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도래국의 황자
황자라, 황자면 황제의 아들이잖아. 모두 네 명이었다니, 황자라서 그런가. 다들 어마무시하게 잘생겼-
수업이 끝나고 한참 개원 황자들의 얼굴에 빠져있던 나를 놀래킨 친구 덕분에 교과서를 떨어트렸다. 야, 그렇게 놀랄 거 있냐, 사람 민망하게. 너도 4황자 사진 보고 있었냐?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진 교과서를 주워 책상에 올려놓았다. 아주 작은 사진으로, 겨우 얼굴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나열되어있는 황자들의 사진. 수업의 여파로 반은 시끌시끌했다. 이 사람이 제일 잘생겼다느니, 이 사람은 별로라느니.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문득 스쳐간 생각. 개원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친구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아이씨, 무섭게! 친구를 한 대 때리곤 교실로 들어와 앉으며 생각했다. 개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전쟁 때문에? 지독한 가난? 혹은 갑자기 퍼진 전염병? ..저렇게 한 나라가 사라지는게, 말이 돼?
생각에 빠져있던 중 보게 된 수행평가 공지에는 우리의 역사를 조사하고 발표해야하는 내용이 붙어있었다. 그래, 이거지.
교실 게시판에 붙은 공지를 보며 남몰래 씩 웃었다. 이번 수행평가는 개원, 너로 당첨이라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는 금방 다른 이야기에 빠져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개원에 멈춰있었다. 왜 이 곳에 빠져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는 이 나라. 내가 이 나라의 끝을 밝혀내겠다고, 개원에 스며들어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내 손으로 찾아내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정말 나도 모를 일이다. 팔짱을 끼고 집으로 걷던 그 길 위의 하늘이 오늘따라 푸르스름하게 빛이 났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불구하고 그 빛이 아주 예쁜 빛이어서, 언젠가 한번쯤은 생각이 날만한 하늘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켰다. 저녁은 안 먹냐는 엄마의 말에 오늘 저녁은 거르겠다고 했다. 나의 무의식은 저녁밥보다는 개원이었던건가. 어짜피 수행평가도 시간이 많이 없을테니, 지금부터 차차 해나가면 돼.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얼른 검색창에 개원을 검색했다.
개원 (?~1392, 황자들의 나라)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 네 황자들이 모여 군림하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록 손실로 인해 현재 개원에 대해 남아있는 것은 4황자들의 사진뿐이다.
개원이 몇 년동안 존재했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며, 그 끝 또한 현재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개원의 4황자는 땅,물,불,빛을 다스렸다는 설화가 전해지나 그 소문 또한 사실을 밝힐 수 없다.
예상했던 대로 정말 적은 개원의 이야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끙끙댔다. 터무니없을만큼 적은 정보, 이 정보들을 가지고 어떻게 개원을 풀어나가야할지. 시작부터 막혀버린 느낌에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지역 도서관에 가기로 결심했다. 빨리 가야겠다, 닫을 시간 다 됐네.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집을 나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아 하복 그대로의 차림으로 빠르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 위로 펼쳐진 하늘이 참으로도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했다.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남았으니까-
길 한가운데 서서 오묘한 하늘을 촬영했다. 잘 찍혔네, 속으로 뿌듯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다시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개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좋을텐데.
*
조용한 분위기의 도서관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했다. 무언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역사책이 모여있는 책꽂이로 향했다. 손 끝으로 잘 꽂혀있는 책들을 하나둘씩 쓸어가며 개원에 대한 책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역시 그런 책은 없었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는 개원의 역사. 조선의 시작, 바로 그 전에서 멈춰버린 개원의 역사를 찾으려면 정말 한국사를 다 뒤져야하는지 머리가 아파왔다. 한숨을 쉬며 조선의 역사가 담긴 책 쪽으로 향했다. 조선이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가, 분명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1392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은 시작되었다. 그 조선이 시작 되기 직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개원. 그 곳의 이야기를 찾아야했다. 조선의 역사가 담긴 책들을 훑기를 수십 분, 누군가 나를 톡 쳤고, 도서관 사서는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며 빌릴거면 지금 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개원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없었고, 결국 도서관으로 갔던 나의 발걸음은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결국 빈 손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진해진 하늘, 결국 이렇게 내 수행평가는 망하는건가 싶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내 뒤에 있던 도서관 건물의 빛이 꺼지며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크게 놀란 탓에 민망함이 밀려들어 큼, 헛기침을 하곤 다시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 때, 누군가 나를 잡았다.
덥썩 잡힌 손목을 깜짝 놀라 풀어냈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아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내게 개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에게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개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의 대답에 남자는 씩 웃더니 내게 사진 하나를 건네주었다. 사진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남자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들은, 앞으로 그대가 써가면 되는거야."
남자의 말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너무 새하얘 눈이 부실정도의 눈이 내린 겨울숲 한가운데였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온통 추운 겨울 나무뿐. 내가 이 곳에 어떻게 왔는지, 여기는 어디인지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할 만큼 추운 한기는 내가 교복 하복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느끼게 했다. 벌떡 일어나 몇 발자국을 걸으니, 내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었던 사진이 눈 위에 떨어져있었다. 얼른 다가가 그 사진을 주웠다. 달려간 발걸음이 재채기를 유발했다. 에취, 크게 재채기를 한번 하다 그 떨림으로 사진을 놓쳤다. 온 몸을 덜덜 떨며 사진을 주우려 했을 때, 사진 뒤에는 이상한 글들이 적혀있었다.
『 개원 17년, 그 곳에는 네 개의 나라가 존재했다. 땅을 다스리며 섬기는 도래국, 물을 다스리며 섬기는 , 불을 다스리며 섬기는 , 빛을 다스리며 섬기는 .
각각의 나라에는 황자가 존재했으며, 그들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현재는 상황, 네 개의 나라 모두 국력이 동일하며, 황제가 나타날 경우 모든 국가가 하나로 합쳐지거나, 제외하고 모두 국력이 바닥으로 치닫게된다.
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
그들의 으로 를 가려내는 것. 의 가졌다 한들, 황자들이 그들은 가 될 수 없다.
의 는 만 명 중 하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군림시기에 를 맞지 못하면 그들의 된다. 』
지금 내가 읽은 것이, 개원의 역사란 말이야?
"지워져있는건 또 뭐야."
아무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군데군데 지워져있는 글씨 탓에, 글의 내용이 개원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 빼고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사진을 다시 뒤로 돌리자,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필름 사진 속 겨울 숲이,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라는 것을. 다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선, 어디로든 가야했다. 죽지 않으려면.
한 발자국 나아갈때마다 얇은 신발에 눈이 녹아들어 동상이 걸릴 지경이었다. 살벌하게 추운 겨울, 짐작하건대 이 곳은 절대 평범한 곳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앞으로 걸으며,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걸으며 내가 여기에 왜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싶었지만, 머릿속마저 얼어붙게 하는 추위에 아무 생각없이 그저 앞으로 걷기를 수십 분. 그 때 뒤에서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살았다. 얼어죽지는 않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법한 저 활들과, 그 뒤로 보이는 말에 올라타 있는 누군가. 아, 내가 지금 사극 세트장에 와있는거구나. 어쩌다 사극 세트장에 들어와서, 내가 촬영을 망쳤구나.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려던 찰나, 그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달려오시는건 예상하지 않았는데요.
"황자님의 부름이니 당장 멈춰서게!"
머릿속에서 자각함과 동시에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너무나도 쉽게 들린 탓에 내 발이 허공에 떠돌고 있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한 나는 목이 아파오자 그제서야 켁켁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기에 바빴다. 몸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차가운 느낌이 온 몸을 타고 돌았고, 내리 깐 시선 앞으로 말 발굽이 보였다. 그리고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도 춥겠다, 야.
"그대, 이 신은 무엇인가?"
신? 신발? 아까 내가 도망치면서 던져버린 내 신발? 그 검은색 단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런 상황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여유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바로 밑으로 처박히는 고개. 지금 어디서 황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하는 것이냐며 누군가 나의 고개를 손으로 강하게 눈 쪽으로 처박았다. 원래 성격같았다면 바로 일어나 엎어치기를 해버렸을테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황자라고 계속 얘기하는 것을 보니 일단 이 곳이 개원인 것은 확실하였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4황자 중 한명이려나.
상황파악에 빠져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으니 누군가가 내 목을 잡고 흔들었다. 대답하라! 아, 기분 진짜 더럽네. 지금이라도 확 째버릴까 생각했지만 나는 이 곳에서 알아가야 할 게 많기 때문에, 혹여 꿈이라도 깰 수 있으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내가 떨어트리고 온 저 신발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그, 제 신발…입니다."
"신발? 특이하게 생겼군요."
높지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게 되물었다. 개원에 당연히 단화는 없었겠지. 저건 외국 브랜드란 말이다. 아마 나는 아주 특이한 외지인으로 찍혔을테고, 개원의 법으로 따지면 황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튀어버렸으니 무조건 사형이려나.
잠시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 황자가 말에서 내려 그의 신발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태자저하, 어찌 말에서 내리십니까. 주변인들이 모두 안절부절하는 듯 했지만 정작 황자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는 눈이 부실정도의 금빛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이 내 쪽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황자가 한 쪽 무릎을 꿇고 나와 마주했다.
아, 저사람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금빛 옷의 황자는 순식간에 번쩍 나를 안아들어 자신의 말 위에 나를 앉혔다. 치마가 아슬아슬해 어쩔줄 몰라하자 그 모습을 본 황자는 망설임없이 제 겉옷을 벗어 말에 올라탄 내 허리에 묶어주었다. 부끄러움이 훅 끼쳐들어와 고개를 돌리니 황자의 기품있는 모습 후에 아이같은 웃음을 보여 조금은 놀란 순간이었다. 그의 주변인들은 모두 안절부절 못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황자는 제 말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부담감의 끝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곳에 떨어졌는가를 한참을 생각하며 멍하니 말에 올라타 그저 황자가 끄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던 때, 황자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하니 한 손으로 나를 가볍게 잡아주고는, 이내 내 발을 조용히 감싸주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에 괜찮습니다, 하고 발을 빼려하니 씁, 하곤 되려 날 어르고 달랜다.
픽 웃어보인 황자는 가만히, 또 조용히 내 발을 감싸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황자 덕분에 동상은 걸리지 않겠다 싶어 가만히 있었지만, 세상에 남정네가 발을 감싸는 경험은 또 처음인지라 몇번을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다른 손으로 나를 받쳐주는 황자의 매너에 몸 둘바를 몰라했달까.
궁으로 들어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말에 타지 않고 걸어들어 오는 황자를 보고 놀라 자빠지려고 한 궁궐 사람들, 그 말에 타 있는 웬 이상한 옷차림의 여자, 그 여자의 허리에 둘러져있는 황자의 옷가지까지. 왠지 내가 이 세상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킨 것만 같아 들어오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궁 안에 들어와 말에서 내릴 수 있었을 때, 그 때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황자의 궁은 정말 화려했다. 너무나도 화려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관광지인 마냥 입을 벌리고 구경을 하니 황자가 픽 웃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대수인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인걸.
궁녀는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 곳에 있던 침대에 걸터앉아 신기한 모습들에 또 한번 감탄하고 있으니 궁녀가 옷과 신을 가져왔다. 사극 촬영인 마냥 너무나도 정교한 옷가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절대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자각하게 했다. 옷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니 궁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물었다. 혹시, 입을 줄 모르시는 겁니까? 민망한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웃음을 참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교복을 들고 이리저리 확인하며 그 큰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묻는 투가 마치 내 여동생을 보는 듯 해 웃어버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궁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여기가 개원인가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말을 잘못한건가요?"
"...정녕, 이 곳 사람이 아니신겁니까?"
조심스러운 투로 내게 물은 궁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살짝 열려있던 문을 굳게 닫고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 곳은, 도래국입니다.
내가 큰소리를 내자 궁녀가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였다. 자연적인 것들을 다스린다고? 개원이? 이게 무슨 판타지사극도 아니고!
두 손을 꼭 모으고 아주 기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투에 나도 모르게 엄마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궁녀가 헉,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났다. 네, 여기 있사옵니다!
이런, 제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나봅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 궁녀, 소원은 내게 신을 신겨주고는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
"옷이, 어여쁘십니다."
금빛 복도를 지나자 푸른 하늘이 보였다. 도래국의 하늘, 내가 살던 곳과 별반 다를것이 없던 하늘. 조금 더 다른 점이 있다면 유독 도래국의 하늘은 맑고 청량했다는 것. 황자를 닮아 그런 것인지 하늘인데도 금빛이 겹쳐보이는 것만 같았다. 궁녀의 부름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황자의 별채였다. 황자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궁녀는 나를 황자의 바로 앞에 앉혔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그 자리는 참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귀인."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자는 한국을 알까? 내가 약 600년을 뛰어넘어온 2016년의 사람이라는 것을 황자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황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어느새 황자의 손에는 내 교복이 들려있었다. 오늘따라 교복 카라에 묶인 검정 실리본이 처량하게만 보였다. 어쩌다, 나와 같이 이 곳에 와서. 황자는 내 교복을 유심히 보더니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황자는 내 말에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오호, 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교복을 바라보는 것이 웃기기도 했지만, 참으로 양심에 찔리는 일이더이다. 그, 그래도 어떻게 보면 사실 아닌가. 내 또래, 학생들이 주말, 방학 제외하고 매일 입고 다니는게 교복인데. 겨우 상황을 무마하니 황자가 또 뜬금없는 말을 던진다.
그런데, 옷이 너무 짧습니다. 귀인.
2차 난관이 시작되었다. 도래국의 황자는 참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는 듯 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탁자 밑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니 황자가 그것을 그새 눈치채고 픽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귀인은, 비밀이 많으시군요.
황자가 묘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김여주, 너 또 사고쳤구나. 니 신변이 뭐야, 니 신변이. 아무리 당황스러웠다고 해도 실수할게 따로 있지!
망했다, 라는 표정으로 잔뜩 움츠려 황자의 눈치를 보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황자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웃긴듯 했다. 웃기려고 한건 아닌데….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겨우 진정한 황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몸을 뒤로 쭉 빼니 황자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잠깐, 귀를 대보시오.
갑,갑자기 귀를 대보라니.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황자가 나를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귓속말을 시작했다.
"..?"
내 곁에서 떨어진 황자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씩 웃어보였다.
황후라니.
내가?
......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