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씨에 바람까지 살랑이는 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자 가만히 있어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오를 것만 같은 계절이다. 근데 시발. 이런 날에 내가 왜 박찬열따위의 병문안을 가야하지? 봄에 감기가 웬 말이야. 손을 부들부들 떨며 죽이 든 봉지를 바라보곤 진지하게 생각했다. 확 침이나 뱉어줄까보다. 애꿎은 죽 봉지를 노려보며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로 아프다며 다 죽어가는 척 연기를 하던 박찬열이 얄미워 괜히 속으로 투덜대는데 휴대폰이 진동으로 제 몸을 울려댄다.
[ㅇㅇ아, 뭐해?]
[나 지금 박찬열 병문안 가는 중ㅠㅠㅠ]
[어디 아프대?]
[응 감기걸렸나봐]
[나 심심한데, 같이 가줄까?]
[헐. 진짜? 그러면 고맙ㅈ]
죽 봉지를 손목에 걸고 은혜로운 민석이와의 톡을 열심히 정성을 다해 하고 있는데 고맙지, 하고 전송을 누르려던 찰나에 고개를 푹 숙인 내 시야로 여러 명의 신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좆된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자 얼굴에 나 일진이에요, 하고 적혀있는 남학생 무리들이 삐딱하게 앉아있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게 없어... 대체 왜... 한 번쯤 틀리면 얼마나 좋아!!
"하하하... 죄송해요. 하던 거 마저하세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뒤돌아 빠르게 골목을 벗어나자 다행히 쫓아오는 소리는 없는 것 같다. 시발. 오늘 일어난 일 중에 제일 잘된 일이야. 이게 다 박찬열 때문이야ㅡㅡ 욕이라도 실컷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휴대폰을 보는데, 잊고있었던 민석이의 애타는 톡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ㅇㅇ아?]
[ㅇㅇ아.]
갑자기 끊긴 대화에 어리둥절하게 보냈을 톡에 내가 민석이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은혜로운 민석이를 걱정시키다니. 망할 나년. 아니지, 이건 다 박찬열 때문이야.
[미안미안ㅠㅠㅠ]
[무슨 일 있었어?]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일진같은 애들 만나서]
[괜찮아?]
[응ㅠㅠ 무서웠는데 걔네들이 그냥 보내줬어. 요즘엔 착한 일진도 있나봐.]
[ㅋㅋㅋ귀엽네.]
헐. 미친. 지금 나보고 귀엽다고 한 거야?? 저 애매한데 설레는 귀엽네. 는 뭐지?! 민석이의 한 마디에 놀라움과 설렘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내 팔을 누군가 갑자기 턱, 잡았다.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팔을 따라 팔의 주인을 바라보자 웬 눈 큰 애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잠깐 나 좀 따라와."
"???"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어 멍 때리고 있을 동안 나는 어느 새 눈 큰 애를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신종 인신매매인가...? 페북에서도 그런 소린 못 들었는데...?? ...아까 그 일진인가? 시발. 그러고 보니 교복이 똑같은 것 같아!!! 이런 썩을. 하여간 박찬열 그 새끼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연달아 쌓이는 빡침에 잡히지 않은 팔을 이용해 휴대폰을 고쳐잡곤 왕년에 한컴타자 400타였던 나는 박찬열에게 문자로 그 실력을 뽐냈다.
[박찬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문자를 보냄과 동시에 눈 큰 애가 멈추는 바람에 민석이에게는 답장을 보내지 못한 게 좀 아쉬웠지만 어차피 저 설레는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도 몰랐으니까, 하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박찬열 때문이네 아주!!
"데리고 왔어."
"... ..."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이지만 왜 슬픈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지.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눈 큰 애는 두목(...)격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데리고 왔다며 말했고 눈 큰 애에게 돌아온 건 두목같은 아이의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부쨩해...
"시발, 어딜 잡아."
"...??"
뜬금없는 두목같은 아이의 말에 당황한 건 나 뿐만이 아니라 눈 큰 애도 마찬가지인듯 보였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선 뭔 개소리야? 하며 두목같은 아이에게 개긴다. 저래도 되나? 싶은데 두목같은 아이가 손목. 이라며 짧게 말하고 눈 큰 아이도 미안. 이라며 짧게 대꾸한 후 내 손목을 자유롭게 해줬다. 시발. 자기 부하가 내 손목을 잡아서 불쾌한 건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서글퍼지는 기분에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두목같은 아이가 눈 큰 애를 대할 때는 딴 판인 상냥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나, 기억 안 나?"
이건 쟤가 개발한 신종 괴롭히기 수법인가?
* * *
"어... 기억이... 안 나는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환하게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일진님에게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자 의외로 아량넓게 넘어가준다. 주변 부하들은 얼굴이 썩어가는 것 같은데, 왜지.
"근데 기억 안 나니까 좀 미안하지?"
"...으응..."
"그럼 번호 좀."
"...응?"
"번호 좀 주라."
이건 쟤가 개발한 신종 괴롭히기 수법인가?222 얼떨결에 고개 끄덕인 거 가지고 번호를 달라니... 존나 무서운 새끼네... 가뜩이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지리겠구만.
"싫어?"
"ㅇ, 아니! 줄게."
결국 기다림에 지친 건지 일진님께서 친히 물어왔고 나는 닥치고 겉만 봐도 비싸보이는 일진님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입력했다.
"여기."
"고마워. 내일 학교에서 보자."
?!?!?? 시발...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알고보니 저 새끼들 교복은 우리 학교 교복이었다. 왜 나는 남녀공학이지...?? 박찬열이 말려도 여고 갈 걸.. 이것도 박찬열때문이네!! 아오.
"ㅇ..응.. 그래... 나 이제 가도 되지?"
"응. 잘 가."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머뭇거리며 묻자 손까지 흔들어준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데 그제서야 또 잊었던 민석이가 생각이 났다. 아까같은 상황에 민석이에겐 나중에 전화해주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박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ㅅ..."
[야 너 왜 이렇게 안 와?!]
"너 때문이잖아!"
[...뭔 일 있어?]
"너 때문에 이상한 애들만 만나고..."
[누군데.]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는 박찬열 때문에 순간 서운한 마음에 울먹거리자 전화기 너머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박찬열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린다.
"됐어. 엘리베이터 앞이니까 끊어."
박찬열의 딱딱한 목소리에도 애써 신경 안 쓰는 척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내려온 엘리베이터엔 박찬열이 타있다. 내 손을 끌어 같이 타게 한 박찬열이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아까 그 문자 뭐야?"
"뭐긴 뭐야. 말 그대로지."
"그럼 그 이상한 애들이 누군데?"
"몰라. 일진같은 애들."
"그래서 무서웠쪄여?"
"하지마. 너 짜증나. 미워."
내 손을 잡고 우쭈쭈하는 박찬열에게 고개를 돌리며 툴툴대자 잡은 내 손을 흔들며 징징대기 시작한다.
"아, 왜- 나 미워하지마. 어?"
"죽이나 먹어. 하나도 안 아픈 것 같구만."
"나 주려고 사온 거야?"
"응. 근데 다 식었을 걸."
"괜찮아. 앉아있어."
"근데 열아."
"어?"
"나 초콜릿."
집에 들어와 죽이 든 봉지를 건네주자 식었다는데도 좋단다. 죽을 먹으려는 찬열이에게 자연스럽게 초콜릿을 달라하자 나는 비싸서 못 먹는데 박찬열은 맛 없다고 안 먹는 박찬열 집에 널리고 널린 초콜릿을 꺼내준다. 저 놈 시키는 초콜릿 맛을 몰라요. 쇼파에 앉아 티비로 무도를 보며 초콜릿을 폭풍섭취하고 있는데 박찬열이 죽을 먹다말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왜."
"그냥."
"싱겁게 뭐야. 아, 맞아. 걔네 우리 학교였어."
"누구?"
"아까 내가 말했던 이상한 애들."
"그래?"
"야. 반응이 그게 뭐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어이구, 그랬어요? 오빠가 혼내줄게요."
"흥. 걔네들 알지도 못하면서. 아, 맞다."
"왜?"
또 우쭈쭈하며 허세부리는 박찬열을 밉지 않게 노려봐주며 다시 티비를 보려는데 나년은 초콜릿에 정신팔려 민석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박찬열의 물음에도 정신없이 휴대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석아!"
"김민석?"
[응. ㅇㅇ아.]
"미안해. 전화한다 해놓고 깜빡했어."
[지금이라도 했으니까 괜찮아.]
"헐. 넌 천사야 민석아."
[그거가지고 뭘.]
"김민석, 얼른 안 끊냐? 너는 나 있는데 왜 김민석이랑 통화해!"
"아, 왜 난리야! 저리 좀 가!"
[박찬열이랑 같이 있어?]
"응응."
"알면 좀 끊어라?"
"민석아 내가 집에 가서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
"전화하긴 뭘 해. 하지마."
"죽을래? 너 아픈 거 뻥이지."
"아니거든?"
"나 집에 간다."
"안 돼."
민석이랑 통화한 걸 또 들었는지 식탁에서부터 달려와선 옆에서 훼방을 놓는데 민석이한테 얼마나 미안한지. 결국 또 미루고 박찬열에게 타박을 늘어놓자 집에 가겠다는 내 협박에 내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대꾸한다.
"빨리 죽이나 먹어."
"다 먹었어."
"그럼 나 간다,"
"아, 안 돼!"
얜 또 왜 지랄이야.
"아픈 건 순 뻥이구만. 괜찮아보이니까 나 갈게."
"...그럼 나 너네집 갈래."
"뒤진다."
존나 집 성애자세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대고 돌아온 내 째림에 결국 포기한 박찬열이 데려다주기라도 하겠다며 일어섰다. 급 시무룩해보이는 게 내가 너무 했나 싶기도 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삐쳤냐고 없는 애교를 피워대는데 이 샛기는 미동도 없다. 사람이 성의를 보이면 뭐라도 있어야하는 거 아니야??
"그만해."
"안 그래도 그럴 거였어."
"귀여우니까."
"뭐?"
"아니야."
순식간에 지나간 말에 상황파악이 안 돼 다시 묻자 덤덤하게 대꾸하곤 마침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좀 설렌 것 같기도 한데.
"빨리 안 타고 뭐해."
"탄다, 타."
역시. 저렇게 날 대하는데 아까 그 말이 진심일리가 없지. 괜히 설렜다고 생각하며 어느 새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리 집인 바로 옆 아파트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운데, 아깐 그 일진들 때문에...ㅂㄷㅂㄷ 쓸데없이 혼자 생각에 빠져있을 때 박찬열이 걸음이 빨라서 그런지 그 보폭에 맞추다보니 벌써 아파트 정문이다. 정문에서 제일 가까운 동에서 살다보니 박찬열을 배웅해주고 가려는데, 박찬열의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행동파인 게 분명했다. 내 바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빨리 마주치게 하신 걸 보면. 그 와중에 박찬열은 그 무리들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이 새끼는 호구인가봉가. 딱 보면 일진이라고 답나오구만 이럴 땐 도망을 가야지, 왜 자꾸 보고있는 거야? 박찬열이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 싶어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하려고 박찬열의 티셔츠자락을 살짝 붙잡았는데 이제 집에 가는 건지 일진무리들이 흩어지더니 아까 본의아니게 내 전번을 따갔던 남자애가 우리 동 옆동으로 들어간다. 시발.
...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박찬열 때문에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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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작가가 여주에게 빙의해서 쓰는 썰.txt
일진물을 써보고 싶었는데 망한 것 같네요. 제목은 왜 저따구... 제목 추천받아여.
그럼 앙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