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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의 리드보컬 변백현 X 사생팬 도경수
-6-
w. 자연으로 오세요
꿈은 언제나 헛된 희망을 준다. 꿈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허상을 보여주고, 희망을 품게했다. 오랜 불면증의 끝에는 나약해진 몸과 마음이 있었다. 꿈에는 새하얀 얼굴이 나왔다. 신기루인가 싶다가도 돌아보면 뭉게 구름 같기도 했다. 흐릿한 그것을 남상거리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람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저릿하게 가슴이 울렸다. 이유는 몰랐다. 가슴이 따가웠다. 익숙한 눈에 습기가 어려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서 쿨쿨 쏟아지는 물줄기와 대비되는 입꼬리가 이질적으로 비틀렸다. 그리고는 한없이 멀어져갔다. 순식간에 다가온 강렬한 자극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도록 뇌 깊숙한 곳에 박혀버렸다. 하마터면 꿈인 것을 잊어버릴 뻔 했다. 한없이 유악하던 새하얀 얼굴이, 그럼에도 영채롭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사고 기능을 마비시켰다. 멀리, 한 없이 멀어지는 그 얼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허상이었다. 백현은 발버둥쳤다. 꿈에서 깨고 싶었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버둥거리던 팔과 다리에 급작스러운 고통이 엄습해왔다. 낮은 비명과 함께 눈을 뜨자, 눈 앞에는 매니저의 얼굴이 있었다. 등 뒤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죽 그어졌다. 꿈과 대비되는 현실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깼냐?"
"뭐에요."
"병실. 너 전치 3주란다, 새꺄."
여상하게 툭툭 뱉어내는 그였지만, 걱정하는 기색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습관적으로 눈썹을 매만지던 매니저는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복잡해졌다. 컴백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지금 전치 3주가 말이 돼? 대표이사의 고함이 쓸쓸한 병실 안에 울려퍼졌다. 애먼 분풀이는 오롯이 매니저의 몫이였다. 회사 이미지 때문에 처벌은 힘들 것 같다는 매니저의 말에 백현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상관없어요. 매니저는 뒷목만 벅벅 긁으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건지 백현은 알 수 없었다. 쓸데없이 병실이 컸다. 찬찬히 둘러보던 백현의 눈에 작은 창문 두 짝이 걸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빗소리에 눈을 떴을 때, 백현이 눈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에도 백현이 나왔으니, 제 눈 앞에도 나타나 줄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한참을 잔 듯 했다. 들어올리는 눈꺼풀이 힘겹게 떨렸다. 몸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납덩이처럼 무거운 머리가 꿈쩍도 하지 않아 이내 그만 두었다. 고개를 돌려 제 머리맡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자, 기분 나쁜 두통이 사정없이 이마를 쑤셔왔다. 손가락 끝으로 매끈한 이마 대신 두툼한 붕대가 만져졌다.
"일어났니, 경수?"
허리를 바로 세우며 경수의 손을 꽉 움켜쥔 그녀는 하루 만에 제법 지쳐있는 표정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을 쓸어내리며 억지로 웃는 얼굴에 가슴이 쓰렸다. 괜찮니? 경수는 그녀가 유난을 떨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두통은 조그마한 미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경수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꼬박 하루를 잤다고 했다. 여태 제 옆을 지켜준 어머니가 고마웠다. 경수가 눈을 뜬 것을 본 그녀는 그제서야 막혀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내일 출근하시는 거 보고 다시 올게.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화장실과 냉장고, 리모컨의 위치까지 알려주고 난 후에야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얀 미닫이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경수는 운동화를 꿰어 신고 병실을 나섰다. 가는 다리를 감싸고 있는 환자복이 힘없이 펄럭거렸다. 804호. 병실 호수를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변백현 환자. 몇 호실에 입원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프론트의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트를 넘기며 무언갈 체크하고 있던 간호사가 고갤 들어 경수를 쳐다보았다. 다시 차트로 눈을 돌린 간호사가 무료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환자분 요쳥이라."
형식적인 대답을 마친 그녀는 동료 간호사와 함께 약품을 정리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눈을 멍하게 굴리던 경수는 프론트 옆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로비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경수는 간호사가 왜 그런 무성의한 답변을 건넸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인파는 팬과 기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진땀을 흘리며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맨 윗 층이라 안 들렸던 거구나. 한없이 고요했던 제 병실이 떠올랐다. 커다란 대학병원도 아닌, 조그마한 동네병원이 이토록 붐빈 적은 개원 이래 처음일 터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의사들은 시커먼 카메라를 문 밖으로 밀쳐내기 바빴다. 짧은 교복 치마 사이로 어렴풋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찾아온 목적은 달랐지만, 찾는 사람은 같았다. 의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딱히 방도가 없었다. 경수는 그대로 뒤돌아서 자신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표지판의 가장 윗 부분에는 8F ㅡ VIP 병실 이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경수는 확신했다. 백현의 병실도 틀림없이 이 곳에 있을 거라고.
병실은 생각보다 찾기 쉬웠다. 자그마한 동네 병원의 VIP 병실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름이 꽂혀있는 병실은 단 세 군데 뿐이었다. 두 개로 나뉘어진 복도에서 백현의 병실은 경수의 복도 맞은 편에 있었다. 새하얀 벽과 대비되는 검은색 양복이 눈에 띄었다. 경수는 그 곳으로 지체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앞에 마주섰다. 그 중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한 쪽 눈썹을 올리며 경수를 내려다보았다. 덤덤히 그 시선을 맞받아치던 경수가 당차게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요?"
검은 양복의 사내는 내리깔던 시선을 다시 정면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안됩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경수가 한 발자국 다가서자, 두 사내가 서로의 거리를 좁혀섰다. 새카만 양복이 시야를 가렸다. 마른 입술을 축이던 경수가 고개를 들고 둘을 바라보았다. 저 여기 들어가야 되요. 부동자세로 일관하는 눈빛이 서늘했다. 두 사내는 손을 뻗을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문 너머에 백현이 있다. 백현이가, 있다. 초조해졌다. 심장이 자꾸만 박동을 재촉했다. 시멘트처럼 단단한 팔이 섬약한 경수의 몸을 막아섰다. 끝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구차해보여도 상관없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성대를 긁어 내렸다. 백현이가 다쳤어요. 통통한 볼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절박한 목소리가 잠잠한 복도를 일깨웠다. 얇은 환자복이 바닥에 거칠게 쓸렸다. 얼굴만 보고 나올게요. 잠깐이면 되요. 오 분, 아니 이 분만요. 다급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목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환자복 상의를 눅눅하게 물들였다. 백현의 마음처럼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열릴 듯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경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목각같던 사내의 목이 잠시 돌아간 것은, 주저앉아 있던 경수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비척대며 일어선 경수가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제 병실에 도착한 경수는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발 밑으로 유리조각들이 투두둑 떨어져내렸다. 깨진 렌즈를 들여다보던 경수가 그것을 목에 걸었다. 가벼웠다. 손에 잡힌 셔터 버튼이 날카롭게 깨져있었다. 카메라를 품에 안고 병실을 나왔다.
퇴원시켜달라는 요구는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몸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기어이 꺾일 고집이었음에도 매니저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진이 빠진 매니저가 담배를 피우겠다며 병실을 나갔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조그마한 매지구름이 무거운 먹구름으로 변해있었다. 빗물로 흥건한 도로를 달리는 차소리가 경쾌했다. 고요하기만 했다.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병실이 등적색으로 빛났다. 손깍지를 껴 뒷통수에 댄 백현이 무료하게 하품을 했다. 삼주 동안 이 곳에서 지낼 것을 상상해보았다가 이내 치를 떨었다. 멤버들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병문안은 커녕, 전화조차 힘들 것이었다. 간간히 매니저가 음식이나 만화책 따위를 들고 찾아올테지. 아무것도 없는 병실에 오롯이 갇힌 채 그렇게 삼 주를 보내야했다. 벌써부터 벌레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듯 근질근질했다. 잠이나 잘 요량으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끈적한 반주에 맞춰 어눌한 발음을 구사하는 여자보컬의 음색이 들려왔다. 불분명한 가사에 집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있겠지. 자꾸만 떠지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머리맡에는 신용카드 한 장이 덜렁 놓여져 있었다. 이어폰을 침대 구석에 던져놓은 백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온통 컴컴한 병실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카드를 주머니에 쑤셔넣은 백현이 침대맡에 걸터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빗소리에 시계초침 소리가 묻혔다. 여름도 아닌데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매운 바람이 창문을 할퀴고 지나갔다. 어렴풋하게 천둥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멍하니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시원한 맥주가 당겼다. 지독한 소속사의 관리로 데뷔 후로는 입에도 못 대던 술이었다. 반항이라면 나름의 반항이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던 백현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꿰신었다. 간호사에게 들키면 야단맞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확신하며 백현은 병실을 나섰다. 적막이 감도는 새벽공기를 가르고 미닫이 문이 사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백현은 경수를 보았다.
"……."
얕은 숨소리가 지독히도 크게 들렸다. 복도 끝 창문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잠든 얼굴을 여과없이 비추고 있었다. 해쓱한 얼굴에 선명하게 그러져있는 눈물길이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앞머리를 약게 괴롭혔다. 그럼에도 미동조차 없는 경수를 내려다보았다. 백현은 문고리를 손에 꼬옥 쥐었다가 놓았다.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고 앞으로 가 쭈그려 앉으니 그제야 눈높이가 맞는다. 물에 푹 담가놓은 듯 축축한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하얀 붕대와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칼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구경하던 백현이 검지손가락 끝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촉감이 좋았다. 두껍게 감겨진 붕대 밑으로 피딱지가 불거졌다. 눈썹을 찡그린 백현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힘없이 떨어진 고개가 맥없이 흔들렸다.
"야."
이마를 꾸욱 눌러봐도 반응이 없다. 간혹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중얼거리긴 했지만.
"야-"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이마를 밀어봐도, 세상 모른 채 잠만 잔다.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백현이 손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지금 안 일어나면 나중에 엄청 후회한다, 너. 실없이 중얼거리던 백현이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복도바닥에 놀라 일어났다. 이런 바닥에서 몇 시간을 앉아있었던 거야. 짜증스럽게 뒷목을 긁적이던 백현이 담요를 가지러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발끝에 무언가 채였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 드르륵 하고 복도 바닥을 긁었다. 고개를 내려 확인해보면 이미 망가져 엉망이 된 카메라가 나뒹굴고 있었다. 카메라 줄이 왼쪽 손목에 꽉 묶여져있었다. 척 보기에도 더 이상 카메라의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카메라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흔연해보였다. 백현은 하늘색 모포를 덮은 채, 곤히 자는 경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거, 진짜 내 팬 맞아? 지금 눈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눈을 내리깔고 웃던 백현이 팔을 괴고 비스듬히 경수를 응시했다.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새 익숙해졌다. 내 기억 속 너의 얼굴은 온통 우는 얼굴 뿐이라서 꿈에서도 넌 눈물만 흘렸더랬다. 지금도 내 앞에서 우는 네 얼굴이 왜 이리 익숙한 건지. 나만 보면 그렇게 눈물을 흘려대는 네가 신기하다. 내 표정에 울고 웃는 네가 신기하다. 카메라에 머리를 깨지고도 보물단지처럼 그것을 끌어안고 내 병실 앞에서 슬프게 울었을 네가 신기하다.
"도경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생긴 것처럼 이름도 반듯반듯 했다. 입에 쉽게 붙은 이름을 몇 번이고 뇌까렸다. 도경수. 도경수. 팬들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길 원하고, 또 불러주길 원한다. 기껏해야 팬싸인회에서 한 번 불려볼까 말까한 이름.
"야, 도경수."
"……."
"넌 왜 날 좋아하냐."
대답없을 질문이 허공에서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