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알람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멈추지 않는 빰빰빰, 주변 어딘가 숨은 휴대폰을 찾아 이불 속을 더듬는다. 간밤에 인형이라도 생겼는지 옆구리가 간지럽다. 의식의 흐름은 휴대폰도 잊은 채 단단한 물체를 느꼈다. 인형이 옷을 입었구나. 근육도 잡혔네. 등은 왜 보들보들한 거야. 꼭 사람 같이.
- “……으응.”
……인형이 말을 했다. 새하얀 이불덩이에 파묻힌 그 존재가. 겹겹이 뭉친 솜뭉치를 조심스레 들춰내자 햇살에 노출된 말간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아직 꿈나라 여행 중인 상대는 옆구리에 달라 붙어 솜방망이로 콧잔등을 긁었다. 새침한 고먐미, 지훈이었다.
동작 그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교 출신 빨간 모자 ‘개’선배 호령에 매끄러운 등을 탐하던 못된 손이 버퍼링에 걸렸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느끼지 않았어요. 고해성사를 마친 못된 손이 반쯤 들린 티셔츠를 제자리에 돌린다. 마른 침을 넘겼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꾸물대던 그의 매끈한 다리가 허벅지를 감쌌다. 기세를 몰아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 솜방망이가 허리를 지분거렸다. 노골적인 엉킴에 이불 밖으로 뜨거운 숨을 뱉는다. 이윽고 소파 한 켠을 차지한 수갑이 어젯밤 잔상을 부르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가능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사고 중의 대 사고였다.
그러니까 어제 술집에서 지훈이가 수갑을 채웠고, 키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자취방까지 왔고, 조금 어색해 하다가 라면을 먹었고 스페어 키를 찾아서 수갑을 풀었지. 그러고 나서 먼저 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눈이 맞아서 뽀뽀를……. 아니 뽀뽀가 아니라 키스를……. 뇌를 자극하는 생생한 긴급 속보에 입을 틀어 막는다. 술로 필름이 끊긴다는 거짓부렁을 누가 했는지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그러나 잠에서 깬 고먐미의 인사 덕분에 공격력은 제로.
- “새벽에 자꾸 만져서 몇 번을 깼는지.”
- “…….”
- “너 때문에 불면증 걸리겠어.”
또 자는 척해. 다 아는데.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움직였다. 얄궂게 반응하는 허리가 찌르르 울린다. 하늘이시여. 고양이 신이시여. 국자의 신이시여. 태종태세문단세. 아침부터 세상의 온 조력자를 부른다. 뻣뻣한 허리를 만지는 농염한 손길에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을 때, 주야장천 천장을 보고 있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가 몸을 일으켜 내 위를 탐한 것이라. 햇살에 반사된 어렴풋한 실루엣이 점차 또렷해져 간다. 나른하게 웃는 그 얼굴이.
- “뽀.”
- “……뽀?”
- “일어나면 해준다고 약속했잖아.”
긁힌 목소리로 ‘뽀’라니. 올망졸망한 발음이라니. 섹시해. 이건 무를 수 없어. 마실 나간 정신이 집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맨다. 그가 무방비한 볼에 진한 입술 자국을 남기고 스러지듯 안긴다. 조금만 더. 한숨도 못 잤어. 불면증에 시달린 그가 입술을 맞대고 까탈을 부린다. 숨결마다 범벅된 비누 향에 녹아내리는 나를 모르고.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18 〈난 남자가 있는데>
21.
기상청이 큰 파장을 맞았다. 스쳐 가는 비 소식이라 단언한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은 강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가 되어 새벽을 강타했고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까닭에 지역 전체 비상이 걸렸다. 덕분에 학과 단톡방에 웃음꽃이 피었다. 축제 기간에도 정상 수업을 이루던 인류애 없는 호경 교수들의 휴강을 지금 막 문자로 받아냈으니.
간혹 축제의 마지막인 오늘을 애도하는 학우들도 더러 있었는데, 기계 공학과 주점에 소맥을 기가 막히게 마는 새내기를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뜻이었다. 그 새내기라 함은 내가 잘 아는 자칭 ‘A대 귀염둥이’ 되시겠다. 어차피 학업으로 날리지 못할 이름을 음주로 이뤄보겠다 큰 포부를 외치던 승관은 주점의 감초가 되어 기공 전체 수입의 절반을 이뤘더랬다.
더불어 초면에도 20년 지기 친구처럼, 실수는 능청스럽게, 분노는 해학으로 푸는 녀석인지라 이젠 자칭이 아닌 A대 공식 귀염둥이로 성장 중이었다. 지금쯤 휴강 공지를 받고 늦잠 부릴 승관의 볼록한 광대가 그립다. 수성 펜으로 동글동글 낙서할 때가 있었는데.
- “뭐해.”
- “단톡.”
- “뭐하는데.”
- “기쁨을 나누는 중.”
자신의 무릎에 앉아 딴짓하는 내가 썩 내키지 않는 그였다. 어깨너머 휴대폰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손가락으로 키패드를 무작위로 두드리며 문자질을 방해했다. 쉬는 날은 단톡 하는 거 아니야. 삐뚠 고양이의 궂은 방해에도 온전한 문장을 만드는 장인 정신이 빛을 발한다.
- “스마트폰 중독이네.”
- “눈 감고도 칠 수 있지.”
- “문자 그만해. 재미없어.”
- “잘 찾아보면 있어.”
기대와 달리 이렇다 할 반응이 없으니 다시 등에 얼굴을 기대고 좌우로 왔다 갔다 몸을 흔든다. 연거푸 울리는 진동에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잠깐만 돌아봐. 아니, 몸 전체. 실무 과목 교수에 관한 실시간 뒷담화에 흥미가 돋은 까닭에 별 다른 반응 없이 자연스레 몸을 틀어 벽을 짚었다.
올라타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집중을 박살 내는 한 마디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다. 그는 묘한 얼굴로 눈꼬리를 접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폰이 바닥을 뒹군다. 읽지 못한 메시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 “이제 물어볼 때 되지 않았어?”
- “…….”
- “난 대답할 준비 벌써 끝났는데.”
눈치가 하늘을 찌른다. 그는 중요치 않은 문자질에 집중하고 매초 예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밤 방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한 내가 깨어난 곳은 침대 위, 심지어 이부자리를 함께한 상대가 다름 아닌 그였으니 물어볼 것이 많았다. 혹 술기운에 드라마에서나 보던 예상치 못한 전개가 흘러갔는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따위의 걱정들.
타이밍을 찾지 못해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는데 기막히게 기회가 났다. 그것도 올라탄 자세는 덤으로. 백허그보다 천 배는 더 기분이 이상하다. 덩달아 입가만 쳐다보며 말하는 내가 얼마나 웃길까 생각했다.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술만 보고 말하다니.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입맛을 다신다. 지금일까. 질문의 타이밍.
- “새벽에 허리 아파하길래 옮겼어.”
- “……아.”
- “다음엔 누워서 잠만 자고.”
-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 “지금 눈으로 묻고 있는 거 아냐?”
온돌이 편하다면서 침대 가니까 잘만 자. 완전 거짓말쟁이. 그는 말랑한 미소와 더불어 내가 잠투정으로 뱉은 말을 일일이 되짚었다. 일어나면 꼭 뽀뽀해주겠다는 약속과 안아 달라 보챈 것, 그리고 밤새 티셔츠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손에 밤을 지새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 “진짜 잘 자더라. 잘 만지고.”
- “기억 못 한다고 거짓말하면 안 돼.”
- “몸은 평소에 만져도 되잖아. 뭘 그렇게 참았어.”
- “아아, 안 들려.”
- “지금 만져.”
보일락말락 티셔츠를 올린다. 아찔한 허리선에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검은 오로라. 김여주, 정신 잃지 마. 본능 같은 거 꺼내지 마. 무려 어젯밤부터 들숨과 날숨에게 이지훈을 보호하자 그리 일렀건만, 그들은 주인의 명령을 내치고 거칠게 호흡했다.
아직 ‘뽀’ 못 받았어. 그가 복숭아 같은 뺨을 내민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저곳에 ‘김여주’라는 오점을 남겨볼까 서서히 눈을 감으면, 먼저 입술 도장을 찍은 그가 배시시 입꼬리를 울렸다. 고개 숙이지 말고 앞에 봐. 또한 웃는 얼굴로 내 눈이 아닌 먼 산을 바라본다. 혹시 이것도 계획의 일부이려나.
- “……뭐해?”
- “경치 구경.”
- “갑자기?”
- “취미 생활.”
- “언제부터?”
- “자연은 참…….”
……아름다워. 코끝을 비비적대며 초점 잃은 눈동자가 경치를 찾는다. 뭔가 냄새가 난다. 의심의 냄새가. 말랑한 볼을 꼬집어도 ‘으아아-.’ 귀여운 맞장구만 들릴 뿐, 상대방의 시선은 오직 창밖 속세였다. 지훈아, 네 귀는 오랜만에 사과를 먹었니. 왜 또 빨개져서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적극적인 이지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다 습관처럼 목을 긁다 상당히 휑한 부분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이해가 빨랐다.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의 출처는 이지훈, 한마디로 말해 어깨가 큰 티셔츠가 앞으로 쏠려 노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옷을 뒤로 잡아당기는 소심한 손길에 내 귀도 새빨간 사과를 먹는다.
- “봤다 안 봤다 그것만 말해.”
- “집게로 집자 그냥.”
- “봤어?”
- “……절대.”
- “봤네…….”
빨간 맛은 노래로 충분했다. 습기 먹은 머리카락과 티셔츠가 창피함에 젖는다. 아니야. 진짜 안 봤어. 너 어깨 커. 태평양 같아. 키보드보다 넓은데. 그는 위로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 손이면 다 가려질 것을 굳이 두 손으로 가리는 이유는 벌어진 손마디 사이로 내 눈치를 살피기 위해서다.
침대로 달려가 이불안으로 몸을 숨긴다. 망했어! 진짜 망했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이불 뭉치는 벽에 착 달라 붙어 동화됐다. 다가오는 슬리퍼 소리에 쫑긋 귀를 세운다. 침대에 걸터앉은 슬리퍼 주인은 이불 뭉치에 조심히 노크를 시도했다.
- “똑똑. 계세요.”
- “없어요!”
- “여주 없어요?”
- “집 나갔어요.”
- “아아, 보고 싶어 죽겠는데.”
투정 대는 목소리에 데구르르 몸을 굴려 이불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다. 지금 되게 쪽팔려. 근데 안아주면 괜찮을 것 같아. 두더지 같다 장난치던 그가 순간 방심한 틈을 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곧이어 양팔로 날 가둔 채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 “진짜 안아줘?”
- “……응?”
- “넌 가끔…… 사람 미치게 해.”
지훈이는 오랫동안 이불 속에서 꿈틀댔다.
내 입술과 목덜미를 괴롭히느라.
오늘의 적정 온도는 얼마일까.
적어도 난 열대야 안팎을 돌 것 같은데.
23.
A대 축제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빗속으로 사라졌다. 안타까움에 좌절한 건 술을 잘 마는 승관이뿐만 아니라, 큰맘 먹고 2층 주점을 설계한 건축학과도 그랬다. 애매하게 끝난 행사에 특히 새내기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술을 찾았다. 늘 상 달고 사는 얘기지만 축제가 망하든 망하지 않든 어쨌거나 술을 찾는 아이들이었다.
학교는 중고로운 평화 나라를 맞이했다. 술집에서 호되게 당한 자그마한 여자애는 진즉 포기한 건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신경을 박박 긁는 꼬맹이가 눈앞에서 사라진 건 정서상 매우 좋은 현상이었으나, 정작 지훈은 잦은 팀플로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많았고, 그중 문제의 여자애가 속한 팀플도 있었기에 어쨌거나 불안함은 여전했다. 자나 깨나 이지훈 주변 탐색, 반경 10M 집중은 당분간 달고 살아야 할 과제였다.
깊어 가는 5월, 캠퍼스 곳곳 익숙해진 얼굴들이 눈에 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들이 안부로 관계를 유지했다.
어차피 프린트로만 수업하면서 교재는 왜 사는 거야. 교수들도 책을 팔아야 돈을 벌지. 이게 돈 지랄 아니면 뭔데. 아아, 대학은 원래 돈 지랄하려고 다니는 거야. 안부 대다수는 대학과 교수의 뒷말로 이어졌다. 불평불만은 강의실에서도 계속됐다.
- “미쳤다. 토요일에 무슨 보강이야.”
- “일요일을 피한 게 어디야.”
- “자체 공강 하고 싶다.”
- “등록금을 생각하면 열심히 다녀야지는 개뿔. 나두.”
늘어진 주말에 강의실 신세가 된 호경과 아이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교수의 지각으로 시간까지 지체된 터라 불쾌지수는 한여름을 웃돌았다. 동기들과 맨 뒷자리에 앉아 최신 화젯거리인 연예 뉴스와 드라마 줄거리 따위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로 얼굴만 알던 동기 한 명이 우물쭈물 말을 걸었다.
여주야, 오늘 시간 되면 같이 놀래? 애들끼리 가볍게 놀 건데, 이야기하다가 술도 먹고 게임도 하고……. 말꼬리가 상당히 길었다. 목적을 알 수 없어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는 허리춤에 달린 원피스 리본 끈을 베베 돌리더니 이내 두 손을 모아 사정을 했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어진다. 앞줄에 자리한 그녀의 무리도 눈길을 던졌다. 기대감 만빵이었다.
- “오늘 과팅 나가는데 대타 딱 한 번만 해주라 응?”
- “대타? 대신 나가달라고?”
- “같이 가기로 했던 애, 남친한테 걸려서 아까 대판 싸웠대.”
- “나도 남자친구 있어. 너 알잖아. 아무리 땜빵이어도 좀 그렇지.”
- “야아-,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깍두기 한 번만 해주라. 제발. 이렇게 부탁할 게. 덥석 손까지 잡은 그녀가 팔자 눈썹을 그린다. 교내 학생 수가 경영 다음으로 많은 학과에서 부탁할 사람이 나뿐이란다. 그녀는 친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우리 밥도 같이 먹은 사이 아니냐, 저번에 스탬플러 없어서 빌려줬지 않느냐 따위의 생색을 내며 곤란한 제안을 걸었다. 불편한 건 주변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과팅 때문에 남친 있는 친구를 팔아먹고 싶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전력을 쏟고 있었다.
- “여주야, 숫자만 맞춰 주면 안 돼?”
- “이지훈한테 걸리면 끝장이야. 아마 죽어서도 죽지 못할걸?”
- “소문 안 나게 조용히 갔다 오자 응?”
- “대학은 강의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 “야, 막말로 걸렸다고 쳐. 근데 시내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보여도 못 잡아.”
- “혹시 월리를 찾아라 해본 적 있어?”
- “그건 왜?”
- “이지훈이 월리 잡는 시간, 정확히 딱 5분.”
그리고 걘 실전파야. 어떤 뜻인지 알겠지. 어서 물러가 주겠니. 극단적 거부에 발을 동동거리던 그녀가 비장의 카드를 든다. 자정에 이뤄지는 기숙사 명단 확인 사인을 대신 해주겠다는 것. 고로 외박을 해도 벌점으로부터 자유가 된다는 뜻이었다. 대필이 걸리면 벌점 두 배라는 말에 그녀가 코웃음 쳤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했다.
- “기숙사 애들 서로 대필해주는 거 몰라? 사감도 모른 척 눈감아주는 마당에 뭐가 걱정이야?”
- “그래도 그건 좀…….”
- “한 학기 동안 책임질게.”
- “……너 진지해?”
- “야, 내가 과팅하려고 그동안 선배한테 얼마나 사바사바 했는 줄 알아?”
예상치 못한 딜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온다. 외박, 그것도 벌점 없는 외박이라니. 자정이 되면 볼링공처럼 기숙사로 나를 굴리던 그를 더 이상 걱정시키지 않아도 된다. 완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각이면 지각, 결석이면 결석.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삶이 가장 가치 있다 여겼던 내 인생, 이딴 것에 고뇌하는 내가 싫다. 이건 아니다. 거부해야 한다. 대 거부, 완전 거부다.
- “컨셉은 캐주얼? 아니면 가볍게 청순 정도?”
- “김여주 진심 미쳤다.”
- “친구를 구해주고 싶은 동지애라고 하자.”
-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친구를 미리 만날 줄이야.”
- “머릿수가 안 맞으면 어떻게 되겠어. ‘도레마파-토’가 되는 거지.”
파-토-. 알겠지.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눈웃음을 짓자,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무리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승관이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아이도 섞여 있다. 섣부른 판단은 지양해야 하지만, 과팅에 나가는 걸 봐서는 왠지 포기한 듯싶었다. 뒤늦게 강의 시작을 알리는 교수의 목소리에 강의실은 촘촘히 침묵에 잠겼다. 책상에 엎어져 듣는 둥 마는 둥 강의를 흘려보내다 밖으로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거짓말이 일말의 양심을 흔드는 중이었다.
- ‘응, 과제 때문에 오늘은 좀…….’
- ‘많이 바빠?’
- ‘……미안.’
- ‘뭐, 미안할 건 없지.’
강의실 복도에 까만 정적이 돈다. 꺼진 휴대폰이 못난 얼굴을 반사했다. 머릿수만 채우고 자유만 얻어가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쪽에 켜켜이 자리한 그가 못내 걸렸다. 속이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힘든, 그런 거짓말 때문에.
24.
과팅의 메카 [레몬] 간판이 빛난다. A대와 타 대학의 과팅까지도 전담 마크 하는 이곳은 예비 커플들의 성지였다. 만남의 광장답게 입구부터 시끌벅적하다. 짧은 치맛단을 밑으로 내리며 구두 굽을 확인했다. 청바지에 스니커즈가 좋은 나로서는 억지로 입은 코르셋이었으나 금세 마음을 고쳐 잡는다.
외박만 생각하자. 지훈이 집에 눌러앉을 것이다. 느릿한 걸음으로 앞서 걷는 주선자 호경 선배를 따라 걷는다. 아, 저기 왼쪽 구석. 선배가 손가락을 뻗는다. 호기심 많은 뒤통수가 일제히 선배의 목소리를 향해 뒤를 돌았다. 그중, 가장 들떠있는 뒤통수가 일어나 즉흥 사회를 맡았다. 화려한 제스처와 언변을 보아 분위기 메이커가 확실했다.
- “네! 드디어 오십니다! A대의 얼굴들이죠! 바로…….”
- “…….”
- “……김여주?”
마이클 잭슨이 되고 싶어 문워크로 후퇴하는 발목을 잡은 놈이 바로 저 곱슬머리 부승관이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큰 눈으로 되묻는 녀석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온 과팅의 상대자가 기공이었다니. 망할 놈의 인생. 한 발짝 뒤로 빠져 다른 동기 등 뒤로 바짝 숨었다. 그러자 과팅을 부탁했던 그녀가 미안하다 두 손을 모았다. 덩달아 옆에 있던, 승관을 좋아했던 아이가 귓가에 은밀한 목적을 흘렸다.
- “한 번만 도와줘.”
- “…….”
- “내가 부승관 좋아하는 거 알잖아.”
얼빠진 승관의 시선을 피해 내게 눈치를 준다. 잘 좀 도와 달라고.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차려 놓은 밥상 엎지 말고 부디 잘 먹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과팅을 주선한 선배들은 인원수를 세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제 진짜들만 남은 거다.
- “……승관이도 있었네? 우리 동방에서 면접 보고 처음 보는 거지?”
- “이건 또 뭔 소리냐? 설마 제가 반가우세요?”
- “저번에 불가사리 면접 같이 봤었잖아.”
- “네가 불가사리 면접을 봤다고?”
-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해준 거 기억 안 나?”
- “……내가 네 노래를 칭찬했다고?”
태세 전환은 빠를수록 좋다. 초면인 기공 얼굴들을 보아하니 날 아는 사람은 부승관과 호경 아이들뿐이다. 이 말인 즉, 녀석과 아이들이 입만 다물면 그만이었다. 얼척 없는 표정으로 서 있는 승관을 주먹으로 밀치며 수줍게 웃는다. 고음 잘 한다고 그랬었는데 기억이 많이 나쁜가 봐. 진즉 같은 배를 탄 아이들이 나를 따라 하하 호호 잘도 따라 웃는다. 승관을 목표로 과팅에 참석한 동기도 미소를 띠었다.
- “그럼 일단 앉을까?”
- “어딜?”
- “자리에.”
- “네가?”
승관의 눈빛은 ‘감히 너 따위가 고귀한 자리를 차지하겠다 이거냐?’였다. 소파 구석에 앉아 가방을 정리하는 척 승관의 눈치를 살폈다. 뭘 봐 이 배신자야. 참된 친구 사이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기공 학우들은 스캔하기 바빠 승관이와 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인기가 없어 수학 기호와 논다 아이들은 훈훈함이 돌았다. 부승관 이놈이 개뻥을 쳤다는 말이다. 조금 전부터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인 채 바삐 움직이던 승관이 뾰족한 눈으로 쏘아본다. 카톡으로 문자 폭탄을 맞아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양심에 털 밭 농사하세요? 이지훈은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압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좌우가 해까닥 맛이 갔어? 소뇌가 파업 중? 미친 거야? 말로만 듣던 물음표 살인마였다. 승관은 답장을 재촉했다. 변명이 가득한 문자를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결국 과팅과 외박을 교환했다는 진실을 남겼다. 녀석은 아침 드라마의 화난 부모처럼 눈을 감았다.
- “여주야.”
- “……어?”
- “이제 네 차례.”
- “아, 내 이름은 김…… 민규?”
건너편 3시 방향 김민규 발견! 김민규 발견! 공격력 85프로, 방어력 120프로, 순발력 250프로. 이지훈과 절친. 돌발행동 주의 요망. 긴급 레이더망이 작동한다. 건축과 과팅과 맞물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현장에서 걸릴까 해마처럼 등을 구부리고 못다 한 이름을 읊는다. 형식적인 소개에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가는가 싶더니, 이번엔 맞은편에 착석한 녀석이 까칠하게 물었다.
김민규가 누구냐. 인기가요 진행자. 아파 보이는데 먼저 들어가라. 오늘 머리 풀고 달릴 건데. 어떻게든 보내려는 자와 어떻게든 막으려는 자의 기운이 팽팽하다. 각자 대화를 이어가는 그때,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동기가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 어필했다. 그래서 더는 반문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귓등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 “승관아, 넌 어떤 스타일 좋아해?”
- “스타일?”
- “눈이 예쁘다거나 아니면 다리가…….”
- “난 굵은 명조체 같은 스타일.”
- “……그게 뭐야?”
- “모르면 묻지 않아도 돼.”
- “나랑 말하는 거 싫어?”
- “우리가 뭘 했어야 싫어하든 말든 하지 않겠냐.”
너는 약간 휴먼옛체 같다. 승관은 알면서도 모른 척 동기의 관심을 내쳤다. 녀석이 굳이 글씨체로 비유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워낙 복잡한 머릿속을 가지고 있는 터라 알 길도 없었다. 그렇게 승관은 1차 과팅이 파할 때까지 기본 응대 수준으로 동기를 대했고, 그녀는 착잡한 얼굴로 내게 헬프를 외쳤다.
미안한데 나도 부승관을 잘 몰라. 아는 건 삼다수를 좋아한다는 것뿐이지. 귓말로 소곤소곤 정보를 흘리자 승관은 내 정강이를 공격하며 입을 막았다. 두 배로 갚아 주기가 취미인 나는 두 발로 동기를 대신해 친절한 호감을 보냈다.
아슬아슬한 과팅이 서서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2차로 장소를 물색했고 지금이라도 빠질까 눈치만 보고 있던 나는 화장실 핑계를 댈 참이었다. 눈으로 봐도 굉장한 키의 소유자가 승관의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이지훈한테 고발. 잘 가라. 멀리 나가지 않겠다 손을 흔드는 김민규의 매력적인 도발이었다. 이미 날 보고는 신나게 문자질을 했을 거다. 가게 문을 열고 사라지는 큰 키를 어쨌거나 잡아야 했다. 은근슬쩍 짝을 맞추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뒤이어 계단을 따라 내려온 승관이 급히 어깨를 잡았다.
- “뭐야? 뭔데?”
- “김민규 어딨어?”
- “인기 뭐시기 진행자라며?”
- “이지훈 친구란 말이야!”
걸리면 끝이라고! 끝! 까마득한 군중 속에서 까치발을 들어 전봇대 같은 놈을 찾는다. 이윽고 삼삼오오 짝을 맞춘 아이들이 가게 앞에서 손짓했다. 따라갈 테니 먼저 가보라는 승관의 목소리에 그들은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승관 바라기이던 동기는 죽을상이었다.
- “그러니까 왜 과팅을 나와서 일을 만드냐.”
- “지금이라도 자백할까?”
- “이지훈한테 너랑 외박하고 싶어서 과팅 나왔다고 말이라도 하게? 퍽도 좋아하겠다?”
- “……쓰레기통 어딨어?”
난 몹쓸 인간이야. 외박에 눈먼 짐승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제일 큰 쓰레기통을 찾는다. 승관은 차라리 변명을 만들라 했다. 승관이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도와주러 나왔다는 그럴듯한 핑계들로. 거리 한복판에서 녀석과 말을 맞추며 대본을 숙지할 때였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잔 소름이 일었다. 당장 찾고 있던 민규도, 승관의 장난도, 지훈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 “또 만나네?”
- “…….”
- “밖에서 보니까 반갑다?”
때에 따라 본능은 앞을 예언한다. 학기 초 지훈이 조심하라 일렀던, 강의실에서 알싸한 담배 향을 풍기며 질문을 쏟아내던 남자였다. [레몬] 간판을 가리키며 징그럽게 웃는다. 설마 여기서 미팅했어? 이지훈은? 헤어졌고? 전처럼 개인적인 질문도 서슴없다. 옆 건물 편의점에서 나온 민규가 넉살 좋게 인사하다, 남자를 발견하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남자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승관이 내 손목을 그러쥔다. 불안하면 나오는 습관이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악수를 강권했다. 억지 스킨십에 아파하자, 승관이 저지하며 앞을 가로막는다. 화가 많이 난 얼굴이었다. 손등에 난 벌건 자국이 싫어 다른 손으로 그것을 가렸다. 한참 잘못된 상황이었다.
- “친구끼리 악수하는데 뭘 그렇게 빼?”
- “네가 뭔데 김여주 친구세요.”
- “이지훈이랑 친구면 얘랑도 친구 아닌가?”
- “뭐 잘못 먹었냐?”
- “너 이지훈 친구 맞지? 저번에 같이 있는 거 봤는데……. 아니면 김여주 세컨?”
- “별 거지 같은 새끼를 다 봤나.”
민규가 달려드는 승관을 막는다. 쟤 또라이야. 상대하지 마. 민규의 말에 남자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타이밍이 정말 거지 같게도 익숙한 얼굴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만큼 느낄 수 있다. 예민하다, 까칠하다, 공격적이다 등등 다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지훈의 시선이 승관이에게 향하다 내게 꽂혔다. 옅은 한숨이 느껴진다. 그는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도 묵묵부답이었다.
- “오랜만이다?”
- “김여주, 승관이랑 먼저 들어가.”
- “같이 술 마시…….”
- “넌 입 다물어.”
서늘했다. 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라서. 이번엔 그가 남자를 막아 세운다. 승관이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다그쳤다.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어. 빨리 와. 녀석은 도무지 갈 의지가 없는 몸뚱아리를 억지로 끌었다. 승관은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 비만 오면 금상첨화 아니냐. 정류장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던 승관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이윽고 제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애석하게 혀를 찼다.
- “이지훈은 뭔 죄냐. 과팅에 ‘과’자만 들어도 몸서리치겠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많아서 변명 같은 거 못 하겠으니까 그냥 나 버리고 먼저 가.”
- “웃기고 있네. 이지훈한테 가고 싶어서 먼저 보내는 거 모를 줄 알고?”
- “……너 솔직히 말해. 나한테 뭐 숨기지?”
알잖아, 촉 정확한 거. 구두 앞코가 승관의 종아리를 툭툭 밀어내며 심기를 건드렸다. 다른 날이면 넘겨짚는 말에 입을 털어대고도 남을 녀석이었으나, 오늘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길 뿐 이렇다 할 거리 없었다.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애초에 승관은 초면인 사람에게 이 새끼, 저 새끼 막대할 정도로 인성 바닥은 아니다. 더군다나 다짜고짜 욕 지거리를 하며 달려들 녀석은 더더욱 아니었다.
잘빠진 슬랙스가 더러워지건 말건 버스 전광판에 집중하던 승관이 얼굴을 감싼다. 마른세수를 여러 번, 작은 신음까지 뱉던 승관이 마침내 입을 뗐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서막부터 다소 충격적이었다.
저번에 강의실에서 네가 이지훈인 줄 알고 딴 놈 끌어안으셨다면서요. 아무튼 그 새끼 건축과에서 변태 또라이라고 소문난 새끼래. 새터부터 여자애들 쫓아다니는 놈이었는데 평판 장난 아니라고. 아까 네 손 억지로 잡는 것 봐라. 만약에 이지훈이 봤으면……. 아으, 생각도 하기 싫다.
그리고 여우 있잖냐. 너한테 물풍선 던지고 존나 쪼갠 밉상. 학기 초에 이지훈이 너 긱사까지 데려다주고 자취방 가는데, 갑자기 걔가 달려와서 안기더래. 누가 쫓아온다면서, 혹시 변태 아니냐고, 너무 무섭다고 징징거리고.
야, 한번 생각해 봐. 평소 이지훈 성격에 너 빼고 다른 사람 위하는 거 봤냐. 그때도 먼저 가면 그만인 걸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줬대. 혼자 있는 게 네 생각 많이 나서 무시할 수 없었나 보더라.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갔대. 말 주변도 없으면서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까지 했답니다. 그게 독인 줄도 모르고.
어쨌거나 그때부터 금싸빠인지 뭔지 그 여우가 삔또 나가서 질기게 이지훈 쫓아다녔어. 너만 없을 때 교묘히 나타나는데 내가 물증을 못 잡아서 그동안 말도 못 하고……. 그 와중에 변태는 네가 이지훈 여친인 거 알고 가끔씩 밥 먹을 때 일부러 반대편에 앉아서 너 지켜본 적도 있다니까. 왜, 내가 갑자기 자리 바꿔서 먹자고 했던 날 있잖냐. 그래, 다 그 새끼 때문에.
아 씨, 내가 너만큼 이지훈 보고 싶어서 건축도 자주 간단 말이다. 직접 옆에서 보고 있으면 진심 환장의 콜라보여. 여우는 스킨십하고 싶어 죽겠는데 이지훈은 그런 낌새만 보이면 바로 피하니까 지 혼자 안달 나질 않나, 무리에 끼지는 못하고 주변 맴돌면서 먹이 탐색하는 변태 새끼가 있질 않나.
이지훈이 나한테 조곤조곤 이런저런 일 말하는데 얼마나 안쓰러운 줄 아냐. 항상 빡쳐있었어. 네 앞에서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
불행 중 다행인 건, 오늘내일 중으로 변태 새끼 결판 날듯싶다. 며칠 전에 3학년 선배 몰카 찍다가 걸려서 안 그래도 도망자 신세인데 아까 이지훈한테 딱 걸렸으니 말 다 했지 뭐. 몰카면 퇴학 아니면 퇴학, 둘 중 하나 아니겠냐. 3학년 선배 남자 친구 사체과라던데 목숨이 남아나겠냐고.
*사체과: 사회체육과
승관의 요목조목한 정리에 점점 아구가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지훈은 남자의 본모습을 알기에 애초부터 경계했고, 여자애는 그에게 빠져 그림자처럼 졸졸 쫓아다니기, 승관이과 민규는 이 상황을 다 알기에 화가 난 상태였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승관은 나이를 먹을수록 커지는 인생 스케일에 밤낮 턱이 빠진다고 했다. 정말 비만 내리면 완벽할 날이었다.
- “네 남친은 거머리 처리하랴 덜떨어진 변태 깽깽이 새끼 박살 내랴 정신이 없는데, 넌 과팅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남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떨려? 네가 모쏠이라고? 모가지 쏠리고 싶냐?”
- “모쏠은 친구가 거들어 주다가 말한 거거든. 이건 확실히 짚고 가자.”
- “그래서 잘했냐고.”
- “……아, 알았어.”
- “조만간 각 잡고 백팔배로 사죄해.”
네가 내 여친이었으면 난 이미 전국 과팅 나가고도 남았어. 아니, 육지만 갈 거 같냐? 제주도 랜드 마크 찍고 인증샷도 보냈어 이미. 버스에 올라 뒷줄 마지막 구석에 궁둥이를 붙인 승관이 창문에 머리를 박고 꿍얼거렸다. 네가 내 친구라니. 어디 가서 자랑도 못 할 거 괜히 애지중지 키웠네. 아…… 그 새끼 얼굴 한 번 후려쳤어야 하는 건데. 허공에 잽을 날리며 후회하는 녀석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 “이지훈 아직 연락 없냐.”
- “응.”
- “설마 막…….”
- “에이, 사람 패고 그럴 애는 절대 아니야.”
- “그렇지?”
버스가 속도를 유지한 채 방지 턱을 넘었다. 붕 뜬 엉덩이가 딱딱한 좌석에 박혀 울분을 토했다. 기사님! 방지 턱인데에-! 승관의 불평에 속도를 늦추던 기사님은 다시금 신나게 엑셀을 밟았다. A대까지 무려 십분 컷을 찍은 총알 버스에 넋이 나갔다. 승관은 어쨌든 살아서 다행이라는 격려를 보냈다.
- “어디 새지 말고 바로 들어가.”
- “같이 안 가?”
- “지금 들어가기엔 이 오빠가 너무 멋지지 않냐.”
- “지훈이한테 가는 거지?”
- “심심하면 삐삐쳐.”
승관은 학교 앞 대기 중인 택시에 몸을 싣고 기껏 온 길을 되돌아갔다.
밥 먹고 자! 라면 먹지 말고! 멀어지는 중에도 창문 밖으로 들어가라 손짓하는 녀석이다.
지금은 날 생각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Epilogue.
조별 과제가 한창인 빈 강의실, 민규의 문자를 확인하던 지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현재 여주가 [레몬]에서 과팅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그는 민규가 보낸 증거 사진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과제는 과팅 나가서 하나 보네. 지훈이 여주와 했던 마지막 통화를 떠올린다. 생각해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대충 휴대폰을 챙겨 들고 일어나자, 여태 과제가 아닌 그의 얼굴만 염탐하던 여자가 행선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여주의 신경을 긁는 바로 그 여자였다.
- ‘어디 가? 밥 먹으러?’
- ‘스크립트 다 짜면 김민규 이메일로 보내. 먼저 간다.’
- ‘여자친구 만나러 가? 어디로?’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여자가 지훈의 손목을 잡는다. 거칠게 털어낸 그가 인상을 썼다. 본디 스킨쉽에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라 더욱이 그랬다. 상대는 민망한 손을 거두고 대신 짐을 챙겼다. 나도 갈래. 밥 같이 먹자. 지훈은 막무가내인 여자를 응시했다. 텅 빈 강의실, 문은 닫힌 상태. 아무런 제한도 방해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지훈의 팔을 움켜잡았다. 큰 마찰과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노트북이 꼭 상대 같다.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왜 안 돼? 뭐가 그렇게 애틋해서 사람 쪽팔리게 만들어? 걔가 뭐, 대주기라도 했어?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지훈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맨 여자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대신 똑같이 움켜잡고 구석으로 몰았다. 쥐 새끼처럼 궁지에 몰린 여자가 지훈을 노려본다.
- ‘잘 봐.’
- ‘…….’
- ‘걘 적어도 이런 상처는 안 내.’
지훈의 손목에 박힌 손톱자국이 새빨간 피를 먹는다. 울긋불긋한 것이 곧 피멍이 들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울먹거리며 지훈의 옷깃을 잡았다. 그는 잡은 손목마저 떨궈내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시답잖은 것들로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 지겨웠다. 아깝기보다 지겨웠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 ‘계범주 꼬셔서 축제 불러낼 바에 차라리 직접 말하지 그랬어.’
- ‘…….’
- ‘그럼 연민이라도 했을 텐데.’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지훈을 무대에 불러 세운 건 계범주가 아닌 여자였다. 공연 구성 따위로 얼버무리는 계범주를 밤낮으로 추궁한 결과였다. 지훈이 얼굴을 쓸어내린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둔탁하다. 여주에게 가는 것이다.
*
의외의 조합이었다. 여주는 정신이 나가 있었고, 승관은 화가 나 있었으며, 민규는 그런 승관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불쾌한 시선으로 여주를 훑는 껄끄러운 상대에 지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비조로 안부를 묻는 남자는 애초부터 지훈의 타깃이었다. 그가 여주 앞을 막고 상대의 진득한 시선을 차단한다. 승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 ‘오랜만이다?’
- ‘김여주, 승관이랑 먼저 들어가.’
- ‘같이 술 마시…….’
- ‘넌 입 다물어.’
승관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여주의 구두소리가 멀어진다. 이윽고 지훈은 남자를 응시했다. 민규는 그들 사이를 막고 지훈에게 낮게 속삭였다. 영상 한 번 찍히면 평생 간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우려한 목소리였다. 지훈이 민규를 밀어내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다가온다. 텁텁한 바람이 불었다.
- ‘여주랑 깨졌어?’
- ‘네 알 바 아니고.’
- ‘그럼 내가…….’
- ‘넌 환생해도 걔 못 만나.’
지훈은 끊임없이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남자에게 보였다. 건축과 단톡에는 대자보가 허가됐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여자 기숙사 1층을 몰래 엿보거나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쫓아가며 겁을 주는 행위 등 불명예스러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찍힌 증거 사진도 학교 SNS를 타는 중이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린다. 짐짓 웃는 것이다.
남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지훈의 손짓에 미리 대기 타던 민규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몰카 찍어서 살림살이 나아졌니? 그 선배 남친이 너 찾고 있어. 죽여버리겠다고. 민규는 남자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낚아채 제 주머니 속에 감췄다. 유독 남다른 키와 체구에 남자는 꼼짝 없이 바등거렸다. 지훈이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낸다. 무심한 위로도 함께.
- ‘네가 뭘 하고 다니든 관심 없는데 김여주 들먹이면 얘기가 달라져.’
- ‘…….’
- ‘애들이 왜 그동안 쉬쉬했게.’
- ‘…….’
- ‘한 번에 터트려야 징계 말고 퇴학을 먹지.’
다신 발 못 붙이게. 남자의 옷깃을 정리하는 지훈의 손이 차갑다. 민규의 좌표를 받고 달려온 사체과 3학년 최승철과 그 무리가 남자를 양옆으로 옭아맸다. 대자보 앞에 24시간 세워 놓고도 남을 기세였다. 민규는 이게 무슨 창피냐며 얼굴을 돌렸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지훈이 끌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막 택시에서 튀어나온 승관은 장정들과 섞여 다정히 멀어지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신 꿈에서도 보지 말자는 인사였다.
- ‘오늘 과팅도 말아 먹었네? 어쩐지 잘 되나 했다?’
- ‘이따가 이메일 확인해서 스크립트 온 거 없으면 걔 이름 빼.’
- ‘이미 없앴지롱.’
- ‘그럼 됐고.’
민규는 배를 땃땃하게 해줄 술로 하루를 마무리 짓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승관은 민규에게 제 친구인 양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민규도 제자리에서 인사를 받았다.
빽빽한 사람들이 공허한 길거리를 채운다. 승관은 습관처럼 턱 밑을 살살 긁었다. 몇 대 맞았는지 형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허무맹랑한 질문에 지훈이 작게 웃는다. 맞았으면 네가 가만히 있겠냐. 승관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명문대에도 이런 그지 같은 일이 다 있다.'
- '여기가 뭐 청정 지역도 아니고.'
- '난 일급 호수에서만 살잖냐.'
- '넌 김여주 우연히 만났어? 아까 같이 있길래.'
승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다. 같이 과팅 했어. 예쁘게 하고 왔더라. 승관은 먼지만 잔뜩 묻은 슬랙스가 제값을 하지 못한다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지훈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고자질을 시작했다.
- '김여주 오늘 작정하고 나왔다니까? 순간 딴 사람인 줄 알고 작업 걸 뻔했다고. 이거 거의 페이스오프 감 아니냐?'
- '네가 걔랑 과팅을 했다고? 기공이랑 호경?'
- '엉, 대타로 나왔는데 우리 과랑 하는 줄 몰랐나 봐.'
- '그래서 뭐…… 어떻게 됐는데.'
- '그것이 글쎄 양심에 고랭지 털 밭 농사를 하더라고? 처음 보는 척 연기를 시작하는데 거기서 난 올해 백상 예술제 대상이 여기 있구나 감탄을 했지.'
불가사리 면접 볼 때 내가 자기 고음을 칭찬 했댄다. 구라도 정도껏 쳐야지 그 음치를 어떡하면 좋냐. 승관이 음정을 정확히 무시하며 신곡을 써 내려가던 여주를 재연하다 꺄르륵 배를 잡았다.
아, 갑자기 김여주 거실에 누워서 수박 먹는 거 생각났어. 씨 뱉다가 코에 붙은 거 겁나 웃겼는데. 중국 순회공연 마친 왕서방 다시 돌아온 줄. 지훈은 깔깔거리는 승관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굳은 결심이 솟은 날이었다.
- “올해 신인상은 내가 노린다.”
- “이건 또 무슨 멍멍이 같은 소리냐?”
- “트로피나 준비해.”
제일 큰 걸로 이름 빡-, 새겨서. 볼륨 만땅인 승관의 머리를 헤집고 자리를 떠나는 지훈이다. 야! 뭔 꿍꿍이야! 나 우수상 주면 도와줄게! 승관이 지훈을 따라 속력을 낸다. 반대인 듯 반대 같지 않은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댄다.
신인상을 노리는 지훈의 꿍꿍이를 들은 승관은, 이후 그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아주 특별한 미친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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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밝았습니다 일 지옥에 갇혀 사는 중 입니다 우리 독자님들은 별탈 없이 잘 지내시죠 나중에 시험 범위 (= 일 거리) 자랑 좀 해주세요 전 결재가 후지산 급 그럼 우리 또 만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