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And Then
10월 너를 좋아한다. 다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네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다, 내 입시 문제가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너와 연락을 못한 지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한 것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러나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다. 최민기한테 물어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 생각은 금세 접혔다. 직접 연락하라고 할 것은 분명했고, 무슨 일 있냐 물을 것 또한 당연했으니까. 아, 모르겠다. 정말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겠다. “강동호 오늘 고백 받음.” “...뭐?” 평소처럼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나오니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최민기가 말했다. 민기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고회로가 멈추는 것만 같았다. “옆반 반장한테.” “......”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데. "근데 걔 진짜 예뻤어." "......." 민기의 말이 머릿속에 콕콕 박힌다. 네가 예쁜 옆반 반장한테서 고백을 받았다는 그 말이 자꾸만 맴돈다. 나는 아직, 너한테,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최우주?" "어? 어 왜." 민기의 부름에 민기를 바라보자 걱정스레 묻더라.
"괜찮아? 표정이 왜 그래." 그 말에 고개를 돌려 현관 쪽 거울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어... 아무것도."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괜찮을 거야. 너는 아직 날 좋아하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누나 안 괜찮아 보이는데." 민기의 말에 다시 시선을 돌려 민기를 바라봤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걱정을 가득 묻히고 날 바라보는 시선이 다정했다. "그래 보여?" 맞아.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 같아. 나 한 마디도 못 하고 이 마음을 접어버려야 할까 봐 조금, 아니 많이 겁이 나.
"누나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어?" 민기의 말에 멍해져서는 되물으니 내 앞으로 걸어와 멍하니 있는 내 손에 뭔가를 꼭 쥐어주고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거절했어. 이건 너 주래." 그 말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민기의 말에 주어가 없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손바닥을 폈다. 언젠가 내가 네게 좋아한다고 했던, 요즈음은 파는 곳을 찾기 힘든 사탕이었다. 몇 개의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것들을 종합해 내린 결과는, ㅡ 자? 두 달이 넘게 끊겨 있던 대화창을 다시 이은 건 나였다. 용기가 없어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할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ㅡ 아직 안 자요 ㅡ 누나 늦었는데 일찍 주무셔야죠 답장은 생각보다 금방 오더라. 네 답장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는 너도 안 자면서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ㅡ ㅋㅋㅋㅋ 그거 굉장히 모순되는 말인 거 알지? ㅡ 주말에 시간 돼? 내가 이 시간에 연락을 한 이유였다. 생각을 마친 후에 바로 너와 약속을 잡고 네게 이야기를 해야지만 지금 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것만 같아서. ㅡ 일요일은 돼요 일요일, 일요일이라. 학원 때문에 애매하긴 한데. 아 몰라, 학원 좀 늦게 가고 늦게 마치지 뭐. 일요일에 만나자고 하자 너는 곧 알겠다며 시간을 정해서 얘기해달라 하더라. 아, 겨우 약속만 잡았는데도 너무 떨린다. ㅡ 안녕히 주무세요 ㅡ 아니다 ㅡ 잘 자요 누나 너의 그 마지막 말도 내 떨림에 한 몫 하긴 했다.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하기 때문에 딱히 어딜 들어가서 만나기가 애매해 내 학원 옆 골목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이네요." 네가 날 보며 웃었다. 여전했다. "응, 안녕." 그 덕에 나 또한 긴장이 풀려 편하게 인사했다. "그래도 두 달만에 연락하는 건 좀 너무했어요." "미안. 나 고3이잖아. 한 번만 봐 줘." 투정 섞인 네 말에 널 달래려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 ...아 진짜." 너는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도리도리 젓더라. "방금 그거 좀 귀여웠어요. 그래서 오늘은 왜 부른 거에요? 바쁜 고3이 그냥 얼굴 보자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으음..." 아, 막상 또 말하려니까 말이 안 나온다. 집에서 그렇게 연습했었는데. 내가 그렇게 머뭇거리고만 있자 네가 눈치를 보더니 말하더라. "아, 그때 밤에 그거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그때 밤에 그거'라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야?" "제가 데리러 갔던 날이요.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말도 안 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날 네 말에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얼마 전에야 내 마음을 알았는데. 이제서야 네게 내 마음을 말해볼까 하는데. "...너는." "...누나?"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떻게 그게 그렇게 쉬운 거야.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는데. "왜, 왜 울어요 누나. 저 좀 봐요." 차오른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너를 당황시키기에도 충분했다. 아, 이런 찌질하고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급히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못 들은 걸로 하면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누나." "내가 묻잖아. 대답해 줘." 내 말에 네 표정이 굳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네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냥 예전처럼, 편한 누나 동생으로." "그래? 그러면..." "......" "나는 평생 기억할래. 못 들은 걸로 안 해." 나를 마주하는 네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내 진심을 전해야 했으니까. 내 말을 들은 네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또 방금처럼 네 입에서 속상한 말이 나올까 봐 그냥 무작정 내 마음을 다 내뱉았다. "나는 네가 좋아.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나 그날의 네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고민 많이 했어. 두 달 넘게 고민했어. 근데 암만 생각해봐도 좋아하는 게 맞는 걸 어떡해. 그거 아니면 다른 답이 없는데. 그래서 못 들은 걸로 못 하겠어. 안 할래.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가는 두 달 동안 무엇 하나도 쉬운 거 없었어 나는. 지금도 똑같아.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지 마."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뱉은 탓에 숨이 찼다. 여전히 네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숨을 고르다가 네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멍한 표정이었다. 내 숨소리가 찰나를 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누나가 저를 좋아한... 다고..." 어지간히도 당황했나보다. 말이 뚝뚝 끊기는 걸 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꿈 아니죠." "꿈 아니야." "안아봐도 돼요?" 너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듯 했다. 응. 네 질문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네가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자극적이지 않은 편한 네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나는, 나는... 누나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그랬죠. 절 좋아하고 있을 줄 몰랐어요. 매번 제가 눈치를 줬는데 알아채고도 그냥 넘어가길래 나한테 마음 없는 줄 알고, 어, 그랬는데." 이번에는 네가 네 진심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귓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며 손을 올려 네 허리에 감았다. "아니, 아, 진짜. 그렇게 하자고 할까 봐 제가 얼마나 떨었는 지 알아요? 진작 말해주지." "미안." "아니 미안하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서툴러서. 너 마음 졸이게 해서." 네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중얼였다. 그래서 많이 미안해. 네가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갑자기 사라진 온기가 아쉬워 네 얼굴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저도 똑같으니까." 그 말을 하면서 네가 웃었다. 아, 이런 너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진짜 많이 좋아해요.” 그 말을 하는 네 표정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또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여 말없이 너만 바라봤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내뱉더니 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랑...”
그냥 아는 누나 동생 하지 말고 애인 사이 할래요? 그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그 어떤 반응도 필요가 없었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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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부제목을 바꿨습니다. 사실은 내용도 바꿨어요. 써둔 게 제 마음에 너무 안 들어서 갈아엎어버렸어요 하핫 늦어서 죄송합니다 P.S. 곧 외전 및 Q&A 공지 / 차기작 관련 공지 올라올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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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애프터 첫사랑 (完) ㅡ 너와 나,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