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찬열] 사신밀담 02
(부제 : 우연하게도 최악의 소년)
자,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장엄한 사랑의 러브러브 대 서사시 전생 스토리는 이쯤에서 끝이 난다.
대략 축약하자면 김 아무개와 박 아무개가 사랑을 했는데 둘은 정말 쎄고 운명의 붉은 실로 엮인 중대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 아무개의 아버
지 되시는 상이라는 아무개가 둘 아무개의 사랑을 방해하고 결국 애비가 아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며 박 아무개와 김 아무개에게 누명을 씌
워 아들에게 애인의 목숨을 담보잡아 봉인하는 초 대형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근데 둘은 그거랑은 상관없이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거의
죽어가는 박 아무개를 위해 봉인을 스스로 깨고 나온 김 아무개로 둘은 재회했고 최후의 투쟁 이후 결국 둘은 동반자살했더랬다.
그리고 둘을 지키지 못한 친구들은 이순재 옹의 폭풍 카리스마 말씀을 듣고 분발! 하며 복수를 예정한다는 내용이다.
자, 이까지 보면 참으로 눈물나는 사연 아니겠는가?
하지만 과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 둘이서 상에게 내린 저주와 함께 약속했던 미래의 행복을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연 둘은 어떻게 재회할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다시 사랑을 나눌지?
그것은 오로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둘만 아는 얘기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시간이 유수같이 흘러, 2012년 3월 3일의 대한민국.아직 꽃샘추위긴 하지만 여전히 커플천국 솔로지옥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봄이란 솔로에게 심히 고통의 계절이렷다.
그러나 이 고통의 계절에서 떳떳하게 승리하여 이제 막 백일이 넘은 여자친구를 자랑스럽게 두고 계신 의지의 휴학생이 있었는데.
- 야 박찬열, 여기 물건 좀 날라라!- 컥!..네.
돈은 없고 밥은 먹어야겠고, 결국 알바하는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모레까지인 폐기처분 직전의 컵라면을 주식삼아 휘휘 젓다 막 한입 넣고있던 찬열은 타이밍 좋게 들어온 물건에 쿨럭대며 일어섰다. 아 왜 하필 한 젓가락 할 때 온거야.. 라면 다 불겠다.. 처참히 불어가는 신라면
에 애도하며 열심히 물건을 나르는 찬열은 휴학한 지금도 알바로 스케줄이 장난 아니게 빠듯했다.
" 이 짓도 이번 달만 지나면 끝이다.. "
그나마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는 것에 위안을 느낄 뿐이었다.
그래봤자 5월부터는 다시 서빙 알바 같은 것을 해야겠지만 말이지. 간간히 등록금이라도 벌어야 내년에 다시 복학할 수 있다.
일찌감치 통장 하나만 남긴 채 부모님과 일가친척 전부가 돌아가신 찬열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찬열이 여덟 살 무렵에 일
어난 일이었기에 그야말로 집안 꼴은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빚이라던가 빚더미라던가 빚이라던가는 없었지만 남은 거야 통장 하
나, 약간의 보험금, 그리고 다 타버린 집 뿐이었던 탓에 어찌하기도 쉽지 않아서 고아원에 잠깐 보내지기도 했었다. 한번 입양되기도 했지만
곧 파양당했고, 왠일에서인지 팔자가 지나치게 나쁘던 찬열에게도 좋은 일은 있었다. 부모님의 재산을 정리해주신 변호사 아저씨가 찬열의
재산을 중학교 때까지 관리해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학비를 건사하기가 쉽지 않았던 찬열은 자퇴를 고려하
기도 했지만 특징 중 하나인 큰 키와 반반한 외모 덕에 간간히 생계형 모델로 살아가며 학비를 벌고는 했다.
그래서, 스물한살이 된 지금.등록금과 모델 오디션을 위해 대담하게 휴학하고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등록금은 지나치게 비싸
고 오디션은 하나같이 다 떨어지기만 한다. 제일 배알꼴리는 점은 최종 오디션까지는 붙고 최종 오디션 현장에서 떨어진다는 점이다. 어쩐
지 매력이 좀 부족해요, 얼굴이 너무 예쁘장하기만 해요, 화보에 잘 어울리는 페이스긴 한데 너무 중성적이에요 등등 2%가 부족하다는 얘기
를 숱하게 듣는데 뽑힌 애들을 보면 사실 찬열보다 못나 보였다. 돈칠 좀 해서 얼굴 건든 애들도 많아 보이던데, 결과적으로는 역시 돈 없고
빽 없는 찬열에게 잘못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 빨리 안 날라? 너 그러다가 짤린다!" 아, 알았어요 형. "
창고 문은 좀 열어놔요.그나마 여친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진정한 루저가 되었을 뻔 했다. 아, 물론 키 빼고.
막 들여온 물품들을 창고로 옮기고 다시 계산대로 돌아온 찬열은 이미 불어버린 컵라면을 씹으며 휴대폰을 보았다.문자 메세지가 두 통 와 있었다. 한 통은 김미영 팀장, 광고고.. 얽! 한 통은 에이전시에서 온 거다.
원래도 큰 찬열의 눈은 이제 아주 왕방울만해졌다. 같이 일하는 형이 물었다. 결과 나왔냐? 끄덕끄덕, 아무리 떨어진다고 해도 밀려오는 기대
는 어쩔 수 없다. 기대에 부푼 마음이 천천히 메세지 란을 클릭한다. 아주 지랄을 해라, 자신을 디스하는 형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찬
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붙어라, 붙어라, 제발 부탁이니까 꼭 붙어라…
[귀하는 이번 오디션에 최종 불합격 처리 되셨습니다.]
떨어졌다.
찬열의 썩창이 된 표정을 바라보던 형이 등을 툭툭 치고 나갔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가게 잘 부탁해, 짜샤.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나가는 준태 형의 뒷통수를 따갑게 째려보던 찬열은 한숨을 쉬었다. 아, 오늘은 붙을 줄 알았는데..
" 아, 형! 문은 열어놓고 가라고요. "
에잇, 시발. 삼겹살 데이에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냐.찬열은 여전히 계산대에 앉은 채 불어터진 라면을 씹으며 인생은 왜 이렇게 맘대로 안 풀리냐에 대한 고찰을 하기 시작했다.
[야, 말도 안돼. xx아, 넌 제자고 난 스승이다? 나이 차이가 얼만줄 아냐? 사백 살이야, 사백 살.][어쨌건 젊잖아, 형도 혼자잖아. 요새 천계에 사백 살 차이가 뭐 얼마나 된다고 그러는 건데.]
[너 말이 좀 짧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린 안..읍!]
[쪽, 도장 찍는 거에요. 형이 내 애인 하고, 마누라 하고 다 하면 되겠네.]
[너 지금 좀..이상한 거 아니지 진짜?]
[이상해요.]
[헐.. 너 진짜 아픈가봐, 어서 의원한테 가자. 너 지금 중증인거 같은데..]
[형 때문에.]
상사병 걸렸어,
어깨를 으쓱하는 소년의 말 한마디에 결국 찬열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 깜빡 잠이 들었다. 손님이 워낙 없어서.
그나저나 그건 무슨 꿈이래, 진짜 뭐 별난 꿈이 다 있네. 작게 하품을 하다 멋쩍은 얼굴로 아무도 없는 가게 안에서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찬
열은 마침 온 카카오톡에 화색을 드러내며 답장을 보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친-물론 찬열은 그 전에도 여러 번 여친을 사귀었다.
단지 지금의 여친일 뿐이다- 민지였다. 찬열이 휴학한 대학 퀸카인 민지는 경영학과 재원이었다. 반반한 외모가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
은데 찬열은 사실 그렇게 성격이 모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연애 경험도 어느 정도 되고, 나이트도 가고 즐길 것도 다 즐기고 하는 건 맞지만
무엇보다 여자친구가 한번 생기면 절대적으로 그 사람에 올인하며 정말 잘하는 스타일이라 여럿 여자들이 찬열을 좋아했다.
바람 잘 피는 나쁜 남자보단 현실적으로 착한 남자가 더 좋잖아요 여러분?
[민지야미안알바때문에바빠서][전화해도돼?]
[응?ㅇㅇ]
곧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에 찬열은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다.곧바로 이루어질 대형 참사는 생각도 못한 채로.
[연락 못해서 미안, 내가 좀 바빴지. 민지야.]
[괜찮아.]
[우리 데이트 할까? 시간 괜찮을 때 말해줄래? 나 시간 비울게. ]
[찬열아.]
[응?]
[…우리 헤어지자.]
나 미국 가, 미안.
그러고서 뚝 끊어진 전화에 찬열은 한동안 멍한 채 휴대폰만 계속 붙들고 있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 야. "" 왜..어,어,네? "
계산 안 하냐?적어도 존나 띠꺼운 표정으로 신분증도 없이 말보로 레드를 들이미는 패기를 내비치는 손님만 없었어도 찬열의 방황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 이게 두 사람의 띠꺼운 첫 만남이라는 점이다.
" … 신분증 있어야 계산이 되는데요, 손님."" 됐고 달라고. "
" 신분증이 있어야… "
" 존나.. 야, 성인 맞으니까 그냥 달라고. "
" … 야. "
" 허, 야? "
그러니까,
" 너 몇살이냐? "
대화만 봐도 슬픈 과거사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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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폭풍연재다 폭풍연재현세편은 분위기가 밝아요 ㅎㅎ 제가 얼마나 개그를 잘 칠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쭉 밝습니다.. 뭐 그렇다고 맨날 천날 밝다는 건 아니
고..음.. 여튼 이 팬픽은 진지물이 아닙니당 ㅎㅎ 덧글 좀 달아주세요 저 그걸로 먹고 살아요..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