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 들어와? 시계는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왜 아직 안자. 그의 말에 작은 전등을 키며 말했다. —너 기다리느라. 연애 3년이 되는 해였다. 남들은 3년이 되도록 권태기 한번 겪지 않았다던데. 아직 설렌다던데. 넌 아닌가 보다.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전화라도 해주지... 그는 나를 살짝 밀어내며, 나 피곤해. 씻을게. 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켜놓은 작은 전등의 불빛이 일렁댔다. 동거 1년 차에 연애는 3년. 끊어내고 싶어 하는 그를 붙잡아 여기까지 질질 끌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는 뭐든지 금방 싫증 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뭐든 금방 질려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조차도 싫어진 건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전등을 끄고 방에 들어갔다. - 언제 잠들었는지,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너의 큰 등이 보였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기분이 간질거렸다. 뒤돌아있는 너의 등을 안았다. 연애 초에는 항상 팔을 내어주던 그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게 입을 맞춰주던 그가 생각났다. 그의 큰 등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그때와 다른 사람인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인데, 너는 자꾸만 멀어졌다. - 어제 술을 많이 마신 듯했다. 간간이 숙취에 앓는 듯한 소리가 그 증거였다. 나는 간단히 해장국을 끓여놨다. 아침밥을 챙겨 먹지 않는 나는 과일을 씻어 들고 거실로 향했다. 커튼을 열고 아침 햇살을 머금었다. 티비를 켜고 딸기를 입에 넣었다. —아침 잘 챙겨 먹어야지. 그의 목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과거의 그에게서 온 목소리였다. 연준은 내가 아침을 거를 때면, 위에 안 좋다며 밥이나 과일 같은 것을 입에 넣어주곤 했다. 티비에서는 로맨스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풋풋한 연인들의 모습에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딸기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 한참 티비를 보다가 문득 밖을 바라봤다. 쨍한 아침 햇살이 어느새 포근한 오후 햇살로 바뀌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나 흘러있었다. 오후 12시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그에게 향했다.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피곤해? 눈이 부신건지 내 손길이 싫은건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응. 하고 짧게 답했다. —국 끓여놨어, 이따 먹어. 나 나갔다 올게. 그는 알겠다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나는 이불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방을 나왔다. 함께지만 공허했다. - 대충 준비를 하고 나왔을 때, 시계를 보니 벌써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약속에 늦을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였다. - —저기요-! 갑자기 나를 돌려세우는 손길에 놀라 귓가의 이어폰을 뺐다. 나는 시선을 한참 올렸다.
키가 아주 큰, 순하게 생긴 남자가 지갑, 떨어트리셨어요.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 나를 쫓아 뛰어온 듯했다. —아, 감사합니다. 연준이 선물해 줬던 지갑이었다. 그가 건네는 지갑 사이로 연준의 사진이 빼꼼 나와있었다. 사진 속 연준과 눈을 마주쳤다.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안아주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가만히 사진 속 연준만 들여다봤다. 그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저기... 안 받으세요...? 멀뚱히 서 내게 지갑을 건네는 사람에게 아차, 죄송합니다. 하고는 지갑을 받아들었다. 돌아서려다가, 지갑에서 카드만 빼고 다시 처음 보는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이 지갑 좀 버려주실래요? 안에 현금은 사례금으로 받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한참을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핸드폰 바탕화면에 웃고 있는 연준이 보였다. 나른한 오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눈을 감았다. 정리해야 한다. 미련을 털어내야 한다. 이별을 준비할 때가 온 듯했다. -
순식간에 모르는 사람의 지갑을 갖게 된 수빈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멀뚱히 서있었다. 멀어져 가는 지갑 주인의 뒷모습과, 사진이 빼꼼 나와있는 지갑을 번갈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