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이가 그렇게 가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얼굴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야했다. 선생님이 쳐줬던 커튼을 걷고 나오자 선생님은 화장실이라도 가신 건지 보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혼자 보건실 문을 열고 나오자 종인이가 동시에 내 앞을 막아섰다.
"야자끝나서 네 가방갖고 데리러 왔어."
"벌써 끝났어?"
"응. 아픈 건 괜찮아?"
"약 먹었더니 다 나았어. 나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
"오세훈이. 너 아프다는 얘기 듣고 너 보러 가고 싶었는데 야자해야되니까 참았다? 나 잘했지."
"응. 잘했어."
자랑스럽게 내 가방을 들어보이는 종인이에게 가방을 받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강아지처럼 내 칭찬을 바라는 종인이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정말 강아지처럼 웃는다.
"근데 찬열이는 못 봤어?"
"응."
나와 떨어질세라 내 옆에서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종인이에게 묻자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인다. 항상 집엔 찬열이와 같이 갔었는데. 내가 찬열이에게 전화하려하자 종인이는 알아서 오겠지, 하며 나를 말린다. 그래도 문자라도 보내놔야할 것 같아서 지금 어디냐는 짧막한 문자를 보냈는데도 종인이와 내가 학교를 나서서 학교와 집의 중간지점인 작은 슈퍼앞까지 왔는데도 답장이 없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은데 내가 생각에 잠길 동안 종인이가 쭈쭈바 두 개를 사들고 슈퍼 앞 평상에 나를 앉힌다.
"여기서 그 찬열인가 뭔가, 걔도 기다릴 겸 못한 얘기나 하자. 아이스크림 아직 못 먹나?"
"아니, 괜찮아."
쭈쭈바를 직접 까주며 내 옆에 앉은 종인이에게 머뭇거리다 종인이를 부르자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왜 여기로 이사왔어?"
"네가 여깄으니까."
"나 여기 계속 사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몰랐었어. 그냥 무작정 온 거야."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어쩔 수 없지 뭐. 수소문해서 찾든가, 아니면 평생 보고싶어하면서 살든가. 둘 중 하나겠지."
담담하게 얘기하는 종인이의 예상치 못했던 말에 당황해서 아이스크림만 쪽쪽 빨고 있자 이번에는 종인이가 물어온다.
"그 찬열이라는 애랑은 언제부터 친구였어?"
"중학생 때부터. 너 가고 나서 바로 사귄 애야."
종인이도 찬열이랑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생각하다 대답해주자 그 때 도서관에서 봤던 그 표정을 짓는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 때처럼 누구한테 차인 것도 아닐텐데 왜 저런 표정인지 알 길이 없다.
"근데, 그 때 번호 가져가놓고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
"막상 하려니까 네가 싫어할까봐 못했어."
"내가 왜 싫어해?"
"그 때는 네가 나 몰랐잖아. 그냥 집적대는 애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그러네."
예상 외로 생각깊은 종인이의 말에 웃자 내 손을 잡는다.
"이제 안 헤어졌으면 좋겠다."
"나도."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또 헤어질라."
"응."
진심으로 바라는 듯한 종인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자 장난스럽게 말한다. 어쩌면 그 말에 내 얼굴은 빨개졌을지도 몰랐다. 어느 새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옆에 내려놓는데 휴대폰 알림등이 반짝거린다.
[가고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집에 들어가있어. 연락할게.]
벌써 오분 전에 온 거다. 이미 늦은 거 찬열이의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려고 종인이에게 말하고 슈퍼에 들어가자 아이스크림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자 찬열이도 좋아하는 돼지바를 계산하고 나왔는데,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릴 것 같은 둘의 표정에 어색하게 웃으며 찬열을 부르자 둘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로 쏠린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표정이 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찬열이에게 사온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집에 가려는데 대뜸 찬열이 내 손을 채가듯 잡더니 먼저 성큼성큼 나아간다. 갑자기 찬열이가 왜 이러는지 생각하기도 복잡한데 우리를 따라잡은 종인이도 내 손을 붙든다. 그리곤 경쟁 붙은 것처럼 걸어가는데 그 가운데 낀 나만 죽을 맛이다. 존나 손 성애자들도 아니고 초딩처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처음 같이 등교할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불편하게 간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손이라도 뺄라치면 더 꽉 쥐어서 그러지도 못하고,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길었었는지, 왜 박찬열을 기다렸는지 괜히 나를 탓하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줄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찬열이와 종인이 손에서 내 손을 빼내고 잽싸게 전화를 받자 수신인은 엄마였다. 야자가 끝난 지가 언젠데 어디냐며 폭풍 잔소리를 시전해주신다. 그래도 지금은 이것조차 좋았다. 혹여라도 나를 잡을까봐 찬열이와 종인이에게 가봐야겠다며 빠르게 말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생각했다. 하느님은 대체 나에게 왜 그러는 거냐고.
* * *
"민석아!"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어김없이 찬열이와 종인이에게 샌드위치처럼 껴서 말 없는 둘 때문에 나 혼자 쫑알대며 온 힘들었던 등교길을 끝내고 교실로 가는 복도를 걷고 있자니 세훈이와 종대랑 얘기하고 있는 민석이가 보인다.
"쟤만 보이고 우린 안 보이냐?"
"당연히 보였지-"
"맨날 김민석한테만 잘해주고."
"삐치지말고. 어?"
내가 오자마자 불평을 늘어놓는 종대의 팔을 붙들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려대자 그제야 비죽댔던 입을 원상복귀한다. 옆에 있는 세훈이도 가만히 있는데 왜 저리 난린지. 그나저나 셋이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으려는데 마침 시간이 다 돼서 각자 반으로 흩어졌다.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서 짝꿍인 종대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중이냐고 물었는데 끝까지 나는 몰라도 된다며 대답을 회피한다.
"지금 나만 왕따시키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말 안해주는데!"
내가 시끄럽게 징징대자 내 얼굴을 앞에 보게 만들며 선생님 들어오신다고 조용히 하랜다. 그러는 자기는 언제부터 조용했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오늘 시간표를 눈으로 훑는데 1교시가 체육이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민석이네 반과 체육수업이 겹치는 날이다. 곧 여름방학이라서 자유시간 많이 주시니까 스탠드에 앉아서 민석이랑 수다나 떨어야겠다. 아침조회를 얼렁뚱땅 마친 후 체육복을 갈아입고 민석이네 반으로 뛰어가자 웃으며 나를 반겨준다. 뒤에서 김종대가 또 자기를 버리고 가냐고 소리치며 뛰어오는 바람에 나와 민석이는 더 빨리 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선생님이 주신 자유시간에 민석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스탠드에 앉았다.
"으아, 날씨 너무 덥다."
"오늘 최고 기온 29도래."
"헐. 미쳤다. 그런데도 쟤네는 저렇게 뛰고 싶을까."
스탠드에 앉자마자 느껴지는 살인적인 더위에 땀에 자꾸 달라붙는 머리가 짜증나는데 민석이는 덥지도 않은지 담담하게 오늘 날씨를 얘기한다. 날씨가 미쳐가니 같이 미쳐가는 것 같은 운동장의 뛰어노는 애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민석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왜?"
"그렇게 더워?"
"응. 넌 안 더워?"
"그저 그런데. 난 더위를 잘 안 타서."
"완전 축복받은 거네. 난 더위도 잘 타고 추위도 잘 타서 진짜 짜증ㄴ..."
햇빛을 받아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 근성에 박수를 보내며 더위를 잘 안 타는 민석이의 말에 열을 내가면서 투덜대자 민석이의 차가운 손이 내 목덜미에 닿는다. 그에 놀라서 말을 멈추자 내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해준 민석이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머리끈으로 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어준다.
"여자애가 머리끈도 없이 다니고."
"잘 잃어버려서 그렇지. 근데 너는 왜 가지고 다녀?"
"그냥, 쓸 일이 있었어."
"어쨌든 고마워. 이따가 끝나고 줄게."
내 말에 대답대신 웃어보인 민석이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체육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축구를 끝내고 스탠드에 앉아있는 우리를 발견한 종대가 아까 일로 씩씩대자 민석이가 종대를 끌고 가버리고 물이라도 마실까해서 민석이와 종대가 간 반대편으로 가자 구령대 밑 체육창고에 있던 선생님이 내게 물건정리를 맡기고 가버리신다. 아니, 운동장에 아직 애들 많은데 왜 하필 나야!! 정리할 것도 많아보이는데. 울상이 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물건정리를 시작하는데 1교시인데도 얼마나 다양하게 논 건지 시간이 꽤 걸리게 생겼다. 크흡... 내 쉬는 시간....!! 이러다 2교시가 시작할 판인데 선생님이 심부름 시켰다고 하면 늦어도 괜찮겠지, 싶어서 수업이라도 째려고 빈둥빈둥 정리하고 있으니 갑자기 창고 문이 벌컥 열린다.
"아, 뭐야. 깜짝이야."
"여기서 뭐해?"
"선생님이 시키셔서."
"아아."
선생님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뒤돌아봤더니 종인이다. 난 또 왜 이렇게 오래걸리냐고 뭐라하는 줄 알았네. 놀랐던 마음이 안심이 되고 다시 물건정리를 시작하려다 종인이에게 너는 왜 왔냐고 물으려고 종인이를 봤는데, 실실 웃고 있다. 더위를 먹었나, 왜 이래.
"어디 아파? 왜 웃고 그래."
"아니. 그냥 뭐."
"그냥 뭐?"
"보고싶었는데 보니까 신기해서."
"무슨 소리야?"
내 물음에도 기분좋은 듯 계속 웃던 종인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급기야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안아버린다.
"너 보고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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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편에 독자 5님께서 댓글에서 신경전이라고 하셔서 깜놀.....^^ 부제 맞추신 거 축하드려요 선물은 제 사랑을 dream
민석이는 약간 키다리 아저씨같은 이미지로 잡아서 직접적으로 종인이나 찬열이와 싸우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그래도 할 건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