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마음속엔 첫사랑을 어미 오리가 제 자식을 안듯 품고 살아간다고 하는데, 그건 저마 다로 인해 모순이 담긴 말 이었다. 첫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종교적이나 사상에 의해서 그걸 애초에 안 만드는 사람도 봤었고. 첫사랑이면 뭐, 근데? 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기에. 또 뭐더라,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그리고 이건 그 저마다에 속한 누군가들의 얘기다.
마이 오매불망 첫사랑
01. 안녕 열여덟
열여덟이라고 별 다를건 없었다. 중학생을 벗어난지 고작 세 달이 흐른 열일곱을 지나 갑자기 어른이 된다거나 하는 마법은 없었다. 그리고 내 온몸의 신경회로를 자극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가슴이 이상하게 찌릿거리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는 건. 그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 진짜 존나 잘생겼네. 이 두근거리는 이상한 감정을 과연 나만 느끼는 것일까. 왜 아무도 박지민의 매력을 몰라? 저 작은 손으로 거칠게 넘기는 머리카락도 잘생겼고, 가끔 급식 먹을 때면 볼 안에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거리는 모습은 존나 귀엽고.. 변태 같지만 나는 이런 오매불망 박지민을 1년째 짝사랑 중이시겠다.
내가 박지민을 어쩌다 좋아하게 됐는지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가 존재하지만 여하튼 설명하려면 시간을 거슬러 일학년 학기 초, 아니 중반쯤으로 가야 할 거다. 점심을 먹고 곧장 매점으로 달려가 새콤달콤을 맛별로 골라 계산 하려는데, 이모 이거 왜 딸기 맛은 없어요? 라고 물어보는 웬 목소리. 어 나도 몰랐는데.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그 작은 손에 쥐어진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새콤달콤 딸기맛이 있던 빈 통을 가리킨 남자애가 서 있었다.
“방금 다른 여자애가 사 가던데, 어쩌지?”
매점 이모가 남자애에게 아깝다는 표정을 짓자, 남자애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자기도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쭉 내밀었는데, 그걸 본 나의 눈이 인지를 하고 뇌로 전달하여 머릿속에선 바로 ‘귀여운 애’라는 신호가 입력, 완료. 그렇게 안녕히계세요 라며 인사를 끝낸 남자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서둘러 계산을 끝내고 그 남자애를 쫓듯이 매점을 나갔고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수진아. 쟤 이름 알아?”
“누구.”
제 친구들 사이에 끼여 있는 제일 키가 작은 남자애를 어느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었다. 아, 박지민?
“이름이 박지민이야?”
그 남자애 이름이 박지민인줄은, 그 날 처음 알게되었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데, 아직 열여덟 밖에 안먹었는데 심정은 이미 노년기였다. 이러다가 박지민이랑 대화 한번 못하고 졸업할 꼴이었다. 바로 옆반인데 어째 마주치는 법이 한 번도 없는가. 그렇다고 내가 직접 찾아갈 때면 박지민은 늘 반에 없곤 했다. 이십 세기 판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 아 그건 서로가 좋아했지 참.
“심란하니까 가줄래.”
또 박지민 생각하고 있지?
그래도 이 진득한 짝사랑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있긴 있더라. 전정국은 언제 온 건지 어느새 내 옆자리에 자리 잡고선 바나나우유를 쪽쪽 맛있게도 먹고 있었다. …저거 지민이가 먹던 건데.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것도 고질병인 게 분명하다. 바나나를 보면 지민이가 생각나고. 새콤달콤을 보면 지민이가 생각나고...
“진짜 성실하다. 어떻게 한 번을 안 빼먹고 좋아해.”
“내가 너로 태어났어도 박지민을 보면,”
거기까지, 그건 아닌 거 같아. 전정국이 말을 잘라먹고 다 비어진 바나나우유 통을 들고 교실을 나갔다. 아니야, 난 확고해. 교실을 빠져나가는 전정국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턱을 괴다가 전정국이 내 옆자리에 펼쳐놓고간 수학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그저 손은 박지민을 향한 나의 감정의 표출이라고 해야하나, 손에 들려있는 샤프는 박지민 이란 석자를 적어놓고 계속해서 덧칠해나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걸 네가 적으셨다구요?”
“미안.”
“근데 말이 되냐, 탄이들 지민.”
그러게. 아무래도 내 머리는 박지민을 떠올릴 때를 제외하곤 무용지물인가봐. 전정국은 나의 말을 듣고 아주 그냥 떠나가랴 웃었다. 그래 너만 즐겁지.
“이번에 동아리 정해야 하잖아, 정했어?”
“아니.. 아직. 넌 뭐 할건데?”
수정 테이프로 열심히 박지민의 이름을 가려주며 전정국에게 물었다. 전정국은 냉큼 축구.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생각해보면 전정국은 잘하기도 잘했지만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소속 작은 축구부에 들어갔다가 중학교 때엔 나도 한번쯤은 들어 본적 있던 축구 협회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 왔었는데,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잠시 활동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다는 나름의 사연이 있는 남자였다. (물론 이 모든건 전정국의 소꿉친구 김태형에게서 들은것으로.)
어쨌거나 전정국은 나와 다르게 청춘이었다. 비유하자면 난 아픈 청춘, 넌─ 약간 청춘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라고 해야할까. 박지민을 좋아하는 내 마음과 별개로 전정국은 확실히 잘생긴 편이었다. 그 사실은 다른 여자애들에게 당연하게 작용했고, 난 그 청춘드라마의 주인공인 전정국 옆 하나의 인물1, 인물2 같은 존재. 어쩐지 전정국과 같은 반이 되고 난 이후부터 전정국에 관련된 각종 기념물 전달과 고백을 내가 담당하고 있었다. 가끔씩 재수가 없어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박지민에 대한 나의 구구절절한 심정을 들어주는건 전정국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나는 철저하게 을인 셈.
“부럽다. 그래도 하고 싶은거 있잖아. 난 이번에도 적당히 독서동아리나 할까 싶은데.”
“……너 진짜 몰라?”
박지민 이번에 동아리 만든다더라. 이미 나는 박지민한테 이상한 애로 낙인 됐으리라 싶어 그저 한탄만 하던 찰나 전정국의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놀래라.”
“뭐.. 만든다는데?”
전정국이 손에 쥐고 있던 수정테이프를 삐끗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덧붙여서 넌 정말 박지민 빼고 관심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동아리 홍보 포스터가 바로 우리반 앞에 붙여져 있다는데, 왜 난 몰랐을까. 바로 교실 밖을 뛰쳐나갔다. 전정국의 말대로 정말 대놓고, 못 본 사람이 뻘쭘할 정도로 크게 붙여져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자율 동아리원 모집-
오로지 박지민만을 향한 나의 사고회로가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