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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hplumll조회 2971l 2
이 글은 7년 전 (2016/9/28) 게시물이에요

로마 전쟁사 이전편(링크)

1화 : 지연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2화 : 시라쿠사 정복자, 마르켈루스

3화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1편 - 카르타헤나 공성전

4화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2편 - 일리파 전투와 이베리아 반도 점령

5화 : 플라미니누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다

6화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팔랑크스를 격파한 사나이

7화 : 로마 - 셀레우코스 전쟁

8화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

9화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2) 58-63년의 전쟁 上편


부록 - 로마 전쟁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키워드 모음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2) 58-63년의 전쟁 下편.JPG | 인스티즈

전쟁 마지막 해의 전황. 티그라네스가 파르티아 영토를 직접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파르티아의 반격을 받았다. 그리고 파이투스의 로마군이 항복하는것으로 끝이 났다.


6. 파르티아의 반격 : 티그라노케르타 포위전


   로마군은 비록 아르탁사타와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아직 그들의 승리로 전황이 로마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해진것은 아니었고 로마군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1세가 히르카니아인들의 반란에 어느 정도 잘 대응해 나가면서 볼로가세스 1세 또한 아르메니아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와의 총력전은 가급적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61년, 티그라네스 6세가 파르티아의 속령인 아디아베네마저 공격하자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침략에 분개한 아디아베네의 모노바즈 2세가 파르티아에 황급히 원조 요청을 하였다. 볼로가세스 1세 또한 이 요청을 거부할 경우 국제적으로 그의 위상이 하락할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그는 로마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히르카니아인들과 서둘러 조약을 체결하고 최고위 귀족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동생인 티리다테스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지위를 재확정하였고 그가 아르메니아의 왕임을 분명히 선포했다. 동생의 왕위를 되찾아 주기 위해 볼로가세스 1세는 모나이세스 휘하의 양질의 기병을 거느리고 아디아베네로부터 보병 부대를 지원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코르불로도 4군단(스키티카 군단)과 12군단(풀미나타 군단)을 아르메니아로 파견하였고 3군단(갈리카 군단), 6군단(페라타 군단), 15군단(아폴리나리스 군단)에게는 시리아 방어를 위해 유프라테스강의 라인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는 네로 황제에게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별도로 카파도키아를 담당하는 속주 총독을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파르티아의 모나이세스는 아르메니아로 진입하여 티그라노케르타로 갔다. 티그라네스 6세는 보급품을 확충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도시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티그라노케르타를 포위 공격하는 것은 아디아베네군이 주로 담당했는데 모나이세스의 부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어 포위전을 수행하는데 미숙했고 또 그럴 의지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로마군의 기습을 받고 쫓겨났다. 이 시점에서 코르불로는 볼로가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당시 볼로가세스 1세는 로마-파르티아 국경과 티그라노케르타 근처에 있는 니시비스에서 숙영지를 차린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포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말에게 먹일 사료 또한 부족했기 때문에 모나이세스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군 또한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였는데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것을 두고 과연 코르불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파르티아인들과 모의하여 상호 철수를 합의한것은 아닌지 혹은 파르티아와의 전쟁 수행이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에 그의 명성이 하락할 것을 우려한건 아닌지 여러가지 설들이 떠돌았으나 어찌 되었든 휴전 협정이 주선되었고 파르티아의 사절이 로마 측에 파견됬다. 그러나 이 협상은 결국 실패하였고 62년 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그 사이에 카파도키아 속주에 새로운 총독이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전년도에 집정관을 지낸 경력이 있는 루키우스 카이세니우스 파이투스였다. 그리고 로마의 동방 군대는 파이투스와 코르불로의 휘하로 양분되어 4군단, 12군단, 새로 도착한 5군단(마케도니카 군단)과 폰투스, 갈라티아, 카파도키아의 보조군은 파이투스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코르불로는 3군단, 6군단, 10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나 군사적 영광을 이룩하기 위한 서로간의 경쟁심 때문에 이 둘의 사이는 시작부터 굉장히 좋지 않았다. 코르불로가 지난 전쟁에서 함께 전쟁을 치른 노련하고 경험 많은 군단들을 보유한 반면 파이투스에게는 경험이 부족한 부대를 주어 전투를 치르게 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로마군은 두 장군의 지휘하에 총 6개 군단, 3만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그러나 나머지 보조군의 정확한 숫자나 배치는 확실하지 않다. 그나마 알 수 있는건 시리아에서만 7개의 동맹군 기병 부대와 7개의 보병대대가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규모는 7천-9천명이었다. 




7. 란데이아 전투


  자신에게 주어진 군대가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한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파이투스는 승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독자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그러자 볼로가세스 1세는 곧바로 선전 포고를 하여 티그라노케르타를 점령하였다. 아직 코르불로는 시리아에 남아 유프라테스강 국경 지대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파이투스는 4군단과 12군단만을 이끌고 티그라노케르타로 전진하면서 중간에 몇개의 작고 약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파이투스는 곧 보급의 부족에 시달리며 서쪽으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파르티아군은 원래 로마령 시리아를 침공할 생각이었으나 코르불로의 군세와 대비 태세가 매우 강력했다. 코르불로는 캐터펄트로 무장한 막강한 소함대를 갖추고 유프라테스강에 다리를 건설하여 파르티아의 강변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따라서 파르티아군은 시리아 침공 계획을 중단하고 아르메니아로 관심을 돌렸다. 한편, 파이투스는 자신의 군대를 몇 개로 분산시키고 휘하 장수들에게 장기 휴가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파르티아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파르티아군의 접근 소식을 알게 되자 파이투스는 볼로가세스 1세의 군대를 살피기 위해 정찰대를 파견했으나 이들은 파르티아군과 조우하여 패배했다. 그러자 파이투스는 매우 당황하여 급히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아르사모사타 요새의 안전한 곳으로 보낸 후, 일부 병력을 타우루스 산맥의 통로로 보내 그곳에서 파르티아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안그래도 흩어져 있던 병력은 더욱 분산되는 꼴이 되었고 파르티아군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로마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고 병사들 사이에 공포심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란데이아 근처의 진영에서 파르티아군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꼼짝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이투스는 코르불로에게 구원 병력을 요청했다. 코르불로 또한 파이투스의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군대의 일부를 준비시켰다. 그러나 파이투스와 곧장 합류하러 가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코르불로의 행동을 두고 파이투스가 지금보다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한 다음에야 그를 구조함으로써 더 큰 명성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나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이투스가 지속적으로 구원을 호소하자 코르불로도 상황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막대한 보급품을 낙타에 실은채 시리아 속주군의 절반을 이끌고 가서 파이투스의 분산되어 있던 부대들을 다시 규합시켰다. 그러나 막상 파이투스는 코르불로가 도착하기도 전에 볼로가세스 1세에게 항복해버렸다. 코르불로의 구원군이 오고 있음을 알고있던 파르티아군은 파이투스가 담화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낼때까지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혔다. 이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치욕적이었다. 로마군은 아르메니아를 떠나고 그들이 보유한 모든 요새를 포기해야 할뿐만 아니라 볼로가세스 1세가 코끼리를 타고 개선식을 거행할만한 다리를 아르사니아스 강 근처에 건설해야 했다. 게다가 로마군이 가진 모든 소지품들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빼앗겼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진 무기나 갑옷, 보급품이나 의복들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강탈당했다. 설상가상으로 타키투스가 제시하는 루머에 의하면 로마인의 관점에서 가장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수모를 겪었다.  


  코르불로와 파이투스의 두 군대가 멜리테네 근처의 강둑에서 만났다. 코르불로는 굴욕적인 실패와 항복을 생각하며 매우 원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파이투스는 다시 코르불로에게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상황의 반전을 꾀하자고 설득했으나 코르불로는 자신에게는 그럴 권한도 없고 휘하의 병사들도 매우 지쳐있었기 때문에 반대했다. 결국, 파이투스는 카파도키아로 코르불로는 시리아로 각각 퇴각하였다. 시리아에서 코르불로는 볼로가세스 1세가 보낸 사신을 만났다. 볼로가세스 1세의 요구 사항은 유프라테스강에 있는 교두보에서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코르불로 또한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볼로가세스 1세 또한 코르불로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양국은 모두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에는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으나 파르티아 대표단이 로마로 가기 전까지는 사실상 파르티아의 영향권 하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8. 코르불로의 복귀와 평화의 정착



  로마 정부는 아르메니아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구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했다. 이를 두고 타키투스는 "전쟁의 결론이 아직 확실히 나지 않았는데도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파르티아 전쟁을 기념하는 트로피와 아치 장식물을 세웠다"고 꼬집었다. 로마의 리더십이 가진 환상이 무엇이든간에 그 환상이라는 것은 63년 초에 파르티아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하자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파르티아 사절단의 요구 사항, 사절단을 수행한 백인대장의 심문으로 인해 네로 황제와 원로원은 파이투스가 숨기려한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코르불로의 시리아 총독직은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에게 위임되었다.  


  코르불로는 군대를 재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패배하여 사기가 떨어진 4군단과 12군단을 시리아로 철수시키고 10군단은 카파도키아 방어군으로 남겨두었다. 3군단, 6군단은 침공군의 집결 장소였던 멜리테네에 남겨두었고 여기에 폰투스에 남아서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5군단, 그리고 15군단과 다수의 보조군 및 속국 군대를 추가시켰다.   



  코르불로는 100년전 루쿨루스가 개척한 길을 따라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후에 티리다테스와 볼로가세스 1세의 사절단을 만났다. 장군으로서 코르불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그와의 협상을 희망했다. 코르불로는 예전에 언급했던 로마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여 티리다테스가 로마로 직접 와서 왕관을 받아가는 것만이 전쟁을 재개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티리다테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란데이아에서 만나기로 합의하였다. 코르불로 또한 이전에 겪었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이 제안에 동의했다. 약속한 날짜에 티리다테스와 코르불로는 각자 20명의 기병만 대동한채 란데이아에서 만났고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가서 네로 황제로부터 왕위를 정식으로 승인받는다는 사항에 동의했다. 며칠 후, 양국의 군대는 행진(parade) 복장으로 갈아입고 정렬하였다. 뒤이어 티리다테스는 직접 로마군의 진영으로 찾아가 네로 황제의 조각상을 방문한 후 항복의 표시로 왕관을 조각상의 발에다 두었다. 


  66년, 티리다테스는 마침내 네로 황제로부터 왕관을 수여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였다. 네로 황제는 자신의 인기를 드높이기 위한 목적으로서 이 행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면서 제국에 평화가 찾아왔음을 선포했다.


  또한 네로는 로마와 파르티아간의 평화를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임페라토르(imperator)로 추앙을 받았으며 개선식을 거행했다. 물론 로마가 새로이 획득한 영토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평화는 진정한 승리라기보다는 타협을 이룬것에 가깝다. 비록 로마가 아르메니아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파르티아 출신 중에 아르메니아 왕위를 이을만한 적임자가 없었으므로 아르메니아는 이란 왕조의 통치를 받게되었다. 아르메니아는 명목상으로 로마에 충성을 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파르티아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했다. 그러므로 후세에 판단하기에 "네로는 아르메니아를 상실"한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란데이아 평화 조약으로 50여년 동안 평화 관계가 지속되기는 했으나 아르메니아는 이후에도 로마와 파르티아(이후의 사산조 페르시아까지) 사이에 지속적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네로 황제가 양측에 평화를 가져다 준 성과를 무시할수는 없다. 심지어 이 기간에 로마 동방군의 대부분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러 갔을 때도 양국의 평화가 깨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코르불로는 황제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았고 커다란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군대를 등에 업은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황제의 정치적인 라이벌로써 의식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코르불로의 사위인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가 66년의 황제 암살 음모에 연루되자 네로는 코르불로도 의심했다. 그리하여 67년, 네로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동안 코르불로를 처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코르불로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이 전쟁은 또한 일전에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동방 영토에 도입한 방어 체계가 더이상 효과가 없음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마 동방 영토의 대대적인 재편이 실시되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폰투스와 콜키스가 64년에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고 킬리키아와 콤마게네, 소(小) 아르메니아도 72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리고 동방에 주둔하는 군단의 개수도 늘어났으며 코카서스 지방의 로마 속국인 이베리아와 알바니아에도 로마군을 주둔시켜 전략적으로 아르메니아를 포위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이로써 직접적인 로마의 지배 영역은 유프라테스강까지 확장되었다. 이 때 구축해놓은 로마의 국경은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정복 활동이 시작될때까지 살아남았다.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2) 58-63년의 전쟁 下편.JPG | 인스티즈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1세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2) 58-63년의 전쟁 下편.JPG | 인스티즈

66년,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왔다는 의미에서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힌 모습이 새겨진 주화.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유대인들의 반란이 터졌다.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 (2) 58-63년의 전쟁 下편.JPG | 인스티즈

파르티아 궁기병을 묘사한 양각(陽刻). 매우 숙련되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이들은 중기병인 카타프락트와 더불어 파르티아군의 핵심 병과 중 하나였다. 




다음편 : 5현제 트랴아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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