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꼭 bgm과 함께 읽어주세요! (bgm: 러브래빗-나무와 소년)
11월 10일
내 겨울 방학은 남들보다 일찍 내게 다가왔다. 날 때부터 몸이 안 좋았던 탓에 다니던 학교를 일찍 관두고 내려온 할머니 댁은 너무나도 깊은 산골이었다. 한참을 달린 자동차는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길까지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차가 멈춰서고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에 얼른 차 문을 열었다. 서울의 날씨 못지 않게 이곳의 날씨 또한 춥기만 했다. 입고 있던 외투를 여미고 귀를 덮고 있던 귀마개를 매만졌다. 아빠는 트렁크에 실린 내 짐을 꺼내며 말했다.
“이제 차는 못 들어가. 짐은 들고 가야해.”
무거운 건 아빠가 들테니까 가벼운 건 네가 들어.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가 건넨 작은 상자를 하나 품에 안았다. 어느새 마을 입구까지 내려오신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오랜만에 뵙는 할머니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 그 품을 향해 달려가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뛰지 말어.
“잘 지내셨어요?”
“그럼. 여기 오니까 많이 춥지?”
“아뇨. 서울도 이만큼 추운걸. 괜찮아요.”
“몸도 약한데 어여 들어가자. 짐은 이게 다여?”
“아직 차에 더 있어요.”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동안 할머니는 연신 웃으며 날 바라보셨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데 때 마침 마을 입구 쪽으로 내려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하얀 후드티를 입은 그 남자는 나와 같은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하얀 그 얼굴을 향해 힐끔 시선을 두는데, 나와 함께 걸어 올라가던 할머니를 발견한 그 아이가 얼굴에 예쁜 웃음을 띄었다.
“할머니!”
“어이구. 지원이 아니냐. 어디갔다 오는겨?”
“김씨 할머니네 전구가 깜빡인다고 하셔서요. 그거 갈아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어느새 우리 앞으로 다가온 그 남자아이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할머니 앞에 섰다. 할머니는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웃음 짓다가 옆에 선 내 손 위로 손을 올렸다. 인사혀. 야는 내 손녀. 할머니의 말에 그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쁜 웃음을 띄고 있는 그 아이는 날 잠깐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나는 김지원이야.”
“아…. 안녕.”
내미는 손을 잡으려다 말고 잠깐 머뭇거렸다. 품에 박스를 안고 있던 탓에 김지원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도 그걸 느낀 건지 김지원이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그리곤 내 품에 안긴 상자를 제 품으로 가져갔다.
“어, 어?”
“내가 들어줄게.”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내 짐을 든 김지원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얼굴에 웃음을 띄곤 내 옆에 섰다. 덕분에 나는 의도하지 않게 할머니와 김지원의 사이에 서게 되었다. 함께 할머니 댁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김지원은 끊임 없이 할머니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할머니, 오늘은 복실이 밥 주셨어? 그 물음에 할머니가 아이구, 하며 웃었다.
“오늘도 깜빡했죠?”
“아이구. 지원이 아니면 우리 복실이 굶어 죽겠네, 그려.”
익숙한 듯 제일 왼쪽에 선 할머니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지원의 시선이 잠깐 내게 닿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나는 문득 김지원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잠깐동안 바라보자, 김지원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왜 그렇게 봐? 내 물음에 김지원이 웃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냐.”
얼마 걷지 않아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꽤 오랜만에 보는 파란색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전에 올 때는 없었던 강아지 한 마리가 마당을 뛰어 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입구 쪽을 향해 달려오는 강아지를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할머니와 김지원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움직이는 강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고 대문 앞에 걸음을 멈췄다. 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상자를 내려놓은 김지원이 몸을 돌려 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 내 모습을 쳐다보았다.
“왜 거기 그러고 서있어?”
“강아지 때문에….”
“강아지 무서워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원이 피실 피실 웃었다. 그리곤 몸을 굽혀 마당 위에 쪼그려 앉았다. 양팔을 뻗고 복실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김지원의 목소리에 마당을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김지원의 품으로 쫄래쫄래 걸음을 옮겼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김지원이 복실이가 조금 더 편하게 안겨 있을 수 있도록 조금 고쳐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나와 눈을 맞춘 김지원이 품에 안긴 복실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들어와.”
“강아지 놓으면 안 돼. 꼭 안고 있어줘.”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김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추워, 얼른 들어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지원은 여전히 복실이를 품에 꼭 안은 채였다. 목언저리를 핥아오는 복실이의 행동에 김지원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간지러워. 그만. 그만.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마루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김지원이 날 힐끔 보곤 다시 몸을 굽혔다. 복실이를 마당에 내려놓자 복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내가 있는 마루 쪽으로 다가왔다. 내 신발에서 낯선 향기가 나는 건지 몇 번 발로 툭툭 치던 복실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멍, 하는 복실이의 소리에 순간 몸을 움찔했다.
마당에 서서 나와 복실이를 바라보던 김지원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이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머리 위로 눌러쓰며 내게 말했다.
“안녕. 나 갈게.”
“…….”
“이곳에서 내 또래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다.”
“…….”
“내일 같이 놀래?”
순수하게 물어오는 그 아이의 물음에 잠깐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야. 갑작스러운 내 말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지원의 눈이 휘어지게 접혔다. 눈이 사라질 정도로 예쁜 웃음을 지은 그 아이가 ---, 하고 내 이름을 소리내어 말했다. 낯선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내 이름을 들으며 그 아이를 향해 살짝 웃곤 말했다.
“내일 봐.”
그리곤 부끄러워 숨는 사람처럼 얼른 문을 열었다. 옆으로 문을 밀어 좁은 틈 안으로 몸을 쏙 숨긴 뒤 얼른 문을 닫았다. 문 너머의 마당에서 김지원이 킥킥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11월 11일
준비 다 했어?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에 신고 있던 양말을 얼른 챙겨 신고 문을 옆으로 밀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마당에 선 김지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의 하얀 후드티와는 다르게 검은 옷을 입은 김지원이 날 바라보며 씩 웃었다.
“어디 갈 거야?”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며 묻는 내 물음에 김지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잘 묶이지 않는 신발끈을 묶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로 끙끙대는데, 내 앞에 몸을 굽힌 김지원이 내 손에 잡혀있던 신발끈을 잡았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리본을 묶었다. 멍하니 김지원을 바라보자 잠깐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 김지원이 살짝 웃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반대쪽 운동화에도 예쁜 리본을 묶어준 김지원이 몸을 일으켜 섰다.
“리본도 혼자 못 묶어?”
“묶을 수 있어. 할 수 있었는데 네가 해준 거잖아.”
내 말에 김지원이 킥킥 웃음을 흘렸다. 마루에 앉은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갔다. 어제의 복실이가 떠올라 마당을 구석구석 살피는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지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복실이 없어.”
“어디 갔어?”
“글쎄. 마을 산책?”
짧게 대답을 한 김지원을 마주한 채로 올려다보자 김지원이 제가 하고 있던 귀마개를 벗었다. 그리곤 내 귀에 회색 귀마개를 덮었다. 안 줘도 돼, 하는 내 말에도 김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걸음을 옮기는 김지원에게 끌려가다시피 움직이며 우리 어디 가냐니까, 하고 묻자 내 물음에 김지원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산책.
마을 입구를 벗어나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 도착하자 김지원이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잡혔던 손목을 살짝 문지르며 작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빠르게 움직이던 김지원은 옆의 나를 한 번 힐끔이곤 내게 걸음을 맞춰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한 흙길 위를 걸었다. 들리지 않는 자동차 소음, 그리고 울려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조용하다….”
한적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김지원이 작게 웃었다. 몇 걸음 걸어가던 김지원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런 김지원을 따라 걸음을 멈춰선 채로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은 길가의 풀숲 안으로 손을 뻗었다. 갈대 하나를 손으로 꺾은 김지원이 내게 갈대를 내밀었다.
“갈대?”
“응.”
“갑자기 이건 왜 줘?”
“이거 봐.”
말을 끝낸 김지원은 우리가 걸어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람은 우리가 걸어온 쪽을 향해 불고 있었다. 바람을 등지고 선 김지원이 갈대의 윗부분을 입으로 후 불었다. 갈대의 끝에 붙어있던 하얀 것들이 김지원의 입김에 바람을 타고 저쪽으로 날아갔다. 와아. 짧게 새어나오는 감탄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아가는 하얀 것들을 바라보았다. 내 감탄에 김지원이 웃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진짜 예뻐.”
“눈 오는 것 같지?”
“응.”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에 배시시 웃으며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 또한 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씨앗이 반쯤 날아간 갈대를 김지원에게서 받아 입으로 후 불자, 아직 날아가지 않고 붙어있던 나머지 씨앗들도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마음에 들어?”
“뭐가?”
“갈대.”
“응. 마음에 들어.”
“선물이야.”
“…….”
“이곳에 온 걸 환영하는 의미로 주는 선물.”
다시 걸어가던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김지원을 따라 몸을 돌렸다. 우리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입은 옷을 조금 더 여몄다. 김지원은 점퍼의 양쪽 주머니에 제 양손을 찔러넣었다. 씨앗이 다 날아간 갈대를 손에 든 채로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힐끔 김지원을 바라보았다.
“여긴 왜 왔어?”
갑작스러운 김지원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김지원을 바라보자 김지원이 날 보곤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웃는 저 얼굴에 자꾸만 중독될 것 같은 느낌에 얼른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잠깐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몸이 안 좋아서.”
“너도?”
“어, 너도야?”
내 물음에 김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느린 걸음을 계속해서 걸으며 주머니에 넣은 한 손을 빼내어 옆에 놓인 갈대를 하나 더 꺾었다. 갈대를 살살 흔들어 바람을 타고 씨앗이 날아가도록 다 털어낸 김지원이 피실 웃었다.
“희귀병이래.”
“…….”
“사실 어떤 병인지는 잘 몰라.”
“…….”
“내가 아는 건 내 세상에 보이는 유일한 색을 빨간 색이라고 부른다는 것 뿐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서 김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지원이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짝 밀었다. 이해 못 했지? 하고 묻는 김지원을 향해 아냐, 하고 짧게 답하자 김지원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색을 못 봐.”
“…….”
“빨간색 빼고.”
“정말?”
“응.”
“정말 빨간색만 보여?”
내 물음에 김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한 마음에 김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김지원이 킥킥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네 입술이 되게 빨간가 봐. 네 얼굴에서 입술 색만 보여.”
“뭐?”
“아, 볼도 좀 빨갛다.”
지그시 내 얼굴을 구석구석 관찰해오는 김지원의 시선을 받고 있다가, 괜히 드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구나. 괜히 시선을 피해 땅만 바라보는데 김지원의 나긋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어라.”
“…….”
“이상하네. 지금은 네 얼굴이 전부 빨갛게 보여.”
아픈 거야? 열이 오르면 그렇게 빨개지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김지원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아무 것도.
한참을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작은 구멍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네에서 본 작은 슈퍼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의 구멍가게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자 김지원이 날 물끄러미 보다가 피실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뭐라도 사먹을래?”
“응.”
고개를 끄덕이곤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김지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에는 서울에선 인기가 없어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과자들이 가득했다. 신기함 가득 담은 눈으로 가게 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과자가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어.”
“어?”
“이거. 내가 예전에 사먹었던 과잔데.”
“어릴 때?”
“응. 초등학교 6학년 때 즈음이니까, 5년 전?”
내 말에 김지원이 과자를 들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왜? 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아주 살짝 인상을 쓰곤 입을 열었다.
“너 열여덟 살이야?”
“응.”
“뭐야. 나보다 어리잖아.”
김지원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넌 몇 살인데? 여전히 너라고 부르는 내 호칭에 김지원이 피실 웃으며 내 이마를 조금 전처럼 손가락으로 살짝 밀었다.
“열아홉.”
나보다 오빠였어? 순간 김지원을 바라보다가 못 본 척 고개를 홱 돌렸다. 내 행동에 김지원이 킥킥 웃으며 뒤에서 나를 툭툭 쳤다. 그런 김지원의 손길에도 모르는 척 품에 안은 과자를 들고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에 앉아계시는 할머니께 살짝 인사를 하곤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려는데, 문득 옆에 보이는 빨간 상자의 과자에 시선이 갔다. 아, 그러고보니까 오늘…. 잠깐 그 과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 과자까지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뒤, 할머니께 만 원 한 장을 내밀었다.
과자가 든 봉지를 손가락에 달랑이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좁은 공간 안에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오니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 공기가 좋긴 좋구나. 배시시 웃는 나를 따라 김지원도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김지원의 손에도 나와 같은 검은 봉지가 걸려져 있었다. 내 앞에 마주보고 선 김지원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라고 불러.”
“뭐?”
“내가 너보다 오빠잖아. 이제 알았으니까 오빠라고 불러.”
“싫어.”
“요것 봐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날 보던 김지원이 피실 웃음을 흘렸다. 그런 김지원을 올려다보며 킥킥 웃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에 들고있던 봉지 안으로 다른 손을 집어넣었다. 빨간 상자의 과자를 꺼낸 뒤 김지원을 향해 내밀자 김지원이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과자를 번갈아보았다.
“이거 받아.”
“갑자기 이건 왜 줘?”
“오늘 11월 11일이야.”
“…….”
“빼빼로 데이라고. 바보야.”
내 말에 김지원이 아, 하는 바보 같은 소리와 함께 피실 피실 웃음을 흘렸다. 내가 내민 빼빼로를 손으로 받아들곤 이리저리 살피던 김지원이 특유의 예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벌써 빼빼로 데이구나. 몰랐어.”
실실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우리가 온 길을 향해 먼저 걸음을 걷자 김지원이 내가 준 빼빼로와 검은 봉지를 손에 꼭 쥔 채로 내 옆을 걸어왔다.
“나도 선물이야.”
“어?”
“나 환영해줬잖아.”
“…….”
“환영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의 선물.”
주고나서야 밀려오는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김지원을 바라보지도 못 한 채로 말했다. 천천히 내게 맞춰 걸음을 옮기며 내 목소리를 듣고 있던 김지원은 여전히 그 예쁜 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고마워.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내 옆으로 닿아오는 김지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11월 14일
장작이 부족하단 할머니의 말에 김지원은 오늘도 우리 집으로 왔다. 산에 오를 거라는 김지원을 바라보며 마루에 걸터앉아 손을 흔들자 김지원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같이 안 가?”
“나도 산에 가자고?”
“어.”
“산은 싫어.”
내 말에 김지원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그 말에 잠깐 김지원을 바라보다가, 시무룩한 그 표정에 결국 한숨을 짧게 쉬곤 앞에 놓여진 신발 안으로 발을 넣었다. 알았어. 가자. 내 대답이 들리자마자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금새 피실 피실 웃음을 피운 김지원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발끝을 땅에 툭툭 쳐서 신발을 제대로 신곤 김지원을 잠깐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내 움직임에 김지원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따라 움직였다.
얼마 오르지 않아 가빠오는 숨에 김지원의 팔을 꼭 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김지원을 향해 힘들어, 하고 칭얼대자 김지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금 쉬다 갈까?”
“응.”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 옆을 툭툭 치자 김지원이 나를 마주보고 선 채로 고개를 저었다. 뭐. 싫음 말구. 바위 위에 앉아서 다리를 까딱이며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겨울이었지만 산 속에는 아직 푸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녹은 눈 때문에 군데군데 젖어있는 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김지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오빠한테 산은 다 흑백이야?”
“응. 빨간색이 없으니까.”
덤덤한 김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게 지내면 불편하겠다.”
“이젠 적응이 돼서 괜찮아. 예전엔 불편했어.”
“언제부터 그랬어?”
“태어날 때부터.”
말을 마친 김지원이 내 머리를 살짝 톡톡 두드렸다. 말 많이 하는 거 보니까 괜찮아졌네. 이제 올라가자. 웃으며 말하는 그 말에 김지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 먼저 걸음을 움직인 김지원을 따라 걷는데 별안간 김지원이 걸음을 멈췄다. 나도 따라 걸음을 멈추곤 영문을 몰라 왜? 하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아,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김지원이 한 손으로 제 눈 위를 덮었다. 곧이어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톱이 땅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톱을 들고 있던 그 손으로도 다른쪽 눈을 가린 김지원이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빠…?”
왜 그래? 아파? 주저앉은 김지원의 맞은 편으로 몸을 옮겨 김지원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여전히 제 눈을 가린 김지원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통증을 느끼는 건지 으, 하고 작게 신음을 뱉던 김지원이 눈을 덮고있던 손을 떼서 제 머리를 감쌌다.
“오빠. 오빠. 정신 차려봐.”
머리가 아픈 건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만 있던 김지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감싼 손을 풀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날 바라본 김지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놀란 나머지 울기 직전의 내 표정을 바라보던 김지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표정이 그게 뭐야.”
“뭐야…. 오빠, 괜찮아?”
“괜찮아.”
“눈때문에 그래?”
“모르겠어.”
날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던 김지원은 주저앉은 몸을 일으켜 섰다.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여전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 하고 김지원의 옷자락만 꼭 쥐었다. 제 바지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낸 김지원이 약간 인상을 쓰곤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11월 19일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쟁반 가득 담긴 음식들을 가지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다. 입구 쪽에 위치한 마을 회관의 맞은 편에는 김지원의 집이 있었다. 그 곳을 한 번 힐끔 바라보곤 곧장 회색의 마을 회관 문을 열었다. 할머니 몇 분이 계신 건지 신발장에는 신발 몇 켤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품에 안은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곤 몸을 굽혔다. 정리되지 않은 신발들을 손으로 하나씩 가지런히 정리하는데, 부엌 쪽에서 할머니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제?”
“그렇다는구만.”
“아휴. 우짤꼬. 저 이쁜 아를 갖다가.”
“이뻐서 하늘이 먼저 데려갈라고 그러는 갑다.”
신발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치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조금 더 부엌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가뜩이나 빨간색밖에 못 보는 아를.”
“나중에 심해지면 아예 앞도 못 본다카더라. 뭐, 암이라고 하던가. 우쨌든 그게 머리까지 다 퍼져서 그렇다데.”
“하이고….”
안타까운 듯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빨간색. 할머니들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김지원이었다. 의도하지 않게 듣게 된 김지원에 대한 정보에 깨문 입술을 조금 더 꾸욱 깨물었다. 이 사이에 물린 아랫입술이 살짝씩 아려왔다. 앞을 못 봐? 그럼… 시력을 잃는 거야? 그게 뭐야….
뭔가를 찾는 듯한 말과 함께 부엌 밖으로 나온 할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내가 마을 회관에 있는 걸 보고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시는 할머니께 배시시 웃으며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구겨진 상의를 손으로 살짝 털며 입을 열었다.
“이거 할머니가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하이고. 맞나. 고맙다.”
“아녜요.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짧은 인사와 함께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곤 그대로 몸을 돌려 마을 회관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고 문을 닫은 뒤 그 문에 기대어 섰다. 왠지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벼웠던 머리가 조금 복잡해지는 것도 같았다. 고개를 돌려 건너편의 김지원네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만히 닫혀진 그 집을 쳐다보고 있으니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른 고개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11월 23일
책상 앞에 앉은 김지원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연신 책만 들여다보았다. 김지원이 앉은 의자 뒤로 작은 탁자를 하나 펴놓은 뒤, 쟁반 위의 사과를 포크로 푹 찍어 한 입 베어물며 김지원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꽃.”
“꽃?”
“응.”
“꽃은 왜 공부해?”
내 물음에 김지원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예쁘잖아.”
“이유가 겨우 그거야?”
“그럼 뭐가 더 필요해?”
그런 건 아니지만. 사과를 입에 우물거리며 답하는 날 바라보던 김지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나는 꽃이 좋아.”
“…….”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의 꽃들도 꽤나 예쁠 거 같아.”
기분 좋은 듯 말해오는 그 목소리에 김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색이 제일 궁금해? 하고 묻는 내 물음에 김지원이 몸을 돌려 책상 위의 책을 하나 들었다. 의자에서 몸을 떼서 내 맞은편으로 내려와 앉은 김지원이 사과가 올려진 탁자 위에 제가 들고온 책을 펼쳤다. 이거. 김지원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예쁘게 핀 노란색 꽃이 보였다.
“어, 이 꽃 많이 봤어.”
“연산홍이야.”
“붉은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노란색도 있구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지원이 예쁘게 씨익 웃었다. 분홍색이나 붉은색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노란색은 보기 어렵대. 난 이게 제일 보고 싶어.
“꽃말도 좋아.”
“뭔데?”
빈 포크로 사과를 하나 쿡 찍어 한 쪽을 작게 베어물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반대쪽 끝을 김지원을 향해 내밀자 김지원이 그 끝을 물었다. 조금 베어문 채로 입을 우물거린 김지원에게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를 꿀꺽 삼킨 김지원과 눈이 마주치자 김지원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김지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사랑.”
순간 김지원의 목소리에 가슴 언저리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주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눈에 들어오는 노란 연산홍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첫사랑…. 제 시선을 피한 내가 웃겼는지 킥킥 웃음을 흘린 김지원이 손을 뻗어 숙인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책을 들어 다시 제가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 김지원의 움직임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그 기분은 뭐였지? 이상하게도 조금 전 나긋하게 말해오던 김지원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몇 번 젓곤 마지막 남은 사과를 포크로 쿡 찍었다. 입에 사과를 반쯤 베어물곤 멍한 표정으로 사과만 우물거렸다.
갑작스럽게 아, 하고 들려오는 김지원의 신음소리에 멍하던 정신이 깼다. 고개를 들어 의자에 앉은 김지원의 뒷모습을 올려다자 김지원이 연필을 쥐고 있던 손으로 제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아파?”
내 물음에도 대답 없이 가만히 멈춰있던 김지원이 조금 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응. 안 아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 김지원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연필을 잡으려는 듯 이마를 감싼 손을 풀어낸 김지원의 움직임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연필이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탁, 하고 연필이 떨어지는 소리에 김지원이 의자를 뒤로 살짝 뺐다. 그리곤 연필을 주우려는 듯 몸을 숙였다.
곧바로 연필을 잡을 줄 알았던 김지원이 방바닥 위로 손을 더듬거렸다. 그런 김지원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지원은 연필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바닥을 더듬으며 연필을 찾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김지원의 행동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아무런 말도 없이 앉은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김지원의 곁으로 다가가 바닥에 구르는 연필을 주웠다. 김지원은 내가 연필을 든 것도 모른 채로 여전히 바닥에서 연필을 찾기 위해 몸을 굽히고 있었다. 오빠, 하는 내 부름에 김지원이 조심스럽게 굽힌 몸을 일으켰다.
“어?”
“오빠 연필 여기 있어. 내 앞까지 굴러온걸.”
주운 연필을 김지원의 손으로 내밀자 김지원이 연필을 잡곤 예쁘게 웃어왔다.
“고마워.”
그런 김지원을 향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김지원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초점이 없는 눈은 내게서 조금 떨어진 옆을 향하고 있었다.
11월 27일
그 날 이후로 김지원의 시력은 여름의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워 졌다.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다가도 갑작스럽게 김지원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졌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검은색만 보이는 세상으로 변할 때면 놀랍거나 무서울 법도 한데, 김지원은 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마을 입구를 나서며, 처음 만난 날과 같이 하얀색 후드티를 입은 김지원이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추곤 내게 물었다.
“뭐 사야해?”
“두부랑 콩나물. 밑에 송씨 할머니는 작은 그릇 하나랑….”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심부름을 하기 위해 적어온 종이를 쭉 읽어주자 김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많지?”
“그러게.”
“올 때 우리 둘이서 다 들 수 있으려나.”
“집에 올 땐 버스탈까?”
그 물음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원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이제는 익숙한 저 손길이 좋아서 배시시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았다. 머리를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 온몸에 퍼진 건지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흙길을 함께 걷던 김지원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야?”
“나도 몰라.”
“오빠가 부르면서도 무슨 노랜지 몰라?”
“예전에 라디오에서 한 번 들었던 노래야. 멜로디가 좋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말을 마치고 노래를 마저 흥얼거리는 김지원의 목소리에 웃으며 같이 고개를 움직였다. 김지원이 노래를 잘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흥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김지원은 왠지 노래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하는 거 좋아해?”
“응. 넌?”
“난 별로.”
“왜?”
“목소리가 안 예뻐서.”
부르는 것 보단 듣는 게 더 좋아. 내 말에 김지원이 의외라는 듯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목소리가 안 예뻐?”
“그렇잖아.”
“아닌데.”
“…….”
“예뻐. 네 목소리.”
고개를 살짝 돌려 옆을 바라보자 김지원이 그자리에 멈춰서선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과 입가에 예쁘게 웃음을 건 김지원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
“듣고 싶다. 네가 노래하는 거.”
김지원의 말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망설이다가 입을 꾹 닫곤 몸을 돌려 걷던 걸음을 마저 걸었다. 불러달란 거야? 내 물음에 김지원이 킥킥 웃으며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나와 걸음을 맞췄다.
“불러달라고 하면 불러줘?”
“아니.”
웃으며 고개를 젓자 김지원이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걸어 작은 마트를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마트 다 왔어. 나도 모르게 조금 빨라지는 걸음으로 마트를 향해 다가가던 내 손목이 누군가에 의해 잡혔다. 뒤를 돌아 김지원을 바라보자 내 손목을 꼭 쥔 김지원의 눈에는 또 초점이 없었다.
“…안 보여?”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김지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잡아줘.”
그런 김지원의 대답에 나도 작게 웃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김지원의 손을 풀었다. 김지원의 손을 잡자 따뜻한 온기가 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이 안 보일 때면 내 손을 잡고 움직이는 김지원 덕분에 우리 둘 사이에서 손 잡아줘, 라는 말의 의미는 조금 특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프진 않아?”
“응. 괜찮아.”
“정말로?”
“정말로. 얼른 가자.”
재촉하듯 나와 잡은 손을 흔드는 김지원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덤덤한 목소리에 장난을 담아 말해오는 김지원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렸다. 좋지않은 기분에 입을 꾹 다물곤 마트를 향해 멈춰선 걸음을 옮겼다.
12월 1일
매일같이 우리 집에 놀러오던 김지원이 오늘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마을 입구에 위치한 김지원네 집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때 마침 마을 회관에서 나오던 할머니 한 분이 날 바라보곤 말했다.
“그 집에 아무도 없데이.”
“어디 갔어요?”
“지원이 눈 때문에 병원간다 카던데.”
“아….”
그 말에 아,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뒤 마을 위로 올라가는 할머니께 몸을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곤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픈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현관문 위로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김지원을 쓰다듬는 것처럼 차가운 현관문 위를 살살 쓰다듬으며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차가운 바람때문에 손끝이 빨갛게 변해갈 때 즈음, 조심스럽게 현관문에서 손을 뗐다.
겨우 하루 안 봤을 뿐인데 자꾸만 김지원이 보고 싶었다.
12월 5일
김지원은 몇 일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날 부르는 목소리에 마루로 향하는 문을 열자, 익숙한 모습의 김지원이 날 바라보며 웃었다.
“김지원!”
반가움에 얼른 마루로 나와 신발에 발을 넣었다. 한 쪽 신발을 다 신고 미처 한 쪽 신발은 다 신지도 못 한 채로 김지원을 향해 달려가던 내 몸이 휘청였다. 넘어질 듯 휘청인 내 몸을 꽉 잡은 김지원이 피실 웃음을 흘렸다.
“오빠라고 안 부르지.”
“괜찮아?”
“뭐가?”
“할머니가 오빠 병원 갔다고 하던데.”
겨우 나머지 한 쪽의 신발도 다 신고 제대로 몸을 일으켜 섰다. 김지원을 올려다보자 김지원이 날 잡고 있던 손을 떼곤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런 김지원을 올려다보던 내 시선이 김지원의 오른쪽 눈동자에 닿았다. 왼쪽 눈과는 김지원의 오른쪽 눈동자가 조금 탁한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은 왜 그래?”
내 물음에 김지원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이제 그쪽은 안 보여.”
여전히 웃으며 말해오는 그 목소리에 김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올려다보는 내 눈에 걱정이 서려있었던 건지 내 모습을 바라보던 김지원이 웃으며 내 머리를 더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직 한 쪽은 보여. 걱정 말라는 듯 말해오는 김지원의 말에 입술을 살짝 꾹 깨물었다. '아직' 이라는 두 글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할 말 있어서 왔어.”
“무슨 할 말?”
빤히 저를 올려다보는 나를 여전히 쓰다듬던 김지원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이사가.”
“…이사?”
“응. 이사.”
“어디로?”
“좀 먼 곳으로.”
잠깐 뜸을 들인 김지원은 눈을 예쁘게 접으며 말을 이었다.
“고칠 순 없는 병이지만 지금보단 괜찮아질 수 있다고 했어.”
“…….”
“양쪽 눈을 다 잃을 순 없으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조금 늦춘 김지원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김지원의 손길을 받으며 김지원을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김지원의 말에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몰라서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인 내 눈을 바라보던 김지원이 약간 당황한 건지 내게로 조금 더 다가왔다.
“울어?”
“…아니. 안 울어.”
“왜 울어.”
“…….”
“못 보는 거 아니잖아.”
눈물이 조금 더 맺히는 느낌에 소매로 눈가를 스윽 닦았다. 내 행동에 김지원이 쓰다듬던 손으로 내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다 나으면 여기로 올 거야.”
“…….”
“아니다. 그 땐 네가 서울로 다시 올라가려나?”
“…….”
“그럼 널 보러 내가 서울로 올라가지, 뭐.”
닦아냈지만 금새 다시 차오른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서운하고 서러웠다.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날 달랬다.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응?
12월 12일
김지원이 이사를 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알람이 울리자 얼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씻고 머리 위로 후드를 뒤집어 쓴 뒤 전날 밤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마을 입구를 향해 내려오자 차에 짐을 다 실은 김지원이 날 발견하곤 작게 웃었다.
“왔어?”
그런 김지원의 앞에 멈춰서자 김지원이 손을 뻗어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줄 거 있어.”
내 말에 김지원이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뭔데?”
“이거.”
손에 들고있던 것을 김지원에게 내밀자 김지원이 조심스럽게 내 선물을 받아들었다. 모양 그대로 말려 코팅된 빨간색 꽃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김지원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연산홍이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엔 안 피는 꽃이라고 해서 찾기 어려웠어.”
“…….”
“네가 보고 싶다던 노란 연산홍으로 주고 싶었는데 그건 못 찾아서….”
말끝을 흐리며 김지원을 올려다보자 김지원이 활짝 웃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고마워. 나긋하게 들려오는 김지원의 목소리에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여전히 탁하고 하얀 오른쪽 눈을 바라보자 또 울컥 울음이 차올랐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김지원을 올려다보자 김지원이 양쪽으로 팔을 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품으로 다다가 안기자 김지원이 나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왔다.
“또 운다. 또.”
“…꼭 와.”
“응. 꼭 다 나아서 올게.”
“기다리고 있을게.”
“너도 건강해져 있어야해.”
알았지? 하고 묻는 김지원의 물음에 그 품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원이 피실 웃음을 흘렸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키곤 김지원의 품에서 몸을 뗐다. 눈물 젖은 눈으로 김지원을 올려다보자 김지원이 손으로 내 볼에 묻은 눈물자국을 닦았다. 그런 김지원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조금 떨리는 내 손을 내밀었다. 새끼 손가락과 엄지를 제외하곤 모두 접은 채로 김지원을 향해 손을 내밀며 약속, 하고 말하자 김지원이 피실 웃으며 제 손을 내밀었다.
김지원의 새끼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얽혔다. 두 개의 엄지 손가락이 닿고 김지원에게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자, 그가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안녕.”
처음 만났던 날처럼 내게 말해오는 김지원의 목소리에 여전히 땅으로 시선을 둔 채로 작게 답했다.
“응…. 안녕.”
‘여보,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
‘전에 우리 딸 어머님 댁에 가있었을 때 봤던 그 총각 말예요.’
‘아, 지원이?’
‘네. 그 총각, 결국 세상을 떴다고 하더라구요.’
‘뭐? 진짜?’
‘조금 전에 어머님 전화 오셨어요. 저 멀리 외국까지 가서 치료라도 해보려고 했던 모양인데, 치료는 커녕 양쪽 시력 다 잃고 그렇게 살다가 갔다네요. 머리에까지 병이 퍼져서 살릴 수가 없었대요. 그렇게나 젊고 예쁘던 아인데….’
‘어휴…. 하늘도 무심하시지. 진짜.’
‘우리 딸이랑 친했었다고 어머님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전화 오셨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다음 해, 2월
오랜만에 산을 올라서 그런지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약간은 빠르게 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코트를 조금 여몄다. 날이 풀리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런 날씨는 내게 춥기만 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보이는 봉긋한 모양의 무덤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멈춰선 걸음을 움직여 그 앞에 섰다.
회색 돌에 새겨진 '김지원'이라는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지원…. 그 때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소리내어 김지원, 하고 발음하자 내 목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익숙한 그 이름에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겨우 울음을 삼키곤 손에 들고있던 작은 화분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화분 속에는 작게 다듬은 노란 연산홍이 담겨 있었다.
“안녕.”
“…….”
“안녕, 김지원.”
“…….”
“안녕, 지원 오빠.”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가만히 그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손을 뻗어 그 위로 조금 자라난 풀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풀의 느낌은 예전의 그와 다르게 차갑게 느껴졌다.
“이제야 소식을 들어서 이렇게 왔어.”
“…….”
“약속했으면서.”
“…….”
“…꼭 오기로 약속했잖아. 손가락도 걸고.”
말을하다 또 다시 한 번 울컥하는 느낌에 하던 말을 멈췄다.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는데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니. 실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른거리는 그의 모습에 입술을 꾹 깨물었는데도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거기는 어때?”
“…….”
“오빠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
“거기에 꽃은 많으려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뱉은 뒤 입을 꾹 다물었다. 눈끝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귓가에 전에 들었던 김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울지 마. 그 목소리에 손으로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보고 싶다.”
“…….”
“안녕.”
“…….”
“잘 가. 내 연산홍.”
잘 가. 내 첫사랑.
마지막 인사를 하고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코와 귀를 스쳤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가 묻힌 그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그곳을 서성이다가 겨우 한 걸음을 뗐다.
“또 올게.”
올라온 길을 향해 몸을 틀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올라온 길을 향해 내려가던 내 시선에 무언가 잡혔다. 고개를 들어 그 곳을 바라보자 겨우 참고있던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멈출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도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는 울지만, 울면서도 웃고 있었다.
내 시선이 닿은 그 곳에는 돌아오는 봄을 맞이하는 노란 연산홍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꼭 김지원을 위해서 피는 것처럼, 김지원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노란 연산홍이야.”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색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오빠도 보여?”
울면서도 겨우 웃음을 담아 짜내듯 나온 내 목소리가 조용한 그 곳을 울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김지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
이 글은 소설 '소나기'의 흐름을 따라 쓴 글이에요 제목 '소낙비' 는 '소나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오늘의 bgm은 러브래빗의 '나무와 소년'!
아가씨가 잘 풀리지 않아서 이렇게 아련한 지원이 글로 왔어요 blue sea는 바다였다면 오늘의 테마는 '산' 입니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김지원의 첫사랑, 몸이 약한 여주의 첫사랑, 그리고 그 둘을 이어준 산골 마을 음, 쓰고보니까 그 노래도 생각나요 어느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음 좋겠어요 몸 아픈 건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병원 밥이 맛이 없네요 엉엉.. 마음도 얼른 나아서 올게요! 늘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해요! 제 사랑 받아요! 쪽쪽! 사담에 활기가 없어보인다는 제 이쁜이의 말에 오늘은 활기를 조금 담아왔는데 보이시나요? 흐흐
앗, 지원시에 올리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다.. ㅠ_ㅠ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