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지나 어느덧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달이었다. 어차피 수업도 안 하는 터라 반 분위기는 방학 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신경쓰이는 게 하나가 있었다.
"근데 요새는 최민기 너한테 안 오네."
"결국 너랑 친해지는 걸 포기한 듯."
"......"
바로 최민기였다.
그날 이후로 최민기는 더이상 내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를 귀찮게 하는 일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매번 일어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 어딘가 어색하고 허전하다 느낀 건 오로지 나였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졸업식이었다. 그동안 최민기와는 정말 단 한 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다. 않았던 건지 못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교류가 없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사진 찍자. 이리 와!"
그리고 나는 그날 부모님께서 주신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사진 수십 장을 찍혔다. 한참을 그렇게 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잠시 쭈그려 앉아서는 돌아다니느라 여기저기 치여 구겨진 꽃다발 포장지를 만자작대고 있을 때였다.
"......?"
갑자기 내 시야에 들어온 두 다리에 고개를 들자,
"......"
보이는 얼굴은 다름아닌 최민기였다.
양손에 꽃다발을 하나씩 든 채로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최민기는,
"무슨 일,"
"졸업 축하해."
내가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제 할 말을 했다.
"...어?"
순간 당황했던 나는 이 상황을 다시 이해하려 애썼으나,
"이건 선물이야. 많이 미안했어."
내가 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 말과 함께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쥐어주고는 저쪽으로 걸어갔다.
"......"
손에 들린 최민기의 꽃다발과 멀어져가는 최민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이나 번갈아봤다. 최민기가 내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최민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나는 다시 내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멍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고,
속에서 찝찝함이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기분인가 싶었다.
그게 최민기와 관련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최민기와 다른 지방의 대학에 갔고,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다만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아니 대학을 졸업하고도 최민기의 생각을 간간히 했다. 처음엔 특별한 건 아니었다. 동기들과 처음 술을 마시던 날에, 술을 마시고 내게 전화를 해 울었던 최민기의 생각이 갑자기 났다거나 정도의 것이었다.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었다.
최민기의 생각이 특별해진 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그 당시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을 즈음이었다.
"...글쎄."
나는 당시에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의 대답은 진심이었으니까. 나는 정말로 사랑이 뭔지를 몰랐으니까. 사랑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겠어.
그리고 그 사람도 내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그 질문을 받았던 바로 다음 날에 나는 차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사랑이 뭔지에 대해 고뇌했다. 인터넷을 수십 번 뒤졌지만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글들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내 스물 세 번째 생일을 맞이했고, 스무 살 이후로 그랬듯 자연스레 최민기에게 문자를 받았던 기억이 추억을 타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나와 최민기의 대화창은 여전히 스무 살의 두번째 날에 멈춰 있었다. 최민기의 생일 축하 문자를 보기 위해서는 스크롤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ㅡ 생일 축하해
ㅡ 축하해줘서 고마워
흔한 이모티콘 하나 없는 문자였다. 이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어땠더라. 다시 기억을 되감았다. 아, 그때의 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 왜 웃었더라. 최민기를 싫어하지 않았던가?
펼쳐둔 노트북에 시선이 갔다. '사랑.' 검색어를 차지하고 있는 두 글자였다.
이거였구나.
최민기가 싫었음에도 웃음이 나왔던 이유가.
사랑이라는 게.
스물 세 번째 생일 이후로 최민기를 다시 정의했다. 나는 최민기를 싫어했다. 동시에 사랑했다. 엄연한 모순이었지만 그 두 문장은 늘 어딘가 2% 정도 부족함을 느꼈던 '내가 최민기를 싫어했던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너무도 어렸다. 아무것도 몰랐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게 나의 잘못이었다. 어렸기에 몰랐던 감정인 '사랑'을, 알아가는 걸 거부했던 거였다.
최민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그 감정을 '싫어함'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처음 느끼는 게 낯설어서, 그 낯설음이 싫어서, 그걸 느끼게 만드는 최민기를 싫어했던 거였다. 정말 바보같았다. 너무 늦게 알아버린 내가 한심했다.
진작에 네가 사랑임을 깨달았더라면, 나는 네게 조금 더 다정하지 않았을까. 내가 조금만 더 네게 다정했더라면,
최소한 지금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시간이 지나 후회해도 변하는 건 없다. 그걸 알기에 나는 더욱 아쉬웠다. 나는 최민기가 첫사랑임을 깨달았지만 최민기는 아니니까. 최민기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본인을 싫어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최민기는 내 꿈 속에 자주 나타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졸업식 날 내게 꽃다발을 건네던 최민기는 내 꿈 속에 자주 나타났다. 과거에서 그랬듯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들면 최민기가 있었고,
"졸업 축하해. 이건 선물이야. 많이 미안했어."
또한 과거에서 그랬듯 최민기는 내게 꽃다발을 쥐어주고는 뒤를 돌았다. 그런 최민기를 붙잡으려 나는 꿈 속에서 지독하게 애썼다. 최민기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고, 그 얼굴이 웃는 걸 마주하고 싶었으며, '너는 미안할 것 없어. 이유 없이 싫어해서 미안했어.'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꿈 속의 나는 단 한 번도 최민기를 붙잡지 못했다. 발이, 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스물이었다. 이제는 성인이지만, 여전히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까맣게 물든 밤하늘 |
애프터 첫사랑이랑은 너무 상반되는 느낌이네요 똑같은 '첫사랑'인데 왜 이리 글 분위기가 달라졌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위기가 무겁거나 독백이 잦은 글을 쓰면 괜히 저까지 무게감에 젖어 사담도 진지해지는 것 같아요 ㅋㅋㅋ 단편에 무슨 외전이 있겠냐 싶으시겠지만 이 글은 외전이 있습니다. 외전에서는 민기와의 재회를 다룰 예정이니 여운을 남기고 싶으신 분들은 외전을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외전은 구독료도 있어요. 첫사랑을 싫어했다 외전까지 업로드를 끝낸 후에 흔적 연재가 시작될 듯 합니다 오늘도 너무 감사드려요 예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