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물들다
혼잣말 둘 _ 초승달
오늘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자연스레 네가 생각나 몇 자 끄적여보려고. 네가 딱히 궁금해할 것 같진 않지만, 나는 달 사진 찍는 게 취미야. 취미? 뭔가 웃기다. 좋아해, 달 찍는 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예쁘잖아. 깜깜한 밤하늘을 홀로 환하게 비추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전에 네가 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초승달 사진에 댓글 남긴 적 있지? ‘너는 보름달보다 초승달이 더 좋아?’하고. 딱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는데 네 댓글을 보고 나서 사진들을 다시 보니까 정말 초승달이 보름달보다 훨씬 더 많더라고. 네 댓글이 달린 걸 보고는 기쁘면서도 뭔가 내 일기장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운 마음에 그냥 ‘응ㅋㅋㅋㅋㅋㅋ’이라는 실없는 답글만 남겼었는데 이제 와서 덧붙이자면, 맞아. 나 초승달 좋아해.
초승달에는 둥근 부분도 있고 모난 부분도 있잖아. 보름달도 예쁘긴 한데, 죄다 둥글기만 한 건 재미없어. 뭐, 사실 그냥 내가 보름달을 질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것 말고도 초승달이 좋은 이유가 몇 가지 더 있는데 그중 딱 하나만 꼽자면 초승달은 언젠가 보름달이 될 존재라는 거야. 아직은 얇디얇은 손톱달에 불과하지만 점점 더 크기를 키워서 둥근 보름달이 되는 꿈을 꾼다는 거 되게 멋지지 않아? 나는 그래서 초승달이 참 좋아.
그리고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불빛 하나 없이 온통 까만 하늘에 걸려있는 초승달을 보면서 나는 가끔 네 생각을 해. 아직은 저 초승달처럼 불완전한 내 사랑이 보름달처럼 완전한 모양을 갖추게 될 날만을 기다리면서. 나 혼자 하는 반쪽짜리 사랑이지만, 나는 절대 내 짝사랑이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초승달이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듯이 말이야. 언젠가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초승달을 네가 가득 채워줄 날이 왔으면 좋겠어. 너도 달을 보며 내 생각을 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겠지? 혼자 떠드는 동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슬슬 잘 준비해야겠다.
어? 잠깐만. 이 밤중에 갑자기 웬 전화?
“여보세요?”
“야 여주야.”
“응?”
“봤어?”
“뭘?”
“달!”
...달?
“오늘 밖에 나갈 일 없어서 못 봤는데, 왜?”
“지금 달 엄청 노랗고 예뻐! 너 보름달보다 초승달을 더 좋아한다며. 연습 끝나고 집 들어가는 길에 하늘 보니까 초승달 떠 있길래 생각나서 전화했지.”
내 마음속에 걸려있던 작은 초승달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물론 너는 알 길이 없겠지만.
“그건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대? 지금 보려고 나왔는데 오늘 달 진짜 예쁘다. 올해 본 초승달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
“그치.”
“응, 완전.”
“...여주야.”
“왜? 무슨 할 말 있어?”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흐른 짧은 정적. 그 끝에 들려온 너의 목소리.
“아니다.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뭐야, 싱겁게. 아 맞다, 지금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데 왜 아직도 밖이야?”
“오늘 오랜만에 밴드랑 맞춰보느라 연습이 늦게 끝났거든. 거의 다 왔어. 이제 집이야.”
“엄청 피곤하겠다. 얼른 가서 쉬어.”
“그러려고.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해 주는 게 맞긴 한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아니거든. 너 피곤하면 괜히 나한테 짜증 낼까 봐 그러지. 걱정은 무슨.”
“좀 그렇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아, 나 집 도착했어.”
“전화 끊어야겠네. 덕분에 달 잘 봤어. 고마워.”
“앞으로도 길 가다 예쁜 달 보이면 종종 알려줄게. 너 달 사진 찍는 거 좋아하니까.”
너한테 달 사진 찍는 거 좋아한다는 말 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아까 속으로 생각한 걸 읽기라도 한 건가. 어쨌든 말이라도 고맙다, 김재환.
“됐네요. 얼른 씻고 잠이나 자.”
“여주야.”
“또 왜애.”
“잘 자.”
나의 초승달이 나에게만 들리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마구 요동쳤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동안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달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알았을지, 보름달보다 초승달을 더 좋아한다는 나의 말을 왜 여태 기억하고 있던 건지, 또 그 말에 오늘 달이 정말 예쁘게 떴다며 전화까지 걸어준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해서. 밤새 고민한 보람도 없이, 알 수 없는 너의 행동들에 대한 별다른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나 해보긴 했다. 네 마음속에서도 너만의 초승달이 자라나고 있진 않을까, 너도 내가 너의 초승달을 동그랗게 메워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상상. 말하고 나니 정말 말도 안 되네. 이 상상은 그냥 없었던 걸로.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은 이제 완전한 모양을 갖출 준비를 모두 마친 것처럼 보였다. 저 달이 점점 커져 보름달이 되는 날에도 걸려올지 모를 너의 전화를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너를 기다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이로써 미리보기가 끝났습니다!
곧 본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