다. 이미 군대를 다녀왔다고 했는데 그의 얼굴에는 전혀 고생한 흔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만난 사촌오빠라는 놈도 군대에 다녀오더니 반 죽음 당한 피라미마냥 힘이 없었거늘 그는 내가 보았던 몇 안되는 남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만큼 어려보였다. 못해도 나보다 두세살은 훨씬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다가 슬쩍 보면 내 동기라도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눈 두개, 코 하나, 귀 두개, 입 하나 갖고 있을 건 그와 똑같이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씩 떼고봐도 제 주장 하나는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는 신이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드실 때도 그마저도 차별을 두어서 만들었다는 생각을 갖게끔 했다. 진짜, 저 남자한테 줄 걸 나한테 하나라도 기부해줬어봐 내가 그 놈한테 이렇게 차이지는 않았을 걸.
"너는."
"네?"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와 같이 쭈그려 앉아있던 그가 엉덩이를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자기 잘생긴 건 다 알면서 이 못난 후배한테 그걸 인정 받아야 속이 후련하냐. 괜시리 울적해지는 기분이 들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자 옹성우, 라는 이 선배는 아주 질척하고 집요하게도 나에게 계속해서 물어왔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손 끝으로 나를 툭툭 치며 말을 꺼내는 꼴이 정말이지 아니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굳이 내 옆에 앉아서 담배나 뻐끔뻐끔 피워대더니 고작 묻는 소리가 지 잘생겼냐고 묻는 거라니, 저기 깔리고 깔린 여자들한테나 물어보면 될 것을 진짜 이건 뭐 애도 아니고.
"어? 야, 나 어때."
"아오, 그래 잘생겼다, 잘생겼다고!!!!!!!"
내 오빠였으면 한 대 쥐어박고도 남았을만한 짓을 하는 선배에게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한 번 쪽을 팔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라는 생각에 했던 말이었다. 근데 뭣 때문에 이 선배는 저리도 기뻐하는 것인가. 알고보면 신종 변태 미친 또라이인가. 내가 옹씨의 성을 가진 이 선배를 처음 봤을 때 드는 생각은 이것이 다였다. 내 인생에 끊이지 않는 시련들 중에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가 대뜸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어, 라고 하는 칭찬은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을만큼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바보같이 가만히 받고 있는 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ㅇㅇ야, 왜 안 들어오고 거기서 있어."
오늘 처음 본 선배와 말도 안되는 상황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썩소만을 짖고 있자 갑자기 나타난 강다니엘은 내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어, 아니 들어갈려고 했어. 더듬대며 뱉어내는 내 말투는 참 비굴했다. 그렇게나 싫어하겠다고 생각했던 놈인데 또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듯한 행동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의 학창시절에 항상 내 곁에서 아빠처럼, 오빠처럼 지켜주었던 그 때가 생각나 나를 차버린 그의 팔도 뿌리치지 못한 채 내 몸뚱이는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니, 따라가려고 했었다. 반대편 내 손을 세게 잡아오는 옹성우 선배님만 아니었다면.
"나랑 같이 집에 가기로 했어."
".....예?"
"내가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잖아, 왜 모르는 척 해."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정녕 나와 한 대화가 맞는 건가. 전혀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로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선배의 힘에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도 가눌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졌다. 무슨 내가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뭔 상황이래. 매번 티비에서만 보던 아주 낯간지럽기 그지없는 행동들을 직접 연출해주시는 그들 덕분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안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쓰러질 걸. 다 나간 전구들이 간신히 힘을 내어 빛을 비추는 허름한 이 술집 앞에서 나는 내 미래가, 내 인생이 이토록 고단해 질 줄은 몰랐었다.
"데려다 줘도 제가 데려다주면 됩니다, 선배님."
뭔 이유에서인지 굉장히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운을 떼는 강다니엘의 태도는 잠깐이지만 우리가 친구였던 시간동안에도 잘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웬만한 일이면 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넘어가며 오히려 상대방을 위하는 태도를 보였던 그였는데 내가 모르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변한건지 아니면 선배가 맘에 들지 않는 건지 그건 모르겠다만 그의 말에 비웃는 것이 분명한 조소로 날리는 이 선배도 정상은 아닐 것만 같았더랬다.
"싫은데요, 후배님아."
Episode 1, FIN
*
이렇게 또 만나게 되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Lighter 입니다!
예전부터 쓰고 싶었던 클리셰가 가득 묻은 트라이앵글(?) 물인데 견주랑은 조금 많이 다른 분위기로 시작을 하고 싶었어요. 견주를 생각해두고 쓸 때는 딱히 밝은 요소라고 할 만한게 없어서 쉽게 읽히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어디에나 있지만 나에게는 없다는게 함정) 견주와 러브서클은 동시연재할 예정이에요. 두 개의 작품을 빠르게 연재하기에는 제가 공모전 준비도 하고 있고 현생도 살아야 하는지라 시간 텀이 좀 길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차마 기대해 달라는 말은 못하겠네요ㅠㅠㅠ 많이 미숙하지만 우리 독자님들 잘 부탁드려요(굽신굽신)
* 암호닉은 견주와 따로 받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