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그냥 날 놓아주면 돼 02
일주일에 두 번, 평일과 주말 하루를 그와 만났다.
곧잘 내게 누나라고 부르며 정말 별 것 없는 평범한 일상 따위를 내게 말했다.
그럴수록 나는 그에게 최고라고 증명 된 무언가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의식주는 물론 차, 사무실 건물, 샵, 협찬, 스텝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작은 광고에서부터 웹드라마 조연과 그가 하고 싶다던 뮤지컬까지 차차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조금씩 그에게 스폰서가 있다는 말들이 나오곤 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들은 것도 듣지 못했다, 본 것도 본적 없다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대형 신문사, 그것도 방송국을 가진 KSBC 김이사장의 손녀인 내게 그들의 입을 막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진짜 이래야겠어?’
‘이제 나도 지친다, 탄소야.’
김대표의 표정과 말투 모든 것들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대하고 있었다.
인생의 절반을 바라봐 온, 사랑이라고 믿었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바라고
돈으로 가지려 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 할 테니 나는 그를 이해한다.
그를 만나고 온 지난밤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김남준, 김태형 두 남자가 나를 힘들게 한다.
창문으로 햇빛이 밝게 비춰 온다.
손을 들어 작게나마 그늘을 만들다 이내 손을 내렸다.
또 다시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손을 꼭 쥐었다.
의자를 돌려 자세를 고쳐 앉으면 보다 만 보고서들이 책상 위 한가득 펼쳐져 있다.
‘똑- 똑-’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면 민비서가 조심스레 들어와 선다.
“이사님, 4시에 김석진 선생님과 상담예약 있습니다. 지금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결제 사인만 마저 하고 가죠.”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그를 보다 시선을 다시 보고서로 옮겼다.
매번 같은 소리만 해대는 뻔한 기획들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사인을 하려던 손을 멈추고 보고서를 다시 덮은 채 들고 나왔다.
“각 부서에 돌려주고 조만간 대회의실로 전체 회의 스케줄 잡아줘요.”
외래환자가 뜸해진 오후였다.
이 것 저 것 평범한 것들을 묻던 김닥터는 내게 약을 꺼내 보라 말했다,
언제나 불안함에 부적처럼 안정제며 수면제 따위의 약들을 가지고 다니던 나이기에 선뜻 그에게 내 주었다.
“지난번 댁에서 봤을 때랑 개수의 변화는 딱히 없네요?”
“조절이 어려울 만큼의 불안이나 우울감은 전보다 덜해요.”
“잠은 좀 편하게 자요?”
“노력 중이에요."
"근 몇 년간 들었던 얘기 중에 제일 반가운 소식이네요.“
김닥터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런 그를 보다 그의 표정을 따라 입꼬리를 생긋 올려본다.
"김닥터."
"네."
"나을 수 있죠?"
"장담은 못해도 탄소씨 의지가 있다면 가능하죠."
"김닥터 믿을게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근 몇년간 김닥터를 만났던 그 어느 때보다 요즘이 더욱 편하다.
김태형이라는 사람 하나로 이렇게 변한 건가 의문이 들다가도 그냥 웃어버렸다.
*
반갑게 인사를 건 낸 그는 이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본다.
오랫동안 보았으면 하는 그런 해사한 미소였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누나, 저 영화 주연 맡았어요."
"정말? 축하해."
"누나가 부탁한 거 아니에요?"
"응, 아닌데?"
"와, 그럼 진짜 대박인건데..."
"기특하네. 이제는 안 밀어도 잘 밀고 나가고."
"그래도 우리 이사님 덕분에 나 행복해요, 요즘."
"나도 너가 잘 커줘서 너무 뿌듯하다."
가끔 웃는 얼굴이 아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자식을 키우는 기분으로 그를 대할 때면 만들어 주는 길로 너무나 잘 따와 줘서 다행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가 나의 기쁨이 되어가고 있다.
"누나 그거 생각나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너 셔츠 단추 풀던 날?"
"아, 그건 기억하지 말구요."
"왜? 나름 귀엽고 재밋었는데. 아무튼, 그건 왜?"
"나는요. 누나가 자부심이라면서 야경 보여준거 아직 생각나요."
"자부심이지. 얼마나 신경 쓴 건데."
"나는 그렇게 자신감 넘치게 웃는 사람 처음 봤어요. 보여주는 웃음 말고 진심을 다한 웃음이요."
"나도 그건 몰랐네."
"누나는 나 어떻게 알았어요?"
"드라마에서.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어? 저 그 드라마에서 진짜 잠깐 지나가는 데."
"맞아. 너무 잠깐이라서 하마터면 놓칠 뻔 했어."
"에이. 그건 아니다."
"근데 너 밖에 안보이더라. 늘어난 테이프처럼 그 시간만큼은 너무 천천히 지나더라고. 그래서 신기해서 부탁했어.
김태형이라는 사람을 만나 봤으면 좋겠다고."
"첫눈에 반했구만?"
"까분다, 또."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밀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해가지려는 듯 하늘은 주황빛 노을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처음 만났던 그날 밤 유난히 창밖으로 빛나는 야경이 황홀하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감이 넘쳤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남준 대표님, 어떤 사람이에요?"
그가 내게 평소와 다른 낯선 질문을 던졌다.
그의 입에서 김대표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질문에 날이 섰다.
"그분한테 연락이 왔어요. 누나랑 결혼 할 사이라면서 적당히 휘둘리다 떨어져 달라고.
누나한테도 전해 달래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김탄소 하나라고."
"다른말은 안해?"
"음, 그게 다에요."
"미안해."
"아니에요. 김이사님을 만나면서 감내해야 할 일이라면 견뎌 볼게요.
그리고 난 누나한테 숨기는 거 없을 거에요. 비밀 같은 거 안 만들고싶어. 그래야 친구가 되죠."
어리게만 보이던 그가 의젓하게 보인다.
마냥 철부지 동생처럼 나를 대하던 그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게 더 가까워져 간다.
김대표의 훼방에도 흔들림 없이, 숨김 없이 나를 본다.
믿음이라고 했다.
친구라는 믿음은 그 어떤 방패보다 자신을 완벽하게 지켜줄 거라는 걸 아니까.
*
(작가시점)
금요일의 어느 밤이였다.
병원에서 걸려온 급한 연락에 김닥터는 차키만 손에 쥐고 급히 집을 나왔다.
운전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전하는 상황에 머리속이 복잡했다.
불과 두시간 전, 자신과 웃으며 헤어졌던 김이사가 자살기도 후 응급실로 실려 왔다는 것이다.
며칠전 자신과의 상담에서는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에 없던 의지마저 보여 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죽으려 했다.
연구실에 들리 틈도 없이 그녀의 입원실로 바로 달려온 그에게 보이는 건 산소호흡기를 단채 누워있는 그녀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김대표와 민비서,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였다.
"김닥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상담 때만 하더라도 아무문제 없었습니다. 그건 제가 정말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회장님도 보셨듯이 이사님 특별한 징후도 없었습니다."
"김원장 말로는 잠시 기절한 거라는데 안심 할 수 있어야지..."
"상황은, 누가 발견하셨습니까."
"김대표가 신고했다더군."
"남준씨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시죠."
김닥터가 이마를 짚으며 김회장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다 김대표를 불러냈다.
그는 안다.
꽤나 오래 되어온 악연아닌 악연이었다.
김대표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목을 졸라온다는 걸.
안타까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벗어나지도 거절하지도 못하는, 선택이라곤 해 본적 없는 삶에서
정략혼 상대인 그에게 마저 사랑을 핑계로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김닥터."
"제가 말했잖아요. 제발. 피해자인척 김이사님 그만 괴롭히라고,"
"피해자인척 하지 말라니."
"아까 본가에서 헤어질 때만 하더라도 이사님 행복해 보이셨어요. 상담 때도 마찬가지고요.
살고 싶다고, 나을 수 있냐고 물었어요, 나한테.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이사님도 좋아하셨어요.
혹시 김태형씨 때문이에요?"
"김닥터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죠?"
"제가 알려드렸어요. 그분 나오는 드라마 보시고 처음으로 낯선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시길래 찾아보라고.
예상대로 그분 덕에 점점 좋아지시기에 뭐든 다 해보라고 제가 말했어요."
"내가 어떻게 끌고 온 관계인데. 김닥터가 망쳐요."
"저는 적어도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의사는 아니라도 살아갈 의지를 만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내 환자가 죽겠다고 망가져 가는 거 바라만 볼 수 없잖아요. 방법이 어떻든 살리고 봐야지.
제발 부탁인데 이사님 그냥 두세요. 김남준씨는 살면서 뭐든 다 선택하고 산 삶일지 몰라도
이사님은 아니었어요. 하나뿐이니까 어른들이 바라는 대로만 살았어요.
작은 것 마저 어른들이 만든 틀에 본인을 맞추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야 겨우 가진 그 선택권이잖아요. 그 작은 행복 마저 뺏지 말란 말입니다."
김닥터는 화가났다.
호강에 겨워 잘난 부모와 형제들과 사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건
고르고 골라 좋은 것들만 보면서 살아온 김대표가 김이사의 삶마저 잡고 흔들려 하는게 못마땅했다,
연구실에 들러 차트와 가운을 가지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김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진게 많다고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것도 이기적인 거라고 했습니다."
"김남준씨 실수 하셨어요."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탄소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거 아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 없었습니다.
다 마음도 의지도 약해서 그런거라고 어머님 돌아가시고 아직 마음을 못잡아서 그런거라고
왜 매번 아프다고만 하냐고 좀 웃어볼 수는 없냐고..
어린 남자애 하나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거냐고 마음만 먹으면 활동 못하게, 사라지게 만들수 있다고
그애 마음, 하찮고 가볍게 봤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목을 조르더라고요.
놀라서 말려보려고 했는데 그냥 죽게, 제발 자기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더군요."
김닥터는 생각보다 복잡해진 김대표와 그녀 사이의 관계에 눈을 감았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건지도 모르는 듯하다.
"입으로 짓는 죄도 아주 큰 죄에요. 김남준씨는 평생 모를 거에요. 오늘 당신이 이사님께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아니 죄 일거에요. 전에 이사님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이해 못하겠다고 했었죠?
적어도 내가 본 김남준씨는 이해하려 노력한 적 없어요. 이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야."
*
여전히 목에 붉게 남은 빨간 자국이 내가 죽으려 했다는 걸 여과없이 보여줬다.
또 후회한다는 말만 되뇌였다.
어떻게든 가려보려 하지만 스카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 했다.
조금 이른, 가을을 만나보기로 했다.
"왔어? 밥은 먹었어?"
"무슨일 있어요?"
"왜?"
"그냥 뭔가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요."
"그런가?"
"진짜 아무일 없어요?"
"응. 아무일 없어요."
"그럼 다행이구요."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혹시나 스카프 사이로 목이 보일까 걱정이 앞섰다.
그가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 파악이 빠르다는 것을 잠시 간과했다.
"아직 가을 분위기 내기에는 좀 덥지 않아요?"
"그냥 스카프가 예뻐서,"
"누나는 목이 가늘고 길어서 잘어울리기는 한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한게 제일 예뻐요."
"그럼 다음에는 안할게."
그가 싱긋 웃어보이더니 내 앞에 작은선물 상자를 꺼내 보였다.
그를 쳐다보자 쑥스러워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 첫 정산 받았어요. 그래도 나 이렇게 키워준 건 누나니까 선물 사주고 싶었어요.
평소에 누나가 하는 비싼 명품은 아니지만 이런건 또 처음일 테니까 좋은 추억일 거라 생각해요."
"뭐야... 말했잖아. 난 너힌테 바라는 거 없다고."
"그래도 친구 잖아요. 그리고 얼마전에 생일이었다면서요. 왜 말 안했어요."
"어떻게 알았어?"
"민비서님께 여쭤봤어요. 근데 생일 안챙긴다면서요?"
"항상 바쁘니까.."
"늦었지만 나라도 축하해 줄래요.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나도 좋은 삶을 살아가는 중이에요."
"이때까지 들었던 축하중에 제일 좋은 말이네. 덕분에 좋은 삶이라는 말. 나도 고마워."
"지금 해볼래요?"
"지금?"
난감했다. 아직 목에 남은 자국들을 그에게 또 얼마나 궁상 맞은 변명으로 늘어놓아야 할지.
이해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지않았으면 하는데.
"왜요? 별로에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잔뜩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선 손에 쥔 목걸이를 내려 놓는 그에게 구차한 변명을 해 보지만
그는 이미 잔뜩 속상한 얼굴이다.
떨리는 손으로 스카프를 풀어보인다.
그의 시선인 내 목으로 옮겨오면 알 수 없는 표정을 묻겠지.
"무슨일 있는거 맞죠?"
예상과는 조금 다른 질문이었다.
숱한 사람들의 질문과 다르다.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요. 내가 미안해요. 누나도 충분히 난감했을 텐데."
"왜, 안물어봐?"
"나도 알아요. 나는 여기거든."
그는 내게 자신의 손목을 보여준다.
희미하게 남은 흉터 몇개가 그가 오래전 자해했다는 걸 알려준다.
"애꿋은 자기만 괴롭히는 꼴아더라구요. 결국 괴로운 건 나에요. 그러니까 다시는 그러지마요."
안녕하세요 웨이콩입니다 :-)
어제 저녁은 일이 있어서 못오고 한 낮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글을 씁니다
댓글을 써주신 귀한 독자님들 덕분에 힘을 내서 글을 더 길고 기존에 써둔 스토리도 늘릴 예정입니다!
언제나 강조하는 말, 저는 필력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ㅜ
평생을 창작이나 창의력은 남일이라 생각하며 학습에 의존을 삶을 살다보니 머리가 단조로워서
스토리 흐름이 다소 어색하고 읭? 스럽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ㅜ
최대한 좋은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는 웨이콩이 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랄게요~^___^
암호닉(=감사한 분들)
자색고구마라떼
단무지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