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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뭐든 들고다니는 걸 죽어라 귀찮아하는 박찬열이 집 키까지 야무지게 챙겨다닐리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집 앞 화단밑에다가 키를 두고다녔다. 내가 저러다가 도둑든다고 볼 떄 마다 잔소리를 해 대어도 훔쳐갈 것 도 없어서 괜찮아.
하고 장난스레 웃다가 나한테 한 대 더 맞았었더랬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헤어지자는 소리 하려고 온 거잖아 변백현. 그런데 그렇게 실실 웃으면 어쩌자는거야. 바보.
"박찬열. 나 왔어."
운동화를 벗고 거실을 가로질러 녀석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나다를까.
박찬열은 침대에 누은채로 열심히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계신중이였다.
그 만화책이 얼마나 웃기고 재밌길래 애인이 집에 왔는데도 잘 왔냐는 대꾸도 하나 안하는거야?
꾹꾹 화를 눌러담으며 녀석이 들고 낄낄대던 만화책을 휙 하고 빼앗아 들었다.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며 씨익 웃는 박찬열.
"마누라. 왔어?"
"지금이 몇신데 벌써부터 침대에 드러누웠어."
"지금이…8시 반이지."
"장난치지마. 나 너랑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마누라. 그러지말고 저기 책상 위에 상자 한번…"
"헤어져."
"저 상자 한번 보라니까."
"헤어지자구."
"내가 뭐 사왔게. 얼른 가서 열어봐."
"내 말이 장난으로 들려? 헤어져! 헤어지자구! 그만 끝내자구, 우리!"
악에 바쳐 결국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때까지 실실 웃으며 장난질을 치던 박찬열의 얼굴표정이 싹 굳은 걸 보니 이제서야 알아들은 모양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손에 바들바들 떨려왔다. 간신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도 후덜덜 떨렸다.
평생 이렇게 화 한번 내 본적 없던 내가 박찬열을 상대로 이럴 수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오늘도 뭐야, 데리러 온다더니 오지는 않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이 집으로 오라고? 와. 진짜 뻔뻔하다."
"마누라."
"진짜 지겨워. 내가 먼저 문자하는것도 싫고 전화하는것도 싫고, 매번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것도 싫어!"
"…못 헤어져. 안 헤어져."
"맨날 니 맘대로지. 진짜 짜증나. 너도 내가 질리고 나도 너가 싫어졌고. 우리가 헤어질 이유는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는데,아니야?"
"아니. 이유가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해. 그러니까 안돼."
"너 혼자 연애질 하던가 그럼. 난 싫으니까. 간다."
"백현아."
"갈게."
힘겹게 그녀석의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래도 솔직히 조금 다행이다 싶은건 눈물이 이제서야 흐른다는 점이였다.
박찬열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를 때 혹시 울기라도 할까싶어 꾸욱 참았는데 정말 잘 참았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울기까지 하면 정말 변백현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놈이 되어버리는거니까.
박찬열앞에서 그건 죽어도 싫었다. 코를 한번 훌쩍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서야 눈이 내리고 있다는걸 알아채었다.
픽. 오늘이 첫 눈 오는 날이라 그랬던가. 이게 뭐야. 정말 최악이네. 되는일이 하나도 없어, 정말.
고등학교때 입학하자마자 처음 사귄친구가 바로 박찬열이였다.
그 당시 박찬열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운동도 잘하고 잘생기고 유머러스하기까지해서 인기도 많은 학생회 회장이였다.
몇번의 우연이 인연이 되어 친구까지 되었는데 무슨 아다리가 그리도 잘 맞았는지 언젠가부터 우리는 베스트프렌드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었다.
그렇게 지내길 삼년, 때는 고삼때였다. 토요일 오후.
그 날은 주번이었던 내가 오후 늦게까지 뒷정리를 하고 가야했던 날이였기에 박찬열이 나를 기다렸었다.
텅 빈 우리반 교실에서 주번일지만 작성하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하고 말했던 나에게 박찬열은 내 앞 책상에 걸터앉아 내 눈을 마주쳐오며 이렇게 말했다.
변백현. 나 너 좋아해.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구.
나는 복잡하고 귀찮은건 딱 질색이라. 나는 니가 좋고 너도 내가 좋고. 이러면 게임오버 아닌가. 깔끔하게 딱 떨어지잖아.
이정도면 우리가 사귈 이유는 충분히 된다고 보는데. 아니야? 왜 였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도 그 때 박찬열을 좋아하고 있었다면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의 노을이 참 예뻐서였을까, 아니면 남자답게 내 손목을 잡아오는 찬열이의 박력에 반해서 그랬을까.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날의 그 고백을 다시 한번 듣고싶었다. 진심이 잔뜩 어려있는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
사랑한다. 는 무미건조한 스쳐지나가는 한마디 말고 듣는사람의 마음도 감동으로 찌르르 울릴 수 있는 그런 묵직한 한마디면 되는데.
그러면 박찬열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바보같은 변백현은 다시 헤벌죽 웃으면서 돌아갈텐데.
뒤를 돌아 여러번 굽어보아도 한걸음에 쫒아와 안아주길 바랐던 박찬열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정말 끝인가 보다. 내가 내 손으로 끊어낸 것인데도 왜 내가 더 아픈거지.
생각보다 너무 아프고 진짜 … 비참하다.
톡-
무슨소리야. 무거운 눈커플을 들어올렸다. 어두컴컴한 방 안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톡-
눈을 번쩍 떴다. 아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펑펑 울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들었나보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분명 둔탁한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툭-
"변백현. 문 열어."
헉.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내리던 눈은 아직도 소복히 내리는 중이였다.
차가운김이 훅 하고 방안으로 끼쳤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찬열이가 돌멩이를 하나 손에 든 채 씨익 하고 웃고있었다.
저 바보. 눈도 오는데 저렇게 얇게입고 나온거야? 빨리가서…아니다. 잠깐만.
우리 헤어졌잖아. 몇시간 전에.
"마누라. 화 많이 났어?"
"…왜 왔어. 얼른 가."
"이리 좀 내려와서 안아주라. 나 추워."
아무리 퉁명스럽게 말해도 제 진심은 못 속이는건지 자꾸만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미치겠다.
다시 창문을 닫고 들어가려는데 문득 찬열이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길게 쭈욱 빼고 잘못본건가 싶어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찬열의 발이 이상했다.
웬 깁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니 다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꽁꽁 붕대로 싸매고 있는 그녀석의 오른쪽 다리를 본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한달음에 녀석에게 달려갔다.
박찬열. 넌 끝까지 사람 바보로 만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