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9장 ; 이별
이별은 한없이 잔인하다. 나에게 그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직감한 땐 이미 늦어버린 후회의 연속이다. 곧 완전히 안녕을 고할 때가 왔다. 함께 있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큰 고통이 이제 내 앞으로 성큼 마중을 나온 것이다.
지훈이를 쓰다듬듯 그가 마지막으로 누워있던 자리를 한 번 손으로 쓸던 승철 씨는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나는 원우를 정한 오빠에게 맡기고 영검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아 괴롭혔다. 다만 그들은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제발 내가 모든 걸 끝낼 때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 달라고 그 검을 보며 빌었다.
다가갈수록 더 크게 날뛰던 '그것'들은 서서히 영검과 함께 땅속에서 희미하게 나던 빛이 커지자 발악했다. 버티지 못하는 것들은 스스로 소멸하기도 했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원우가 어느새 내 옆에 선다.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은 원우의 무기였다. 말 한 마디 없이도 든든하게, 믿게 만들어주는.
"빛 때문에 쟤네들도 오래 버티지 못 할 거야. 다만 너무 날뛰니 조심해야 해."
"2시 방향에 3마리, 11시 방향에 5마리가 끝인 것 같아."
"원우랑 순영이가 2시 방향 맡아줘."
정한 오빠와의 얘기를 마친 승철 씨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얘기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턴 티스 씨의 몫이에요."
"..."
"티스 씨가 희생할 이유는 없어요. 저한테 영검을 넘겨주면 ..."
"아뇨."
"..."
"제가 다 끝낼게요."
"정말 후회 안 하겠어요?"
".. 네."
살랑, 바람이 일었다. 침묵은 그 바람을 타고 주변을 넘실댔다. 안에 꼭꼭 담아뒀던 죄책감들도 동요했다. 그래. 이걸로 끝이야.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침묵을 가르는 칼소리가 울려 퍼진다. 함께 막아서는 승철 씨에게 몇몇은 악담을 퍼부었다.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그러나 승철 씨는 그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도 마음을 굳힌 것이다. 여전히 옆에 있던 원우는 이를 악물고 나를 보호했다. 생채기가 두어 개쯤 더 생긴 뒤에야 그들은 칼들 거둘 수 있었다.
'그것'들이 다 사라지고 황폐화가 된 이 공간에서 간간이 바람에 맞부딪히는 쇳덩어리들과 우리의 거친 숨만 들려왔다. 강하게 하늘을 향해 뻗은 빛 앞으로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긴다.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에 커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한 손을 제 가슴팍에 얹었다.
두려운가?
아니다. 죽음의 두려움보다 돌아갈 그 상황이 더 두렵다. 내가 다시 살아가야 할 인생, 나만 기억하고 있을 이들. 허무하게 아무 재미없이 살아갈 바에 이들이라도 기억해준다면 다 괜찮다.
"여길 찌르면 모든 게 끝나나요?"
".. 네."
승철 씨의 대답이 탐탁지 않다. 이승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함부로 희생하려는 것이 정 본인 맘에 걸리는 모양이다. 어쩌겠는가, 내 결정인걸.
똑바로 서서 숨을 고르자, 뒤에서 누군가 영검을 쥐고 있던 손목을 살며시 잡는다. 하도 뒹굴고 몸싸움을 하느라 닳고 헤져버린, 흙들이 굳어 제 색을 잃어버린 초록색 소매.
원우였다.
"만약 여기서 네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승에 있던 너의 육체가 정리되고 다시 망각의 숲으로 돌아올 거야."
"..."
"내가 찾을게. 너 올 때까지 내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평생 함께 있는 거야. 그럴 수 있어?"
".. 응."
"평생.. 나랑 같이 있을 거야?"
"응. 너랑 있을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 대답을 들은 원우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한없이 슬퍼 보인다.
"고마워. 그 대답이 듣고 싶었어."
안 돼!
순식간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영검을 순식간에 뺏은 원우는 내가 막을 새도 없이 재빠르게 축에 꽂았다. 강한 바람이 한창 불고 우리 옆에 문이 생겨났다.
처음에 내가 들어왔던 바로 그 문이다.
어떻게 이래. 네가 어떻게 이래.
"이제 여긴 없어. 그니까 허튼짓 할 생각은 하지 마."
"..."
"제발.. 우리처럼 포기하지 말아줘."
"..."
"꼭 네 인생 멋지게 살아."
".. 원우야."
원우의 소매를 꾸깃하게 잡았다. 다른 사람들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땅바닥을 괴롭히고 있거나,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알았다. 이미 저들끼리 얘기가 끝난 일이었구나.
가득 고인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내 앞에 선, 내 일을 그르친 당사자도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이기적이라는 거 아는데 티스야."
"..."
"내가 너 많이 좋아해."
".. 전원우."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야. 다시는.. 우리 보지 못할 테니까."
"..."
"미안해."
"원우야, 전원우!"
원우는 곧바로 나를 문 안으로 밀쳤다. 우느라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닫혀버린 문을 열려고 아둥바둥거렸으나 미동이 없다.
잘 지내라고 손도 흔들지 못했다. 그들과 눈을 다 마주치지도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탈출구, 갑자기 들어버린 고백.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 깨닫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런 경우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또 그러지 않길 바랐다.
아아, 나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내가 전원우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다리가 후들거리고, 곧 버티지 못해 주저앉았다. 희미해진 정신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여준 입모양만 선명하다.
'고마웠어. 잘가'
무너져 내리는 눈꺼풀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환상에서 깨어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