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다.
고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그릇된 판단을 하며 거짓을 내뱉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거짓말을 하는 상대가 애정사로 얽힌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이 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게 세상의 많은 인물들은 보기좋게 포장한 그것을 핑계삼아 불특정 다수의 상대에게 변명을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분이지만, 제대로 악질인 존재들이 있다. 그것은 곧 양심이 없다시피 한,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을 위해 완전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볼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 역시 그 후자에 속해져 있다.
[카이/찬열] 악의 꽃
종인은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사랑은 물론 애정어린 관심조차 그에게는 사치였다. 애당초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것을 주는 방법도 몰랐다. 5세 때부터 별거에 들어간 젊은 부부는 머지않아 이혼을 했고, 양육권은 모친에게로 돌아갔지만 이전에도 그랬듯 전도유망한 사업가였던 그녀는 자식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부친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친은 헤어진 전남편을 끔찍히도 증오했는데, 불행히도 종인은 친탁이었다. 정상적인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한동안 종인은 친척집을 전전하거나 빈 집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다. 방목하에 자라는 아이가 그렇듯 자라며 종인은 모든 일에 무관심해졌다. 수없이 반복되는 모친의 이혼과 재혼에도 그것은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해가 수없이 바뀐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열일곱의 종인에게 모친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네 새아버지가 될 사람이야.
" 그래서요? "
받아든 사진 속의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나이는 스물여덟, 직업은 모델. 진즉에 마흔이 훌쩍 넘은 모친과는 정확히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왠일이세요, 이런 걸 다 보여주시고. 좋은 사람이야. 너한테도 잘해줄 거다. 별 관심도 흥미도 없는데요. 몇 번의 영양가 없는 대화들이 이어지고 나서 모친은 그의 이름을 말했다. 박찬열, 이라고. 어머니의 재혼과 이혼은 이미 십수년째 반복된 것들이었으므로 그것에는 그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종인에게 무어라 말을 늘어놓는 모친을 뒤로 한 종인이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앳된 얼굴이었다. 이십대 후반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이다. 초반 정도로 보인달까, 외모는 제법 준수했다. 그러나 팔랑대는 사진 속의 젊은 얼굴과는 달리 주름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건사하기 위해 수없이 덧칠된 어머니의 얼굴은 역겨움만 자아내게 했다.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의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내던진 종인이 곧이어 관심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가라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종인의 어머니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래봤자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종인은 그제서야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들었다.
몹시도 앳된 상이다. 정말로 이십대 후반이라는 가정에서는 말도 안되는 동안에 몹시도 화려한 외모다. 선이 곱다고 해야 하나, 스물여덟이라면 창창한 나이인데, 뭐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했든 아니든 어머니같은 사람에게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게다가, 아마도 종인의 예상대로라면 이 결혼도 머지 않아 깨질 것 같았다. 찬열이라는 사람이 정신나간 대인배가 아니고서야 어머니의 더러운 남성 편력에 이혼 카드를 꺼내들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종인은 시큰둥하게 찬열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평소답지 않게 자신에게 조금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외모이긴 하지만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을 사람이다. 설령, 그쪽이 진정으로 모친이 말한 것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 안녕, 종인아. "첫 만남은 레스토랑에서였다. 웃는 얼굴이 선량했다. 찬열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진에서 본것과 같이 선이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키가 아주 컸다. 182cm인 종인과 거의 손바닥 반 정도가 차이날 정도로. 그것과 반대로 몸선은 아주 가늘었는데, 전체적으로 허벅지를 제외하면 몹시도 마른 체형이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웃는 얼굴이 마냥 선량해 보였다. 종인은 왜 이런 사람이 어머니와 결합했는지 잠깐동안 이해하지 못하다가, 제 손을 꼭 잡은 찬열의 손을 바라보았다. 얼굴과는 달리 보통의 사내처럼 투박하다. 손은 부드럽지도, 그렇다고 크게 거칠지도 않았지만 종인은 알 수 있었다. 귀티나는 얼굴과 달리 유일하게 험한 일을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손이었다. 잡은 손의 약지에는 어머니와 똑같은 결혼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문득, 종인은 저 반지를 손에서 빼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잘 부탁해. "
눈이 마주쳤다.
찬열이 종인을 향해 웃었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욱 그를 갖고 싶어졌다.
곧 찬열은 종인의 집에 들어왔고, 종인에게 더없는 친절을 배풀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찬열은 드디어 자신이 의도하던 "좋은 사람"이라는 자격을 종인에게서 따낼 수 있었다. 그것에 몹시 기뻐한 찬열은 종인을 더없이 챙겼고, 종인은 찬열에게 매일은 아니지만 새아버지라는 호칭을 종종 붙이며 착한 아들 역할을 제대로 해 주었다. 결혼하고 멀지 찬열에게 종인이 착하고 좋은 아들인 것처럼, 종인에게도 찬열은 "좋은 사람"이었다.
단지, 밤에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자위를 하거나, 다른 여성과 섹스할 때 그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다.
찬열에게 종인은 아들이었고, 종인에게 찬열은 첫번째 애정이었다.
- 응, 종인아.
" 형, 오늘은 오지 마요. "
- 그래도….
" 그 남자 있어, 오지 마. "
누군가를 온전하게 갖기 위해서는 명석한 두뇌가 필요하다.
고로 열아홉의 종인은 일부러 서서히 찬열과 어머니의 사이에 균열이 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이 된 종인은 몹시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그는 아직 완전히 모든 것이 박살나지 않은 지금 찬열에게 대놓고 손을 뻗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서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늪가에 은닉하는 물뱀처럼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행동했다.
- 미안해." 왜 형이 미안해요. "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 없이 달다. 그러나 모친으로 인해 조그맣게 떨려오는 목소리는 영 달갑지 않다. 그러나 종인은 부러 찬열을 걱정하는 척 상냥하게 말을 덧붙였다. 오피스텔 가 있어요 형. 잘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도 거기 가도 되죠? 찬열의 수긍이 떨어지자 그곳에서 보자며 종인이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종인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 찬열은 자신에게 더 없이 상냥하기 때문이다.
종인은 한참 방안에서 뒹굴고 있을 모친과 신인 모델을 생각했다.
멍청하기는,
지금 그 욕구 상대보다 훨씬 가치있는 누군가를 쉽게 놓아버린 어리석은 존재에게 남길만한 것은 그저 비웃음과 비아냥 뿐이었다.
버스를 탄 종인이 오피스텔 바로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마중나와 있는 찬열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정신적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수척해 보였다. 어머니가 외도하고 난 직후부터 쭉 그 모습이었다. 얼굴에 부쩍 살이 빠졌다. 우울감이 가득한 그 얼굴에 화가 치밀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종인이 찬열의 팔을 잡아채자 찬열이 놀라 제 이름을 부른다. 종인아, 일단 들어가요. 한숨을 쉬는 종인의 표정이 냉랭했다. 찬열은 그저 그런 종인의 눈치를 보며 오피스텔로 따라들어갈 뿐이었다. 키를 따고 들어간 직후에야 종인은 팔을 놓아주었다. 열아홉 살 아들의 얼굴이, 더없이 사나웠다.
" 미안해.. "
" 형이 왜 미안한데, 엄마가 잘못한 걸 왜 형이 미안하다고 해. "
" 그래도.. "
왜 참고만 있어요 형은.
종인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찬열이 조용히 흐느낀다. 그래도 선희 씨, 좋은 사람이야. 끝까지 어머니를 옹호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종인은 인내했다. 찬열의 고개숙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서른 초반이라기에는 말도 안 되는 외모다. 성격도 그랬다. 그는 무려 저보다 열여섯 살이 많은 아내가 외도한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종인이 찬열의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모양새가 가엾다. 결국 종인은 찬열에게 다시 한번 다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형. 찬열이 입술을 깨물며 종인을 바라보자, 종인이 찬열을 끌어안았다. 익숙치 않아 움찔대는 찬열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별 개의치 않았다.
" 울어도 돼요. "
" 흐윽…. "
종인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들어갔다. 찬열의 충격은 생각보다 훨씬 큰 모양이었다. 이런 적이 벌써 서너번이다. 평소 긍정적이고 밝은 찬열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될 거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를 못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인은 여전히 인내했다. 손도 안 대고 자멸의 길로 빠져들 모친을 생각하면 자신이 나서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미 그녀는 외도로 찬열의 신뢰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종인은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천천히 그녀가 끝을 자초한다면, 맨 마지막에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그녀를 밀어버릴 존재가 자신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찬열이 말했다.
미안해.
울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에 종인이 대답했다.
" 형 탓이 아니야. "
굳이 따지자면, 잘못을 빌어야 할 사람은 내 쪽이니까.
지금도 종인이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찬열은 당연스럽게도 모르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다독였을까. 종인의 위로 덕분인지 안겨있는 찬열의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종인이 찬열의 고개를 들게 하여 눈물로 잔뜩 젖은 뺨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 다음부터는 이런 일로 울지 마. "
다음에도 이런다면 참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찬열은 종인이 저를 걱정하는 줄로만 알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사람은 너무나도 여리다. 외도는 벌써 일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찬열은 두달 전에 겨우 자신의 힌트로 모친의 외도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cctv로 녹화한 섹스 비디오를 보냈던 것이 치명타였을까, 사실상 찬열을 이렇게까지 패닉상태로 몰아붙인 장본인은 다름아닌 종인이었다.
그러나, 찬열이 그 여자 때문에 우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울지 마요, 알았죠.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찬열에게 예의 그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찬열이 고맙다고 중얼거린다. 그 여자로 인해 이런 일을 겪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호감을 사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그렇게, 서서히 그를 조금씩 죄여가는 것이다.
종인은 다시 찬열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그다지 떨림이 없다. 곧바로 찬열을 다시 한번 천천히 다독이며 종인이 미미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