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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구. 나는 복잡하고 귀찮은건 딱 질색이라.
나는 니가 좋고 너도 내가 좋고. 이러면 게임오버 아닌가. 깔끔하게 딱 떨어지잖아.
이정도면 우리가 사귈 이유는 충분히 된다고 보는데. 아니야?
허, 나 참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오늘새벽 댓바람부터 전화질을 하더니 뭐? 데리러갈테니까 먼저 버스타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어쩐지.
박찬열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의심부터 하고 봤어야 하는건데.
오늘 마지막수업이 몇시에 끝나는지 수업시간에 문자까지 보내 확인도 했으면서. 답문도 안보내길래 설마 했지.
그런데 결국은 이 꼴이야. 내가 애초부터 박찬열한테 무슨 팔자에도 없는 공주대접을 받겠다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제 앞에 놓은 깡통을 발로 뻥 차버렸다.
그러나 저 만치 떨어져 나뒹구는 깡통을 보아도 뒤틀린 속이 풀어지지가 않는다.
저 커피캔이 박찬열이였으면 좋았을걸.
"어? 변백현. 너 아까 수업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나가더니, 왜 아직도 여깄냐?"
"준면선배. 이제 가세요?"
"어. 경수 수업이 지금 끝나서. 같이가려고 기다렸다."
"…그렇구나."
"근데, 넌 여기서 뭐하냐? 급해보이길래 뭔 약속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약속이… 있었나, 없었나."
"뭐야. 다 죽어가는 꼴 하곤. 오늘 첫 눈 온댄다. 애인은 뭐하냐? 둘이 영화라도 봐."
선배. 지금 영화라 그랬어요? 박찬열 그자식이 영화관을 얼마나 질색팔색하는데요. 뭐라더라.
의자가 불편하고 소리만 크고 답답해서 못 있겠다나. 진짜 어이가 없어요.
키는 더럽게 커서 그런거 생각은 안하고 괜히 의자탓만 한다니까요.
거기다가 팝콘이라도 하나 사먹을라 치면 콜레스테롤 덩어리 뭐하러 사먹냐며 핀잔주기에만 바빠요.
다른 애인은 콜라먹을래? 오징어까줄까? 팝콘 더 사다줄까? 옆에서 시중들어주기 바쁘던데.
거기다가 눈이요? 내가 진짜 박찬열하고 사귄 삼년동안 첫 눈 온다고 로맨틱하게 눈 맞으러 나간 기억이 단 한번도 없어요.
눈오면 바지 밑단이 젖어서 싫다나. 결국 저 혼자 나와서 처량하게 눈 맞다가 집에 들어갔다니까요,
작년에. 더 웃긴건요. 그래서 내가 감기에 걸렸으면 적어도 미안해하면서 말이라도 다음부터 같이 가자 하면 어디가 덧나냐구요.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 문병와가지고는 것 봐. 내 말 안듣더니 그게 뭐냐. 낄낄거리면서 웃고 갔다니까요,그자식!
"선배. 경수가 기다리는거아니에요? 얼른 가보세요."
"아. 맞다. 근데 있잖냐."
"네?"
"내가 아무리봐도 그녀석 옷 사이즈는 95거든."
"95 맞아요. 맨날 덩치커보이려고 100이라고 말하는데 그거 믿으면 안되요."
"그치? 죽어도 100이라고 우기는거야.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오는데."
"근데 사이즈는 왜요?"
"아. 티셔츠가 이쁘길래 그녀석 생각나서 하나 샀거든. 좋아해줬으면 좋겠는데."
"좋아할꺼에요. 티셔츠 모으는거 취미잖아요."
준면선배의 발길이 참 가볍다. 경수 만나러 가는길이 저렇게 즐거울까,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나질 않는다.
손목시계를 한번 더 들여다 봤다. 7시. 그래. 사실은 안 올 걸 알면서도 괜한 오기에 한번 기다려 봤다.
박찬열이 이런적이 어디 한 두번 이던가. 우리가 사귄지 첫 한달동안만 야자끝나고 밤 길이 위험하다면서
열심히 바래다주더니 슬슬 그것도 귀찮은지 횟수가 줄어져 가길래 뭐 찬열이네 집이랑 우리집이랑 정 반대니까 힘들기도 하겠지.
하면서 다음부턴 안 바래다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랬는데 이 놈이 단박에 정말? 그래. 좀 멀긴 했어. 하는게 아닌가.
와. 입 발린 소리로라도 하나도 안 힘들었어. 너랑 같이있는데 뭐가 힘들어. 해주면 안되는건가.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박찬열이 이런 놈이라는걸 진즉에 알아봤어야 했다.
버스에 올라탔다. 카드를 찍고 맨 뒤에서 한칸 앞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우리 둘이 즐겨타던 자리. 매번 나 혼자만 녀석과의 순간 순간을 기억하고 되새기는것만 같은 이런 느낌이 싫다.
분명 박찬열은 아무 생각도 없이 이자리가 편하니까.
맨 뒤는 넘 덜컹거려서 멀미할것 같고 맨 앞은 사람들 왔다갔다 거려서 걸리적거리잖아. 할 게 뻔하다.
핸드폰을 열었다. 혹시나 문자라도 하나 와 있을까 했지만 역시나 박찬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한통 없었다.
그럼 그렇지. 니가 이런 것 까지 신경 쓸 위인은 못 되지.
폴더를 막 닫으려고 하는 찰 나 녀석과 내가 언젠가 찍어서 대기화면으로 해 놓았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변백현. 이 벨도 없는 자식아. 이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 옆에서 그렇게 빙구같이 웃고 있는건데.
대기화면을 그냥 기본 시계화면으로 바꾸어버렸다.
사진도 삭제할까 하다가 차마 삭제는 못하겠고 해서 일단은 그냥 두었다. 일단은.
[ 마누라! 어디야? ]
"왜 전화했어."
[ 어디야 지금? 우리집에 와라. ]
"… 야! 너 진짜…."
한껏 속으로 녀석에게 욕이란 욕은 다 퍼부어가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박찬열에게서 걸려온 전화.
양반은 못 되겠구나,너도. 하고 일부러 시큰둥하게 받았다. 그런데 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찬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활기찼다.
오늘 학교앞까지 데리러 온다고 했음에도 안 오길래 집에서 낮잠이라도 자겠지하며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박찬열의 목소리는 잠을 자다 깬 목소리는 아니였다. 거기다가 뭐? 집으로 오라고?
진짜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대체 박찬열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약속도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린주제에 싹 싹 빌어도 모자랄판에 집까지 나더러 찾아오라고?
"그래. 기다리고 있어. 할 얘기 있으…"
[ 빨리와! 키 어딨는지 알지? 그냥 문 따고 들어와! 끊어. ]
그래. 원래부터가 너는 이런사람이였다. 내 이야기는 끝까지 귀 담아 듣지도 않다가 제 할말만 다 하면 볼 일 없다며끊어버리는 성격. 언젠가 그러겠지. 잘 놀았어, 변백현.. 이제 그만하자. 딴 여자 혹은 남자가 생겼어. 하고 냉정하게 뒤돌아서 가 버리더라도 하나도 이상할게 없는 놈이다. 지난 삼년동안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싶다. 하기사. 언제나 아쉬운 건 내 쪽이였으니 전화도 문자도 매번 내가 먼저 했고, 뒤 돌면 보고싶어 했던 것도 내 쪽이였기에 내가 먼저 달려갔다. 우리가 친구사이였을 때 부터도 항상 초조해했던건 나였다.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매번 지는건 변백현. 박찬열이 아닌 변백현. 바로 나였다. 그런데 이젠 끝낼래. 더이상은 못 하겠어. 나는 이런 연애를 원했던게 아니야. 나도 나 보고싶다면서 새벽같이 달려오는 사람 만나고 싶고, 하루에 열 번 사랑한다고 말해도 질려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고 싶고, 낯간지럽고 유치하지만 로맨틱한 말 한마디 해 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런데 너는 그거 나한테 못 해주잖아. 그러니까 끝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