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니엘/옹성우]
LOVE CIRCLE
W. LIGHTER
바쁜 와중에도 날씨는 더럽게도 좋았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기 전, 대학교라면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축제가 시작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졸지에 스모키 화장을 한 것처럼 진하게 내려온 다크서클이 조만간 턱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거진 강제적으로 맡아버린 조장이라는 역할 때문에 과제 준비만으로도 여념이 없었거늘 1학년이라는 죄로 즐기라고 만들어진 축제는 땀으로 얼룩지기 위한 날이 아닐까 싶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주문에 하루종일 서빙과 음식을 만드는 것만 하다보니 이대로 쓰러져서 내일까지 연장으로 잠만 자고 싶었다. 24시간 중에서 자는 시간은 5시간도 족히 되지 않아서 피곤함은 점점 몰려왔고 무엇보다도 학과 애들과 맞춰입었던 하얀 셔츠가 애들이 장난식으로 쏘는 물총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훤히 속옷의 형태가 비추는 것이 괜히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ㅇㅇ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
간신히 지성 선배 덕분에 겨우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 강의실로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을까 했지만 막상 책상에 들어눕자 자꾸만 쏟아지는 잠은 내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마냥 감겨대고 있었다. 이렇게 자다가 학교 문도 잠겨서 집에도 못가는 건 아닌가, 찬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간댔는데. 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떠돌아 다니고 있었지만 녹초가 되다시피 누워버린 내 몸뚱이는 그나마 얻은 자유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미 일어날 미동조차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쉬기 위해 있는 집에 가도 밀려있는 과제와 시험준비로 여념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싶었다.
"뭐야, 왜 여기있어."
"......."
"잘거면 집에 가서 자라."
간만에 아주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옆 책상에서 덜컹, 하고 나는 소리와 나를 귀찮게 불러대는 목소리는 흡사 내가 아는 누군가를 연상시키게끔 했다. 애초에 아는 사람도 없는 학교에서 ㅇㅇㅇ, 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강다니엘과 옹성우가 전부였고 대뜸 자고 있는 내 볼을 쥐어뜯을 기새로 잡아오는 사람은 아마 옹성우 외에 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온종일 불 앞에서 일을 한 결과인 초췌한 몰골을 보이게 되는 사람이 옹성우라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살짝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나오는 앓는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제 팔을 베고 누운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한 손으로 내 두 볼을 눌러오며 말하는 선배에게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꺼낼 힘도 없었다. 어차피 장난 칠 요량이 분명한데 이러다가 놓아주겠지 싶어 점점 흐릿해진 눈은 이미 반쯤 감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쓰러지면 깨워줄 사람이라도 있는게 어딘가 싶은 때 아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답은 생각해봤어?"
"뭘요."
"내 고백에 대한 대답."
아, 그래 그 고백. 진짜 당황스러웠는데. 실없는 웃음만 실실 거리고 있었을까 순간 다시금 떠오르는 '고백'이라는 두 글자에 몰려오던 잠까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바보도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저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사람과 단 둘이서 이런 밀폐된 공간에 있을까. 잠이 아무리 고파도 그렇지 와, 진짜 내가 미쳤구나. 한동안 조별과제에서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피해다니고 있었던 사람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주할 줄이야. 물론 내가 마련해두었던 대답은 '노'였다. 예쓰와 노에서 고르자면 정말 딱 확연하게 갈려진 '아니다'의 대답. 어떻게 사과를 해야하고 차였던 아픔이 있던 나로서는 무슨 말로 선배를 위로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고민을 하고 있었었다. 비록 고백도 아닌 나를 갖고 노는 것이 확실한 선배의 말놀음에 놀아난 것 같아 석연치 않았어도 거절의 말을 들을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대답을 하기 위해서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간신히 떴을까 내 말을 가로치듯 선배는 제 말을 이어나갔다.
"나, 너 좋아해."
"아....예?"
"너 좋아하는 거 진심이야, ㅇㅇ야."
진심이라니. 그런 말은 솔직히 너무하는 거 아니냐. 분명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했었는데, 장난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건 뭐 거의 새치기도 아니고 내 대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진심'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던 선배는 가히 너무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먼저 마음을 전하는 쪽, 거절 당하는 것이 익숙한 쪽이였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뒤돌아보고 싶을 정도로 예쁘지도 않았고 남을 즐겁게 해주거나 대단히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삶을 바래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내가 상상한 나의 미래는 혼자 살아가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랬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축제 기간동안 나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는지, 아니면 신나게 놀았는지 땀으로 제 몸에 달라붙어 있는 티셔츠를 펄럭이며 나를 바라보는 선배는 어김없이 또,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다시 또, 그렇게.
"괘, 괜히 사람 착각하게 장난 하지 말아주실래요."
"뭐가 장난이야."
"......."
"거절할거면 거절하고 받아주면 나야 더 좋지, 근데."
나도 장난은 그닥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긴 책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쯤 걸쳐지듯 나온 선배의 다리를 보자니 아무래도 선배에게 있어 책상은 턱없이 작은 모양이었다. 천장을 바라본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아오던 선배는 여전히 나에게 있어 저 책상처럼 과분한 사람이었고 여적 나오는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은 조용한 공간 속에서 달아나버린 잠을 다시금 부르고 있었다. 너가 강다니엘인가 뭔가 하는 그 놈이 그렇게나 죽자살자 좋으면 좋아해도 돼. 뭘 그렇게까지 고민을 해. 그 와중에도 잘만 오는 잠에 반 기절 상태를 하고 있던 내 귀로 성우 선배의 낮은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아무리 내가 제대로 된 답도 꺼내지 못한 호구였지만 듣고 있다는 의사표시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몸을 모로 누우며 시선을 마주하자 별안간 내 몸 위로 덮어오는 선배의 남방이 눈에 띄었다.
"내가 그냥 너 좋다고 하는건데."
평생을 익숙하게 여겨왔던 내 신세도, 다니엘의 섬유유연제 냄새도,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을 차지하고 마는 내 존재도 조금 변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내가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공과 사는 똑바로 해야 되는 것이 맞는 이치였으며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존재인 선배였어도 처량하게 또다른 나로 만들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사람이 자꾸 남한테 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거덜나기 마련이야. 그게 친구간의 우정이든,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간의 사랑이든 간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제 말을 이어가는 선배의 말에 나는 쉽게 동조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선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내 성격이 우습게도 어느덧 나는 조금 벅차오르는 마음과 함께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저 또다시 귀 끝으로 모여드는 열기가 익숙하지 않아 두 손으로 귓가를 가리기에 급급했지만.
* * *
축제는 저녁이 되었어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밤은 길면 길수록 좋았고 한참이나 젊은 혈기로 가득한 대학은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다니엘, 저 역시도 이런 분위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지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즐거웠다.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신망을 얻는 것을 즐겨했다. 그만큼 사소한 생활도 항상 신경써야 한다는 부분이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뭐든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으니 그 또한 제가 겪어가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 주점 홍보하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제 술잔으로 가득히 술이 따라졌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인간의 본성인 건지, 선배들은 저보다 한 단계 아래인 후배들을 제 곁에 두면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부풀려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부모님의 돈으로 어떻게든 학벌이라도 따보고자 온 것들이 부지기수인 그들을 자신은 한 번도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넘칠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채워져 있는 술잔을 단번에 비우자 혀 끝으로 느껴지는 쓴 맛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남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자신은 술을 싫어했다. 술 뿐일까, 사회에 나가면 다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이 그 놈의 학번으로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선배들도 싫었다. 남이 하는 연애사를 듣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만났다 하면 서로 뒷얘기가 오가느라 바쁜 사람들을 상종하는 것도 지쳤다. 단지, 제가 스스로 정해놓은 '원만한 관계', '원만한 학교생활', '원만한 사회생활'과 같이 원만하다는 것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참을 뿐이다.
"야, 근데 너희 그거 알고 있냐. 영문학과에 ㅇㅇㅇ 인가, 걔가 다니엘 좋아한다며."
저렇게 쉽게 남의 가십거리를 씹고 다니는 맛으로 사는 인간들한테 한낱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익히 제가 알고 있던 ㅇㅇ가 맞았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자칭타칭 아싸인데다, 학점에 목을 멘다는 흔히들 비꼬는 것이 분명한 소리는 그녀가 확실했다. 어쩌다가 그런 애한테 걸려갖고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제 어깨를 두드리며 안쓰럽게 보는 시선들과 그녀를 비웃는 웃음들이 난자했다. 다니엘은 제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관심이라고 답할만큼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물며 저와 사귀는 사이였던 여자친구들을 얕보는 어투에도 조용히 있었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지껄이는 말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자신과 결혼한 사이도 아닌 그녀들을 굳이 대변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단순히 스스로에게 올 피해만을 생각해 적당한 선을 지키게끔 언질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뜻하지 않는 변수가 하나씩 있었고 저에게는 ㅇㅇㅇ, 그녀가 그 변수였더랬다.
"걔 얼굴은 좀 괜찮은데 성격이 음침해서"
"또 모르지. 벗겨놓으면 여자는 달라진대잖아."
찰나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쓸데없는 말을 내뱉은 선배의 머리는 술로 진득하니 젖어있었고 순식간에 제 멱살을 잡으며 신랄하게 욕을 지껄이던 선배들과 그런 그를 말리는 사람들로 한동안 즐거웠던 축제는 난장판이 되었다. 예상대로 제 얼굴로 내리꽂는 그의 주먹을 맞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참아보려고 해도 안되는 일들은 존재했었고 어느새 제 밑에 깔려 있는 선배를 보면서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릴 수도 있겠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서서히 떨어지는 제 몸뚱아리는 다리조차 힘이 들어가질 않아 휘청거려댔다. 스무해를 살아오면서 자신은 한 번도 남을 때려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의 감정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이성이였으니까. 제대로 형성도 되지 않았던 가정 속에서 자란 자신은 조금 이르게 사회 생활을 접함과 동시에 그걸 통해서 배운 점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사람들과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제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 다짐했었거늘 욱하는 감정으로 사람을 대했던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뜬금없게도 질책하는 말들과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오는 사람들 속에서 강다니엘, 자신은.
"걔가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네가 보고싶었다. 너로 인해서 같잖게도 엄하게 채워놓은 제 계획이 틀어졌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이 얻고 싶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은 ㅇㅇㅇ, 너였다.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완벽한 척을 하면서 살아왔던 저도 쉬이 넘어지고마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아오기 위해서 안달했던 나와 다르게 제 길만을 걸어가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나는 너를 부러워 했었고,
"제가 ㅇㅇㅇ 좋아하는 거라고요."
그보다 더, 너를 좋아했었다.
Episode 4, FIN
*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다.
한 주를 또 잘 보내고 오셨는지 모르겠어요. 어느덧 우리 애들이 데뷔한지 일주일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시간도 빠르고 나는 나이만 먹고 우울우우루우울하다...
이제 입추도 지나서 완연한 가을이 오려는지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여기에 나오는 니엘이나 성우가 연습생 신분에서 어엿한 아이도루가 되다니ㅠㅠㅠㅠ 괜스레 뿌듯해지네욯ㅎㅎ(코쓱)
언제나처럼 많이 부족한 글을 좋아해주시구 재밌게 봐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p.s 성우 선배와 함께하는 조별과제와 니엘이와 함께하는 축제는 더.럽.입니다.
독자님들 진짜 대박 헐 리얼 많이 사랑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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