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니엘/옹성우]
LOVE CIRCLE
W. LIGHTER
저녁을 넘어서 밤이 되어도 더위는 가시질 않은 듯했다.
제일 싫어하는 계절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여름이었다. 그렇다 해서 겨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벌거벚고 다녀도 끈적끈적한 습기와 더위가 사라질거란 보장도 할 수가 없고 모기와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는, 달갑지 않은 때가 여름이었다. 간신히 불어오는 바람에 한 손으로 머리를 잡아 올리자 그제야 조금 살 것만 같았다. 단번에 과제를 다 끝내고 집에 가겠다는 포부로 몇 시간을 끙끙대며 한 결과 테이블 위에는 아메리카노 네잔과 초코라떼와 카라멜 마끼야토가 번갈아가며 조금씩 남겨져 있는 다섯잔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우선 큰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된 것만 같아 들뜬 기분으로 나는 선배가 그토록 원했던 영화를 보러 갔었다. 지금 나온 영화들도 꽤나 재밌는 것들이 많았는데 유독 선배는 재상영을 하는 로맨스영화를 보자고 했고 통에 가득 들어있던 팝콘이 미처 다 사라지기도 전에 선배는, 그래 선배인 옹성우씨는 혼자서 울고 있었단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옆에서 나는 훌쩍이는 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뻗어 선배의 등을 토닥여주자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던 옹성우는 두어시간 되는 시간동안 내 손이 제 인형인 것마냥 붙들고선 놓아주질 않았다. 물론, 그 눈물도 마르지 않았고.
"진짜 대사 하나, 하나가 주옥이야."
"되게 감명 깊으셨나봐요."
딱히 한 거라고는 없었지만 같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왠지 옹성우를 닮은 것 같은 토끼와 오리 인형 두 마리가 내게 안겨졌을 때의 시간은 금세 열두시를 넘어서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늦은 밤에 혼자 갈 수 없다고 친히 데려다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선배는 문득 다음에 나랑 이 영화 또 보러 오자, 라고 말을 꺼내왔다.
"이 영화를 또 볼 정도로 돈과 시간이 여유가 안됩니다만."
"응, 괜찮아."
"아니, 제가 안 괜찮다니까요?"
순 자기위주로 돌아가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는거지. 예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친구들한테는 들었던 악평만큼 영화는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옹성우처럼 두 번을 와서 볼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였다. 딱히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을만큼 굳이 발걸음과 비싼 영화값을 내면서까지 와서 봐야하나, 라는 좀 투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지라 탐탁지 않은 얼굴로 선배를 바라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신이 좋으면 말릴 수도 없을 것만 같은 그를 무슨 수로 싫다고 거절을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가 다시 이 영화를 보러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선배에게 지금 이 순간에 바로 딱 싫다고 할 필요도 없을 듯싶었다.
"또 재개봉 하게 되면 그 때 생각해 볼게요."
"기다리다가 정 안되면 그냥 우리집에서 같이 보자."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은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옹성우는 제가 말해놓고 스스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괜히 영화 때문에 너랑 또 못 볼까봐 그런거야.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게 아니라. 무덤덤하게 제 말을 이어나가는 선배는 참 이상하게도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듯했다. 왜 자기가 말을 해놓고선 귀는 빨개지는 건지, 괜스레 웃긴 모습에 한동안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만큼 나는 길거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웃어댔다. 다행히 새벽녁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까 영화를 볼 때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인해서 눈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은근 귀여운 구석도 있네요."
"어?"
네? 뭐가요? 앞서가던 선배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통에 뒤따라가던 내 몸은 그대로 선배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웃음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바보같이 얼이 빠져있는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자 아까 전보다 더 심하게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가 보였다. 우리가 지금 뭘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선배는 숨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 재빨리 제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는 그런 그를 또다시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수줍은 소녀같은 행새는 뭐고 아무 잘못도 없는 귀는 도대체 몇 번을 잡아 뜯는 건지.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거리며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으며 간신히 따라잡은 선배의 옆자리에서 왜인지 모르게 말수가 줄었던 선배는 내 집 앞에 도착할 때쯤에 그런 말을 꺼냈다.
"다음 조별과제때도 나랑 같이 하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그 조별과제를 할 때는 꼭 저와 단둘이 하자고. 기약도 없는 만남을 기다리는 듯한 옹성우가 내게 들어가라고 말을 꺼냈을 때, 이층주택으로 되어져 집까지 들어가는 것도 얼마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끝까지 집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혹시나 싶어 창문을 열어 그를 다시금 마주했을 때, 그 때 해맑게도 웃어오는 그 얼굴과 평생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다정함에 나는 그토록 원했던 단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더랬다.
* * *
며칠동안 딱히 오지도 않았던 잠이지만 마지막 조별과제 발표만을 위해 더욱이 열심히 밤을 샜었던 그 날이었다. 잠을 못자서 그런지 온 몸이 쑤셔오는 듯한 느낌에 나름 스트레칭을 해도 제대로 걸려버린 담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곧 있을 발표로 인해 손바닥에 눅눅하게 묻어져 나오는 땀을 몇 번이고 티셔츠에 닦고 있었을까 뒷 자리에서 앉아있던 애들의 수다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원체 남들이 이야기 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여서 항상 무시했던 그 말들이 왜 오늘은 그리도 잘 들리는 건지. 한동안 과제와 시험준비로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서 그런거라면 오늘까지만이라도 내 귀는 제 할일을 잘 해야했다. 완벽하게 차단을 할거면 차단을 하던가, 하필 중요한 오늘에서 그런 소리들에 신경을 쓰고 있냐고. 끊임없이 자책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소문이 나고 말 것들이라 치부하는 내 자신도 우스웠다.
"그러니까 우리과 ㅇㅇㅇ인가 걔가 건축학과 강다니엘을 좋아한다 이거야?"
"야, 그게 아니라 그 남자애가 우리과 여자애를 좋아한다고 그랬대. 그것도 선배들 다 있는 학과 주점에서."
애써 무시하려고 발표용 자료들이 가득 묶어놓은 에이포용지만 넘기고 있던 내 손이 멈추었던 것도 그 말 때문이었다. 잘못들은 거겠지, 하고 넘어가려고 하면 여러번 되새김 시켜주듯이 강다니엘이, ㅇㅇㅇ를 좋아한다고. 라는 이 구절이 들려왔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걔가 나를 왜 좋아해. 그렇게나 좋아해서 혼자 사랑앓이를 하고 고백을 했던건 나였고 그걸 차놓고선 전혀 꺼리낄 게 없다는 듯이 왔던건 강다니엘이었다. '친구'라는 선에서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감정으로 나를 대했던 사람이 강다니엘인데 괜한 코웃음이 나올정도로 어이없던 소문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 놈을 좋아한다는 꽤나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말들보다 그 어이없는 소문들에 더 크게 요동을 쳤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막상 또 사실이면 어떡하나, 하는 내 딴에는 과분하기만한 고민 사이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발표는 끝나있었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었고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우리 조의 점수 분배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이 가질새도 없이 멍한 기분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너 오늘 왜그래?"
"아, 잠을 못자서 그런가봐요."
어느덧 학생들과 교수님조차 다 나가신 강의실에는 넋을 놓고 있던 내가 있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런 나를 걱정하듯 옆을 지켜주는 옹성우도 함께였고. 선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한 번도 예상해보았던 문제도 아니거니와 단순히 묻어갈 수 있었던 내 짝사랑은 널리 공연하게도 알려져버렸다. 다른 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선배에게 말을 꺼내면 답을 알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학교는 나랑 정말 안 맞는게 아닐까. 운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일인가, 이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꺼내는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하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밥이나 먹어야지, 라고 혼잣말을 꺼내자 타이밍 한 번 참 웃기게도 급하게 뛰어왔는지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다니엘이 내 앞에 있었다.
"아, 지금 수업 끝났어?"
"어? 아, 응."
나를 보러 온건지, 아니면 들려오는 이 소문들에 대해 할 말이 있는건지는 모르지만 공과대학에서 인문대학까지 거리도 있는 이 교정을 저렇게나 땀을 흘리며 온 다니엘도, 막상 다 알면서도 말 하나 꺼내지 못하는 나도, 누구 하나 이 영양가도 없는 무의미한 대화만이 오가는 공간에서 제 뜻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지 적막한 공기만이 몇 분째 계속되었던 찰나에 옹성우는 술이나 먹으러 가자, 라고 해왔다. 다행히 해는 조금씩 지고 있어서 낮술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퍽이나 안심이 되었지만서도 내 손을 잡아 이끌던 선배는 어느새 문 앞까지 다다랐고 그 앞에는 본의 아니게 선배와 손을 마주하고 있는 내 손만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다니엘이 있었다. 둘 사이에 또다시 낑겨버린 것만 같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상황은 꽤 오랜시간 이어져나갔다.
"너도 따라올거면 오든가."
그리고 그 때 툭, 하니 내뱉는 선배의 말에 나는 애써 무마하기 위해서 별 핑계를 다 갖다대기 시작했다. 아니 얘가 아직 강의가 남아있을 수도 있고, 나름 바쁜 애라서 나중에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난리래. 분명 나 딴에는 20년의 인생동안 처음으로 겪는 소문과 심각한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열심히 둘 사이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갖은 힘을 다 쓰고 있었다. 비록 안타깝게도 그런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지만.
"제가 자주 가는 곳으로 가도 되죠?"
아, 진짜 울고 싶다.
Episode 5, FIN
*
기다림에 목빠지셨던 독자님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라이터입니다(울컥)(하트)
텀이 길어져서 많이 기다리셨을 독자님들 매번 언제나 제가 사랑한다는 거 알지요????
개강시즌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 전까지 여러분들에게 후다다다닥하고 딱 보여드려야 하는데 견주나 러브서클이나 한 화를 적으면 다음화 비축분도 쌓고 스토리 구성도 계속 수정들어가고 하니까 현생과 번갈아가면서 나름 빨리 한다고 하는데 속 시원하게 되지를 않네요...정말 매우 많이 미안해요
오늘따라 비도 유난히 많이 내려서 독자님들 사시는 곳은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제가 있는 인천은 아주 그냥 비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가 안왔다가 지 멋대로입니다
이미 개학을 하신 분도 계시고 곧 앞두고 있는 분들도 있을텐데 월요일 모두모두 화이팅....해요....아자아자....!
* 암호닉 신청은 최신화에 해주시떼 *
암 투더 호 투더 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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