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그냥 날 놓아주면 돼 01
멍하니 김닥터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뒤로 티비 속에 나오는 남자에게 눈이 갔다.
드라마의 한 장면인 듯 찰나의 순간을 스쳐 지나는 그 얼굴이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천천히 내게로 왔다.
"김닥터."
"네, 탄소씨."
"지금 티비에 나오는 저 드라마, 제목이 뭐에요?"
"저 드라마요? 아마,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일 거에요. 요즘 인기 많아요, 저 드라마."
"그런가요?"
"탄소씨가 드라마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냥, 눈이 가요."
로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가 틀린 말을 하진 않았나 보다.
"이사님, 회의에 참석하려면 지금 출발 하셔야 합니다."
"아, 탄소씨 얼른 가봐요. 조만간 또 보기로 하고."
"매번 고마워요. 다음에 본가에서 한번 봐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김닥터 보고싶어하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조심히 가요."
김닥터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을 나왔다.
여전히 티비 속 그가 눈에 밟힌다.
"민비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작은 것들을 위한 시라는 드라마, 남자 단역 프로필 좀 구해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
민비서의 일처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이사실 책상 위에 '단역 프로필(남자)'이라는 보고서가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인기 드라마의 명성 덕인지 출연하는 단역만 해도 꽤 되는 듯 보고서는 두꺼웠고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혹시 그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똑, 똑'
노크소리에 보고서를 내리고 고개를 들자 민비서가 새로운 파일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번 여름 이벤트 기획안 입니다. 그리고 마인소프트 김남준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 함께 하자고 하시는데 뭐라고 할까요."
"서류는 테이블에 놔 줄래요? 김대표는 내가 전화한다고 해요."
"알겠습니다."
민비서가 나가고 다시 프로필을 넘기자 맨 마지막, 그를 찾았다.
인터폰을 누르자 다시 민비서가 이사실의 문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온 그에게 프로필을 건냈다.
"그사람 기획사에 스폰 제의해요. 조건은 원하는거 모든 다 해준다고 전해요. 내일 저녁 8시까지 1104호로."
"이사님."
"부탁할게요."
"저 못합니다."
"내가 부탁, 한다고 했어요.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
그가 나가고 난 뒤, 조용해진 이사실에는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고 있다.
핸드폰을 들어 김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탄소씨 안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조금 바빠서."
-아니에요. 이해해요.
"오늘 저녁 같이해요. 전할 말도 있고."
-근사한 곳으로 준비했으니까 나중에 호텔 앞으로 갈게요.
"네. 이따 봐요."
*
그와 마주 앉아 와인잔을 부딪혔다.
찰랑거리는 맑은 소리와 붉은 와인이 어우러져 분위기를 더한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남준씨. 우리 내년에 결혼해요."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
"대신, 부탁이 있어요. 결혼 발표 전까지 내가 뭘하든 이해해 줄래요?"
"탄소씨?"
"나 스폰 제의했어요. 아직 답은 못들었지만 내일 그사람 만나요.
그냥 찰나에 지나간 그 사람이 잊혀지지가 않아. 그래서 만나보려구요. 이게 무슨 마음인지."
"하, 하... 탄소씨 지금 장난치는 거죠? 오늘 만우절도 아닌데 탄소씨 장난이 좀 지나치네요."
"나 진심이에요. 지금 남준씨 기분 상했다는 거 알아요. 근데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
"우리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
"남준씨."
"탄소야, 다음에. 지금은 아니야."
언젠가처럼 그가 다정스레 내이름을 부르곤, 낯선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 봤다.
그가 떠났다.
이상적이지 않았던 내 발언이 그러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그는 나와의 결혼을 꽤나 오랜시간 기다려 왔다.
나는,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해 온 그의 첫사랑이니까.
*
8시가 되자 초인종이 울린다.
이내 문이 열리고 어제 티비 속 그 남자가 눈 앞에 있다.
"반가워요. 김탄소에요."
"김태형입니다."
"내가 부탁했어요. 그쪽 만나게 해 달라고."
"대표님께 들었습니다. 스폰서 제의 하셨다고."
그는 다 안다는 표정을 하고서 내가 앉은 소파로 다가오며 깔끔하게 차려 입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나 그쪽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서 불렀어요."
내 말에 멈춰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 본다.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냥 친구 할래요? 아, 물론 내가 누나지만."
"진심이세요?"
"그럼 지금이 장난 같아요?"
"조건, 원하는 거 뭐든 다 해주신다면서요."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이니까?"
"근데 이사님 제안은 친구?"
그가 다시 한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건 없는 제안에 모든 걸 다 해준다니 무명의 그에게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일지 그도 알 것이다.
상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방송국 창업주의 손녀이자 재벌 중의 재벌이라는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 게다가 세계 어딜가나 하나쯤 있는 호텔 알망의 이사이니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테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거든. 재벌 3세, 무남독녀 외동딸. 다들 돈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들이야.
친구가 아니라 상전 모시듯, 날 그렇게 보더라고.
지금도 그쪽, 친구해달라니까 이상한 표정이잖아."
말처럼 그는 여전히 이해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분명 그를 이해 시키고서 자리에 앉혔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자 달라고 안해요. 불편하고 수치스럽게 했다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나랑 가끔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 해요.
그냥 평범한 사는 얘기. 그럼 내가 뭐든 다 해줄게요. 최고가 될 수 있게 뭐든 좋은 것만 줄게."
"정말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친구 말고?"
"아직도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만큼 해도 차고 넘치는게 돈이에요."
"이사님 진짜 이상해요."
"그 이사님이라는 호칭도 좀..."
"그럼 뭐라고 해요?"
"누나. 탄소누나."
"누나요?"
"아, 잠시 나 따라와 봐요. 여긴 이시간에 보는 야경이 최고거든.
내 호텔이 최고의 자부심이야. 특히 이시간에 여기서 보는 서울 야경이 환상적이거든."
어제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게 일찍온 웨이콩입니다 :-)
독자분들의 반응을 크게 기대하며 쓴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00화를 보고 댓글을 써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
타고난 글쟁이가 아니라서 생각이 날때 한마디씩 끄적이는 건 잘해도
문장이 단이되고 또 긴 글이 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 같아요 ㅜ
글잡에 계신 모든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아!
제가 길이 조절을 실패해서 너무 길었나봐요ㅜ
길다고 경고가 뜨는 바람에 예상했던 3편보다는 더 오래와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끊어야 할지 고민이라 4-5편 정도로 독자분들과 만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아요
비록 모자라고 재미 없는, 뻔하고 투머치한 설정의 글이라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예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