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2장; 늦어버린 사과
정한 오빠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지훈이 떠다녔다. 자신이 아닌, 남의 과거를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좋은 과거도 아니고. 정한 오빠는 뒤로 젖힌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순영이 어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어. 지훈이 말로는 쇼크사였대."
"..."
"근데 궁극적으로 쇼크의 원인을 찾자면, 지훈이 쪽이 맞아. 지훈이도 그 사건 담당이었거든."
"사건 담당이요? 지훈이 경찰이었어요?"
"응. 말단이라 지훈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닐 테지만."
.
.
.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반장님."
"사건 종결한다고, 인마. 잘 된 거지. 진범도 따로 찾을 일 이제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이거 나불대면 옷만 벗는 줄 알아? 네 목도 날아가, 이 새끼야!"
그니까 잠자코 있어. 누가 들었을새라 크흠, 헛기침을 하며 두리번거리던 반장님은 지훈의 어깨를 짓누르듯 토닥였다. 쫙 빼입은 정복. 분명 이번 일을 덮는 대신, 승진을 얻었을 것이다. 지훈이 손톱에 눌려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제 힘에 못 이겨 파들거리는 것을 그대로 책상에 내리꽂았다.
며칠 전 하숙생을 받는 일반 주택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가만히 둬도 모자랄 현장을 아무것도 모르고 아주머니가 청소한 것이, 성가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던 선배들 눈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겠지. 결국 목격자에서 순식간에 용의자로 신분이 바뀐 아주머니는 의심도 모자라 이젠 아예 자신을 범인이라며 가둬두니 얼마나 충격이 컸으랴.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도록 꼭, 부끄럽지 않은 경찰이 되기로 했는데 자신이 속한 집단은 오히려 범인을 조작하고 사건을 은페했다. 오직 이 직업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시작부터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형이 꼭 범인 잡아줄게.'
'형아 진짜 멋있다! 우리 엄마 오면 형아가 범인 잡아준댔다고 꼭 얘기할래요!'
약속했는데. 나는 몰려오는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했다. 그들을 경멸하면서 정작 나도 나에게 해가 될까 입 다물고 있었던 게 너무 역겨웠다. 우리 엄마가 범인이라고 몰린 것도 모른 채 그저 다시는 못 본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던 8살 꼬마를 위로해준 것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 어린 것에게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저기.. 걷다 보니 여기로 왔는데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요?"
"너.. 너는"
"절 아세요? 이상하게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요. 제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혹시.. 이름이"
"순영이요. 권순영."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꼬마가, 제 또래가 되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버렸다. 아,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염치없게도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길 바랐는데, 그 어린 꼬마도 자신과 같은 결말을 맺었다.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결국 나는 또 입을 열지 못했다. 혹시나, 혹시나 다 알아차렸다면. 여기서라도 아무 기억 없이 살기를 바랐다.
.
.
.
결국 둘은 도망친 거구나. 자신에게 닥칠 일이, 닥친 일이 너무 무서워서 그대로 도망친 거야.
서로에게 아픈 과거로 남은 두 사람은 다시 이곳에서 재회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순영이. 이것도 운명이라면, 이승에서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여기에서나마 다 털어내라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정한 오빠는 옆에 두었던 의료 상자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라기보다는 꺼냈다 집어넣다를 반복했다.
"지훈이, 너무 나쁘게는 보지 마."
"..."
"말로는 못 느껴도 지훈이가 당시 느꼈던 압박은 어마어마했을 거야."
"알아요. 지훈이 나쁜 애 아닌 거."
"응."
"단지"
"겁이 많았던 것뿐이죠."
겁. 그래, 겁이 많았지. 정한 오빠는 덜그럭거리던 행동을 멈추고 의료용 칼을 집어 천천히 돌리며 살폈다. 맞아, 겁이 너무 많았지. 중얼거리던 정한 오빠는 이내 웃음소리를 살짝 흘려보낸다. 어딘가 슬픔이 섞인.
"나도, 결국 찾은 출구가 여기였으니까."
"그래도, 다른 애들처럼 오빠도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네."
"오빠는 어떻게.."
"난 어떻게 왔냐고?"
정한 오빠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딸그락- 소리를 내며 나오는 플라스틱에 둘러싸인 증이 눈앞에 달랑거린다. 정갈하게 쓰여 있는 이름이 화려하게 빛나 보였다.
"나 의사였어. 그것도 최연소 타이틀 단."
아, 그래서
'정한이 형이 칼은 나보다 더 잘 다뤄요.'
원우가 한 말이 이해가 갔다. 전에 다친 발을 치료해줬을 때 이게 내 할 일이라는 말도. 괜히 여기서 맡은 게 아니었어. 정한 오빠는 돌리던 칼을 다시 집어넣고 의료 상자를 꾹 닫았다. 괜찮아요, 오빠 말 안 해줘도 돼요. 어깨를 살며시 잡자 내 쪽으로 돌려 보여준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에 살짝 물이 맺힌 것이,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얘기는 여기까지. 어색해진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역시,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애들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 정한 오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목소리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곧 멀리서 걸어오는 형상이 보인다. 오빠는 다시 의료 상자를 꼬옥 껴안았다.
"원우 오면 소독 좀 다시 해줘야겠다."
"아, 그거 제가 할게요. 저 때문에 다친 거니까.."
"할 수 있어?"
"네. 제 동생도 싸돌아다니다 다치고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소독약을 챙겨준 정한 오빠는 한 손에 의료 상자를 놓지 않은 채 벌떡 일어나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며 파이팅! 을 외친 정한 오빠는 꽤 가깝게 온 승철 씨에게로 갔다.
정한 오빠가 살아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고 왜 이곳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꽤 확신해도 될 만큼 드는 추측 한 가지.
오빠는 여전히, 오빠가 했던 일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
지훈은 꽤 오랫동안 하늘과 눈을 마주했다. 물감 번지듯 붉은빛을 가득 메웠지만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예쁜 하늘은, 제 마음과도 너무 정반대였다. 이따금 확 따가운 고통이 다리를 쿡쿡 찌른다.
"..."
문득 생각이 나 뒤를 돌아보니, 불앞엔 권순영 혼자 누워있을 뿐 나머지는 전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들끼리 무언갈 하고 있었다. 나 참, 저렇게 혼자 내버려 두면 어쩌자는 거야. 천천히 일어나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쑤셨다. 아직도 자나. 혹시 죽은 거 아닌가. 순영의 콧구멍에 손을 조심스레 갖다 댄 지훈은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죽을 리가 없지. 순영에게 덮어준 얇은 담요를 다시 정리하자, 감겨있던 눈이 찡긋 움직였다.
"..."
".. 일어났냐."
"..."
마주친 눈을 먼저 피한 건 지훈이었다. 순영은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한, 3시간 정도. 아예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지훈은 순영이를 보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었다. 둘 다 이미 알고 있다. 기억이 돌아와, 지금은 서로 껄끄럽다는 것을. 순영이 담요를 곱게 개 옆에 두고 지훈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의 눈에 지훈의 다리가 슬쩍 보였다. 전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날뛴 내가 저렇게 만들었겠지.
"이지훈, 너 나한테 할 말 많을 것 같은데."
"..."
"범인. 꼭 잡아주겠다고 했었잖아."
".. 미안하다."
"..."
"미안해. 그땐 너무 무서웠어.."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그래서 말 못했어. 진짜 쓰레기 새끼 맞아, 나.
지훈의 눈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울컥, 하고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 늦은 사과. 지훈은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망설였는지. 내가 좀만 더 일찍 얘기를 했더라면 아니, 애초에 바로잡았다면 됐을 텐데.
"나, 알고 있었어. 네가 일부러 우리 엄마 몰아간 게 아니라는 건."
"..!"
"나중에 너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나한테 찾아와서 얘기하더라. 지가 죽을 때가 돼서야 사과를 하러 왔더라고."
"..."
"너, 나 다 죽은 마당에 이제와서 나한테 사과한 들 무슨 소용이냐."
"..."
"근데, 난 너 용서 안 해. 죽은 우리 엄마 생각해서라도 네 용서 절대 안 받아."
순영은 제 눈을 벅벅 문질렀다. 지금 제 옆에서 찌질하게 울고 있는 사람과 같이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도 찢을 수 있다면 찢고 싶을 만큼 이상했다.
바로잡아주지 않은 지훈이 너무 밉지만, 한구석에서 자꾸 그를 이해했다.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답답했을 거야. 어쩌면, 이곳에서 새롭게 사귄, 의지할 사람이 이 사람들밖에 없는데 여기서까지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그를 이해하는 걸 것이다.
"평생 여기서 그 죄책감 가지고 살아."
".. 흐으,"
"우리 엄마 그렇게 만든 거, 나랑 한 약속 못 지킨 거."
"..."
"영원히 우리 엄마랑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살아."
그리고 그만 울어라. 너 지금 진짜 찌질해 보이니까. 어째서인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꾸깃한 휴지 조각을 지훈의 앞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결국 한 방울 흘려보낸 순영은 지훈이 볼 새라 얼른 손으로 닦은 뒤 일어나 어디론가 걸었다. 순영이 점점 제 눈에서 사라지자, 지훈은 필사적으로 참은 울음소리를 내보낸다.
때늦은 사과에 용서 따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순영이 자신에게 마음 쓰고 있다는 게 보여서. 비밀을 꾸역꾸역 감췄던 무능력하게 살아있던 때보다, 이제야 터놓고 얘기한 자신이 더 꼴 보기 싫어서.
지훈의 눈물이 더 깊어져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활활 타오르던 불씨는 점점 꺼져 크기가 하찮아진다.
지훈은 그 불이 아예 꺼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여러분! 스타티스예요.
저 그러고보니 항상 새벽에 오네요 신알신 하신 분께 너무 늦은 시간에 알림 가게 하고 말입니다.. 죄송해요 ;ㅅ;
-
우래들 행복하자 아프지 망고..☆
-
♡ 암호닉 ♡
대시, 자몽몽몽, 제로나인, 늘보냥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