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아아-, 나 어디-게?
"어디야, 응? 어디야.."
-어디긴! 바로바로..
"응, 어디?"
-배켜니 마음 쏙-!
미쳐버리겠다, 나보고 집에 꼼짝말고 누워서 눈도 뜨지 말라는 말에 말잘듣는 강아지처럼 곧이곧대로 눈감고 자고 있었는데, 내 알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얘 퇴근시간에 맞춰서 알람을 맞췄는데..그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술에 쩔어버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직 퇴근시간도 안된 애가 어디서 술을 이렇게 퍼마시고 전화를 한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애를 찾아야하니 옷을 대충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귀에 붙은 전화에는 횡설수설 말도안되는 소리만 들렸고.
-아아, 백혀나..나 정말..
"옆에 뭐가 보여? 응?"
-나아, 내 가방이 보여요..
"가방 말고 또 뭐가 보여요?"
-발..큰 바알!
뭐? 발? 큰 발? 큰 발이면 남자 발 아니야? 이런 씨ㅂ..욕을 속으로 읊조리며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계단을 마구 뛰어내려갔다. 어디에 퍼질러 앉아있길래 남자 발이 보인다는 거야,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고 손에 들고 있던 가디건은 입을 생각도 못한 채 전화에 대고 재촉했다.
"혼자야? 옆에 아무도 없어?"
웬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줘봐요, 휴대폰 줘봐요.
-시러어!
-..쌤, 여기 병원 앞에 있는,
-아아아아, 너 배켜니한테 호온 난다? 백혀니는.. 나 이러는거 아주아주 시러해.
아, 익숙한데. 익숙한 목소린데 누구지. 어찌됐든 남자랑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불안해서 휴대폰을 들고 언성을 높였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딘데, 어디서 얼마나 마셨길래 말도 제대로 못..!!"
-흐으어어엉!!!!
"왜!! 왜 울어, 왜!! 무슨 일인데, 어?!"
-니가 화내짜나!!!!
"아.."
그랬구나, 내가 소리질러서..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다시 어디냐고 물었다. 이건 무슨, 환자 다루기보다 힘들어.
"으응, 미안. 지금 어디 앉아있어? 병원 앞이야?"
-백혀니다..
"응, 나 백현이야. 백현이가 데리러 갈게. 어디에 있.."
-우와아..백혀니다..
"어...?"
-진짜 백혀니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도 똑같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전화를 살짝 떼고 귀를 기울였더니 건물 모퉁이 쪽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백현이다.. 백혀니다..아, 망할..귀여워.
"너!!"
"흐흥, 거봐.. 진짜 백혀니라구 내가 그랬짜나.."
건물 모퉁이를 돌았더니 문 닫힌 카페 앞에 쪼그려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보여. 누구겠어. 그 앞에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발로 땅바닥만 턱턱 치는 종인이.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종인이었구나. 나를 보자마자 종인이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쟤는 저 표정 병원에서도 나만보면 짓더니 이런 상황에서도 짓네.
"쌤..집이 어딘지 얘기를 안해주셔서.."
"하이고..이 여자야.."
"선배님 얼른 병원으로 출근 하셔야겠어요. 엄청 힘들어하시던데."
무덤덤하게 내게 핸드백을 건네주면서 하는 종인이의 말에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어.
"..왜, 힘들대?"
"그래보이시던데."
"너랑 마신거야?"
"저는 안마셨구요."
"야, 이 자식아. 그럼 못 먹게 말려야지, 그걸 보고 있어?"
"아시잖아요, 저 이 쌤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거."
맞다, 그랬지. 김종인은 감히 4년차 간호사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레지던트였고 병원에서도 종종 혼나고 있는 모습을 봤었는데. 술 마시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애를 말렸을리 만무하다.
"야, 그럼 왜 힘드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한마디도 하지 말고 앞에 앉아있으라고 그러시던데요."
"그렇다고 진짜 한마디도 안했어?"
"안주 시켜드리려다가 맞을 뻔했어요."
"그럼 빈 속에 술만 먹였어?"
"네. 선배님 부르려고 했는데 제가 휴대폰을 안가지고 끌려나와서.."
진짜 다 꼬였네, 바닥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애를 한 번 쳐다보고, 최소 몇시간 동안 고생한 것 같은 종인이를 한 번 쳐다보고.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미안해지는 나였다. 일단 애를 일으켜야겠다 싶어서 허리를 구부렸는데,
"백혀나아.."
내 다리를 두 팔로 꼬옥 껴안으면서 얼굴을 부비부비 문지르는데,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되지만 입술로 웃음이 자꾸 삐져나왔다. 아, 귀여워. 귀여워..
"..선배님,"
"어, 왜."
"그냥 웃으세요."
김종인, 이 당돌한 자식..내가 웃음을 꾹꾹 참는 걸 봤는지 자기도 피식 웃으면서 그냥 웃으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냥 웃었다. 이 정도까지 술을 마시면 다음날 고생할 거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일년에 몇 번 볼까말까한 애교를 이렇게 폭탄처럼 터트려 주는데 웃지 않고 버틴다는 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너는 일하다가 끌려 나온거야?"
"일 끝나고 공부하고 있었어요."
"음..그래, 사고 안치고 잘 있지?"
"저 사고 많이 쳐서 이 병원 채용 안될 것 같아요."
"인턴 합격 해놓고 레지던트에서 떨어질래? 잘 좀 해."
"얼른 오세요, 선배님 없어서 사고 칠 때마다 눈치보여요."
이 자식이 사고 안 칠 생각은 안하고. 그래도 많이 공부하는 게 보이긴 한다만. 딱 일 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내년에 얘도 레지던트 달고 개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이 좋을 때라는 생각도 했다. 여전히 내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부비고 있는 애를 붙잡아 일으킨 다음 종인이의 도움을 받아 등에 업었다. 얼마나 마셨으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내 등에서도 휘청휘청거린다. 나올 때 가지고 나와 미처 입지도 못한 가디건을 등에 덮어 달라고 부탁한 뒤 핸드백을 손에 들었다.
"고생했어, 미안하고. 오늘은 들어가서 좀 쉬어."
"고생은요, 선배님도 푹 쉬세요. 출근 언제부터 하세요?"
"내일부터 가야지, 얘가 이 모양이 됐는데."
그럼 내일 뵈어요, 이제야 풀려난다는 듯 씨익 웃은 종인이랑 인사를 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 마실거면 나를 불렀어야지."
"으응..잘모태써여..의사선샌니임.."
"잘못했어요? 잘못한 거 알아요?"
"네에.."
"응, 사랑해."
"어어...모야아.."
"대답해야지."
"모야아..부끄러어.."
부끄러어, 부끄러어, 그러면서 내 등에 얼굴을 부비더니 대답을 재촉하는 내 말에 웃기만 한다. 그러더니 잠이 들었는지 금새 조용해진 숨소리에 깰까 싶어 걸음을 살짝 늦췄다. 내일도 출근해야하니, 최대한 깊게 재워야지.
더 가벼워진 것 같은데, 살이 빠졌나. 밥을 제때 안챙겨 먹나..별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다보니 어느 새 집 앞이었다. 신발을 벗겨 준 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더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다. 뭐야, 자는 줄 알았더니.
"깼어? 더 자. 집이야."
"으으응.."
"안 잘거야?"
"백혀니도 여기 누워어.."
"백현이도 거기 누워?"
내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는데, 이 귀한 기회를 그냥 넘길 수 없지.
"백현이 눕기 싫은데."
"누워어..누워즈세여.."
"여기, 뽀뽀하면."
볼을 갖다대면서 손가락으로 톡톡 쳤더니, 부끄럽다는 듯이 웃더니 바로 볼에 쪽쪽쪽 입을 맞춘다. 그리곤 내가 고개를 휙 돌려서 입술을 갖다대면 또 거기에 잔뽀뽀를 퍼붓고, 내가 웃으면 자기도 웃으면서 입꼬리에 입을 맞추는데 술냄새가 폴폴 풍겨도 예뻐.
"돼따아..백혀니 얼릉 느워.."
"응, 백현이 누우러 간다."
침대를 빙 둘러 옆자리로 가 누웠더니 몸을 내 쪽으로 홱 돌리며 꿈틀꿈틀 움직여온다. 얘가 술 먹으면 속이 뒤집히는 타입이라 또 속을 게워내진 않을까 싶어 명치 끝을 살살 만지면서 물었다.
"속은? 여기 아파? 답답해?"
"..으응?"
"여기, 누르면 아파요?"
하면서 살짝 눌렀더니, 아픈지 내 손을 탁 치고 품 속으로 파고들어오길래 등을 톡톡 쳤더니 또 우욱거리며 어깨를 꿈틀한다. 토하려나, 차라리 토하면 술이 조금 깰텐데. 싶었지만 바로 눈을 감고 색색 숨소리를 내길래 깨우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자다 토하면 큰일 나니까..오늘은 내가 나이트 근무서는 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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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ㅏㄱ악!!!내일 성적 나오는 날..제가 오지 않는다면..한강 대교 밑을 찾아주세요...아.. 장학금 받고 싶다!!!!!!!!장학그 ㅁ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