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찬디/찬백]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
written by. 돼지저금통
4. 권태기의 sibal점
찬열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고3 이라 9시에 마치는 경수보다 한시간 더 늦게 마쳤으므로 함께 갈 수는 없었지만 경수와 카톡을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은 충분히 꿀행복 그 자체였다. 오늘은 공부도 제법 열심히 한 것 같은 만족감에 찬열은 입에서 웃음을 지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찬열의 애교에 경수가 보고싶다며 카톡 답장이 왔다. 그 말에 경수의 집 앞으로 뛰어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찬열은 나도, 라는 말 뒤에 하트 오백개를 목표로 하고 폭풍 자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온 것은.
“이게 다야? 어? 너 거지새끼야?”
“씨발 거지새끼는 너네들이지! 이정도도 불쌍해서 준거다 개새꺄!”
“뭐?! 이 좆만 달린 계집애가!”
“씨바알- 좆이 달렸는데 어떻게 내가 계집애야!!! 눈깔 갖다 버렸냐?!?!?”
어째 대사가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영락 없이 돈을 뜯기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곳은 전형적인 삥뜯김의 장소인 어둑한 골목 안이었다. 정의의 사도 박찬열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찬열의 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누가 내 나와바리에서 삥을 뜯고 지랄이야! 경수에게서 온 카톡이 울려댔으나 찬열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그러고 보니까 너, 니가 그렇게 남자 잘 후린다며?”
“…ㅁ, 뭐?”
“우리도 한번 후려 봐. 어? 우리도 사내새끼 후장 맛 좀 보자. 씨팔 돈이 없으면 그걸로라도 떼워야지.”
아니 이게 무슨 소리?
살금살금 발걸음을 죽여 걸어 급습할 생각이었던 찬열의 귓가에 도무지 더이상은 용납 할 수 없는 양아치의 대사가 들려왔다. 후, 후려? 후장? 아니 이런 개새끼들이! 참을 수가 없어진 찬열은 우레와 같은 고함을 지르며 후다닥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약해보이는 남학생 한명을 둘러 싼 세명의 양아치들이 찬열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고 경계 태세만 갖추었던 양아치들이 돌진하는 찬열의 모습을 보고는 박찬열이다! 고함을 지르며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거기 안서?!! 너희 잡히면 죽는다!!!”
어, 물론 박찬열의 대사는 좀 이상하긴 했다. 마치 야자를 튀는 학생들을 쫓아가는 학주의 대사같았던 거다. 그러나 찬열은 자신이 제법 멋있었다고 만족하며 양아치들을 쫓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널부러져 있는 희생자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나. 자신이 들어도 어찌나 멋지고 달콤한 목소리였던지, 찬열은 자기 스스로에게 빠질 뻔 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던 익숙치 않은 교복의 남학생이 고개를 들었는데, 찬열은 눈이 튀어 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어! 너 종인이 친구! 변, 변백!”
마지막 글자는 다음에 가르쳐 드릴게요. 라고 말하고는 뛰어가던 그 하얀 얼굴이었다. 자신의 후배 종인과 카페에 있었던, 강아지처럼 순둥순둥하게 생긴 애. 그 뒤에 이름을 두번째 까지만 가르쳐 줬던 것이 기억에 남아서 아직까지 그 두글자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찬열은 대뜸 백현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휘저어가며 당황한 티를 팍팍 냈다. 백현은 아까의 당당하고 패기 넘치게 소리 지르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그때와는 다르게 눈물을 그렁그렁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찬열은 안절부절 했다. 자신보다 조그만 아이가 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을 모르는 찬열이었다. 달래줘야 하나 그냥 지나가야 하나 망설이던 찬열은, 험한 일을 당하고 쓰러져 말도 못하는 백현이 불쌍해진 마음에 일단은 백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백현의 하얀 얼굴은 눈물이 두세줄기씩 흘러내려 벌써 눈물 범벅이 되어 있다.
“흐윽…. 흐읍, 흑…… 흐어엉….”
“괜찮아, 괜찮아. 쉬…. 울지 마. 아 씨, 미치겠네.”
미치겠다, 미치겠다. 중얼거리던 찬열은 결국 백현을 품에 꼭 끌어 안고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자라도 아니 남자라서 이런 꼴을 당한것이 더욱 서럽고 창피할 것이다. 얼마나 놀랬을지 생각을 하니 찬열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우리 경수가 혹시 이런일을 당하게 될지도 몰라…. 끔찍한 상상에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저런 쓰레기같은 새끼들은 경수나 이 작은 변, 변백…어쩌구…같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박멸(?) 하고 말것이라고 찬열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백현은 찬열의 품에 안겨서 안정을 찾아 가는 듯 보였다. 찬열은 백현의 잦아 들어가는 울음을 가만히 듣다가 백현의 몸을 일으켰다. 저보다 키도 훨씬 작은게 몸은 빼짝 말라서는, 휘청하는게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 없었다. 찬열은 얼굴에 가득 연민을 담고 백현을 부축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현은 집으로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집 찾아갈 경황도 없을 것 같다. 찬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백현과 함께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는 양아치들이 득시글한 곳이지만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찬열에게는 그 어디보다 아늑하고 안락한 아지트 같은 장소였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백현은 고개를 숙이고 도통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같이 앉기는 앉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찬열은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저, 저기….”
“…….”
“변백 맞지?”
이름의 끝글자를 모르니 앞의 두글자만 부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백현은 너무 울어 빨개진 눈으로 찬열을 힐끔 올려다 보고는 다시 눈을 깔고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그 때 말했잖아.”
“…….”
“다음에 만나면 이름 마지막 글자 말해 주기로.”
그럴 상황이 아닌가, 하하하…. 말을 붙이며 찬열은 머쓱하게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백현은 그 말에 천천히 얼굴을 들어 찬열을 쳐다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실핏줄은 터져서 발갛게 물들어 있다. 아, 안쓰러워라. 찬열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백현의 부은 눈가를 쓸었다. 백현은 움찔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현.”
“응?”
“현이에요. 마지막 글자. 변백현.”
아직까지도 눈꼬리에 눈물은 맺힌 주제에 백현은 이름을 말하며 웃는다. 찬열은 그 웃음에 어쩐지 얼굴이 빨개 지는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변백현, 변백현. 백현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미안. 다시는 까먹지 않을게. 찬열의 말에 백현은 아까보다 훨씬 더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찬열은 마음이 놓였다. 백현은 신기했다. 하얗고 강아지처럼 순둥순둥한 백현을 보고 있으면 어릴적 동물을 좋아해 길렀던 많은 동물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백현은 애완동물 같았다. 사람에게 애완동물이라고 하다니, 제가 생각을 해놓고도 찬열은 화들짝 놀랐다.
그럼 안돼. 종인이의 친구니까 잘해줘야지. 찬열의 마음은 종인에 대한 의리와 불한당들에게서 백현을 지켜야 한다는 정의감으로 불타올랐다.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나 불러! 개새끼들. 혼내줄게”
“고맙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이 뭐야. 한살 차이 밖에 안나는데. 편하게 불러.”
“…선배.”
“편하게 부르라니까.”
그래도 종인이 선배라고 부르는 판에 몇번 봤다고 백현이 벌써 형형 거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현은 눈알을 굴리면서 뭔가를 잠깐 생각하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자신의 폰을 꺼내 찬열에게 들이밀었다.
“선배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어? 어떡하라고? 자신의 앞에 갑자기 들이밀어진 백현의 핸드폰에 찬열은 백현과 그것을 번갈아 보며 눈만 동그랗게 떴다. 백현은 자신의 손에 든 핸드폰을 찬열의 손에 쥐여주었다.
“번호 가르쳐 주세요!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선배 부를게요.”
그리고 백현은 활짝 웃었다. 쳐지는 눈꼬리와 네모지게 벌어지는 입이 상당히 귀여웠다. 찬열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백현의 모습에 흡족함을 느끼며 폰을 쥐었다가 잠깐 망설였다. 경수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답장도 못했는데….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윙윙 울리는 폰의 감촉이 느껴졌다. 줄까, 말까. 망설이며 눈을 굴리던 찬열은 자신을 향해 여전히 웃고있는 백현의 얼굴과 아직도 촉촉한 눈 가를 보고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좋은 선후배 사이인데 뭐 어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백현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하나 하나, 꾹꾹 눌러 입력하는 찬열이었다.
***
경수는 요즘 들어 찬열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찬열은 뭔가가 있기는 했다. 하루종일 폰을 붙잡고 살면서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하루종일 배를 잡고 낄낄대는 것이다. 경수는 자신과 데이트를 할때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찬열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폰검사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서로의 성격이 아니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고3인 박찬열 때문에 겨우 2주만에 하는 제대로 된 데이트인데, 박찬열은 아까부터 카페에 앉아 커피만 죽죽 들이키며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기에 정신이 없다. 앞에서 다리를 꼬고 불편한 표정으로 눈치를 주던 경수는 결국 눈치코치 없는 찬열에게 화가 나버려 쾅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컵을 내려 놓았다.
“형! 뭐가 그렇게 웃긴데! 나도 좀 웃자!”
그 말에 그제서야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찬열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여전했다. 심기가 불편한 경수를 뒤늦게 발견한 찬열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황급히 넣었다. 그 모습도 거슬리게만 보이는 경수의 눈썹이 꿈틀, 했다.
찬열은 분명 그저 아는 후배인 백현과 카톡을 하는 것 일 뿐이었다. 백현의 성격이 생각보다 찬열과 너무 맞았던 것이다. 찬열은 학교에서의 위치와는 다르게 카리스마는 개나 줘. 굉장히 비글스러운 면모가 많았는데 백현 또한 한 비글스러움 했던 거다. 경수는 워낙에 조용조용하고 도도해서 항상 찬열이 대화를 이끌어 나갔었는데 백현과 연락을 하면 대개는 백현이 조잘조잘 말을 했다. 그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찬열은 일이 없을 때도 백현과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 잔뜩 화가 나있는 경수를 보자 일단은 그만 둬야겠다 싶었다. 아무리 백현이 좋은 후배라도 경수가 상처를 받고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찬열은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함이 우러 나오는 것을 느끼고 경수를 향해 하트를 쏘기 시작했다.
“우리 경수 삐졌구나! 이제 형이 폰 안만질게. 우리 뭐하고 놀까? 응응?”
“…됐어.”
“우리 경수는 삐진 모습도 귀엽다. 히히, 입술이 삐쭉하네.”
찬열이 애교를 부리며 경수의 입술을 퉁, 하고 튕기자 결국 풀어져버린 경수가 프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트모양으로 벌어지는 경수의 입술에 찬열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나가자 경수야!!”
오늘 내가 너의 입술을 가져야겠다. 괜한 죄책감에 저가 평소보다 더욱 오버하는 것은 모르고 경수의 손을 잡으며 방방 뛰는 찬열이었다. 그러나 팔불출인것은 경수도 결국 마찬가지. 둘이 똑같아도 어찌나 똑같은지 도경수도 자신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종인의 연락을 애써 무시하며 찬열의 손을 잡고 사이좋게 카페를 나섰다.
그러나 그 알콩달콩 깨소금 쏟아지는 그들 커플의 마음 한구석에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꽁기꽁기한 두 사람이 그들을 자꾸만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
“경수야! 오늘은 나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집에 조심히 가….”
“즐.”
아싸. 드디어 거머리 같은 자식이 떨어졌다! 경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기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찬열이 없는 틈을 타서 집에 갈 때 마다 졸졸 따라다니던 종인이 오늘은 약속이 있단다. 이 얼마만의 자유인가. 경수는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김에 먼저 간다는 종인에게 침통한 표정까지 지어주었다. 종인은 그 표정을 보며 신나가지고선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 경수는 재촉하는 사람이 없다는 기쁨을 느끼며 평소보다 느긋하게 가방을 챙겼다.
그러나 경수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또 종인인가 싶어 확인하니 그 카톡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찬열이었다. 오랜만에 요거트 빙수나 먹으러 가자는 데이트 신청이다. 저번주에 보고 아직까지 찬열을 보지 못했다. 보고 싶어 눈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었던 경수는 튕기고 자시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OK 답장을 보내고는 아까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야자를 마치고 경수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대만이 오늘도 혼자 집에 가겠구나 하는 불안함을 느꼈다.
“종대야! 나 찬열이 형이랑 약속 있어서 먼저 간당.”
저 호모씹게이 새끼……. 벌써 홀로 독수공방하며 집에 간지도 몇개월이 흘렀던가. 찬열이 경수와 만난 뒤로는 쭉 그랬다. 본의 아니게 하나뿐인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 종대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찬열에 대한 복수심을 남몰래 불태웠다. 언젠가는 내가 박찬열 골탕 먹인다. 물론 종대의 좁은 어깨와 좋게 말하면 하늘하늘, 나쁘게 말하면 비실비실한 몸으로는 택도 없는 소리긴 하다….
빠른 속도로 교실에서 나온 경수는 학교 중앙 현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찬열과 만나 학교 근처의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본 찬열의 얼굴은 고3 티를 팍팍 내려는지 그새 좀 까칠해보여 경수의 마음 한구석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손도 잡고 뽀뽀도 몰래 하면서 카페 앞에 도착했다. 경수의 기분은 현재 최상, 경동성 요곡 운동으로 인해 동쪽으로 융기한 태백산맥의 고위 평탄면을 날아 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나 카페에 들어간 순간 경수의 기분은 순식간에 멘틀을 뚫고 내핵으로 파고 들 수 밖에 없었다.
“어!”
“어. 선배.”
찬열과 경수와 맞닥뜨린것은 다름 아닌 종인과 백현이었다.
경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저 허여멀건한 자식을 다시 보게 되다니! 그것도 종인의 옆에서……! 주문을 하려는 것인지 종인과 함께 계산대 앞에 서있는 그 망할 개새끼 닮은 놈은, 여전히 축 쳐진 눈꼬리를 해가지고선 미소지으며 찬열에게 손까지 흔드는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에 경수는 뒷목을 잡을 것 같았으나 그래도 남자는 남자. 자존심이 상하기 싫어 일단은 입술을 꾹 깨물며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찬열은 뭐가 그렇게 반가운건지 줄서있는 뒷사람들은 생각도 안하고는 쪼르르 종인과 백현에게 다가간다.
찬열을 따라 그 앞에 선 경수는 날이 선 눈빛으로 종인을 노려봤다. 어째 종인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기도 하고…. 종인은 경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 약속이 있다더니, 이 계집애랑…. 경수는 남모르게 이빨을 빠득 갈았다. 종인의 마음은 도저히 종잡을수가 없다. 저럴꺼면 좋다고 하질 말던가…. 어쩐지 억울해지는 느낌에 경수는 이번엔 백현까지 노려보기 시작했다.
“변백 넌 여기 왠일이야? 종인이랑 많이 친한가보네.”
“아하하. 뭐 다른 학교라서 가끔 만나는 거죠…. 그닥 안친해요.”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종인과 백현은 서로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사이인 것이다. 백현은 눈꼬리를 휘어 곰살스러운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종인은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분명 제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저렇게 여우같은 놈은 데리고 살기가 힘들어……. 질색팔색하는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종인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자신만의 장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뿔이 나서 노려보는 모습도 귀엽다. 저 동글동글한 눈으로 누굴 뚫겠다고… 흐히히. 바보같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수만고의 흑표범 김종인, 이대로 카리스마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야 그럼 자리 낭비 할 것 없이, 걍 같이 앉자. 경수랑 종인이랑 너희도 서로 알지?”
그 말에 경수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일주일만에 단 둘이 있을 수 있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고공행진을 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축 가라앉았다. 그러나 종인과 백현의 앞에서 투정부리는 눈꼴 시린 모습은 도무지 자존심이 상해 보여줄수 없었다. 입술이 비죽거리려는 것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경수는 찬열의 영혼없는 손이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물론 종인과 백현만 싱글벙글 기분 좋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럴수가. 백현과 작전 회의를 하기 위해 만났다가 이런 때 아닌 횡재를. 장미와 함께 빙수를 먹을 수 있게 된 종인은 이따가 백현에게 자그마한 사례라도 해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백현은 또 백현대로 찬열을 더 오래 볼 수 있으니 그게 좋았다.
각자 먹을 것을 시키고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입을 먼저 뗀 것은 찬열과 백현이었다.
“야 근데 너희 둘이 되게 안어울린다. 절대 안친할 것 같은데.”
“으학학. 그쵸. 제가 이런 놈이랑 놀아주니까 아깝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찬열과 백현 둘이 깔깔 웃고 난리가 났다.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지? 조잘대는 찬열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경수의 눈빛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저와 함께 있을 때는, 저정도로 신나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찬열이었다. 분명 경수와는 다른 편한 사이기에 풀어진 것도 있을테지만 경수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종인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고 그저 경수의 표정 변화를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관찰 하고 있었다. 찬열과 경수가 싸우는 것은 자신이 미치고 팔짝 뛰도록 원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경수가 저렇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자신의 마음에도 경수의 감정이 전이되어 심장 한구석이 찌릿찌릿한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근데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백현과는 아직 제대로 인사조차 나눠 본 적이 없는 경수였다. 날이 바짝 선 경수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찬열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곧 어색하게 하하하 웃음을 지으며,
“야 그러고 보니 둘은 얘기 한 적이 없네. 변백, 우리 경수 알지?”
“얘기 많이 들었죠. 선배가 그렇게 애지중지한다고…… 안녕.”
말꼬리를 흘리면서 저를 슥 훑어 보는 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경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어, 안녕. 그러고 답변을 했다. 마지못해 벌어지는 하트모양의 입술이 오늘따라 처량했다. 종인은 물론 그 모습조차도 예뻐서 침을 흘릴 지경이었지만.
“아 근데 선배.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그 게임 있잖아요.”
“어어. 너 그거-!”
아니 저년이. 경수의 말은 보란듯이 무시하고 다시 찬열을 보며 어쩌구 저쩌구. 온통 경수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들이 오고 간다. 경수는 서운함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까부터 찬열은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다. 네명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대화는 오직 찬열과 백현 사이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종인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까부터 느껴졌다. 그것이 더 서럽고 억울했다. 모든 원망의 화살이 종인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쟤를 데리고 하필 이 카페에 와선……. 하지만 가장 원망해야 할 대상은 찬열이라는 것을 경수도 알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전에 한번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눴을 뿐인 백현과 어떻게 그렇게 친해 질 수 있었는지, 어떻게 둘이 평소에 연락을 하게 된건지, 어떻게 벌써 「변백」 이라고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게 된건지, 백현은 자신과 찬열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는 있는건지 궁금한 것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백현의 앞에서 경수는 한마디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종인이 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그런 말을 꺼내기에는 자신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괜히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오버하는 것 처럼 보일까 싶기도 하고, 또 찬열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와 자신이 상처를 받게 될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 불편한 자리를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그토록 보고싶었던 찬열의 얼굴도 더이상 보고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아까부터 찬열과 얘기하다 말고 자신을 흘끔흘끔 보는 백현의 시선이었다. 정말 평소 성격 같았으면 뒤통수를 한대 때려주고도 모자랐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 같고, 깔보는 것 같았다. 찬열의 옆만 아니었어도 분명 뭐라고 욕을 지껄였을 것이다. 억울하고 분통했다. 찬열을 백현에게 뺏긴 것 같았다. 지금 일어서서 집에 간다고 할까, 그럼 너무 비참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툭툭. 누가 테이블 밑으로 경수의 다리를 차댄다. 경수는 눈을 깔고 빙수 그릇을 노려보고 있다가 눈동자를 굴려 발의 주인을 보았다. 종인이었다.
“…….”
종인은 씩 웃으며 입모양으로 「심심하지.」 그러는 거다. 평소에는 그렇게 부담스럽고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웃으면서 하는 그 입모양이 어찌나 다정하게 느껴지던지. 경수는 울컥하는 것을 꾹 참으며 다시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즐.」 하고 입모양으로 욕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종인은 계속해서 발로 경수를 쿡쿡 찔렀다. 딴데를 보다가도 종인이 자신의 다리를 찌르면 집중이 되지 않아서 경수는 몇번이고 자신의 다리로 종인의 발을 쳐냈다. 그러나 종인은 굴하지 않고 킥킥 웃으며 계속 경수의 다리를 찌르는 거다. 옆의 찬열을 힐끔 보니 아직까지도 백현과 대화를 하느라 경수가 꿈지럭거리든 말든 종인이 킥킥거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어쩐지 억울함을 느낀 경수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발을 쭉 뻗어 심술을 가득 담아 종인의 다리를 쓸어 올렸다.
“헙.”
경수의 노골적인 발짓에 깜짝 놀란 종인은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 말에 그제서야 놀란 찬열과 백현이 종인을 쳐다봤다. 종인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그 행동에 재미를 붙인 경수는 두 발을 달랑거리며 자꾸만 종인의 다리를 쓸어 올리고 쓸어 내리고 난리가 났다. 얘가 왜이래……. 기죽어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장난을 걸어줬더니 이런 도발을 하고 앉았다. 슬슬 작은 종인이가 설 것 같았다. 종인은 울상을 짓다가 반격을 하기 위해 경수보다 훨씬 긴 자신의 다리를 이용해서 경수의 허벅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치는 종인의 발에 경수는 짜증을 내며 그것을 몇번 밀어 내다가는,
“아!”
하고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나게 된 것이다. 종인과 경수의 테이블 밑 다리싸움을 알 리가 없던 찬열과 백현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경수는 이렇게 된 이상.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나 집에 먼저 갈께.”
그러고 찬열이 붙잡는 것도 무시하고 돌아서다가는, 별안간 홱 돌아서선
“너 다리 분질러버린다.”
이러고 종인에게 귀엽게 손가락질을 하고는 씩 웃어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영문을 모르는 찬열과 백현만 서로 아이컨텍을 주고 받으며 멀뚱멀뚱 서있을 뿐이고, 아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표정와 발걸음으로 경수가 카페를 나가고 있을 뿐이고, 앉아서 벙쪄있던 종인만이 신이 나서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찣어져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찬열은 카페 문 앞까지 경수를 따라 나섰다가, 경수가 화가 난게 아니라 너무 추워서 일어 난 것이라고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말에 다시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경수는 끝까지 끈질기게 붙잡지 않는 찬열이 서운해 입술을 씹으면서도 결국은 발걸음을 카페 밖으로 돌렸다. 그 때였다. 종인이 벌떡 일어 난 것은.
“저도 먼저 가볼께요, 선배. 낼 학교에서 봐요.”
“어? 어? 변백 너는?”
“아 김종인 뭐야. 배신자.”
“저 집에 엄마가 불러서요. 경수도 집에 가고 해서….”
“아, 그럼 종인이 너가 경수 좀 데려다 주라. 너 경수랑 좀 친하지? 내가 부탁할께. 경수가 나한테 화난게 좀 있는 것 같은데….”
찬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우, 저 병신에다가 눈치 코치 없는 호모씹게이새끼…. 아까 카페를 나가던 경수의 아련한 표정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던 종인만이 속으로 열심히 찬열을 까며, 얼른 경수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백현에게 아까 더치페이 했던 빙수값을 건네고 뛰쳐나갔다.
한편 카페 밖으로 나와 혼자 터덜터덜 걷고 있던 경수의 기분은 종인 덕에 좀 나아졌던 것이 다시 바닥을 기어, 최근의 기분 중 가장 최악이었다. 오늘의 데이트는 찬열과 만난 후로 해왔던 데이트 중에 가장 비참하고, 가장 슬펐다. 언제나 자신의 행동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던 찬열이었다. 항상 다정했고 경수를 챙겨줬었다. 그런데 오늘 찬열의 모습은 낯설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사람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과 있었던 시간보다 더욱 들떠서 얘기를 하는 것이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 슬펐다. 나는 아직도 많이 좋아하는데…. 카페에서 나와 어두운 길을 혼자 걷고 있자, 결국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다. 발갛게 달아 오른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경수는 옷 소매로 슥 닦아냈다. 너무나도 서러웠다.
나쁜놈, 나쁜놈. 찬열을 수도 없이 욕해봤지만 결국은 하나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찬열은 어떨지 몰라도 경수는 이제 너무나도 찬열을 좋아하게 되버린 것이다. 그동안 찬열에게 너무 튕겨서 그런가? 그래서 찬열이 그렇게 여우처럼 구는 그 개새끼 자식에게 반해버리기라도 한건가……. 이제 더이상 찬열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에 까지 생각이 이르자 경수는 결국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어린애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경수!”
그 때였다. 마치 구원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김종인이었다. 항상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귀찮게 굴고, 끈질기게 구는 진드기 김종인. 종인은 경수의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아 놀란 얼굴로 경수의 눈가를 자꾸 쓸어주었다.
경수는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평소에 그토록 싫어하던 종인이 자신을 달래고 있는 것도 상관을 안쓰고 그냥 지금은 너무 슬퍼서, 종인이 자신을 안아주는데 그 품에 안겨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렇게 슬플 줄이야……. 아직까지도 카페 안에서 백현과 얘기를 하고 있을 찬열이 생각나서 더더욱 마음이 쓰려 왔다.
“울지마. 경수야, 울지마.”
“흐읍, 흐어엉……허어엉… 흐윽, 흐윽….”
한편 종인은 다른 의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까 카페에서 나와 경수가 혹시라도 멀리 가지 않았을까 싶어서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쳐 나왔는데, 길거리에서 쪼그려 앉아 펑펑 울고 있는 경수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이라도 백현에게 모든것을 엎자고 말할까. 그럼 경수는 어떡하지. 포기 할 수는 없는데. 어떤 생각이 들던 간에, 그 순간 종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종인이 저도 모르게 하게 된 일은 그저 울고 있는 경수를 달래주는 것 뿐이었다. 경수는 아주 섪게 울었다. 항상 도도하고 가시가 돋혀 있던 경수의 모습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너무 귀여웠고, 그것마저 사랑스러웠고…… 하, 포기 못하겠다. 김종인은 더더욱 도경수를 포기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미안해, 미안해. 모든것이 분명한 종인의 잘못이다. 그러나 종인은 그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의 장미가 나의 정원으로 옮겨 오는 그 날 까지. 종인은 안타깝고 마음이 찢어지지만, 조금만 더 경수를 울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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