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걔, 담배는 끊었을까?
Ep02 : 어떤 사이.
며칠 후
“뭐해?”
톡톡 어깨를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민윤기였다.
까만 무스탕에 까만 구두. 말갛게 하얀 얼굴을 살짝 가릴만큼 칭칭 감은 검은 목도리까지.
놀란 나를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눈이 개구진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짐 놔두고 기숙사 가려고.”
“저녁 같이 안먹을래?”
“희주언니는 어쩌고,”
“누나 오늘 일찍 집에 갔어, 가족 모임있대.”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기숙사 밥 시간을 놓쳐 버렸는데 갑자기 나타난 민윤기가 밥을 같이 먹자길래 고민했지만
지금 같이 먹지 않으면 계속 립글로스 핑계를 대며 밥을 들먹일 것 같아 민윤기를 따라갔다.
긴 다리가 한 걸음 씩 옮길 때 마다 나는 바삐 걸으며 그 애를 따라잡아야만 했다.
“좀 천천히 가면 안되겠냐?”
“아, 너 생각보다 좀 걸음 느리네-?”
무스탕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목도리에 푹 파묻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던 민윤기가 우뚝 서서 나를 돌아봤다.
“너가 빠른거라고는 생각 안해봤고?”
“그래?”
가던 길을 뒤돌아와 나의 뒤로 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민윤기가 있는 힘껏 내 어깨를 밀며 걸었다.
지우개질에 밀려 일어나는 종이 껍데기 마냥 우스꽝스럽게 골목을 걸어갔다.
“야아- 멈춰봐!”
“이러다간 밥말고 술먹을 시간되겠다, 배고프다 빨리가자 좀!”
이상하게도 등떠밀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민윤기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희주 언니 생각도 나지 않았다.
.
.
.
“그때, 왜.. 그랬어?”
돈까스를 세 번정도 집었다가 놓고는 말했다.
굳이 그 입맞춤에 대해 논해야하나 싶다가도 한번정도는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입 안 한가득 오물거리던 그 애가 나와 눈을 맞춘 채 장국을
들이켰다.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음식을 삼킨 민윤기가 휴지를 뽑아 입을 닦았다.
“그때라니?”
전혀 모르겠다는 그 두 눈
. 팔을 옆에 있는 의자에 걸친 채 눈썹을 치켜뜨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 애의 모습에
나도 모르는 사이 하! 하는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넌 여자친구 있잖아. 희주언니랑 사귀는 사이잖아. 근데 나한테 이래도 되는거야?”
“미안.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사과할게. 근데 누나랑 내 사이는 내가 알아서 해.”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호석’
“안받아?”
“아, 받아야지..”
“탄소~ 어디야? 나 애들이랑 피씨방에서 놀다가 술마시러갈건데 너 같이갈래?”
“아니, 나 친구랑 밥먹는 중이야”
“...친구? 누구?”
“... 있어 그냥. 과친구. 끊는다”
전화를 끊자 민윤기가 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왜?”
“남자네? 은근히 너, 둔한건지- ... 것보다 그냥 과친구라니,”
“너랑 같이 있다는거 말하고 싶지 않아. 아무한테도.”
“그래? 굳이 안숨겨도 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해”
먼저 일어난 민윤기가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야 김탄소. 너 나랑 이렇게 가끔 놀자, 응?”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이 아이의 흐름에 나도 같이 휩쓸리고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들었다.
"내가 왜?"
"그냥, 동기잖아. 그리고 너 되게 재밌어."
"됐어, 너 말고도 놀 사람 많아-"
실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손사래를 쳤다.
민윤기가 내 옆으로 바싹 따라붙었다.
길고 슬림한 다리, 그리고 뽀얀 피부가 온통 검은색인 옷과 머리와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고개를 들어 그 앨 쳐다보니 그 애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다 안다는 듯한 그 표정이 어딘진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토요일 저녁, 그때 봐."
"무슨 기준이야 그건?"
민윤기가 한참 무스탕에 고개를 푹 쳐박고 있다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기준 같은거 아니고, 그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왜 시계 토끼를 따라가서 이상한 나라에 갔는지 알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민윤기가 이끄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
"탄소야 옆에 앉아도 돼?"
"어 남준아, 응. 이거 치워줄게"
남색 코트가 단정하게 어울리는 셔츠와 까만 슬랙스가 비율 좋은 몸에 딱 맞게 어울렸고,
닥터마틴 로고가 돋보이는 구두는 남준이의 트레이드 마크인것만 같다.
뒷축을 구기며 막 신고 나와 헝클어져 있는 내 무지 퍼셀 운동화끈이 초라해 보였다.
"조만간 학교에 봄축제있는거 알지,"
"응 부스도 많고 사진전도 한다며. 남준이 넌 준비하느라 바쁘지 않아?"
"괜찮아,생각보단 안힘들더라. 넌 해수나 지영이랑 부스구경할거지?"
"아마..? 아직 잘 모르겠어, 호석이랑 얘기..아 호석인 다른 과 내 친구!"
"남자애야?"
"응, 같은 동네 친구야"
"아,, 그래. 과제는 다 했어?"
"응? 어, 다 했어. 이번에 좀 어렵더라, 그치"
수업이 끝난 후 남준이가 먼저 일어섰다.
과제를 모두 걷어 교수님께 전달해 드리곤 남자애들 무리와 섞여 교실을 빠져나가는 걸 잠시 바라보다 짐을 챙겼다.
띵- 문자 음이 울려 폰을 봤더니 민윤기로 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바보'
휙 돌아 뒷 문을 보니 민윤기가 희주 언니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나를 돌아보며 입모양으로 바,보,를 만들곤 사라졌다.
"...뭐가 바보라는거야, 도통 모르겠다니까 쟤는."
"뭘?"
호석이가 앞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곤 웃었다.
"뭐가? 뭘 모르는데?"
"아니, 별거 아냐. 너 집가?"
"응, 넌 이번 주 안가?"
"이번주 토요일에 약속..있을 것 같아서. 학교에 있으려고."
"오.. 너 완전 인싸네? 주말까지 약속있고, 그면 다시 학교올 때도 혼자 올게. 다음 주에 보자."
"응, 잘 다녀와, 아줌마한테 안부전해드리고."
"그럴게, 나 가~"
금요일 수업이 끝난 그날 저녁, 민윤기한테 연락을 할까말까 수십번을 망설였다.
'토요일 저녁, 그때 봐.' 라는 말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
하루 종일 폰은 울리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띵-하는 소리에 후다닥 폰을 집어들었다.
'김탄소, 미안한데 다음에 봐. 지금 희주가 화나서.'
뭘 기대한걸까.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내가 뭘하는거지?
여자친구 있는 사람한테 뭘 바라는거지?
하는 마음과 함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길로 찬 물로 세수를 하고 도서관으로 가 밤 새 공부를 했다.
조금도 후련해지지가 않았다.
밤을 새고 기숙사로 돌아와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 땐 꽤 많은 연락이 와 있었다.
정호석
탄소!!
너네 엄마가 간식 왕 많이 챙겨주심!!ㅋㅋㅋㅋㅋ
월요일에 주러갈겤ㅋㅋㅋ
언제 시간되는지 말해줘
김남준
벚꽃축제때 사진전 이벤트 있다는데
탄소 너 참가할거야?
민윤기
내일 저녁에 보자
해수
벚꽃축제 가고싶은 부스 있어??
컴공 부스 대박이래!! 같이 가자!
옷 이쁘게 입고와서 사진도 많이 찍고 그러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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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걔, 담배는 끊었을까?>
2화입니다
텀은 길지만 꾸준히 올리겠습니다 :)
+)노란배경은 무시해주세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