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w. 채셔
오랜만에 어머님이 친구와 함께 집을 방문하겠다고 통보를 내리는 바람에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났다. 청소는 업체에게 맡겨두고, 일단 화장부터 해야 했다. 머리를 말리고 남은 물기를 닦는데 전정국이 화장실에서 샤워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서는 게 거울로 보였다. 근육이 알맞게 자리잡은 넓은 어깨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로 맞닿은 시선 속에서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몇 초간 눈길이 서로 뒤얽혔다. 전정국이 먼저 내 눈길을 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망친 쪽은 오히려 나였다. 정국의 눈을 계속 보다 보면 타버릴 것 같다.
…아! 이내 엉킨 머리를 쓸던 꼬리빗이 순간 반창고로 덮인 손을 찔렀다. 젖은 반창고를 벗기자 안에 꼼꼼히 상처를 막아둔 방수밴드가 보였다. 역시 지민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지민은 제 몸보다도 더 나를 끔찍이 아꼈다. 태형은 나를 따라하다 몇 번씩 다치곤 했지만, 지민은 항상 나를 지켜주려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자전거에 치이려던 나를 순간 끌어안아 등을 크게 다친 적도 있었다. 아직도 시뻘겋게 그 자국이 남아 있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처남은 이제 집에 오지 말라고 해."
방수밴드를 떼어버리려는데, 귓가로 날아드는 정국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옆으로 다가와 조언하듯 툭툭 내 어깨를 만지던 정국은 이내 작게 속삭였다. 소문 돌아. 재미있다는 듯이 픽 웃은 정국은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전정국은 항상 이런 식이다. 정국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누구보다 정국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국은 이따위로 나를 무너뜨리고는 했다. 가볍게 화장을 하는데, 립스틱을 바르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지민에게 연락했다.
"…나 다쳐도 치료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가씨, 또 다쳤어요? 조심 좀 해요, 왜 맨날 자기 아픈 줄 모르구…."
"………."
"반창고는요? 붙였어요? 아무리 찾아도…."
노크 소리에 지민의 말을 듣기 전에 황급히 통화를 끊었다. 어디를 집중적으로 청소했다느니, 어디가 더러웠다느니 하는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늘어놓는 청소 업체 아주머니에게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중간중간 시선을 돌려서 화장을 마친 나는 아주머니에게 수표 몇 장을 건네주고 밖으로 나섰다.
"이모, 페스토는 이렇게 만들면 될까요?"
이내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연희였다. 앞치마를 둘러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연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음식을 준비하는 연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섰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낮은 목소리로 묻자, 연희는 깜짝 놀라 숟가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이 싫었다. 아니, 부엌이 제 것이라도 되는 듯 안주인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게 싫었다. 아니, 그것보다… 앞치마를 맨 연희의 모습이 이 집에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게 싫었다. 나가. 혹시라도 정국이 들을까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후다닥 제 방으로 도망치는 연희를 바라보는데 시선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식탁 의자에 두 손을 올려놓고 기댄 전정국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룸에서 방금 나왔는지 수트 차림이었다.
"때리면 너 보고 나가라고 하려고 했는데."
"…………."
"역시 타이밍은 기가 막히네."
정국은 이죽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 나갔다 올 동안 연희 손끝 하나라도 건들여 봐. 그대로 너도 끝장이야. 곧이어 들려온 말은 협박이었다. 이내 정국은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옆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며 음식을 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거였다.나를 아가씨로 만들어주지 않는 건 너야, 전정국…. 머리가 지끈거려서 나는 눈을 꼭 감고 테이블에 잠시 기댔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어머님이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아가씨
몇 시간 되지 않아, 정국이 어머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골프 선수 출신이라던 50대 중반의 여자와 그 남편도 함께였다. 어머님은 정국과 나를 앞에 두고 흥미도 없는 골프 얘기를 해댔다. 몇 번 홀이 좋다든지, 어느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파서 죽겠다든지. 어떻게 그 중에 내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머님과 손님 부부의 얘기를 맞장구 쳐주면서 나는 언뜻 정국을 쳐다보았다. 전정국은 얘기가 흥미롭다는 듯 중간에 웃기까지 했다. 저건 진심으로 웃는 걸까, 가식으로 웃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정국은 얘기를 듣는 데 열심이었다. 하긴 아버님도 제 사업에 도움이 되는 얘기라면 뭐든 눈을 반짝이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장인어른도 골프 좀 치시지 않아?"
한참 맞은 편에 꽂혀 있던 정국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나를 향했다.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자 정국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좋아하시기도 하고…. 말을 잇는 중에도 정국의 표정은 서늘했다. …잘 치시기도 하세요. 말을 끝내자 그제야 정국은 유하게 표정을 풀곤 만족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의원님이랑도 한 번 쳐야겠네-, 하고 시어머님이 웃었다. 이내 …예상하지 못한 데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어깨 위에 다정하게 올려진 손. 슬쩍 내려다보니 정국의 메탈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심한 듯 내려앉은 손이 살갑게 내 팔을 감싸고 있었다. 살짝 올려다본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굴었다.
"그나저나 둘이는 결혼 전인데 어떻게 사이는 좀 좋고?"
어머님의 물음에 애매한 미소를 짓자 정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하고 웃음을 짓자 다시 그제야 힘이 풀어졌다. 식탁에는 묘한 긴장감이 계속 들어찼다. 전정국의 이런 손길을 견딜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섰다. 정국을 포함해 네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쪽을 향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더듬거리며 핑계를 찾아낸 뒤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화장대 서랍 안을 뒤져 약을 찾았다. 물도 없이 허겁지겁 알약을 삼킨 뒤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꽉 쥐었다. 주저앉아 멍하니 앉은 틈에, 사진 하나가 시선에 들어왔다. 태형과 지민의 사진이었다. 태형이 미국에 가기 전 공항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태형이는 아… 아가씨가 좋아. 예쁘… 세상에서 제일 예뻐!"
알약이 목에 걸린 듯해서 가슴을 몇 번 퉁퉁 쳤다. 사진을 보자 괜히 마음이 편안해져서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이마를 몇 번 문지르다 일어섰다. 먼지가 많이 쌓인 사진을 티슈로 몇 번 닦아내자 태형의 아이 같은 웃음이 선명해졌다. 태형은 우리 집의 계륵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는 필요하고, 또 나를 유난히 따르는 것을 보면 싫고, 그런 존재. 태형을 우리 집에서 내쫓으면,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득달같이 따라붙어 사실을 보도할 게 뻔하니까. 버리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 그렇기에 태형은 우리 집에 온 뒤 5년을 채우지 못하고 미국으로 보내져야 했다.
'태형이 무서워…. 아가씨, 아가씨 오면 안 돼? 무서워. 혼자 싫어.'
'태형아, 그런 말 하면 안 돼.'
'지민이 형, 시러…. 태형이, 무서워.'
그러고보니 태형과 영상 통화를 한 지도 꽤 오래 됐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통 할 수 없었다. 지민과도 잘 왕래할 수 없는 곳에서 태형과의 영상 통화는 사치였다. 사진을 바라보다 문득 아래에 적힌 포스트잇과 글자가 눈에 띄였다. 증거…. 태형의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글자였다. 흘려 쓴 글씨가 정국의 글씨처럼 보였다. 기분이 이상해서 다시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화장대 의자에 앉아 사진을 멍하니 보는데 노크와 함께 정국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웃음이 나를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장난해? 저 골프 선수, 유통 돈줄……"
"미안해."
"……뭐?"
"이거, 당신 글씨 맞지?"
순순히 튀어나온 사과에 놀란 듯이 말문이 막혔던 정국이 사진을 보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내 빠르게 다가온 정국은 사진을 얼른 뺏어 제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사진이 살짝 구겨진 건 상관도 않는 듯 했다. 불안한 눈빛이었다. 정국의 이런 눈동자는 처음이었다.
"무슨 증건데?"
"…알아서 뭐해."
"나 태형이 궁금해.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지민이랑도 잘 못 있으…."
"모르겠어, 나도."
"거짓말."
"사실 알아."
"……."
"보육원 들어갔어."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을 정국이 서둘러 잘랐다. 정국과 이렇게 길게 대화한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정국은 쫓기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표정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침착한 것 같았다. 넥타이를 고쳐 매던 정국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고 계시니까 얼른 정리해. 정국은 이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정국은 지쳐 보였다. 내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틈이었다. 다시 앉아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민이는 왜 나한테 말 안 했지?"
"……글쎄."
지민의 얘기를 꺼내자 다시 표정을 굳힌 정국은 다시 일어섰다. 애매한 대답으로 대화를 끊은 정국은 다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국의 온기였지만,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큰 손이야, 잘 해. 정국의 말에 괜히 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네가 잘하면, 처남이랑 따로 방도 만들어줄게. 정국은 다시 빈정거리며 지민의 얘기를 했다. 어깨를 빼려고 하자 정국은 더 단단히 내 어깨를 잡아왔다. 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국은 마치 단백질 인형 같은 얼굴로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대체 뭘까….
덧붙임
아가씨가 요즘 연재되고 있는 타 작가님의 글의 현대판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T-T
아가씨는 제 옛 블로그에서 2013년 10월 25일부터 연재를 시작해 2014년 12월 29일 연재를 마친 글입니다.
아가씨는 어릴 때 힘겹게 힘겹게 완결을 낸 글이라, 제게 너무 소중한 글이에요.
인증도 가능하니 필요하시면 부디 말씀해주세요!
암호닉 출첵 해주세요. 이 글은 꼭 아껴주시는 분들한테 드리고 싶네요 V_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