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김태형과 정수정, 둘과 함께 노는 건 아무래도 돈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다. 직업으로 따지면 극한 직업 수준? 잘 맞을 땐 그렇게 잘 맞으면서도, 안 맞는 부분에선 또 어떻게 그렇게까지 안 맞을 수가 있는지, 어느 장단에 맞춰 박수를 쳐줘야 하는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내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지금껏 그렇게 쾌활하고, 또 존재감이 무지막지하게 큰 친구들은 처음이었다. 낯설긴 해도, 그래서 또 즐겁고, 어쩐지 나도 한 단계 더 성장한 기분이 든다고 해야하나, 암튼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좋은 편이라면 또 몰라도.
생각보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마음이 잘 맞으면서도, 날 매번 지치게 하는 친구들 때문이기도 했고, 또 내가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물론 선배들을 보면, 내가 1학년이라는 마음에 들떠서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 같긴 했다. 평소 잘 나오지 않는 콧노래까지 불러대며 입학 전, 미리 짐을 옮겨두었던 하숙집으로 발을 옮겼다. 학교에서 하숙집은 20분 거리 내에 있을 정도로 나름 가까웠다. 가까운만큼 돈을 많이도 받는 탓에 조금 비싸게 주긴 했다. 아줌마는 친절했고, 밥도 맛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 있는 침대보다 넓다는 점이 좋았다. 하숙집까지 가는 길은 어두웠지만 골목마다 가로등이 있어서 드라마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로맨틱한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옛날 우리 집이 아파트라는 걸 감안했을 때, 이 곳이 아니면 절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며칠만으로도 나는 이 곳을 좋아하게 됐고, 그래서 학교에 마치자마자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항상 밤이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도 역시 수정이, 태형이와 함께 9시까지 학교에 머물러있다가, 학교를 나섰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나는 밤길이 이토록 무섭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하는지도 처음 알았고, 왜 드라마에서 여자들이 착각을 그렇게도 많이 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발자국 소리는 묵직했고, 마침 휴대폰 배터리도 없었다. 가방을 꼭 붙잡고 침착하며 곧 보일 하숙집을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 마치 그 발이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숙집은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하숙집이 보이자마자 와다다 달려가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며 바로 보일 누군가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 초인종을 마구마구 눌러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줌마가 늦게 확인하시는 건지 괜히 불안한 마음에 가방끈만 꼭 붙잡고 있으면 내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듯 했던 누군가는 내 바로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 정국이니? "
" 네, 저예요. "
초인종을 누른다. 순간 가방끈을 꼭 붙잡았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전정국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왠지 그 얼굴이 살짝 웃고 있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졌다. 내가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있는 걸 본 게 분명했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했고, 전정국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는 그대로 들어가버린다. 아. 쪽팔려.
아줌마는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다며,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셨다. 아니라며 내 나름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데 어쩐지 낯선 신발이 보인다. 아줌마는 혼자 사셨고, 나는 여자. 그리고 우리 하숙집엔 나밖에 없는데 웬 사이즈가 커보이는, 그러니까 남자 신발이 있었다. 아줌마에게 물어봐야 하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서면 탁 트인 거실과, 거실 바로 옆에 있는 부엌 의자에 앉아 있는 화려한 머리색의 젊은 남자가 보인다. 누구냐는 듯 아줌마를 쳐다보면 아줌마는 자연스럽게 나를 데리고 가 부엌 의자에 앉힌다.
" 이번에 들어온 하숙생이야. 인사해. 이 쪽은 민윤기. 그러니까… 윤기야, 네가 몇 살이랬지? "
" 스물 셋입니다. "
" 아, 그래. 내 정신 좀 봐. 스물 세살! 그리고 여기 이 아가씨는 스무 살! 김아미. 서로 인사하면서 앞으로 잘 지내. "
" 아… "
" 아미야, 밥 안 먹고 들어왔지? "
" 아… 네……. "
우리 엄마가 알면 노발대발할 사건이었다. 남자도 없고,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좋아라 하며 계약한 하숙집이었다. 일단, 우리 엄마가 몰라야 할 사실임에는 분명했다. 어색하게 앉아있으면, 곧 아줌마는 하얀 쌀밥을 나와, 그러니까 그. 민윤기 씨에게 퍼주었고 정갈한 반찬들을 내놓았다. 진수성찬급인 반찬들을 보니까 그래도, 우리 엄마가 설사 남자 하숙생이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해도, 어쩌지 못할 건 분명했다.
아줌마는 방으로 들어가셨고, 곧 방에서 티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용했다. 거실과 부엌은 조용했다. 불은 환히 켜져 있는데 조용했다. 낯선 느낌에서 으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젓가락과 숟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라서 먼저 입을 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쌀밥만 입에 담으며 민윤기 씨 눈치를 보았다. 민윤기 씨는 하얀 편이었다. 태어나서 햇빛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하얬다. 얼굴만 하얀가 했더니, 것도 아닌 것이 팔도 하얬다. 분홍빛으로 물들인 머리는 그의 하얀 피부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평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라고는 똥만큼도 주지 않는 내가, 설사 있더라도 애써 무시하는 내가, 계속 그의 얼굴과 머리색만 힐끔거렸다. 그게 꽤나 거슬렸는지 민윤기 씨는 정갈하게 쥐고 있던 젓가락을 소리내어 내려놓았다.
" 할 말 있어요? "
" 네? 아, 아니. 그냥. 그건 아닌데요… "
" 근데 왜 자꾸 봐요. 머리색 신기해요? "
" 아… 예뻐서요! 머리색! "
" 그럼 댁도 하세요. "
재수 없어. 싸가지 없어. 어디서 말을 저런 식으로 배워와서는. 아니, 스물 셋 맞아? 스물 셋이면 적어도 말주변도 좀 있고, 사회성도 좀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같은 사람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재수 없는 편은 아니었고. 그러니까 저 사람은, 수정이와 나를 섞어놓은 사람 정도라고 생각했다. 애써 칭찬한 말이 민망하게 돌아왔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더니, 옛 조상 말 믿을 게 못 된다. 소심한 성격에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지는 못하고, 눈을 내리깔아 반찬에 손도 대지 않고 밥만 퍽퍽 퍼먹고 있으면 민윤기 씨는 다시 한번 젓가락을 소리내어 내려놓는다.
" 무슨 과예요. "
아니, 그건 댁이 알아서 뭐하시려고.
" OO과요… "
" OO과? OO과예요? "
민윤기 씨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과가 학교에서 나름 머리로 먹히는 과라 놀란 건가, 아님 감히 나따위가 그런 과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서 놀란 건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나름의 기분 나쁜 표정으로 놀란 토끼같은 민윤기 씨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제대로 쳐다본 민윤기 씨는 역시 하얬고, 분홍색 머리가 잘 어울렸다. 눈이 조금 세모난 게, 나름 매력있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금방 지워버렸지만.
" 네. 왜요? "
" 아니, 뭐. 그냥. "
" 그냥요? "
" 같은 과네, 싶어서. "
같은 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윤기 씨, 이제 선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암튼,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놓았던 젓가락을 다시 들어 반찬을 집어 입에 넣는다. 젓가락을 잡은 손가락이 길어, 예뻤다. 여자인 내 손보다도 길쭉하고 얇은, 거기다 하얀 손에 살짝 질투심을 느끼며 젓가락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진짜 우리 과냐고, 묻는 내 질문에 민윤기 씨는, 아니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민윤기 선배는 이번엔 제 얼굴색 마냥 하얀 쌀밥을 입에 넣어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를 보는데, 숨이 턱. 방금 전에도 느꼈지만, 눈이 참 매력적이다. 언뜻 보면 조금 재수 없긴 한데, 다시 보고 싶은 그런 눈. 또 보고, 또 보고, 계속 보다, 다시 안 보면 그리워질 것 같은 눈.
" 15학번이라고? "
" 네. 20살 김아미예요. "
" 왜 우리 과 들어왔어? 학점도 존나 거지같이 주는데. "
" 아, 정말요? "
" 너 우리 과 잘못 들어왔어. 진지하게 전과 생각해라. 나 학점 말아먹어서 휴학 하고 군대 간 거야. "
민윤기 씨, 그러니까 민윤기 선배는 자연스럽게 반말 스킬을 시전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아까 밥 먹을 땐 말이라도 섞으면 죽일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사람이 같은 과라는 공통 관심사가 생기자마자 입에 모터가 달린 듯 제 얘기를 쏟아낸다. 말이 별로 없는 터라, 거기다 처음 보는 사이에 상대가 말이라도 없으면 어색함에 밤잠을 설치는 성격이라, 선배가 혼잣말이라도 주절주절 떠들어주는 게 꽤 고마웠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선배가 생겼다는 것보단, 좋은 선배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선배는 1학년 때 들었던 수업들, 또 학교를 오래 다닌 건 아니지만 나름 알고 있는 꿀강들, 가지고 있는 족보들 등등 자랑스럽게 여러 얘기들을 풀어놓더니, 결국에는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은 군대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난 밀려오는 피곤함에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에도 선배 얘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는 정수정, 김태형, 집에서는 민윤긴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도 집중하지 않는 내 모습에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웠다. 어쩌면 내가 스물 셋이고, 선배가 스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나름 웃어가며, 맞장구도 쳐가며 듣고 있으면, 선배 동기들은 모두 군대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바로 입대를 한 선배와는 다르게, 선배의 동기들은,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안 되는 공부를 붙잡고 끙끙대다가 2학년 1학기를 끝내고서야, 늦으면 2학기를 끝내고서야 입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투덜대는 모습이 역시 스물 셋같지가 않아, 앞에서 베시시 웃고 있으면 선배는 비워진 내 밥그릇과 선배의 밥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가 물에 담근다. 가만히 앉아있는 나와는 다르게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식탁에 있는 나머지 반찬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어두고, 고무장갑을 낀다. 잠시 벙 쪄 있었다. 그러니까. 저 선배, 지금.
" 선배! 제가 할게요! "
" 아냐, 됐어. 넌 들어가서 쉬어. "
" 선배, 진짜 제가 할 수 있어요! "
설거지를 한다. 물을 틀어놓고, 딸기 모양 수세미에 퐁퐁을 묻히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물이 묻은 그릇을 뽀득거리며 닦고 있다. 사장님들이 왜 굳이 군필 알바생을 뽑는지, 새삼 이해를 하며 옆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으면, 선배가 입꼬리만 올려 살짝 웃으며 손을 분주하게 놀린다. 사실 태어나서 설거지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하숙집을 계약하면서도, 당연히 나는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이니까,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선배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선배의 옷을 살짝 당기면 그릇을 뽀득거리던 선배가 내 쪽을 쳐다본다. 아, 또 저 눈.
" 들어가 있어. 진짜. 괜찮으니까. "
선배, 재수 없다고 생각한 거 정말 미안해요.
" 남자가 하는 거야, 이런 건. "
싸가지 없다고 한 것도 미안해요, 선배.
미안함에 선배가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싱크대 앞에서, 그리고 선배 옆에서 선배가 설거지 하는 모습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요리도 어깨 너머로 배운다고 하던데, 나라고 설거지를 어깨 너머로 못 배울까. 물론, 설거지가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는 부잣집 아가씨들은 아니고, 나도 설거지 정도는 할 줄 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간다거나, 편하게 의자에 앉아있기에는 선배가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나이로나 학번으로나 한참까지는 아니지만, 암튼 어린 내가 그러기엔 미안하기도 하고, 선배는 괜찮다고 했지만 눈치가 살짝 보이기도 하고.
선배는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고무장갑을 한쪽 끝에 정갈히 놓더니 고무 냄새가 나는지, 손을 씻고는 싱크대에서 손을 털며 여전히 선배 옆에서 선배가 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나를 보고는 소리 내어 웃는다. 목을 살짝 긁는 웃음에, 그러니까 낮은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에 살짝 움찔 하며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 아미야, 11시야. "
" 네? 아, 그렇네요……. "
" 네, 그렇네요. 들어가서 씻고 자, 얼른. "
" 네… 수고하셨어요, 선배… "
선배는 물기가 살짝 묻은 손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잠시 멈칫, 싱크대 호수에 아무렇게나 걸려져 있는, 설거지를 하는 바람에 끝부분만 살짝 젖은 행주에 대충 손을 닦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괜히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푹 숙여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올라가려는데.
" 내일 몇 시 수업이야? "
" 아, 저… 음… "
선배의 갑작스런 질문에, 시간표가 아직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입생인 나는 머릿속에서 시간표를 떠올려다보다 실패하고, 기다리고 있는 선배에게 미안해 부랴부랴 휴대폰을 꺼냈다. 폰을 켜자마자 배경화면에 둥둥 떠 있는 시간표에서 요일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고는 선배에게 '오전 수업이에요. 9시.' 라고 울상 지으며 말하면, 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 8시에 보자. 같이 가. "
" 네? "
내 방은 1층, 그리고 선배 방은 아마도 2층. 아줌마 방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내 방을 향한 상태에서 몸만 틀어 선배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면 선배는 식탁 의자에 놓여있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고는 2층으로 발을 움직인다. 그리고는, 또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더니, 뒤를 돌아.
" 내일 보면 오빠라고 불러. 선배 말고.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선배는 눈치 챈 것 같았다. 안 그럼 저렇게 다정하게 웃으며 올라갔을 리가 없다. 분명. 지금 내 얼굴은 빨개져 있다. 선배와 학교를 같이 간다는 게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다거나, 오빠라고 부를 생각에 가슴이 떨린다거나, 암튼 그런 건 아니었는데 괜히 그런 속마음을 선배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절대 그런 게 아닌데. 학교 같이 가는 게 너무 좋다거나, 오빠라고 부르는 게 설레거나, 절대 그런 거 아닌데. 절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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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와 함께 하는 첫 등교였다. 일주일째 하고 있는 등교지만, 조금 새로웠다. 아마도 옆에 선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말이 많던 어제와는 다르게 선배는 말이 없었다. 머리를 감고는 말리지 않았는지, 조금 젖어 있는 선배의 분홍색 머리는 축 쳐져 있었고, 덩달아 선배의 가방도 축 쳐져 있었다. 피곤한 듯 눈을 비비는 선배의 모습을 힐끔 보았다.
" 선배, 수업 몇 시세요? "
" 아……. "
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수업 시간을 고민하는지, 무얼 고민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조용히 옆에서 걷고 있었다. 선배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내가 절대 선배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고, 잘생긴 남자에게 눈이 가기 마련이고, 나는 여자고, 선배는 잘생긴 남자고. 그래서 선배를 힐끔 쳐다보는 걸 나도 모르는 새에 그만두고 선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가 맞다.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 아미야. "
" 네? "
" 오빠. "
너무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던 게 불편했던 건지, 선배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보았고, 그에 화들짝 놀란 티를 팍팍 내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어제처럼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닐까, 걱정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오빠' 라고 정정해주는 선배의 말에 심장을 부여잡기는 커녕, 심장이 온 몸에 방송이라도 하는 듯 온 몸에서 쿵쿵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귓가에서 심장이 쿵쿵대는 것 같은데, 이게 선배에게 안 들린다면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크게 들려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럽다.
결국 선배의 수업이 몇 신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20분의 등교 시간 내내 나는 눈을 아래로 고정하고 있었고, 선배는 그런 모습에 개의치 않고 조용히 걷기만 했다. 그 이후에 나에게 신경을 쓴다거나, 암튼 그런 일은 없었다. 가끔 젖은 머리가 신경 쓰이는지 축축한 머리를 털거나, 뒷주머니에 꽂아놓았던 휴대폰을 확인한다거나, 시간을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원래 같으면 8시에 출발하면, 8시에 30분에 딱 맞춰 과실에 도착하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8시 40분에 도착했다. 30분에 도착하면 과실은 보통 텅텅 비어있는데, 고작 10분 차이임에도 40분에는 9시 수업을 들어가려는 내 동기들이 많았다. 물론, 윤기 선배와 같은 학번인 여선배들도 가끔 도서관에 가기 전에, 아침을 챙기기 위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나 도시락따위를 사들고 와 계시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8시 40분, 과실 도착. 문을 열자말자 보이는 건 15학번, 동기들. 그리고 내 옆엔 윤기 선배.
" 여, 김아미! "
"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늦게… "
전자는 김태형, 후자는 정수정. 나보다도 학교와 더 가깝게 사는 김태형과 정수정은 집에 있는 게 오히려 심심하다며 매번 학교에 일찍 오곤 했다. 그리고 그 둘은 늘 나보다 먼저 와서 나를 반겨주곤 하는데, 둘은 지금 내 옆에 있는 낯선 사람의 얼굴에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고는 눈이 동그랗게 된 김태형은 물론이고, 웃으며 반겨주다 말의 끝을 잃어버린 정수정, 그리고
여전히 여자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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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선배라는 거잖아! 우리 과! 선배! "
" 그래, 우리 과 선배. "
" 와, 진짜 대박!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어? 어떻게 같은 집에 사… "
아무렇지 않게 윤기 선배와 내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걸 말하는 수정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걸 입 밖에 내면 어떡하냐는 내 당황 섞인 물음에 수정이는 뭐 어떻냐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같은 하숙집인 게 이상한 건 아닌데. 암튼 이런 게 나돌아다니는 건 좀 그랬다. 같은 하숙집도 정도가 있지, 같은 과에서 이런 얘기 도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 괜찮다는 수정이의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 소문 내고 다니면 죽어, 너. "
" 야,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언니만 믿어, 언니만. 밥 먹으러 갈까? 우리 아미 뭐 먹으러 갈까~ "
마침 화장실에 다녀온 김태형이. 얜 참 이상하다. 수정이와 내가 여자인 걸 뻔히 알면서도 지퍼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잠근다. 우리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 일주일 만에 습관이 된 건지, 아님 남고를 다니다 보니 습관이 된 상태에서 우릴 만난 건지, 수정이는 어김 없이 그런 태형이의 모습에, 태형이 어깨를 찰싹 찰싹 아프게 때린다.
" 야! 너 내가 화장실에서 지퍼 잠그고 나오라고 했어, 안 했어! "
" 아, 귀찮아! 그게 뭐 어때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면 되잖아! 정수정 변태같은 게. "
" 얼씨구. 야, 나도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요~ 별로 볼 것도 없는 게. "
" 야! 네가 봤어? 봤냐고? 볼 거 없는 건 그쪽이고여~ "
내가 이래서 얘네랑 못 논다. 동기 간의 싸움, 그러니까 20살의 다툼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버린다. 처음에는 둘이 정말 싸우는 줄 알고, 둘을 말려보다가도 지금이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싶어, 한 발 물러나 있다. 저기에 껴서 둘을 말리다 보면, 분명 제 편을 들어달라고 내 양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릴 게 분명했다. 내 등은 안 터지게 내가 잘 관리해야지.
일상과 같은 둘의 말싸움에 지쳐 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이제 그만할 때쯤 되지 않았나 싶어 둘 사이를 중재하려 발을 움직이려 하면, 어딜 갔다오는 건지 과실 쪽으로 가는 윤기 선배의 모습이 보여, 괜히 내가 이 선배와 친하다는 걸 알리려는 것 마냥, 나도 모르게 선배를 크게 불러버렸다. 절대, 내가 이 선배와 친하다, 유세를 떨려는 건 아니었다.
선배는 뒤를 돌아 나와, 내 옆에서 언성을 높여 말다툼 하다가도 내 목소리에 놀라 나를 쳐다보는 김태형과 정수정을 번갈아 보다가, 내쪽으로 걸어온다. 사실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수업이 끝나서 과실로 돌아오니 선배는 없지, 찾으려고 했지만 선배를 아는 사람은 없지, 해서 그냥 밥을 먹으려던 참이라 지나가던 선배의 모습이 반가워서 부른 거라 선배가 와도, 그 앞에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냥 내 앞에 선 선배의 모습에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 오빠라니까. "
" 아, 맞다… "
" 밥 먹으러 가? "
" 네… "
" 배고프다. "
선배의 뜬금 없는 말에 다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여기서 배고프다는 선배의 말은, 함께 밥을 먹기를 권유해달라고 하는 거라던가, 아님 나에게 밥을 얻어 먹고 싶은 마음을 돌려서 말한 거라던가, 아님 선배가 밥을 사준다는 건가? 아니, 지갑도 얇아 보이던 선배가 밥을 사줄 것 같진 않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뒤에 있는 수정이와 태형이를 힐끔 쳐다보고는 선배에게 물었다.
" …같이 드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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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 끝장판인 태형이와 수정이는 선배와 쉽게 친해졌다. 선배도 나와 다르게 마냥 말이 없는 편은 아니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또 밥을 먹으면서, 어쩌면 나보다도 수정이와 태형이가 선배랑 더 친해진 건 아닐까 싶었다. 젓가락으로 밥을 몇 번 집어먹다, 입맛이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으면 선배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선배 앞에 있던 물을 내쪽으로 밀어준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선배가 준 물을 마시다, 저 끝에서 누군가와 웃으며 밥을 먹고 있는 전정국을 발견했다.
누구지. 전정국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등을 돌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여자는 아니었다. 짧은 머리에 어깨도 좀 있었고,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사람이 전정국과 있다고 해서 내가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 잠시 잊고 있긴 했다. 전정국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전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나, 그때 잠깐 보고, 보지 못했던 그런 웃음이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만 보여주는 그런 웃음. 눈이 휘어질대로 휘어져, 더 이상은 휘어지지 못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눈을 접어 웃는다. 턱을 괴고 전정국을 관찰했다. 선배와 태형이, 수정이가 얘기하는 소리는 주변 소음에 흘러 들어갔다. 오랜만에 전정국의 얼굴을 마주 보는구나, 싶었다.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전정국을 웃게 해주는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부러웠고, 조금은 질투했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내어서 웃는 전정국의 모습이 들뜬 그 때의 전정국인 것 같아, 조금은 씁쓸했다. 내 앞에서 딱딱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애가 조금은 미웠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으면, 문득 내가 조용하다는 걸 느낀 선배가 내 어깨를 쳐왔고, 태형이가 내 앞에서 손을 흔들었고, 수정이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전정국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기도 전에 쳐냈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전정국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턱을 괴고 나도 모르게 웃으며 전정국을 보고 있으면, 뚫어져라 저만 보고 있는 걸 모르는 게 더 멍청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던 전정국은 그 누군가에게서 잠시 시선을 꺾어 나를 쳐다본다.
잠시였지만, 그 웃는 모습이 나를 향했다. 선배에게 어느 다정한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낯선 감정에서 오는 느낌보다도, 익숙한 감정에서 오는 느낌이 내 온몸을 에워싸는 것만 같았다. 전정국은 곧 얼굴을 굳혀 시선을 피해 갔지만, 나는 편안했다. 여름 밤에 시원한 바람을 쐬며 가로등만 비춰져 있는 길을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있을 그 시기에 벚꽃 나무가 즐비해 있는 거리를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웃는 모습이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간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내가 너를 웃게 해줄 수도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드는 게 좋았다.
" 아, 좋다. "
" 아미야? "
" 죄송해요.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이게 바로 똥망이라는 건가요. 저 진짜 망했어요.
이번 글 너무너무너무너무 마음에 안 드는데 오늘을 또 넘기면 독자님들이 사라질까봐 급하게 올렸어요.
시험도 끝났고, 다른 시험을 준비해야 하긴 하지만, 스토리 진행 소재가 고갈되지 않는 이상은 꾸준히 열심히 올릴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프롤로그에 비해서 1편 반응이 좋더라구요.
생각치도 못했는데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하구요 ㅠㅠ 글 좋다고, 잘 쓴다고 해주시는 분들도 너무너무 감사해요.
이 글의 남자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정국이지만, 사실 제 사심을 조금 담아서 윤기를 투입했어요.
남자 주인공은 바뀌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여러분. 윤기에게 조금 설렜지만 정국이에게로 다시 돌아왔어요!
이번 편엔 정국이가 적어서 저도 조금 아쉽긴 한데, 다음 편엔 정국이가 많이 나올 거예요!
아, 혹시 스토리 진행에서 원하시는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참고할 수도...
아, 그리고 혹시 포인트 싫으시면 말씀해주세요 ㅠㅠ 체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단 제일 낮은 걸로 체크하긴 했는데
혹시 독자님들이 부담스럽다, 하시면 0p로 고고하겠슴다!
암호닉
현지 / 카누 / 낭자 / 정국이최소내남자 / 그리 / 솜니움
연 / 목단 / 가온 / 계피
>> 혹시 제가 놓친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수정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