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얽히고설킨 트라이앵글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구조 |
구름이네 쉐어하우스 클라우디 에스프레소 |
"내가 여기까지 할게."
"아, 내가 여기까지 하께요.
맨날 알바 땜에 쫓기는 누나랑 내랑 우예 같은 양을 하냐고요.
사람 좀 쫌생이로 만들지 마라, 누나야."
미간을 한껏 좁히고 말하는 다니엘이다. 그래봐야 나 겁 안 먹는다고. 네가 아무리 그래도, 설령 내가 그렇게 바쁜 게 사실이어도, 신세지기는 싫어서 그런다고.
그렇게 다니엘이 알아 듣도록 이야기를 하고, 타일러 보아도 전혀 수용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렇도록 저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녀석의 고집을 꺾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도 나도 내 주장이 있으니 최대한 맞서 싸웠다. 그런데 이러다가는 도통 끝이 안 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다니엘을 노려봤다.
내한테 안 통한다. 그래 봐야 누나 귀엽잖아요. 하며 고개를 젓는 다니엘이다. 야 넌 지금이 나한테 귀엽다고 할 상황이야?! 큰 소리를 치며 물었지만, 녀석은 미동도 없다.
"그럼 귀엽지를 말든가요. 여튼 여까지 내가 합니다."
저가 하겠다고 내내 고집을 부리던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올린 다니엘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내가 이겼어. 하는 표정이다, 저건.
나는 아아... 진짜 이런 배려는 해주지 말라고...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다니엘은 미안하면 밥 사요. 술도 좋고. 아님 내랑 데이트? 하며 실실 웃었다.
야, 그 셋 다 필요 없고 그냥 과제만 내 양만큼 하면 되니까, 그게 제일 편하니까 이렇게 고집 부린 거 아니냐고, 내가. 말하면 삐질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누나 그 어디 가서 함부로 누구 노려보고 그카믄 안 되겠다."
"왜."
"심장 콱 떨어질 뻔했다, 내."
"어떻게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냐 너는?"
"와요. 더한 말도 잘하는데. 함 해주까요?"
따라오는 능글맞은 웃음. 성운오빠가 왜 항상 다니엘의 등짝을 스매싱하는지 알 것 같은 부분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노트북을 켰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호경론 과제 제출과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지금은 우리가 딱 버닝해야 할 시기였고, 그래서 나와 다니엘은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대게 된 것이다.
다니엘은 저가 더 많은 양을 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매일 아르바이트에 쫓기는 누나보다 저가 한가하고 시간이 많으니 괜찮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다니엘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과제를 많이 해야 하는 것보다 더 불편하고 미안했다.
한강 피크닉 때부터 해서 알바를 쉬는 날이나 수업이 일찍 끝난 날에 다니엘이 자주 가는 맛집과 카페를 같이 가곤 했다.
이래저래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다니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좀 친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무작정 부담스러운 마음은 좀 누그러지고 있었다.
다니엘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데다(이 말은 '낯 간지러운 말을 많이 듣고 자란 데다'와 같은 의미이다.) 본인이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서,
나를 제외하고는 쉐어하우스 사람들과 금세 친해졌다고 했다. 본인 말로는 내가 제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고 있다고 했다.
왜, 나 너랑 충분히 친한데. 라는 말을 1%의 영혼도 없이 했다가 잔뜩 빈정이 상해 토라진 다니엘을 풀어주느라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빈말을 할 때는 최소한의 영혼은 담아줘야 한다는 걸 새삼스레 다시 깨달은 하루였다. 하여간 그렇게 나와 다니엘은 조금씩 혹은 성큼성큼 친해지고 있었다.
[민현선배: 지금 도서관인 사람? 닭강정 시킬 건데 같이 먹자.^^]
날이 좀 쌀쌀해져서 그런지 춥다는 내 말에 제 자켓을 친히 벗어서 내 등에 얹어준 다니엘의 호의에 고마움을 표한 게 두 시간 전.
내가 꼭 필요한 말만 오가며 불티나는 마우스 클릭질과 키보드 타닥타닥으로 PPT를 만들고 있던 게 두 시간,
다니엘이 화려한 단축키 사용 스킬로 한글 프로그램으로 보고서를 쓰고 있던 게 두 시간이었다.
시계는 어느덧 밤 10시를 향해 가고, 저녁 먹은 지는 서너 시간 정도 된 터라 약간의 출출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민현선배한테 카톡이 왔다. 쉐어하우스 단톡방에 보낸 톡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카톡을 확인한 내가 다니엘. 민현선배가 닭강정 사준대. 했더니, 눈이 빠져라 노트북을 쳐다보고 있던 다니엘이 시선을 돌렸다.
"민현이형 어디라는데요?"
"선배도 도서관이었나봐. 답장한다?"
"콜!"
저랑 다니엘도 도서관인데! 선배 어디세요? 하는 내 물음에 별 기다림 없이 답장이 왔다. 나 3층 열람실이야. 1층 로비에서 보자!
나와 다니엘은 저장버튼을 누른 뒤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별 미동 없이 앉아만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찌뿌둥했다.
닭강정이라니.. 너무 설렌다.. 하는 내 말에 웃는 다니엘이다. 자켓을 돌려주려는 내 손길을 거부하고는 밖이 더 추운데요, 입고 있어요. 한다.
알았다고 대답한 나는 다니엘보다 앞장서 걸어갔다. 따라오는 다니엘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선배!"
내 부름에 민현선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 여기! 하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이 오늘도 잘생겼다.
흐뭇한 마음에 온 얼굴에 엄마미소가 만개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기쁜 걸음으로 달려가듯 향했다. 선배는 10분 전쯤 우리의 최애가게에 미리 배달을 시켜놓았다고 했다.
학교 근처에 닭강정가게가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나와 민현선배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지난 번에 같이 고기 먹을 때에 이야기한 거였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이런 세심한 사람. 얼굴에 만개한 엄마미소는 그렇게 사라질 줄을 몰랐다.
선배는 중간고사 공부와 외교관 시험공부를 같이 해야 해서 많이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차분하게 본인 성격대로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얼마간 다니엘과 민현선배의 영국 프리미어 리그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들 사이의 축구 이야기는 여자들 사이의 화장품 이야기와 동급이라는 생각이 매번 든다.
축구에 대해 아예 문외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팬도 아닌 나는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만 겨우 했다. 흥미를 잃고 하품이 나오려던 차에 닭강정이 도착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감사합니다, 선배."
고개를 꾸벅, 한 번 숙이고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딸려온 치킨무의 국물을 종이컵에 버리고 먹기 편하게 뜯어놓는 건 막내 다니엘의 몫이었다.
이게 얼마만에 먹는 닭강정인지... 지난해에 동기들이 다 졸업하고 나서는 이렇게 시켜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니 꼬박 반년은 훨씬 넘었던 거다.
오래간만에 시켜도 여기는 정말 맛있네요. 하는 내 말에 민현선배는 많이 먹으라며 특유의 눈웃음으로 웃어주었다. 스윗하기도 하셔라..
다니엘은 종이컵 세 잔에 콜라를 따라 내 앞에 하나, 민현선배 앞에 하나, 제 앞에 하나를 놓았다. 고마워, 다니엘. 하는 나에게 천천히 무요. 안 뺏어 문다. 하는 녀석이다.
뺏어 먹을까봐 급히 먹는 게 아니라구... 닭강정이 너무 맛있어서라구... 닭강정을 향한 내 사랑을 알아 다니엘? 하고 묻고 싶었지만 민현선배가 있어 참았다.
그렇게 한참을 닭강정, 치킨무, 콜라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우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 황민현. 오랜만이다?"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여자였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얼굴에 박힌 눈은 컸지만 좌우로 길게 찢어져 고양이같았고, 붉은 립스틱을 꽉 채워 바른 입술은 앙칼지게 민현선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고양이같은 눈은 민현선배를 흘겨 보고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둘 사이가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민현선배는 닭강정을 먹다 말고 나무젓가락을 놓은 채 일어섰다. 나는 다니엘을 향해 뭐야? 너 저 여자 알아? 하는 눈빛을 보냈고, 다니엘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듯 자리를 피할 요량이었다.
민현선배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올려다 봤다. 잠시 눈을 내려 나와 다니엘을 한 번씩 쳐다본 민현선배는 따라와. 다른 데서 얘기해. 하며 앞장서 걸어갔다.
여자는 재빠른 걸음으로 민현선배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리를 긁적이며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니엘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민현이형 전여친이다."
"헐. 진짜?"
"예. 민현이형 외교관 시험 본다고 맘먹기 전까지 만나던, 헤어진지 좀 됐다."
"어쩌다 헤어졌는데?"
"뭐... 무작정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챙길 만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근데 저 누나가 형아를 마이 좋아해가. 헤어지고 나서도 억수로 따라다닌 거 아녜요."
"...아..."
"누나 입주하기 훨-씬 전에 형아들이랑 내는 전여친 얘기 다 깠거든요. 그때 들었다."
"......."
뭔가 이렇게, 현실의 벽에 팍! 하고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민현선배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내 첫 기분이 그랬다.
그 후로 밀려드는 생각은 민현선배같이 잘난 사람은 저렇게 예쁜 여자도 피도 눈물도 없이 찰 수 있는 건가. 하는 것이었다.
뭐랄까.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과제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이 좁은 용량에 굳이굳이 억지로 그렇게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야.
다니엘은 점점 바닥을 향해 치닫는 내 기분을 눈치챈 건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보통 때는 무디고 눈치없는듯 하다가도 이럴 땐 귀신같이 알아챈다.
입맛이 싹 달아난 것 같은 기분에 애꿎은 콜라만 들이켰다. 몇 조각 남아 굴러다니는 닭강정이 왠지 보기 싫어졌다. 배가 터질 것처럼 부른 것 같기도 한 게... 그만 먹고 싶었다.
"분위기 깨서 미안. 이야기 좀 하느라구."
20분쯤 흘렀을까. 민현선배는 혼자 돌아왔다. 미안해하며 멋쩍게 짓는 웃음에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아무 일 없었다는듯 태연하게 나무젓가락을 들고 닭강정을 입에 넣는 선배다. 다니엘은 그런 선배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민현선배를 향한 나의 마음은 솔직히 내가 보았을 때도 이성적인 사랑이라기 보다는(물론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동경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전여자친구라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생각이 진짜라면 전혀 기분이 나쁠 수가 없는데, 나는 기분이 나빠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민현선배를 좋아했던 그 마음이 그러면... 동경이 아니라 짝사랑이었던 건가.
그렇게 따지면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언제부터 민현선배한테 빠져서 혼자 설레고 있었던 거지? 나 혼자 좋아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그러면?
그렇게 '내가 왜 지금 기분이 나빠야 하는가'에 대한 엄청난 내적갈등을 겪고 있었다.
민현선배와 다니엘은 깔끔하게 닭강정 한 판을 싹싹 비웠다. 우리는 사이좋게 뒷정리를 마치고 각자 과제를 하러, 또 공부를 하러 돌아갔다.
과제를 하기 위해 다니엘과 마주 앉았는데, 다니엘은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며 보고서 작성에 집중을 하는 반면 나는 어쩐지 더 이상 PPT를 '잘' 만들 수가 없었다.
'잘'이라고 하는 건, 어쨌든 만들어야 하니까 만들고는 있는데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어떤 그래프를 만들고 있는 건지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현선배는 두 시간 동안 각자 열심히 하다가 열두시에 같이 집에 가자고 했는데, 맘 같아서는 지금 짐을 싸서 혼자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
그 말이 또 쓸 데 없이 다정해서 그 다정함에 홀라당발라당 넋을 놓아버린 나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전여친과는 무슨 말을 나누고 온 걸까.. 달갑지 않은 호기심이 일었다.
집중이 되지 않아 귀에 이어폰을 꼈다. 이어폰을 낀다는 것 자체가 다니엘과의 대화에 대한 여지를 닫아두는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계속 민현선배의 전여친에 대해 물어보게 될 것 같아서 차라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전여친은 몇 살이야? 무슨 과야? 어쩌다 사귀게 됐는데? 민현선배가 많이 좋아했대? 궁금한 건 점점 많아졌다. 그렇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물어봐서 답을 해주지 않을 다니엘은 아니었지만,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을 내 자신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은 생각보다도 더 달갑지가 않아서 나는 자꾸만 나빠지는 기분을 멈추고 싶었다.
대화 없는 두 시간이 흐르고, 민현선배는 본인의 짐을 다 챙긴 채로 우리와 같이 가기 위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왔다.
민현선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민현선배를 대상으로 내가 느낀 감정 중에는 최악의 것을 맛보았다.
민현선배가 얄밉고, 야속해진 것이다. 그 단어가 제일 적당했다. 그리도 트루럽이라 우겼던 민현선배에 대한 감정이... 야속함으로 변해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집에 오는 길 내내,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 다니엘과 민현선배가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입으로는 맞장구를 치고 있지만 사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 관심은 고양이눈과 빨간입술을 한 그 여자, 그녀에게 가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사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만 알고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게는 그걸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자격... 이라고 하면 우습긴 했지만, 나는 정말로 그런 주제가 되지를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민현선배라서 그랬다.
"잘자, ○○가. 오늘 고생 많았겠다, 과제하느라구."
스윗하게 잘자라고 인사해주는 목소리가, 그 얼굴이, 평소와 다를 게 전혀 없었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내 감정이 평소와 너무나 달라서인지 한없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끝내 웃으며 선배도요. 하고 답했지만,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울 건 또 뭐람. 왜 우는데 네가. 나 자신을 나무라게 되었다.
방에 들어오던 찰나, 걱정스러운 눈빛의 다니엘을 보았지만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이 부끄럽게 티가 나는 게 싫었다. 그런데 이미 충분히 티나고 있었을 것이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휴우, 하고 긴 한숨을 뱉었다. 화가 났다.
민현선배가 배려해주는 바람에 제일 먼저 씻기로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후다닥 씻고 머리를 말린 뒤 방에 들어왔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깔고 침대에 몸을 뉘이면서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어쩐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자보려고 불을 꺼두었다. 시야는 캄캄해졌지만 민현선배와 다니엘이 씻느라 돌아다니는 발소리에 귀가 예민해졌다.
발소리가 잦아들고 나서도 30분이 더 흘렀을까.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아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 인기척은 한동안 부엌에서 머무는듯 하더니 똑똑, 내 방을 두드리는 노크소리로 이어졌다.
"누구세요."
캄캄한 방에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불을 켜니 눈이 너무 부시다 못해 아팠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빼꼼 얼굴을 내미는 옹성우다. 배 안 고프냐? 물어오는데 모락모락 튀김 냄새가 난다.
시간이 몇 신데. 그래도 한 번 튕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까 민현선배가 닭강정 사줬어, 도서관에서. 라고 말했는데 튀김 냄새의 주인공은 감자튀김이다.
그래? 부엌에서 튀기다가 네 생각 나서 네것까지 했는데. 케찹도 있어. 한 손에 들린 케찹을 날 향해 들어 보이는 옹성우다.
"어... 들어와."
고민은 3초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옹성우는 씨익 웃으며 내 방에 들어왔다. 침대 밑 빈공간에 자리잡은 옹성우는 감자튀김이 예쁘게 담긴 그릇에 케찹을 짜올렸다.
맛있게도 튀겼네... 싱숭생숭해서 잠도 안 오는 데다 점점 배도 고파지는 것 같아 짜증났는데, 이렇게 갓 튀긴 감자튀김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잘 먹을게. 하면서 포크를 들어 감자튀깁을 찍었다. 몇 차례 그렇게 감자튀김을 입에 가져간 나를 빤히 쳐다보던 옹성우는 내게 물었다.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
"...."
"민현선배 전여친 봤어. 아까."
"어디서?"
"도서관에서.
나랑 다니엘이랑 민현선배랑 셋이 닭강정 먹고 있는데 마주쳐서..
민현선배 자리 떴다가 잠깐 이야기하고 다시 왔어."
"..그랬는데?"
"뭔가 되게... 멍해졌어. 별 생각이 다 들더라."
나... 왜 이렇게 옹성우 앞에만 있으면 안 열리던 입이 술술 열려서 별의 별 말이 다 나오는 걸까.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은데, 왜 옹성우한테는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게 되는 거지. 내 이야기를 듣던 옹성우는 야, 잠깐만. 맥주 좀 가져올게. 하며 일어섰다.
나는 내 꺼도! 하고 소리쳤지만, 너 어제도 먹었잖아. 안돼. 하며 굳이 제 것만 가져오는 옹성우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캔이 따졌고 옹성우는 꿀꺽꿀꺽 잘도 삼켜냈다.
나는 한 입만... 하며 애처롭게 빌었고, 옹성우는 못 이기겠다는듯 내게 맥주를 내어주었다. 아, 시원하다. 아까보다는 훨씬 행복해졌다.
"뭔가.. 나는 동경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게 아니라는 것처럼 깨달아지니까.. 이상했어. 기분이.
그리구.. 내가 그 여자보다 훨씬 못났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것도 마음이 상하고. 휴우.."
"....."
"아 모르겠다. 내가 너한테 왜 이 얘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냥 듣고 까먹어라."
"어떻게 까먹냐."
어떻게 까먹냐. 딱딱하게 묻는 옹성우다. 묻는다고 하기가 어려울 만큼 좀... 까칠하게 따지는 투였다.
나는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너한테 이야기한다고 해서 너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걸 내가 왜 너한테 이야기하고 있는지.
내 입이 방정이다. 내가 미안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래도 민현이형이 좋아?"
한참 바닥을 보고 있던 옹성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는 뜨끈뜨끈한 감자튀김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옹성우는 말했다. 여자는 자기를 많이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데. 너도 뭐, 만나고 헤어져 본 적 있다며. 알 거 아냐.
알지, 아는데... 민현선배한테 갖고 있던 내 맘이 그런 종류였다는 걸 깨달은 게 바로 몇 시간 전이라니까. 무슨 말 하는 거야, 지금 너. 하며 내가 받아쳤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그러게... 그냥 미친척하고 한 번 들이대 볼까?
혹시 아냐, 진짜 요만한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잖아."
취한 것도 아닌데 헛소리가 막 나왔다. 나는 웃자고 한 말인데 옹성우는 미간을 확 좁혔다. 알아, 자식아. 가능성 없는 것 나도 안다고.. 그렇게 얼굴 찌푸릴 것까지는 또 뭐냐.
나는 중얼대며 웃었다. 그래두 너한테 말하니까 마음 좀 풀린다. 나 왜 이렇게 너한테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막 하게 되는지 모르겠네... 네가 너무 편한가.
넋두리하듯 늘어놓는 나를 옹성우는 빤히 쳐다봤다. 나 또한 옹성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옹성우의 오른쪽 귀에 귀를 뚫은 자국이 있었다. 처음 보는 귀 뚫은 자국이 궁금해진 나는 어? 야 근데.. 하며 말문을 열었다.
"너 귀 뚫었었어?"
"귀? 아... 어."
"아 진짜? 언제?"
"......"
"뭔데? 언제 뚫었는데?"
"전여친이랑 사귈 때. 귀 한 번만 뚫어달래서 같이 갔다가 한 쪽만 뚫고 왔다."
감자튀김이 한껏 끌어올려놓은 기분이 다시금 와장창, 깨지듯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해탈한듯, 털어놓으며 말하는 옹성우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가웠다.
아니 내가 근데 왜 기분이 나쁜 건데. 대체 왜... 기분이 나빠졌음에도 그럴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민현선배를 향해 느꼈던 감정보다 억만 배는 더 바닥을 파고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왜. 기분 나쁘냐?"
".......어."
"네가 왜 기분이 나쁜데."
"...그니까. 나 왜 기분 나쁘지.."
"너 진짜... 곰이냐?"
"......"
옹성우는 내게 곰이냐고 묻는 말을 끝으로, 바닥에 내려둔 케찹과 감자튀김 그릇을 가지고 내 방을 나갔다.
내 진짜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옹성우의 전여친 이야기에 민현선배의 전여친을 봤을 때보다 훠얼씬 더 기분이 나빠진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바야흐로 얽히고설킨 트라이앵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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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편 암호닉(10편 업로드 전에 작성된 댓글에 한함. 강과장 최종~오구쉐 1차 암호닉 포함.) [분홍색솜사탕] [사모녤드] [라온하제] [셸] [녤과장] [0846] [어어] [@불가사리] [녤부] [다녤잉] [숮어] [강달리엣] [백설탕] [녤니짱] [맥주톡톡] [피치수플레] [영이] [121027] [니나노] [구원자] [주여닝] [마요] [크뽀] [하마하마] [럽딥] [지블] [몽쟈] [무네큥] [깡구] [사용불가] [챠미] [샤넬] [딸기시럽] [리본] [일개사원] [초록하늘] [찌부] [꼬꼬망] [우즈] [마카롱] [쌈장] [비눗방울] [리베르떼] [구르밍] [굥뷰죰햬] [옹성우] [포카리] [오늘도행복해] [도앵도] [일이일공] [해령] [강낭] [쑤쑤] [뚜띠따띠] [메론바] 안녕하세요, Y사원입니다. 오늘은 분위기를 좀 전환해 보았어요. 뭔가.. 뭔가 시작되긴 한 것 같은데 그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ㅅ' 재밌게 읽어주셨기만을 바라게 되네요.. 하핫 워낙 러브라인에 대한 의견들도 분분하고.. 독자님들이 응원하시는 남주도 각자 다르겠지만, 흔들리지 않고 제가 생각해놓았던 이야기를 차분히 끌어나가는 게 독자님들께서 원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맞겠...지여?) 하핫 토요일 밤이라 아직까지는 마음의 여유가 있네요. 내일 이 시간이면 아주아주 우울하겠지만요.. ㅠ_ㅠ 흑흑 다들 어제 발칙한 동거 보셨어여? 옹녤환 넘모 기여운 거 실화냐ㅠㅠ 오늘 애들 넘넘 이뿐데 그러케 이뿌게 하고 왜 나를 떠나 가시나!!!(다녜리 금발에 주것따고 합니다. ㅇ<-<) 저는 등록 버튼 누르구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갑니당~ 매번 독자1부터 답댓을 달아드리다 보니 밑으로 내려갈수록 답댓을 못 달아드려서 죄송한 마음이.. 많이 있어요. 종종 밑에서부터 달기 시작해보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려나요(...) 즐거운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편에서 또 만나요~♡ +) bgm에 팝 넣어본 건 처음인데, 앞으로 이렇게 좀 다양화 해볼게요! 즐기실 분들은 즐겁게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 ++) 다시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오늘 왜케 노잼인 것 같져...ㅜㅜ 뭔가 딱 쓰고 싶어져서 보다는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더 컸기 때문일까요. 이번편 좀 재미 없더라도 너그러이 넘어가주시면 제가 다음편은 더 재밌게 써보도록 할게요ㅠ_ㅠ 노잼이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흑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