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님….
……미안합니다.
가지 말아요.
미안해요.
가지 마셔요. 서방님-.
“아-. 머리 아파….”
지끈대는 머리와 쉬어버린 목소리를 내며 윤기는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쳐 둔 탓에 햇빛이 들어올 일도 없건만 그는 주름이 깊이 생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또다. 이 빌어먹을 꿈-!
그냥 한번 꾸고 말 꿈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겠건만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꿈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윤기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뭐야, 아침부터 담배?”
“…?”
담뱃불을 붙이려던 차에 들려오는 목소리, 자기와 마찬가지로 쉰 여자의 목소리에 그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뭐지. 그 누구냐는 얼굴은?”
처음 보는 여자가 나신인 채로 저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시선을 옮겨 제 모습을 보니 저도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상황파악이 덜 된 얼굴로 윤기는 담배를 문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누구?”
“씨바- 진짜!”
더듬거리며 만진 터진 입술이 아렸다. 윤기는 터지는 화를 억누르려 깊은 숨을 내셨다.
“원나잇에 얼굴하고 이름까지 알아야 해?”
생각지도 못한 화끈거리는 뺨과 터진 입술을 선물하고 떠나버린 여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간 그가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섰다.
추워-.
쪄 죽을 듯이 더울 때는 언제고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윤기가 최대한 옷을 여미며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직행했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건지 쓰려오는 속을 해결할 겸 주린 배를 채울 겸, 겸사겸사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어서 오세요.”
들려오는 점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윤기가 필요한 상품을 고민 없이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바코드 찍는 소리와 편의점의 노래 소리가 뒤섞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려올 점원의 말을 기다렸다.
“6700원입니다.”
“아- 모자라네.”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동전을 처리하고 싶었는데.
윤기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깝게 모자라는 동전을 보며 카드를 꺼내는 시야로 계산대를 일정하게 두드리는 점원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제가 싫어하는 행동을 남에게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은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카드와 상품을 윤기에게 밀었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점원을 바라봤다.
“어…?”
“…?”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꽤 자주 오는 편의점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손님. 죄송하지만 손가락은 좀 내려주시겠습니까?”
“어, 어!”
어쩐지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인 것 같았다. 무례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윤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여자를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며 또 다시 인상을 썼다. 머릿속에서 여러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그 중 여자의 얼굴은 없었다.
“손님?”
“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냥 사과하고 나가면 될 일인데 그렇게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삐죽 곤두세우며 다가와 윤기는 저를 이상하단 눈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는 여자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기억을 떠올리는데 집중했다. 그 때였다.
“서방님!”
“네?”
기억을 다 찾기도 전에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 꿈을 꾸는 날이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던, 이해할 수 없던 꿈에서 제가 했던 단어가.
“미친!!!”
말릴 새도 없이 나온 단어를 들은 여자의 얼굴엔 조소와 황당함이 가득했다. 윤기는 그 표정을 본 즉시 편의점을 뛰쳐나왔다. 편의점과 최대한 먼 곳으로 달려왔는데도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달린 탓에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숨소리는 욕지거리를 숨길 수 없었다.
“아씨- 이건 또 뭐야.”
거친 숨소리는 헐떡이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젖은 줄도 모르게 젖어있던 눈이 방울을 만들며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작게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아, 뭐야. 진짜 엿같네.”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신체반응에 윤기는 더 멀리 도망치려던 행동을 멈추고 골목길로 들어서 잠시 벽에 몸을 기댔다.
가지 마셔요. 서방님- 어찌 저를 두고….
…….
사랑하는 저를 두고….
…….
당신이 없으면 못 사는 저를 두고 어찌 그렇게….
“가십니까-.”
매번 같은 꿈. 반복되는 꿈을 기억하지 못 할리 없었다. 그저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망상이라 치부하며 기억 저편으로 넘겨뒀을 뿐이었다. 기억하게 되면 인정해버릴 것 같아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서방님이라 부르며 슬퍼하는 여자가 꼭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무시하고 또 무시했었는데 이번엔 무시하기가 힘들어 질 것 같았다.
윤기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끈대는 머리와 쓰린 속을 무시하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마시면 마실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예전에 했던 쪽팔린 행동들이 그랬고 후회됐던 순간들이 그랬다. 그 꿈을 꾸기 전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꿈을 꾸고 난 후에는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꿈의 내용들이 선명해져왔다.
“또 시작이야….”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시면 슬펐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청승맞고 쪽팔리게 눈물이 났다.
“저기요오.”
“아악! 깜짝이야!”
여자가 제 목소리에 깜짝 놀라했다. 윤기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 배시시 웃었다. 저를 보며 경계하는 여자를 보며 그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편의점이 사람 많은 거리 한가운데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안합니다.”
“…저기요. 손님. 여기 술집 아닌데 취하셨으면 집에 가시는 게 좋아요.”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는데 문을 닫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윤기는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소 같았으면 짓지 않았을 바보 같은 웃음을 배시시 지으며 웃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왔어요.”
“네?”
“얼굴도 안 보여준 서방님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네?”
여자가 저를 미친 사람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기분 상태를 못 느끼는 것도 아닌데 이 빌어먹을 입은 왜 혼자 떠드는 지, 왜 그리고 떠드는 입을 내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윤기는 미칠 것 같았다.
“제가 꿈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여자는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여자인 사람에게 서방님이라 불러서 그런지 표정 반쯤엔 약간의 흥미도 생긴 것 같아 보였다. 서방님이 제게 보여주는 관심이 좋아 그는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디를요?”
여자의 물음에 술기운에 풀린 윤기의 눈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여자에게 향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꼭 꿈에서 저를 보고 슬프게 지어주던 웃음과 비슷해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죽음으로, 가지 말라고-.”
“…아-.”
미안해요. 내가 먼저 말 걸었지만 대답하지 말아요. 이러고 있으니까 꿈에서처럼 내가 당신의 부인이 된 것 같잖아. 난 남자고 당신은 여잔데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잖아. 그러지 마요.
하지만 야속하게도 서방님을 향한 눈물은 여자에게로 이미 떨어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