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흙과 같이 어두운 밤, 달빛이 연聯국의 위를 덮었다. 푸른 색인지 혹은 하얀 색인지 모를 달빛에 반사된 분홍의 꽃잎 위에는 투명한 이슬이 두어 개가 맺혀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선 채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 꽃잎을 잡은 공주의 손가락을 타고 물방울이 흘렀다. 그림자와 같이 어두운 곳에 선 채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우가 입을 열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물이 들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이렇게 곱고 어여쁜 색이라면 나는 마냥 좋구나.”
나긋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공주의 말에 찬우가 옅게 웃었다. 꽃잎을 매만지던 공주는 혹시라도 꽃잎이 저 때문에 떨어질까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그리곤 제 손가락에 옅게 물든 분홍색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소리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공주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길 좀 봐.”
“무엇을 말입니까.”
“하늘 말이다. 만월滿月이야.”
공주의 말에 찬우의 시선도 하늘에 닿았다. 검은 하늘,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어느 곳 하나 흠이 없는 동그란 모양의 달이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이름 그대로 ‘가득찬’ 달이었다.
잠깐 하늘을 지켜보던 공주가 혼잣말을 하듯 속삭였다.
“고요하구나. 그렇지?”
찬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은 공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공주의 말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왔다.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에 놀란 공주가 뒤를 돌아 텅 빈 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찬우는 본능적으로 공주를 품에 가두며 공주를 보호했다.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무언가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만월滿月, 보름달이 뜬 고요한 밤.
황煌국이 연국을 침략하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여기저기서 높은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찢어지는 소리, 떨어지는 소리, 둔탁한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겹쳐서 궁 안을 울려왔다. 불에 타는 냄새, 피의 비린 냄새와 같은 것들이 꽃 향기로 가득하던 연국을 흐렸다.
제가 있던 곳을 박차고 나온 공주와 찬우는 바로 뒤에 위치한 산으로 몸을 숨겼다. 행여나 누군가 따라올까,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한 손으로는 제 치맛자락을 잡고 달리는 동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공주의 뒤에서 함께 달려오는 찬우는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 속,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겨우 옅은 달빛이 들어올 정도의 깊은 산 속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숨을 돌리는 공주의 볼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타고 흘렀다.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처참했다. 연국의 궁이 있던 그 자리에는 불길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공주가 저도 모르게 다시금 몸을 떨었다. 그런 공주를 잠깐 바라본 찬우가 습관적으로 제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피곤 공주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게….”
“…….”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이냐….”
공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찬우가 그런 공주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왔다. 공주는 허탈한 표정으로 불타는 연국의 궁을 계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 이리 도망친 것이지?”
“…….”
“연국의 궁이 불타고 있어. 그 어여쁘던 연국이, 그 꽃들이, 노래를 흘리던 새들이, 그 나무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주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켜보는 찬우는 그런 공주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왔다.
공주를 안아주려고 손을 머뭇거리던 찬우는 결국 다시 제 손을 거뒀다.그리고 그 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넘어지려고 비틀거리는 공주를 찬우가 재빨리 잡아주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요하기만 했던 내 나라에 어째서, 어째서….
조금 전 찬우와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구나.’ 그 생각에 더 눈물이 차올랐다.
겨우 목숨은 구했다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할까. 나는 어디를 가면 좋으냐. 내 나라가 아닌 곳, 어디에…. 이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란 말이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한참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중,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그러니까 아바마마가 돌아가시기 전. 그의 품에 안겨 나눈 이야기였다.
‘혹 무슨 일이 생기거든 예禮국으로 가세요.’
‘예국이요?’
‘공주를 도와줄 겁니다, 예국이라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공주는 저도 모르게 찬우의 팔을 잡았다. 꽉 잡는다지만 이미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그런지 찬우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공주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찬우를 살짝씩 당기며 말했다.
“예국이다.”
“예?”
“예국으로 가야해, 찬우야.”
“갑자기 예국은 왜 간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바마마께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예국으로 가라고 하셨어. 예국으로 가야만 해. 길을 아느냐?”
찬우가 대답 대신고개를 끄덕여왔다.
공주가 재촉하듯 찬우의 드러난손목을 꼭 잡자 찬우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곤 목에 둘렀던 천으로 제 입가를 가린 뒤 빠르게 걸음을 움직였다. 그 뒤를 공주가 함께했다.
한참을 달리던 공주가 찬우를 잡는 손에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달리고 도망다니는 데에 힘을 모두 쏟아버린 듯 했다.
서서히 저를 잡은 손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낀 찬우가 걸음을 늦추려는 찰나, 공주가 발을잘못딛은 건지 경사진 곳으로 몸이 기울었다. 떨어지려는 그 때, 찬우가 공주의 몸을 당겨 감싸안았다. 그리고 둘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으….”
공주가 신음을 뱉었다. 그런 공주의 신음에 찬우의 신음이 옅게 묻혔다. 정신을 차린 공주가 제 밑에 깔린 찬우를 발견하곤 놀라서 몸을 옮겼다.
찬우는 팔과 머리를 부딪힌 듯 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성한 팔로 다른 한 쪽 팔을 움켜쥔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찬우야!”
“…….”
“찬우야, 찬우야.”
“…예.”
“괜찮아? 괜찮은 것이야?”
겨우 눈물이 멈춘 듯 했던 공주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저를 걱정하는 얼굴로 내려다보는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우는 다시 아픔이 느껴지는 건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 소리를 뱉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손을 떨며 저를 지켜보는, 눈물만 흘리는 공주를 올려다보던 찬우가 공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뻗다가, 망설이다가, 겨우 공주의 얼굴에 제 손을 가져다 댄 찬우가 그녀의 눈물을 한 번 살짝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금방 다시 손을 거두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아?”
“예.”
“피가 나지 않느냐, 이런데 어찌 괜찮아…. 이것 또한 내 탓이구나.”
울먹이며 말하는 공주의 말에 찬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고 낮게 말하는 찬우의 목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뒤쪽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낯선 옷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주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찬우 또한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인상을 쓰곤 몸을 일으켰다.
겨우 제 몸을 세운 찬우가 공주를 제 뒤에 숨겼다.
점점 사내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들이 든 불빛에 비친 저들의 의복은 분명 황煌국의 것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간간이 “공주를 찾아야 한다!” 라는 말이 들릴 때면 공주는 작게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들킬 것만 같았다. 가까워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찬우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가십시오.”
“뭐?”
“가셔야 합니다.”
“그럴 순 없어. 널 두고는 못 간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예국이 있습니다. 예국의 땅으로 발을 붙이면 그래도 이 곳 보다는 안전할 겁니다.”
“…찬우야.”
공주의 부름에도 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성한 팔로 공주를 뒤로 밀어낸 찬우의 손길에도 공주는 걸음을 떼지 못 했다.
다시 한 번 “찬우야….” 하고 망설이는 공주를 향해 찬우가 제 입을 천으로 가리며 말하였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찬우의 그 말에 공주의 눈물이 터졌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찬우야, 찬우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도 찬우는 공주를 한 번 더 뒤로 밀어냈다. 그리곤 앞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던 공주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뒤로 걸음을 뗐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공주는 힐끔, 뒤를 돌아 찬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방 나를 따라 올 것이야. 그렇지? 그렇지, 찬우야?
한참을 달리던 공주의 꽃신이 결국 찢어졌다. 맨발로 험한 산길을 걸어가던 공주는 이전에는 맡지 못 한 달큰한 향기를 느꼈다. 예국은 꽃이 가득한 곳이라 하더니 연국과는 다른 꽃내음이 풍기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빠진 공주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아 드디어 숲을 벗어난 공주가 제 얼굴을 비추는 빛에 살짝 인상을 썼다.
숲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날은 이미 밝은지 오래였다.
은은한 새벽의 안개가 드리웠고, 지나쳐온 숲과는 다르게 넓게 펼쳐진 들을 바라보는 공주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입고 있던 치마는 흙이 묻고 찢어져서 볼품 없어진 지 오래였다. 머리는 다 헝클어졌고, 몸 어느 구석 하나도 성한 곳이 없었다.
상처투성이인 제 팔, 보이진 않지만 욱신거리는 발, 그리고 아무도, 아무 것도 없는 이 곳.
공주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울어선 되는 것이 없다. 공주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렸다.
눈물을 닦기 위해 손을 들던 공주의 시선에 연분홍으로 물든 제 손가락이 들어왔다.
“아까 그 꽃 때문에….”
연분홍으로 물든 손끝에서 찬우의 향기가 겹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참던 눈물이 터진 공주는 “흐아앙….” 하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거기 누구냐!”
그러던 그 때, 풀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말을 탄 사내 하나가 공주를 향해 다가왔다. 놀랄 힘도 없는 공주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사내를 올려다보자, 혹시나 싶어 칼을 들고 오던 사내는 칼을 거두고 공주의 앞에 말을 세웠다.
“너는 누구냐.”
“…….”
“누구냐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은 것일까. 대답할 힘도 없는 공주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하고 고개를 서서히 떨궜다.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말발굽 소리가 늘었다. 조금 전 그 사내의 뒤로 많은 사내들이 우르르 말을 타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사내의 일행인 건지, 사내를 향해 “무슨 일이냐.” 하고 묻는 물음에 사내는 “여기에 누군가 있습니다.” 하고 짧게 답을 하였다. 그리고 공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생채기가 많지만 본래부터하얗고 고운 피부, 머리에 꽃힌 꽃핀, 그리고 금색의 실로 새겨진 연꽃, 聯의 문양.
문양을 발견한 사내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사내는 뒤에 선 사내들 중 백마를 탄 남자를 향해 제 말을 옮겨 걸어갔다. 백마탄 남자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사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연국의 문양입니다.”
그 말에 백마를 탄 사내의 시선이 공주에게로 닿았다. 공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내의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했다.
매마른 시선으로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든 공주가 제게 시선을 두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하고, 그 곳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낸 공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살려주세요….”
그 말에도 사내는 가만히 공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체력도, 기운도 없는 공주는 말이 끝남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때, 백마를 탄 사내가 잡고 있던 굴레를 들어 올려 말을 움직였다.
풀 위로 공주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공주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남자가 제 곁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데려오거라.”
* * *
바쁜 걸음을 옮긴 공주가 생과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따스한 연기와 함께 달큰하고 고소한 향기가 공주의 코를 자극했다.
공주를 발견한 어린 나인‘리’가 몸을 꾸벅 굽혀 인사했다. 그런 리를 향해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곁으로 다가갔다.
“꽃내가 아주 향기롭구나.”
“그렇지요? 특별히 어린 꽃으로 만들었어요. 채화는 어린 잎에서 나는 향이 더욱 진하거든요.”
자랑스러운 듯 말하는 리가 귀여운 건지 공주가 웃으며 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팔의 저고리를 살짝 걷어 올린 공주가 리의 앞에 놓여진 그릇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왔다.
“이걸 하면 되는 거지?”
공주의 행동에 리가 놀란 듯 제 양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앗, 안 돼요! 공주마마! 마마 손에 반죽이 묻잖아요.”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인 걸. 나도 네가 만드는 것 처럼 한 번 즈음, 만들어 보고 싶었어.”
“그래도 제 일인데….”
“아니야. 괜찮아.”
웃으며 말한 공주가 가루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힘을 가하며 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후, 바람만 불어도 흩어질 것 같던하얀 색과 연노랑 색의 가루가 점점 뭉치는 것이 느껴졌다. 공주는 저도 모르게 제 콧등을 손등으로 슥 문질렀다.
“이만하면 되었나?”
“예!”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한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리를 향해 조금 전 반죽을 하던 그릇을 내밀자, 리가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안에 있는 반죽을 조금씩 떼어 커다란 솥 안으로 넣었다.
“이리 하면 떡이 되는 것이야?”
“그럼요. 불을 떼기 전에, 위에 이렇게 꽃 하나를 놓으며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반죽 위로 노란 꽃을 놓는 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예쁘게 놓고 싶은 건지 리의 손길이 신중했다.
정 가운데에 노오란 꽃을 심은 리가 활짝 웃으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공주를 바라보며 아이 특유의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렇게요!”
“정말로 곱다. 색도 곱고, 향기도 진하고.”
“나중에 떡이 되면 이 열기 때문에 향내가 더, 더 진해질 거예요.”
웃으며 “그래?” 하고 되묻는 공주의 물음에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 앞의 꽃들 중 예쁜 것을 고르고 골라 공주에게 한 송이 내밀었다.
“공주마마도 한 송이 올려 보시겠어요?”
“내가?”
“예!”
“흐음….”
리가 내민 꽃을 받아든 공주가 솥 안에 올려진 반죽을 둘러보았다.
어느 곳에 올리는 것이 좋을까, 잠깐을 고민하던 공주는 제게서 가장 가까운 곳의 반죽 위로 꽃을 가져갔다.
조금 전 리가 했던 것 처럼 신중하게 가운데를 찾는 공주의 손이 작게 떨렸다.
꽃이 반죽에 심어지고, 리가 한 것과 제가 한 것을 번갈아 바라보던 공주가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이며 말했다.
“내 꽃은 네가 한 것 처럼 예쁘게 올라가지 않았구나.”
“아니어요! 그래도 예쁜 걸요.”
손을 내젓는 리의 모습이 귀여워 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손에 묻은 반죽을 털어내는데, 생과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 한 명이 생과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를 발견한 리가 먼저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리를 따라서 공주 또한 가볍게 목을 숙였다.
“바쁘십니까?”
“아뇨. 어찌 이리로 오셨어요?”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전하께서요?”
남자의 말에 공주가 놀란 듯 되물었다.
전하가 저를 왜 부른 것일까, 하고 생각하던 공주가 슬며시 웃으며 남자를 향해 물었다.
“혹, 전하께서 외출을 하시나요?”
공주의 물음에 사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내의 대답에 공주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더 피었다.
낯선 예국에 온 지도 벌써 반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아직도 예국의 길이 익숙치 않았다. 또한 연국의 공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궁 안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에 처할 지 모르는 공주는 궁 밖을 나가는 것을 꺼렸다. 전하 또한 비슷한 이유에서 공주가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전하의 외출이 있을 때에는 공주의 외출 또한 허락되었다. 함께 나간다는 전제하에.
손에 묻었던 반죽을 재빨리 털어낸 공주가 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리를 향해 몸을 굽힌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궁 밖을 다녀올 것 같구나. 이건 완성이 되는대로 별궁에 가져다 놓아달라 부탁해도 될까?”
“당연하죠!”
“궁 밖의 물건 중 뭐 갖고 싶은 게 있어?”
다정한 공주의 말에 리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리의 볼을 살짝 문질러주자 리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뒤의 하얀 꽃을 한 송이 잡았다. 그리곤 공주의 묶은 머리 사이로 꽃을 끼웠다.
“공주마마와 잘 어울리는 꽃이어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지 수줍어하며 말하는 리의 모습에 공주가 웃으며 “고맙구나.” 하고 말했다.
앉은 몸을 일으키고 뒤를 돌아 조금 전 그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가 생과방 밖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리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한 공주가 사내를 따라 쪼르르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와 사내를 따라 걷는 동안 공주는 얼른 제 옷 매무새를 만졌다. 혹 치마가 구겨지진 않았을까, 저고리에 무언가 묻지는 않았을까 옷을 털어내던 중 사내가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뒤늦게 걸음을 멈춘 공주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백마를 타고 있었던 남자, 용포를 입은 사내. 그는 예禮국의 왕, 김지원이었다.
마주친 시선을 공주가 먼저 피했다.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숙인 채로 꾸벅 인사를 하는데, 역시나 지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오늘은 조금 달랐다.
늘 제게서 금방 시선을 옮기는 지원인데 오늘은 계속해서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공주의 앞에 다가와 섰다.
공주는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렇게나 가까이서 맡게 된 전하의 향기는 포근하고 향긋했다. 예국과 퍽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찌 그러시나요….” 하고 묻는 공주의 목소리에 지원이 공주를 바라보던 고개를 숙였다.
꼭 제게 닿을 것만 같이 숙여오는 지원의 행동에 공주가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갑작스레 제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공주가 몸을 움찔했다. 그런 공주의 행동이 웃긴 건지 지원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콧등에 무엇을 그리 묻히고 다니는 것이냐.”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 한 채로 물어오는 지원의 행동에 공주는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제게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씩 멀어지자 그제야 공주가 눈을 슬그머니 떴다.
그래도 여전히 가까운 전하의 향기, 그 얼굴에 공주는 고개를 들지 못 하고 괜히 제 앞의 용포만 바라보았다.
달큰한 꽃 향기 때문인가.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원은 여전히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움찔거리는 공주의 모습이 지원은 흥미롭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공주를 내려다보던 지원의 시선이 공주의 땋은 머리칼에 꽃힌 하얀 꽃에 닿았다.
“…이 꽃은 무엇이냐.”
“예…? 아, 어린 나인 하나가 저와 어울린다며 제게 주었습니다.”
“그래?”
공주의 말에 지원이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의 얼굴에 닿아왔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그 시선만 받고 있으니 금방 지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몸을 돌린 지원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얀 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