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w. 채셔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갔다. 정국은 기어이 골프 선수 부부를 그룹사 호텔에서의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내가 보기에도 대단한 사교성이었다. 부부를 대하는 정국은 마치 작열하는 태양 같았다. 늘 정국의 곁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렸다. 정국의 재산을 탐하지 않는 재벌들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그게 정국의 진짜 모습일지도. 도대체가 정국의 성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정국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왜 정국을 좋아하게 됐을까. 정국은 누구보다 내게 딱딱하게 구는데. 어쩌면 내가 고통을 즐기는 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이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해."
"아가씨?"
"뭐하냐구."
"매형이 아가씨 집 들르지 말라고 했는데…."
"뭐하냐고 물었잖아."
"…사진 정리하고 있었어요."
"우리 집 좀 와. 물어볼 게 있어."
그저 장난으로 해둔 말인 줄 알았는데. 전화를 걸자마자 호들갑을 떨 줄 알았던 지민이 오히려 수동적으로 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화장을 하려다가 얼핏 사진 생각이 나서 서랍을 뒤졌다.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랍을 탈탈 털기까지 했다.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지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태형은 정말 보육원에 갔는지, 잘 지내는지, 왜 연락 한 통 없었는지, 그리고 지민은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 난장판이 된 방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정국이 아침부터 연희와 데이트를 하겠다고 나가는 바람에 집은 일찍부터 비어 있었다. 큰 거실을 따라 걷다 소파에 눕듯 앉았다.
'너는 왜 태형이랑 같이 우리 집에 오게 됐어?'
어린 나는 우리 집에 남자 친구들이 온다는 말에 마냥 신이 났었다. 태형과 지민은 형제가 아니었는데, 어려서 그랬는지 한 번도 이상하다 여긴 적이 없었다. 내가 열두 살이 되었던 때였나. 아버지의 인터뷰를 위해 기자와의 식사 자리에 태형을 대동하고 간 날, 지민과 나 둘이 집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그날 지민에게 물었던 것도 대답을 얻고자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정말 단순히. 아무런 대가 같은 것 없이 물은 것이었는데 지민의 반응에 놀랐던 적이 있다. 그렇게 굳은 표정은 처음이었다. 괜히 실수를 한 것 같아 나는 작은 손으로 원피스를 꼭 쥐었었다.
'…태형이, 잘 생겼잖아요.'
'……응?'
'그래서 선택 받은 거예요.'
더 이상 침범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어린 나는 기어이 실례를 하고야 말았다. 그럼 너는? 아무 것도 모를 것만 같은 맑고 깨끗한 눈에 지민은, 입을 달싹이다 속삭였다. …네가 알 필요 없잖아. 지민의 낮고 탁한 소리에 나는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보다 지민이 내게 말을 낮춘 것도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내게 말을 놓거나 한 적이 없지만, 지민은 그 날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거칠게 굴었다.
'희망보육원 애들 중에 공사 잘 칠 애들로 데리고 와야지.'
'둘 다요?'
'아니, 한 명은 진짜. 또 한 명은 가짜. 둘 다 공사 잘 치면 우리한테 뭔 짓을 할지 몰라.'
'……공사?'
'어허, 아버지 얘기하는 데에 막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도통 해석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얼떨결에 들은 아버지의 얘기는 지민과 태형이 무언가를 할 줄 아는 애들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갑작스럽게 소름이 돋아서 소파에 올려져 있던 담요를 어깨선까지 끌어올렸다. …지민을 믿고 싶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집에 지민만이 오롯이 내 사람이었다.
아가씨
꿈에서 알 수 없는 세상을 헤엄치고 있을 때,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아… 하고 불렀는데, 꿈속에서가 아니라 내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옆을 보니 내가 지민의 허벅지를 베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셔서 눈을 찌푸리니, 지민이 다정한 손길로 내 눈을 감겨주었다. 조금 더 자요. 꿈속에서만큼 예쁜 목소리였다. 지민이 든 찻잔에서는 국화차 향이 났다. 지민이 입은 아이보리색 니트처럼 따뜻한….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묻자 지민은 '아-까부터요.'하고 대답했다. 잠에 취한 모습에 지민은 말하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웃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지민이 끓여놓은 국화차가 보였다. 차는 어디서 찾았어, 나도 못 찾겠던데. 잠결에 묻자 지민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 '그냥… 뒤져보니까 나오던데요?'하고 눈웃음을 쳤다. 언제부턴가 지민이 내게 한 발짝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까칠해진 뒤로부터는 나에게는 한 마디도 못했는데…. 지민이 주는 찻잔을 받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홀짝이며 마시는 지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 준비했던 질문들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할 말 있죠."
"……어?"
"오늘은 하지 마요."
지민은 고민하던 나를 훤히 보고 있는 것 같이 굴었다.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두던 지민은 다시 제 허벅지를 퉁퉁 쳤다. 저번에 잘 못 자는 것 같아서, 국화차로 끓여왔어요. 벙찐 나를 두고 재잘거리던 지민은, 힘을 주어 나를 제 허벅지 위로 다시 눕혔다. 싫으면… 조금만 자고 말해요. 지민은 속삭이듯 조그맣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주제넘게 굴지 말라며 뺨을 올려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싫으면…."
"………."
"조금만 있다가 말해요."
지민의 말은 귓속말 같으면서도 끝이 단호했다. 졸릴 정도로 따뜻하면서도 금방 서늘해졌다. 이런 분위기의 지민은 처음이어서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눈을 감자 지민은 그 노래를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주었던 노래를…. 나를 뚫어져라 보는 지민의 눈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지민은 아주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지민의 노래 끝엔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여운으로 남으면 나를 미치게 했다. 지민은 내가 제게 묻고 싶었던 말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노래가 끝나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태형이는………. 앞에 태형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 같은데, 자세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민이 울고 있다는 것을. 한참을 있다 지민은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좋아해요…."
지민의 바람 같은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일정하게 숨을 내뱉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아가씨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지민이 나를 흔들어 깨워서 일어났을 때, 곧 정국과의 스케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커팅식을 위해 회사에 가야 했다. 왜 깨우지 않았냐고 묻자, 지민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급히 지민을 보내고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한참을 찾았지만 없었다. 정국이 사주었던 …하얀색 원피스. 왜 사온지 알 수 없었지만, 정국은 회식 후 술에 거나하게 취해 옷 한 벌을 내게 건넸다. 왜 선물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국은 이미 곯아 떨어진 이후였다.
분명히 얼마 전에 아주머니가 세탁해 걸어둔 걸 봤는데…. 다른 건 익숙하게 제자리에 있는데, 그 옷 하나만 없었다. 정국의 옷 쪽을 찾았다가, 행거에 달린 옷들을 하나씩 뒤적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원피스와 정장 바지가 있는 서랍 쪽을 뒤졌다. 아주머니가 실수를 했나 싶어, 마지막으로 양말 서랍을 확인하려다 위에 정국의 상자가 보였다. 무심히 눈길을 돌리다가 안 쪽에 연희의 귀걸이가 살짝 보였다.
이게 드레스룸까지 차지하나 싶어 얼굴을 팍 찌푸리고 확인하니 연희의 물품이었다. 한 번의 고민 없이 나는 상자를 들고 뒤집었다. 물품들이 쏟아지면서 깨끗하던 방이 어질러졌다. 연희의 속옷에서는 정국의 향수 냄새가 났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가위를 들고 와 연희의 속옷을 모두 찢었다. 마지막 브래지어까지 모두 찢으니 몸 안에 남아있는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서랍에 기대 그대로 주저앉았다. 찢겨진 속옷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공허한 눈길로 그것들을 살피다 서류 봉투가 눈에 띄였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정국과 연희의 혼인신고서일까 덜컥 겁이 나 서류 봉투를 허겁지겁 쥐어 들었다. 그리고 구겨진 서류 봉투 안에 서류를 빠르게 집어 꺼냈다.
그것은…… 태형의 사망신고서였다.
손을 떨며 확인한 이름 세 글자는 분명 태형의 이름이 맞았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한참 서류를 들고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려고 해도, 보이지가 않았다. 태형이가 죽어…?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몇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하다 떨리는 손으로 연희의 속옷과 물품들을 다시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지민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바깥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내가 진짜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벌컥 벌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지막으로 드레스룸을 열고 정국이 들어섰다.
"준비 안 했어?"
"………."
"…김여주?"
주저앉아 있던 내게 다가온 정국은 이상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었지만, 차가워진 손이 쉴 새 없이 떨려서 등 뒤로 숨겨야 했다. 다리야, 움직여…….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국의 뒤로 연희가 들어왔다. 연희가…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정국이 사준 하얀 원피스. 드레스룸에서 다정하게 연희에게 옷을 맞춰보며 웃는 정국의 모습이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연희는 마치 천사 같았다. 내가 구원을 받고 싶을 정도로 연희는 예뻤다. 나는 홀린 것처럼 연희에게 다가갔다. 옷, 잘 어울리네…. 정국과 연희는 귀신을 본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벗어."
"…네? ……아, 아가씨."
"너 왜 그래, 또."
나는 한 번 더 날카롭게 '벗어.'하고 얘기했다. 강압적인 말투에 연희는 가녀린 손을 단추에 가져다 댔다. 스르륵 풀리는 원피스를 보고 있다, 정국이 얼마 안 가 연희의 손을 덜컥 잡았다. 그만해. 정국은 간결하게 내게 명령했지만, 나는 연희에게 다가갔다. 연희는 정국의 뒤로 숨었지만 나는 연희의 옷깃을 꼭 쥐었다. 정국이 연희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게 보였다. 나는 여지 없이 연희의 원피스를 찢었다. 가차 없이 찢겨진 원피스가 스르륵 벗겨졌다. 너 그만 못 해? 정국이 참다 못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태형이 죽었다는 건 한 번도 눈치 챈 적 없었다. 생각해보니 지민이 내게 전하려던 말은 태형이가 죽었다는 말이었을지도. 씩씩거리며 정국을 올려보는 눈에 여지 없이 눈물이 차 올랐다. 분에 못 이겨서 연희의 뺨을 후려쳤다. 몇 번을 더 때리자 정국이 강한 힘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너 왜 그래. 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태형은 죽었고, 정국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 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국은 위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덧붙임
늦게 찾아와서 미앙해요.
다음에 암호닉 리스트 들고 찾아올게요. 오늘도 출석 체크! 짜ㅏ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