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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이잉 -지이이잉

 주말의 아침에,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손을 더듬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평소였다면 정신 사납게 시끄러운 벨소리에도 아랑곳 않은 채 깊게 잠들었을 나인데, 그날따라 유독 청신경이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고개만 빼꼼히 내민 상태 그대로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진심이 가득 담긴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부어줄 참이었다.

 

 -…나야, 경수야.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수많은 욕들이 한 방에 사그라들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네게 막대하지 못한다.

 

 “아, 어…아침부터 웬일이야?”

 

 아침이고, 또 아직 꿈속에서 헤엄치는 중이라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고 제멋대로 갈라져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영 거북한데 수화기 너머의 너는 어떨까 싶다.

 네가 보고 느끼는 나는, 너의 환상에 갇혀있는 모습 일 텐데 그 환상이 한 꺼풀 벗겨지자 실망이라도 한 것일까. 너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고요함.

 …하암.

 네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제대로 눈을 뜨려고 시도해봤건만 이놈의 눈꺼풀은 밤사이 푸둥푸둥 살이라도 찐 건지 유독 무거워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멍하니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너에게서 어서 빨리 침묵이 깨어지길 기다리며.
 정신을 놓을 듯 말듯, 살짝 벌어진 입이 닫히고, 또 열리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핸드폰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 미끄러져 내릴 뻔 했을 때,

 

 -있잖아,

 

 드디어 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얼른 고쳐 잡으며 나도 모르게 번쩍, 하고 눈을 떴다.

 

 “어,어?”
 -내가, 많이 생각 해봤는데….
 “…어,어어.”

 

 이 자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참았다. 너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우리,
 “…….”
 -헤어…질까?

 

 솔직히, 생각지도 못했다. 네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그래서 너의 말에 한동안 말없이 그저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 네가 한 말이 맞는가 싶어서.

 

 -…헤어지자.
 “…….”
 -그게, 좋을 것 같다.

 

 이별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헤어지자는 그 말도 내가 먼저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글쎄….
 전화는 이미 끊겨버렸지만, 슬라이드를 내릴 생각도 못한 채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생각을 하긴 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저, 너와의 이별이 꿈같았다고 기억하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때의 네가 과연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꿈 같이 이별했었다.

 

 

너와 나만의 시간
1.

 

 오늘은 월요일이다. 시험이 끝난 주말 동안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다 학교엘 가니까 몸이 고새 나른해져서 그런지 벌써 피로가 밀려오는 듯 했다. 중간고사를 장렬하게 말아먹고, 모두가 열심히 놀 때에 난 열심히 공부를 할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거늘 이틀 동안 주구장창 놀아댄 나도 참 별수가 없다. 인간이란 원래 조금의 빈틈만 생겨도 나태해지기 마련이라고 누가 그랬다. 누가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보자마자 이건 존나 명언이다!! 라고 생각했을 뿐. 학교에 오자마자 교탁에 놓인 영어 점수표를 보고 죄책감이 들어서 서랍에서 비문학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그나마 제일 자신 있는 게 언어니까 이거라도 잘 다져놔야 한다. 나의 무한신뢰를 얻고 있는 언어마저 빵꾸나면 난 진짜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플라즈마는 ‘주조되어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로, 생물학에서는 원형질이나 세포질…을 말한다는데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소린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간다. 하얀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자이니라. 왜 하필이면 과학 지문이란 말인가!!! 과학이 싫어서 문과에 왔는데. 문과 오면 과학 하나도 안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쌩뚱 맞게 비문학에서 과학이 나오고 지랄이야. 지랄이. 빌어먹을.. 이건 공부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임에 틀림이 없다. 아 나 안 해, 나 안 해. 공부 안 해!

 괜히 짜증나서 펼쳐둔 문제집을 홱 덮어버렸다. 그러고는 책상에 엎드렸는데 큰 손이 다가와 내 어깨를 마구 흔든다. 이건 보나마나 박찬열이다.

 

 “야야, 영어 점수 떴어!! 봤냐?”
 “아 졸라 망했어. 흑흑. 엄마한테 학원 보내달라고 할까봐...”

 

 박찬열은 흥분해서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교탁에서 가져온 종이를 팔랑거렸고, 변백현은 점수가 낮게 나온 모양인지 엉엉 우는 시늉을 한다. 그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겨서 말이 안 나온다. 변백현 누가 보면 밤 새워서 열공열공빡공! 했는데 점수가 못 나온 줄 알거 아냐 저거. 어이가 없어서 변백현 뒤통수를 한 대 쳤다. 그랬더니 아프잖아 시발!!! 하면서 소리를 빽 지른다. 그걸 그냥 무시하고 박찬열이 들고 있는 종이를 빼앗았다.

 

 “이거 내가 먹어 버릴 거임. 없애버리겠어!”
 “야야 가져와봐! 인증 샷 찍어서 엄마한테 보낼 거야.”
 “아 왜 내 껄 찍어! 니 껄 찍어서 보내야지!!!”

 

 좀 전까지 망했다고 울던 변백현이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또 빼앗아 카메라로 점수를 찍는다. 가만 보니, 지 점수 대신 박찬열 점수를 찍어서 보내겠다고 설치고 있다. 어차피 성적표 나오면 다 들통 날 텐데 왜 저럴까 몰라.

 

 “점수 차이가 무려 60점이 넘게 나!! 너네 어머니가 이걸 보고서 잘도 믿으시겠다. 병신아.”
 “아들 된 도리로 잠시나마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사기 칠 생각 할 시간에 공부를 해라, 공부를!”

 

 키만 멀대 같이 큰 줄 알았던 박찬열은 의외로 공부를 잘 한다. 얼굴만 보고선 변백현이나 나보다 더 공부 못할 것같이 생겼는데 우리 셋 중에 제일 잘 한다. 중학교 때까진 놀고먹던 게 일상이던 애가 정신을 차렸는지 어쨌는지 고등학교 와선 꽤 열심이다. 사실 처음엔 백현이가 공부 제일 잘할 줄 알았는데.. 변백현은 만날 잠만 퍼질러 잔다. 저 새끼 저건 잠만보야, 잠만보. 역시 사람은 외모만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된 사례랄까.

 

 “다 닥쳐. 나 공부 할 거니까 저리 꺼져.”

 

 다 필요 없고,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윤리, 수학, 국사 등등 내가 말아먹은 과목이 너무 많다는 걸 영어 점수표를 보고 또 한 번 자각한 나는 시험을 잘 쳐서 싱글벙글인 박찬열과 그냥 인생이 즐거운 변백현을 내 자리에서 내 쫓고, 좀 전에 덮어둔 비문학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플라즈마고 뭐고 내가 다 정복해주겠어! 내가 믿을 건 너 뿐이다. 시발, 열공!!!

 

 


 

 


“도경수, 너 오늘도 안 나갈 거냐?”
“어? 어…니들끼리 해라. 이 형님이 요즘 좀 바쁘셔서 너네랑 놀아 줄 시간이 없단다.”
“까고 있네. 너 이 새끼, 이래놓고 나중에 나만 빼고 했네 어쨌네 욕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둔다.”
“안 해,안 해. 빨리 나가기나 해. 애들 기다린다.”

 

 변백현과 박찬열의 권유에도 손사래 치며, 그 좋아하는 축구도 마다하고 교실에 남아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서 멍한 눈빛으로 운동장 어딘가를 주시했다. 요즘 따라 자꾸, 눈에 밟히는 녀석이 하나 있다.
 농구 코트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고고한 학의 자태를 연상시키고, 거친 몸놀림 사이에서 우아하게 팔을 뻗어, 유연한 손놀림으로 높이 솟은 골대를 향해 거침없이, 그러나 깔끔하게 슛을 넣는 저 녀석. 그물망을 거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가볍게 받아들며 씩 웃는 모습이 눈이 부시다고 생각되는 건 단지, 뜨거운 햇빛 아래라서 그런 것일까.

 

 “흐음….”

 

 통,통,통.

 참 신기하게도, 저 먼 운동장에서 일정한 리듬에 맞춰 튀는 농구공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몸도, 마음도 나른해져가는 것 같았고. 조금은 풀어진 몸짓으로 책상에 몸을 기울였다.

 3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알고는 있을까. 다시 시작된 게임에 꽤나 열정적으로 농구코트 위를 가로지르는 그 몸짓에 목에 걸린 진갈색의 넥타이가 나풀거린다. 살랑살랑. 마치 춤을 추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만 되면 자연스럽게 여기에 앉아, 너를 내려다보는 내 시선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오, 3점 슛.”

 

 너의 몸짓 하나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내 눈동자를,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일까. 요즘 자꾸 그 꿈을 꾼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서랍 속에서 꺼낸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본 기분이 들었다. 마냥 상쾌하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유명 인사였다. 잘 생긴 외모에 좋은 성적, 괜찮은 성격까지 다 방면에서 출중했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냥 유명했다. 어디서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명한 애가 평범함의 끝을 달리는 내게 어느 날 갑자기 고백을 해왔다. 당황하기도 했고, 얘 가 왜 나를? 하면서 의아했지만 싫진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잠깐 만났었다. 음, 여기서 만났다는 의미는 그냥 단순히 만난 게 아니라 사귀었다 쯤으로 보면 될 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사귄다’고 정의를 내리게 되면 조금 더 깊어지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난 싫지 않았을 뿐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이 모든 게 다 나를 위한 변명이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유명 인사인 그 아이가 내가 좋다며 고백해왔을 때 난 그냥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만 ‘사귄다’뿐인 우리의 관계에 나는 무관심했고 그 아인 날 기다려줬었다. 그러다 지쳐서 나한테 이별을 고했고. 이게 벌써 1년 전이었던가.. 꽤 시간이 지났다. 난 이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계속 꿈에 나온다. 그 아이가 내게 이별을 고했던 그 장면만 끊임없이. 그래서 자꾸만 그 애 생각이 나고, 눈에 밟힌다.

 이게 다, 그 아이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일까.

 시험이 끝난 지난 주말에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가 우당탕탕 시끄러운 옆집 소음에 잠에서 깨 머리엔 까치집을 지은 채로 온갖 짜증을 내며 창문을 내다 봤다. 그리고 이삿짐을 옮기는 듯한 옆집 풍경에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우려던 중에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었다.

 나를 보면 항상 웃던 너인데,
 그 날 처음 봤다. 그 애의 무표정한 얼굴을.

 

 “뭘 그렇게 보고 있냐?”
 “아, 깜짝이야...”
 “병신. 놀래기는.. 축구 안한다고 빼더니 안 어울리게 운동장 구경이나 하고 앉아있네?”
 “그냥, 사람 구경이나 하고 있었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장난스럽게 목을 조르는 박찬열의 팔을 밀쳐냈다. 아 이 귀찮은 놈. 축구 한다고 나가더니 벌써 끝난 건가,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이야, 김종인 진짜 대박인 듯. 쟨 뭐 못 하는 게 없냐?”

 

 잠시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도경수가 운동장에 뭘 숨겨놨을까- 장난스럽게 말하며 운동장을 찬찬히 둘러보던 박찬열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쟤 운동장에서 저러고 있는 거 보면 여자애들 환장하겠다. 우리 도경수처럼 창가에 앉아가지고 어머어머 김종인 졸라 멋쪄! 이러고 있겠지?”
 “그러고 있겠지, 뭐. 그나저나 변백은?”
 “5교시 교과서 안 가져 왔다고 딴 반에 빌리러 갔을 걸, 아마.”
 “걘 들고 오는 게 뭐냐, 대체.”
 “그러게 말이다. 정신머린 쏙 빼두고 몸만 오는 거 같다, 걘.”

 

 찬열과 농담을 하다가 5교시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서랍을 뒤적였다. 5교시가 뭐였더라? 아아, 국사였지, 참. 국사책은 사물함에 있는데, 사물함 갔다 와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힐끔 운동장을 쳐다봤다.

 

 “어?”

 

 좀 전까지만 해도 농구코트에 있었는데 없다. 눈동자를 굴려 운동장 곳곳을 돌아보는데 그 어디에도 없었다. 5교시 시작한다고 들어 갔나보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을? 내가? 대체 왜? 뭐가 아쉬워서?

 

 “야, 어디 갈려고?”
 “아, 나 국사책 가지러 사물함 좀….”
 “가는 김에 내 것도~ 비번 1234 알쥐?”

 

 평소였다면, 부탁하는 박찬열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을 텐데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 가기 위해 뒷문을 넘어서는 순간에도 내가 지금 걷는 건지, 기는 건지 멍할 뿐이었다. 아, 나 왜 이러지…. 한숨은 그냥 나온 것뿐이라고, 아쉬워서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나 자신에게 세뇌시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나이 도경수! 정신 차리자.

 

 “아….”

 

 사물함으로 향하던 도중, 나를 스쳐지나가는 그 아이의 땀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나를 보았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굳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목에 걸린 진갈색의 넥타이가 나풀거리는 것처럼.

 

 

 

 

 

 

 

 

 

 

*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난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긴 했지만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을 줄이야. 텅 빈 교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창가 쪽 제일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빗방울이 맺힌 가방을 툭툭 털었다. 새 학기부터 영 기분이 찝찝하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내가 집 안에 있을 때 얘기고, 비에 젖은 그 축축한 느낌은 싫다.

 

 [뭐하냐?]


 
 박찬열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자는 건지 학교 오느라 바쁜 건지... 가만히 핸드폰만 붙잡고 바라보다가 운동장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호기심이 일어 창가로 다가갔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 둘씩 무리지어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등교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 이제 곧 교실이 북적일 것이다.

 내리는 빗방울이 약해 질 법도 한데 그대로다. 내린다기보단 퍼붓는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저기 오는 떠들썩한 무리 중, 파란 우산이 유난히 눈에 띈다. 비가 갠 다음 날의 하늘이 저런 색일까 싶을 정도로 예쁜 파란색이었다. 딱히 눈 둘 곳도 없어 그 우산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산이 들춰지며 그 사이로 남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

 

 가만히 그 얼굴을 지켜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가 날 올려다보며 눈을 휘면서 웃는다.

 그 순간, 왜일까….

 

 나도 모르게 황급히 몸을 숨기고 말았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너와 나만의 시간
2.

 

 


 엉덩이가 아직도 얼얼하다. 사물함 앞에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멍하니 서있다, 우리 반으로 들어가는 국사 선생님의 뒷모습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교실로 들어갔다가 책을 안 들고 왔다는 이유로 엉덩이를 다섯 대 맞았다. 나에게 책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던 박찬열도 함께. 박찬열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고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미안해, 찬열아. 아임 쏘리.

 5교시 수업시간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성의 5교시는 수면 시간인데 하필이면 또 국사시간이라 여기저기 좀비 천국이다. 국사 선생님은 염불 외우듯이 수업을 하는데 마침 또 목소리까지 잔잔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꾸벅 졸게 된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진짜다. 잠은 오는데, 엉덩이는 아직도 아프다는 게 함정일 뿐. 조금 전까지 잠시 졸다가 깨어나서 수업에 집중하는 척 했다. 국사는 애들이 하나둘씩 풀썩풀썩 쓰러져가는 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진도만 쭉쭉 나가고 있다. 옆을 보니 내 짝지는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고…,

 내 짝지는 좀 이상하다. 성격이 좋은 건지 뭔지, 말을 할 때마다 애들이 자꾸 한국말로 하라고 놀리는데 좋다고 히죽 웃는다. 어디가 모자란 건가 싶기도 하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안쓰러워서 이것저것 챙겨줬다. 그랬더니 또 고맙다고 계속 웃는다. 처음 짝지를 정하기 전엔 백현이랑 앉아서 하루 종일 심심할 틈은 없었는데 얘랑 앉고 나서는 조금 심심하다. 얘가 말이 없는 편이기도 하고, 변백현이 쓸데없이 말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처음엔 백현이랑 계속 짝을 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귀찮았을 거 같다. 깨어있을 땐 자꾸 조잘 거리느라 공부 방해하고, 그러다 내가 무시하면 제풀에 지쳐 혼자 잠들었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그나저나 담임은 무슨 기준으로 짝을 뽑았는지 모르겠다.
 짝지의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맨날 까먹는다. 별명이 오징언데 왜 오징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애들이 자꾸 오징어, 징어징어 하니까 이름보단 별명이 더 익숙하다. 뭐, 내가 얘 이름이나 별명을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왜 자꾸 쳐다봐?”
 “응? 아냐, 공부해.”

 

 뚫어져라 쳐다보니 민망했는지 짝지가 내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공부하는데 괜히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해진 나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복도 쪽 일 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변백현을 쳐다봤다. 역시나 졸고 있다. 아니다. 졸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자고 있다고 해야 될 것 같다. 아주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쯧쯧, 저건 공부 지지리도 안하지...
 지금 내가 남 걱정 할 때가 아닌데. 수업에 집중하려고 뒤늦게 가져온 교과서도 들여다보고 국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자기도 좀 그렇고 해서 교과서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쪽지가 책상위로 던져졌다.

 

 ‘도경수 개새끼.’

 

 박찬열이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은 백현과는 달리 찬열이는 내 바로 옆자리다. 짝지는 아닌데 옆 분단의 같은 줄에 앉아있다. 힐끗 쳐다보니 아주 찢어죽일 듯이 나를 노려본다. 좀 전까지 자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언제 또 일어나서 시비야.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말도 못하겠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 쪽지에 답을 썼다.

 

 ‘아임 쏘리. 그러게 왜 나한테 맡김? 니 잘못도 있음.’

 

 이대로 보내면 박찬열한테 맞아죽지 싶어서 지우개로 열심히 지웠다.

 

 ‘아임 쏘리. 다 내 잘못이오.’

 

 그리고, 최대한 불쌍해 보이기 위해 이모티콘을 쓰려다가 말았다. 변백이나 박찬열은 이모티콘 잘만 쓰던데 난 간지러워서 영 쓰기가 거북하다. 쪽지를 기다리는 찬열에게 건네며 조용히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랬더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붓글씨라도 쓰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쪽지를 쓴다.

 아, 그놈의 쪽지 그만 좀 쓰지.. 귀찮은데.

 

 ‘010-XXXX-XXXX’

 

 열 한자리의 숫자. 누군가의 핸드폰 번호 같은데,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걸까. 영문을 모르겠어서 전해 받은 쪽지를 들고만 있자 찬열이 다시 빼앗아 가더니 사족을 달아준다.

 

 ‘너 요즘 축구도 안하고 훔쳐보잖아. 김 종 인.’

 

 김종인의 번호였다. 1년 전 언젠가 내 핸드폰에서 삭제된 김종인의 전화번호와 달라진 새 전화번호. 번호를 바꾼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찬열의 기습공격에 할 말을 잃은 채 쪽지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찬열은 알고 있었다. 내가 김종인에게 고백 받았던 사실을. 어린 마음에 김종인처럼 유명한 애가 내가 좋대! 하고 박찬열을 붙잡고 주절주절 모든 상황을 읊었던 내 탓이지만.

 둔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가만히 찬열을 쳐다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판서중인 국사선생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한다.

 

 ‘공부해.’

 

 시선을 돌려 관심 없는 척 내려다본 교과서엔 뭐라고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교과서 글씨가 이리도 깨알 같았던가, 아주 큰 도화지에 알알이 박힌 듯한 글자들이 너무나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스윽,

 찬열이 전해준 쪽지를 바지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다녀왔습니다.”

 

 빈집에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다. 야자를 안 하고 집에 오니 역시나 아무도 없다. 부모님은 맞벌이라 늦은 저녁이 돼서야 들어오시고, 하나있는 형은 군대에 갔다. 처음엔 다 내 세상인 것 같아서 신이 났었는데 그것도 한 두 달이지 요즘은 좀 외롭다. 외동인 애들이 이런 마음일까. 아님 말고.

 박찬열이 전해준 그 아이의 번호가 적힌 종이쪽지가 꼬깃꼬깃 해질 때까지 주구장창 들여다봤지만 결국 연락은 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또, 그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꾸 시선이 가고, 신경 쓰이고, 생각하게 되고, 보면 울렁거리긴 하는데…, 에이 몰라몰라!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다. 생각 안 해야지. 냉장고를 열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 컵에 따라 마셔야 되는데 엄마가 알면 질색 할거다. 그치만, 지금 없으니까, 뭐! 변백현이 수업 끝나고 피시방 같이 가쟀는데 따라 갈 껄 그랬다. 그땐 난 집에 가서 열공빡공 할 거니까 너나 쳐 놀라고 악담을 퍼붓고 왔는데 막상 집에 오니까 공부도 하기 싫고, 그냥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서 티비나 보고 싶다. 그치만 마지막 남은 양심이란 게 있어서 티비는 못 켜겠다. 아 집에 왜 왔지? 그냥 박찬열 따라서 야자까지 다 하고 올걸. 공부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집에 와버렸더니 오늘 하루를 또 날리게 생겼다. 이러니 내가 성적이 안 오르지. 매일 매일이 죄책감의 연속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면서 공부는 안하고, 결과가 나오면 그제 서야 후회하는 병신찌질이 도경수. 내가 나를 너무 잘 아는 게 문제다. 이러면서도 안 고치는 게 더 문제고. 누가 날 좀 잡아줬으면 좋겠다. 무력으로 말고, 정신적으로.

 거실에 있으면 곧 티비를 켜고 소파에 드러누울 것 같아서 내 방으로 향했다.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푸르고 와이셔츠를 벗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택밴가?
 거실로 옮기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귀찮아서 흐느적거리며 걸어가선 누구세요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 앞엔 김종인이 무언가를 들고 서 있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방문이라, 완전 깜짝 놀라서는 내가 생각해도 진짜 멍청하게 눈만 굴려 김종인을 봤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들고 있던 걸 내게 내민다.

 

 “며칠 전에 수확한 토마토야, 엄마가 나눠주라고 하셔서.”
 “아…, 고마워.”
 “쟁반 없어? 아님 니가 나중에 갖다 줄래?”
 “아, 잠깐만!!”

 

 부엌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서 쟁반을 가져와 토마토를 옮겨 담으며 김종인 눈치를 봤다. 그 아인 내가 무얼 하든 신경도 쓰지 않으며 토마토만 쳐다 볼 뿐이었다. 이러고 있자니 괜히 어색해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을 걸었다.

 

 “너도 야자 안 하고 집에 왔나봐?”
 “어.”

 

 괜히 말 붙였다. 무안할 정도로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말을 뚝뚝 잘라먹네, 아주 그냥.

 

 “아, 어…잘 먹을게! 고마워!”

 

 말없이 토마토 아홉 개를 옮겨주던 김종인이 고맙다는 말에 날 한번 슥 쳐다보곤 간다는 인사도 안하고 자기네 집으로 가버린다. 웃을 땐 몰랐는데 쟤 되게 차가운 인상이네….

 

 

 

 

 

 

 집에 들어와서 쟁반을 식탁위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괸 상태로 빨갛게 익은 토마토만 뚫어져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멍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공부는 망했는데 예상치 못한 김종인의 방문 때문에 머릿속이 더 혼란스럽다. 좀 전의 김종인은 진짜 말 그대로 엄마 심부름만 하고 갔다. 전에 이사할 때 한번 마주쳤으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란 건 알고 있었겠지? 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온 건지, 아니면 내가 있어도 상관없었던 건지.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 애 앞에서 당황해서 혼자 아,어… 따위의 말만 몇 번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니까 존나존나존나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 싶다. 아악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그러고 있는 사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번엔 엄만가 보다.

 

 “엄마 왔어?”
 “응, 웬 토마토야?”
 “아 옆집에서 주고 갔어. 나 내방 간다.”
 “그래, 아들. 열공!”

 

 잘 익은 토마토를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어머, 잘 익었네, 맛있겠다! 하며 감탄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 나 그러고 보니 아직도 교복차림이네. 아까 옷 갈아입는 중에 김종인이 찾아와서 그 길로 그냥 식탁에 앉아서 하염없이 생각만 했었구나. 아 더워. 옷이나 갈아입어야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책상에 앉았다. 공부가 안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수학의 정석 책을 펴 놓고 x값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졸라 고민하다가 펜을 휙 집어 던지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찬열이가 준 쪽지를 펴들고 핸드폰을 켰다. 토마토 고맙고, 잘 먹겠다는 내용의 똑 같은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몇 번을 반복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토마토 고마워. 잘 먹을게! 아, 나 도경수야!]

 

 심장이 벌렁거리고, 핸드폰을 쥔 손에는 땀이 다 났다.

 

 

 

 

 

 

 

 

 

 

너와 나만의 시간
3.

 


 온 몸이 찌뿌둥하다. 어제, 핸드폰만 붙잡고 다리를 덜덜 떨다가도 거기에 매여 있는 내 모습이 싫어서 배터리를 분리해보기도 하고, 서랍 깊숙한 곳으로 숨겨도 봤다가, 번호를 잘 못 적었나 싶어서 보낸 문자를 몇 번이나 보고, 진짜 별의 별 짓을 다 했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찾았거늘 상단 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초라해. 비참해. 이게 뭐야. 밥 먹을 기운도 없어서 아침도 거르고 학교에 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배까지 고팠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 백현이 웬일로 일찍 왔기에 걔를 데리고 급한 대로 매점 가서 빵을 사먹고 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나 엄마한테 맞았어.”
 “왜?” “전에 박찬열 영어 점수 찍어서 보낸 거 걸렸음. 흑흑”
 “그러게 내가 하지 말랬잖아. 쯧쯧”
 “어제 완전 장난 아니었다니까? 엄마가 그 점수 누구거냐 길래 찬열이꺼 이랬더니 박찬열이랑 계속 비교를 하는 거야.”
 “너네 어머니 찬열이 좋아하시잖아.”
 “그니까! 엄마가 아침부터 얼마나 닦달을 했으면 내가 이 시간에 학교를 왔겠냐고.”
 “자랑이다, 자랑이야.”
 “박찬열 존나 싫어. 으으으!!”

 

 그 자식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며, 키만 멀대 같이 커가지고 공부 지지리도 안하게 생긴 주제에 쓸데없이 공부는 잘해서 왜 나를 욕먹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엄마는 왜 박찬열네 엄마랑 아는 사인지 으 얄미운 새끼 어쩌구저쩌구… 백현이는 찬열이 자리에 앉아서 신나게 찬열이 욕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찬열이 잘못한건 없는 것 같은데. 찬열이 학교에 오면 둘이서 얼마나 시끄럽게 굴지 안 봐도 뻔하다. 찬열이가 늦게 왔으면 좋겠다.
 저러다 말겠지 싶어서 혼자 흥분해서 마구 날뛰는 백현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얜 가만 보면 진짜 의외란 말이지. 순하게 생겨선 하는 짓은 완전 반대다. 처음엔 좀 놀랬다. 2학년이 되고나서 첫 날 어쩌다 같이 앉게 됐는데 초면인데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고, 대화 도중 내 어깨를 자꾸 툭툭 치면서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 길래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미친 친화력을 갖고 있는 박찬열 못지않았다. 인정. 그래서 더 빨리 친해진 거 같지만, 아직도 가끔 신기하다.

 

 “야야, 경수야 내 말 듣고 있냐?”
 “어어, 듣고 있지.”
 “아 이 새끼 너무 하네 또, 귀찮냐? 너 내가 귀찮아?”
 “쪼금?”
 “솔직한 거봐! 완전 내 스타일이야. 오빠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나랑 커피 한잔 콜?”
 “미친놈.”

 

 백현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뻗었다. 그랬더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교실이 떠나가라 웃어 재낀다. 얜 진짜, 미친놈이야.

 

 “나 잠 오거등? 좀 잘 거니까 썩 꺼지렴.”
 “옛 썰.”

 

 배도 부르겠다. 수업 시간도 한참 남았으니 부족한 수면 보충이나 해야겠다 싶어서 백현을 내쫓고 자리에 엎드렸다. 근데 엎드리니까 또 잠이 안와. 공부는 하기 싫고, 자기 자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변백현이랑 노는 것도 귀찮아. 말하기는 귀찮고 잠은 안와서 생각만 들입다 많아진다. 난 생각이 많은 게 흠이다. 생각은 많은 데, 쓸데없는 생각만 해. 안하느니만 못한 거지. 중학교 땐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밤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버스 사고가나면 어떡하지? 배틀 로얄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배틀 로얄이면 애들을 죽여야 되나? 내가, 친구들을? 헐. 이건 좀 아니다. 그럼 숙소에 불이 나면? 내가 떠난 사이 집에 도둑이 들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사서 걱정을 하는 스타일이랄까. 이러면서도 의외로 큰일엔 걱정이 없다, 또. 내 이런 성격을 아주 잘 아는 8년 친구 박찬열이 한마디로 정리해줬다. 넌, 그냥 병신이야. 아, 눈물 나.

 그나저나, 내 짝지는 만날 일찍 오더니 오늘은 좀 늦네. 얘가 와서 옆에서 공부를 해야 내가 자극을 받고 설치기라도 하는데. 도움이 안 돼, 도움이.


- 지이잉


 생각 안하려고 일부러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놨는데 진동음 소리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와, 진짜 순식간이었어, 방금. 나 완전 빨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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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시발.
 열 받아서 핸드폰을 던질 뻔 했다.

 난, 또 김종인인 줄… 알았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김종인 때문에. 지금까지 답장이 없는 걸 보니 내 문자를 보고 그냥 무시 한 거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손가락 두들기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보통, 문자가 오면 답장을 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내 문자가 스팸도 아닌데. 난 오히려 고맙다고 보낸 건데….

 

 “어이, 변백.”
 “어? 니가 웬일이냐?”

 

 조용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뭐야, 또. 변백현 친구라도 왔나 싶어서 고갤 들었는데 그 애다. 김종인. 그 앨 본 순간 문자고 뭐고 다 잊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가 멈칫하며 유심히 살펴봤더니, 백현의 자리에서 대화하고 있다. 중얼중얼 하는데 뭐라는지 잘 안 들린다. 인사는 그렇게 크게 하더니만. 뭐야, 둘이서 뭔 얘기 하는데. 나도 알고 싶다. 백현인 날 처음 봤을 때처럼 스스럼없이 김종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치고, 그 애도 그걸 다 받아주며 웃는다.
 뭐야, 백현이랑 친하네. 난 김종인도 알고, 변백현이랑도 친한데 둘이 친한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어제 나한텐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더니, 오랜만에 김종인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설명하기 힘든 모호한 기분이다.

 한참을 둘이서 웃고 떠들다가 그 애가 백현을 향해 손을 내밀자, 백현이는 분주하게 서랍을 뒤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문을 열고 나갔다. 김종인도 따라간다.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아무도 없는 백현의 자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뒷문이 쾅 열렸다.
 


 “야 경수야, 너 문학책 있냐?”
 “어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 백현이, 내게 주절주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책 빌리러 왔는데 내가 책이 없는 거야, 서랍에 없길래 사물함까지 가려다가 생각났어, 내 사물함에 아무것도 없는 거 너도 알잖아. 한번만 빌려주라. 전에 쟤한테 국사책 빌려서 빌려줘야 된단 말이야. 아잉 오빠,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 한 번만~~
 
 내 팔을 잡고 흔들며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끌어모으는 백현이 뒤로 뒷문에 서있는 김종인의 얼굴이 보였다. 바닥을 보던 그 애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서랍 속에서 문학책을 찾아 백현에게 건넸다.

 

 “자.”
 “땡큐땡큐! 완전 사랑해 진짜!”

 

 교과서 빌려준 게 뭐라고, 신이 나서 내 볼에 뽀뽀하려고 달려드는 백현의 얼굴을 손으로 밀쳤다.

 

 “저리 꺼져!!”
 “내가 담에 맛있는 거 사줄게. 기다리셈.”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인 백현이가 내 책을 들고 뒷문의 김종인에게 뛰어갔다. 내 시선도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방금 김종인과 눈이 마주치고 살짝 민망해져서 대놓고 보진 못하고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게 더 이상한가? 암튼, 둘이서 또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백현이 내 책을 건네자 그걸 받아든 김종인이 손을 흔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종인의 손에 들린 내 문학책을 보니 또, 기분이 이상했다. 난 만날 쟤만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정말, 이상하게도.

 

 


 

 


 “나 사문 필기 좀.”
 “수업시간에 계속 딴 짓 하더니 내 필기를….”
 “뭐라고?”
 “아냐. 자, 여기 사회문화 책.”

 

 그래, 맞다. 못들은 척 했지만 짝지 말대로 수업 내내 졸고, 박찬열이랑 쪽지 주고받고, 핸드폰 가지고 놀다가 필기를 못했다. 그래서 책을 빌렸는데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좀 큰 소리로 말하던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던 짝지가 히죽 웃으며 교과서를 빌려줬다. 아, 얘도 이상한 것 같다. 박찬열, 변백현 이상한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요즘은 나도 좀 이상한데 얘까지 이상하네. 내 주위엔 이상한 애들뿐이구나.

 
 
 “땡큐.”
 “야, 경수야 너 다보고 나도 좀 빌려주라.”

 

 필기를 베끼려고 책을 펼치는데 옆에서 학원 숙제를 하던 박찬열이 끼어들었다. 저 새낀 왜 나한테 물어보지. 원래 주인에게 먼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시 짝에게 물었다.

 

 “들었지? 찬열이도 빌려줘도 돼?”
 “왜 자꾸 내꺼 보려는 거지, 지들이 수업 열심히 들으면 되는 거 아닌 가….”
 “뭐라고?”

 

 또, 들리는데 그냥 못들은 척 했다.

 

 “응? 아냐. 봐도 돼, 괜찮아!”
 “엉, 고맙다.”

 

 아, 진짜 이상해. 나 들으라고 일부러 그런 건가. 내 잘못도 있으니까 뭐라 할 수 없었던 나는, 날 보고 있던 찬열에게 입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얘 좀 이상해.’

 

 그랬더니,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찬열이 대답했다.

 

 “뭐라고? 뭐라는 거야.”
 “암 것도 아님. 숙제나 하셔.”

 

 누가 박찬열이 눈치 빠르다고 그랬지? 난가? 난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랬다면 취소.

 

 “병신.”
 “니가 더.”
 “반사.”
 “아 존나 유치해. 이 형아가 좀 바쁘거든? 놀고 싶음 변백현이랑 놀아라?”

 

 아까 변백현이 욕할 때 같이 욕할 걸. 재수 없어. 흑흑. 우리 백현이 지금 뭐하지? 고갤 돌려 백현의 자리를 쳐다봤더니 열심히 퍼질러 자고 있다. 수업시간 끝났는데 아직도 자? 원래는 쉬는 시간 되면 귀신같이 벌떡 일어나는데, 오늘은 학교 일찍 왔다 이거지. 피곤해서 골아떨어지셨군.
 박찬열을 노려보고, 자고 있는 변백현을 향해 쯧쯧 혀를 한번 차주고 나 혼자서 잘 놀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짝지를 한번 봤더니 이어폰을 끼고 수리 문제를 풀고 있다. 볼륨을 어디까지 높인 건지 나한테도 가사가 다 들려…. 방금 박찬열이랑 얘기 좀 했다고 이러는 건가. 쉬는 시간인데 내 맘대로 얘기도 못해? 좀 억울한데, 이거.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짝은 인상을 쓴 채 열심히 고개를 흔들면서 가사까지 중얼거린다.

 

 “야, 얘 존나 이상해.”

 

 수학 문제 푸느라 정신없는 박찬열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에 내 짝을 슥 쳐다보고 날 보는 찬열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걔 좀 사차원이야.”
 “헐?”
 “좋게 말해서 사차원, 나쁘게 말하면 또라이.”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쯧쯧, 불쌍한 도경수. 힘내.”
 


 좀 이상해도 나쁜 애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근데 옆에서 자꾸 노래 따라 부른다.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애는 맞는 것 같다. 혼자 이어폰 끼고 노래 따라 부르면 진짜 병신 같구나. 난 안 그래야겠다. 짝지를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필기를 베꼈다.

 


 

 

 

 

 

 

 

 “매점 갈래?”
 “야, 방금 밥 먹고 왔잖아.”
 “아 먹어도 배고픈 걸 어떡하냐. 매점 갈래, 말래?”
 “귀찮아.”
 “아, 이 새끼 이건 안 귀찮은 게 뭐야?”
 “숨 쉬는 것 정도?”
 “나가 죽어라. 야, 변백 우리끼리 매점 갔다 오자!”
 “엉, 오케~”

 

 방금 밥 먹고 왔는데 배고픈 두 명의 걸신이 매점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먹고 또 배가 고플까. 배도 부르고, 점심시간이라 교실에 애들도 별로 없이 조용하다. 잠자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5교시 때 안 자려면 지금 자야한다. 빨리 자야지. 엎드리자마자 몸이 나른해졌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 왔나보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점점 나에게 가까워진다. 몽롱한 와중에 귀는 예민하게 작은 소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낯선 냄새? 냄새라기엔 좀 좋다. 그러니까 향기. 그래, 낯선 향기가 났다. 한참동안 그 향기가 내 곁에서 머물렀다. 툭, 무언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책상위로 떨어졌다. 발자국 소리가 또 들린다. 이번엔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지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드르륵, 또 한번 교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눈을 떴다. 고개를 들었다. 문학책이 내 책상 위에 올려져있었다.

 

 [잘 봤어.]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져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돌려받은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좀 전의 낯선 향기. 그러니까, 김종인 냄새가 났다.

 아, 간지럽다.

 

 

 

 

 


 오늘도 야자를 빼먹고 집에 왔다. 우리학교는 고3만 강제로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키는데 내가 2학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빨리 집에 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7교시가 끝나갈 무렵 얼마나 다리를 떨었는지 모른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내팽개치곤 냉장고부터 뒤졌다. 엄마가 어제 사온 오렌지와 바나나, 사과 몇 개를 집어 쟁반에 담고 무작정 옆집으로 향했다. 옆집 문 앞에서 큼큼, 목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 애가 나오길 바라면서.

 

 “누구세요?”

 

 중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문 앞에 서있는 날 보더니 조금 당황했는지 눈이 커졌다. 그런 김종인에게 들고 있던 쟁반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엄마가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서.”

 

 웃으며 말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아, 좀 무거운데….

 

 “쟁반 없어? 아님 니가 나중에 갖다 줄래?”

 

 어제 김종인이 했던 말이다. 일부러 똑같이 했다. 그러자, 그 애가 기다려 하더니 옮겨 담을 쟁반을 갖고 온다. 하나씩 내 쟁반에서 그 애의 쟁반으로 옮길 때 마다 말을 걸었다.

 

 “오늘도 야자 안 했네? 집에서 공부하나봐?”
 “어.”

 

 어제처럼 뚝뚝 끊더라도 오늘은 꿋꿋하게 말을 걸 생각이었다.

 

 “문자 봤어?”

 

 그 말에 아주 잠깐 김종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본 것 같다. 문자, 봤구나.

 

 “문자 봤지?”
 “문학 책 고마워, 잘 봤어.”

 

 내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 그냥 넘어갈 거 같았음 엄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과일 들고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다.

 

 “근데 왜 답장 안 했어?”
 “너 공부 꽤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내 번호는 저장 했어?”
 “필기도 잘 돼있던데.”
 “답장은 안 해도 되는데, 내 번호 저장 안했으면 저장해.”

 

 과일을 다 옮겼다.

 

 “…….”

 

 마지막으로 오렌지를 옮기자마자 김종인이 처음으로 침묵했다. 끝까지 못 들은 척 할 줄 알았다.

 나는 그 애를 쳐다보고, 그 앤 날 쳐다본다. 한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고마워, 잘 먹을게. 어머니께도 고맙다고 전해드려.”

 

 끝까지 묻는 말엔 대답을 하지 않던 김종인이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다. 사실은 5분 남짓이었을 뿐인데.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곧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침에 엄마한테 뒤지게 맞았다. 등이 화끈거리고 장난 아니다. 꼭 불이 날 것 같다. 어제 옆집에 갖다 바친 과일 개 수 만큼 맞은 것 같다. 과일 몇 개 때문에 나 죽네, 나 죽어. 어제 사와서 먹지도 않은 걸 옆집 갖다 주면 어쩌자는 거냐고 화내는 엄마한테 어차피 옆집에 고맙다고 뭐 갖다 줄 거 아니었어? 이랬다가 한 대 더 맞았다. 아파죽겠다. 엉엉. 입 다물어야지.

 

 “나 엄마 차타고 학교 가면 안 돼?”
 “니가 뭐가 예쁘다고 모셔다줘.”
 “아, 엄마 진짜!”
 “진짜, 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만 봐 주십시오.”

 

 스님처럼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더니 엄마가 얄밉다며 또 때렸다. 그런데 이번엔 살살 때렸다. 울상을 하고 쳐다보자 엄마가 집을 나서며,

 

 “빨리 타.”

 

 아싸! 오늘은 엄마 차타고 편하게 학교 가야지.

 

 

너와 나만의 시간
4.

 

 


 드르륵. 드륵. 청소시간이었다. 평소 얼굴 한번 비추지도 않던 담임이 오늘따라 딱 버티고 선 까닭에 하지도 않았을 청소를 한답시고 책걸상을 뒤로 밀어 버리고서 모두들 청소 용구를 손에 하나씩 쥐고서 나름대로 하는 시늉을 하는 가운데, 나는 잠에서 금방 깬 사람 특유의 멍한 얼굴로 담임이 억지로 쥐어준 빗자루를 들고 가만히 서있었다.

 

 “도경수! 너, 청소 똑바로 안 해?”
 “해요, 지금. 하고 있습니다!”

 

 몽롱한 와중에, 남자치고는 꽤 하이톤인 담임의 신경질 섞인 말투에 하는 수 없이 슥슥, 건성으로 바닥을 쓸었다. 남자 반 특유의 쾌쾌한 냄새도 뺄 겸 공기도 정화 시킬 겸 열어놓은 창문으로 쌩쌩 불어 닥치는 찬바람에 머리가 띵하니 울려온다. 점심시간 이후로 내내 잤는지 아주 그냥 죽을 지경이었다.

 요새 자꾸 잔다. 5교시만 잤으면 몰라, 오늘은 5,6 연달아서 수업 두 개를 날려먹었다. 망했다. 엄마가 아침에 공부 열심히 하라고 차 태워서 보내줬는데 난 불효자야. 엄마, 미안.

 

 “쯧쯧, 어제 밤 샜냐? 정신을 못 차리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잠을 자는 건 정상이니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박찬열, 변백현이 차례로 내게 말을 걸었다.

 

 “거기 삼총사. 좋은 말로 할 때 청소해라.”

 

 난 대답도 안했는데, 담임이 다가와 매일 들고 다니는 단소로 우리 셋의 허리를 찔렀다. 아, 눈치 보여서 말도 못하겠다. 청소나 해야겠다. 셋이서 표정을 구긴 채 각자 흩어졌다. 난 좀 전에 받은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백현인 걸레로 창틀을 닦고, 찬열인 창가에서 칠판지우개를 열심히 털었다.

 

 

 

 

 


 “완전 짜증. 담임이 생존신고를 이렇게 하네.”
 “그니까. 평소엔 보이지도 않더니 오랜만에 와서 왜케 난리냐고. 교감한테 깨진 거 아냐?”
 “니 생각도 그러냐? 내 생각도 그래.”

 

 오랜만에 셋이서 대동단결했다. 청소시간 내내 매의 눈으로 딴 짓할 틈을 안 주던 담임 흉보기. 청소가 끝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와 하나씩 바나나우유를 물었다. 오랜만에 친절한 박찬열이 쐈다. 변백현이 옆에서 오빠 완전 멋져. 번호 좀 알려줄래? 개드립을 쳤고, 나는 말없이 빨대를 꽂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찬열은 그런 우리 둘을 비웃었다. 나쁜놈.

 

 “암튼, 도경수 너 어제 밤 샜냐고. 오늘 왜 하루 종일 취침모드야?”
 “아니? 나 어제 꿀잠 잤는데.”
 “야, 자는 거 갖고 뭐라 그러지마! 경수가 죄졌냐?”
 “죄는 니가 지었지. 아이고 백현아, 넌 언제 정신 차릴래? 내년돼야 정신 차릴래?”
 “이게 진짜.. 너, 바나나우유로 맞아봤냐?”

 

 날 도와주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백현이 찬열에게 놀림 받고 있다. 그러건 말건 빨대만 쪽쪽 빨았다.

 난 어제 진짜 말 그대로 꿀잠을 잤다. 옆집에 잠깐 들러 과일을 전해주고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공부도 했다. 그것도 집에서. 티비와 컴퓨터의 유혹을 다 뿌리치고 공부를 했다고. 공부하는 내내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몇 달에 한번 올까 말까한 대단한 집중력이었지.

 내가 며칠 공부할 걸 어제 몰아서 하는 바람에 피곤해서 그런가. 오늘 유난히 잠이 왔다. 옆에서 두고 보고만 있을 박찬열이 아니니 나를 몇 번이고 깨웠을 거다. 근데도 난 내리 잤을 뿐이고. 그게 궁금해서 찬열이가 나한테 두 번이나 물어보다가 결국 백현이랑 둘이서 티격태격하고 있네. 아직도? 유치하게 다 먹은 우유 곽으로 던지니마니 실랑이를 벌인다. 아유, 귀여운 자식들.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 죽여 버리고 싶다.

 

 “아, 진짜 못 봐주겠네. 나 먼저 간다.”

 

 투닥거리는 둘을 뒤로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그랬더니, 뒤에서 두 멍청이가 쫓아오며 소리 지른다.

 

 “야 도경수 어디가!!! 같이 가야지!”

 

 아무튼, 셋이 모이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다니까.

 

 

 

 

 

 

 소나기다. 7교시 끝나자마자 오늘도 칼퇴근 하려고 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발이 묶였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변백현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우산을 안 가져와서 본의 아니게 야자를 하게 되었다. 늘 혼자 남아 공부하던 찬열이 우리 둘을 보고 음흉하게 웃었고 나와 백현인 그런 찬열에게 쌍으로 엿을 날려주었다.

 어차피 오늘 자느라 공부도 못했는데 잘됐다.

 자리에 앉아 내가 잘해서 좋아하는 언어 문제집부터 꺼내들었다. 잘해서 좋아하나? 좋아해서 잘하는 건가. 암튼, 시작은 항상 언어부터다. 왜냐면, 수리부터 시작하면 그날 하루 공부는 비읍비읍. 잘 가라고 인사해야 되거든.

 어젠 비문학이었으니까 오늘은 문학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신기할 정도로 하루 종일 김종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으니까 하루 종일 안 한건 아니지만, 방금 떠올리기 전까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꼬리를 물고 생각이 길어진다는 게 함정. 아, 어제는 내가 왜 그랬을까. 무슨 자신감으로 걔한테 그랬던 거지? 과일은, 그래… 보답이라고 치자. 덕분에 엄마한테 흠씬 두들겨 맞긴 했지만 어차피 엄마도 언젠간 나한테 똑같은 심부름을 시켰을 테니까 패스! 그럼, 문자는? 전화번호는 왜 저장하라 그런 거야. 저장하라고 했으면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서 귀찮게 하던가, 아님 저장 했나 안했나 확인이라도 해야 되는데. 말만 던져놓고 이렇다 할 정도로 보여준 행동이 없다.

 미쳤어. 미쳤나봐. 이게 다 문학책 때문이다. 그냥, 백현이가 빌려간 책이나 다름없어서 당연히 백현이를 통해 전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직접 주다니. 예상치 못한 한방이었다고 해야 되려나…. 돌이켜보니 어제의 나는 쪼다 같았다.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인데 책에 얼굴을 파묻을 건 뭐야, 그래놓고 좋다고 또 실실 쪼갰어. 이건 마치, 짝사랑하는 상대의 책을 훔쳐가지고 품에 안고 좋아하는 그런 거 같잖아.

 헐. 짝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방금 건 생각이 좀 과했다. 패스!

 

 

 

 

 

 

 

 

 김종인 생각을 하다가 한 시간을 보냈다. 오늘 계속 잔건 역시 어제 며칠 할 공부를 몰아서 한 거 때문인 것 같다. 아주 그냥 통으로 야자를 날렸다. 내가 한 거라곤 말도 안 되는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어, 하나도.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야자가 끝나면 그칠 줄 알았던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다. 소나긴 줄 알았는데 소나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젠 날씨마저 날 괴롭힌다. 으으 몸서리를 치며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찌감치 집에 갈 준비를 마친 백현이 나와 찬열에게 빨리 챙기라고 독촉한다.

 

 “아씨 나 우산 없는데 망했다.”
 “나도. 아, 비 맞고 가야되나….”
 “쯧쯧, 불쌍한 중생들. 형한테 잘 보여. 특히 변백현은 나한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다.”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던 우리 둘에게 자신 있게 말하던 찬열이 가방에서 삼단 우산을 꺼낸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 비 온다 그랬는데 우산 챙기지 그랬냐. 하면서 얄밉게 타박을 준다. 그러건 말건 찬열과 같은 방향의 백현이 재빨리 찬열의 팔을 붙잡고 달링, 고마워잉 하며 살았다는 표정을 짓는데 난 여전히 울상이었다. 왜냐면, 쟤네 둘의 집과 우리 집은 정 반대쪽이라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야, 경수 너는 어떡하냐. 데려다줄까?”

 

 신난 백현이를 쯧쯧 거리며 쳐다보던 찬열이 여전히 울상인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찬열이 들고 있는 삼단 우산은 2인용으로도 부족할거다.

 

 “아냐, 됐어. 우리 집은 가까우니까 괜찮아.”
 “야, 그래도 비 많이 오는데 진짜 괜찮냐?”
 “뭐가 진짜 괜찮아, 데려다 주고 가야지.”

 

 당연히 데려다 주겠다는 둘에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해봐, 그 작은 우산에 세 명이 어떻게 들어 가냐? 안 돼. 난 진짜 괜찮으니까 너네끼리 가. 대신, 내가 비 맞아서 앓아누워 죽거든 장례식장엔 꼭 찾아와야 된다.”
 “이게 진짜,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야 진짜 괜찮아? 좀 추하더라도 셋이서 가면 되긴 되는 데.”

 

 추하더라도 종종 걸음으로 가면 된다고 끝까지 날 데려다주고 갈 거라는 두 멍청이에게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면서 현관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 버스정류장 까지만 데려다주는 걸로 합의를 봤다. 창밖으로 보이는 빗줄기가 꽤 세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빗속을 뚫고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아파왔다. 어째, 오늘 일이 잘 풀린다 했더니 운수좋은 날이야 뭐야….

 나가기 직전에 운동화 끈이 풀린 찬열이 주저앉아 끈을 고쳐 매는 사이에 파란 우산을 든 김종인이 우리를 지나쳤다.

 어…! 오늘은 야자 했나보네.

 

 “어? 깜종!!”

 

 내가 봤는데 백현이 못 봤을 리가 없다. 반가운 목소리로 지나쳐가던 그 아이를 불러 세웠다. 백현이가 웃으며 이제 집에 가냐고 말을 걸자 김종인도 웃으며 넌 웬일로 야자를 다했냐며 백현이를 툭 친다. 오랜만에 본 것처럼 복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찬열이 틈새를 파고들어 김종인에게 넉살좋게 인사했다. 내가 알기에 쟤네 둘은 친분이 없을 텐데. 아무튼, 박찬열이나 변백현이나 대단하다. 친화력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지…. 이제와서 아는 척 하기도 뭐했던 나는, 그렇게 세 명이서 대화하는 걸 멍하니 바라만 봤다. 김종인도 분명 나를 봤는데! 나를 본 것임에 틀림이 없는데! 절대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만 빼고 복도에서 한참을 웃고 떠들던 와중에 백현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김종인의 어깨를 탁 치며,

 

 “아 맞다, 깜종 너 경수네 동네로 이사 했었지?! 넌 우산 있냐?”

 

 대답 없이 김종인이 들고 있던 파란색 장우산을 흔들어 보였다. 그걸 본 백현이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던 날 끌어당겨 그 아이의 옆에 세우며 박수를 쳤다.

 

 “와우! 도경수 구사회생이야~!”
 “아, 이 무식한 새끼. 구사일생, 기사회생이겠지. 모르면 쓰지를 말던가.”
 “암튼, 십년감수했다 그치?!”

 

 어디서 바보 냄새난다며 코를 막고 있는 찬열의 발을 지그시 밟은 백현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김종인에게 날 가리키며 말한다.

 


 “얘랑 같이 쓰고 가. 얘가 너 문학책 빌려주고 그랬는데, 어? 기억나지?! 집도 가까울 텐데 둘이서 우산 같이 쓰고 가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

 


 백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날 가만히 쳐다보던 그 아이가 말없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를 보며 오라고 손짓한다.

 

 “간다. 내일 보자!”

 

 그 행동에, 급하게 손을 흔들고 김종인의 뒤를 따랐다.

 백현아, 넌 천사야.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암튼. 내가 담에 맛있는 거 사줄게!!!

 

 

 

 

 

 집에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혼자 쓰고 있을 땐 굉장히 커 보였는데 둘이 쓰고 가려니 우산이 비좁다. 어깨위로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비를 조금이라도 더 피하려고 김종인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랬더니 묵묵히 손잡이만 들고, 앞만 보고 걷던 김종인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 내려다봤다. 내가 얘보다 키가 조금 더 작았다.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내가 들까?”

 

 그 아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우산 같이 쓰자고 한 거지. 아, 따지고 보니 얘가 먼저 쓰자고 한 게 아니네. 백현이가 사정사정해서 들어준 거였지 참.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더라면 그냥 빗속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을 뻔 했다. 나도 말이 없고, 김종인도 말이 없고. 아까 보니 말만 잘 하더니 내 앞에선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먼저 말을 하는 법이 없을뿐더러, 말을 시켜도 대답이 없다. 나도 말 재주가 좋은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몇 번 말을 붙여보다가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과일 잘 먹었어. 맛있더라.”

 

 내가 입을 닫아버리자 하는 수 없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역시 너도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괜한 말을 꺼낸 것 일거다.

 

 “그래? 다행이다.”

 

 내가 엄마한테 얼마나 맞았는데, 당연히 맛있게 먹어야지. 뿌듯한 마음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었다. 툭툭 빗방울이 자꾸 어깨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김종인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그랬더니 김종인이 흠칫 놀래며 한발자국 멀어진다.

 

 “우산이 좀 좁다. 너 비 맞아, 이리와.”

 

 그 아이의 어깨를 흘깃 보니 나만큼이나 젖었기에 팔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온다. 뭔가, 더 어색해진 것 같다. 김종인이 큼큼, 헛기침을 한다.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아니었으면 혼자 편하게 집에 갈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난 십년감수했지만.

 

 “미안,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아…, 괜찮아. 전에 문학책 빌린 거 갚는 셈 치지 뭐.”
 “아냐아냐, 내가 담에 이 은혜 꼭 갚을게.”
 “됐어. 우산 같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

 

 순조롭게 대화가 오가는 듯 했다가 말이 끊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눈을 굴려 우산만 뚫어져라 봤다. 파랗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처음 봤을 때 이 우산을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보면 볼수록 색이 너무 예쁘다. 그래서 이 우산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왜? 하며 묻는다.

 

 “나도 살려고.”

 

 내 말에 한참 또 대답이 없다. 어디서 샀냐고 물은 것뿐인데 기억이 안 나면 안 난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아깐 잘만 대답하더니 왜 또 대답이 없어?

 

 “기억 안나? 아님 말하기 싫나?”
 “…….”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내 번호는 저장했어?”
 “…….”
 “집도 가까운데 앞으로 자주 마주칠 거 아냐. 책도 빌려주고, 우산도 같이 썼고 하니까 뭐 백현이 말대로 친하게 지낼 수도 있는 거고.”
 “…….”
 “…아닌가?”

 

 또 묵묵부답이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못들은 척 어디서 물이 새는 것 같네, 우산에 구멍이 났나. 하며 괜히 멀쩡한 우산 여기저기를 손으로 짚어본다.

 얘가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하는데, 난 왜 굳이 말을 걸고 문자를 보내고 번호를 저장해달라고 애원까지 하는 거지. 보통 이 정도하면 넘어오게 돼있는데 진짜 냉정 하네 김종인. 차리리 싫으면 싫다고 대답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괜히 울컥하게 만들고 있어.

 

 “…나랑 친하게 지내기 싫은가?”

 

 나도 징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이래본적이 없었는데 왜 나를 무시하는 김종인에게 이러고 있는 걸까.

 

 “난 널 좀 더 자주 봤으면 좋겠는데….”


 생각만 한다는 걸,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

 그 말에, 여전히 대답 없던 김종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난 그것도 모르고 걷다가 비를 맞을 뻔 했다. 놀래서 나도 따라 멈추자 김종인이 내 손에 자기 우산을 쥐어준다.

 

 “자. 이거 너 가져.”

 

 그 한 마디만 던지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당황한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우산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멍하니 보다가 김종인을 붙잡으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 아인 이미 사라진 후였다.

 뭐야,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나….

 

 그 아이가 주고 간, 우산을 쥔 손이 화끈거렸다. 김종인을 모르겠다. 그 아인 내게 너무 어렵다.

 

 

 

 

 

 

 

 

 

 

 나한테 우산을 주고 간 김종인은 비를 많이 맞았을 것이다. 지금 아파서 앓아누웠을지도 모른다. 집이랑 거리가 꽤 먼 곳이었는데 무모하게 그렇게 가버리다니.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그 애가 사라지기 전, 내 손을 잡고 우산을 쥐어주던 그 장면만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머리가 아프다. 그 애의 파란 우산을 현관에 놓고 그 앞에 주저앉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울컥하며 무언가 속에서 끓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수백 번째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도망치듯 자리를 뜬 걸까. 비도 엄청 많이 오고 있었는데….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나를 이렇게나 혼란스럽게 만든 그 애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서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보내볼까 했지만 손가락이 굳은 듯 움직이질 않는다. 왠지,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엄마가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방으로 쫓는 바람에 억지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서도 눈만 끔뻑이고 있다가 창밖으로 옆집을 훔쳐봤다. 불이 다 꺼진 와중에 한 곳만 유난히 밝다. 아마도, 저 곳이 김종인의 방일 것 같았다.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오늘도 엄마가 차를 태워줬다. 집을 나서며 현관에 놓인 파란 우산을 보자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으, 생각하지말자! 조수석에 타서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와중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창밖으로 김종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눈을 굴려 열심히 그 아이를 찾았다. 어딨지? 어제 비 많이 맞았을 텐데, 감기에 걸리진 않았을까. 안 보인다. 좀 전에 분명히 봤는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똑똑히 봤다. 분명히 저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김종인을 찾는 걸 포기하고 차 시트에 파묻히며 본 사이드 미러에 김종인이 비친다.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까딱이며 걸어가고 있다. 그 아이의 보폭에 맞춰 내 시선도 따라 움직인다. 횡단보도 앞에 서더니 초록색 등이 켜지자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며 건너간다. 그렇게 점점 작아지더니, 이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다.

 한참 동안 사이드 미러를 바라봤다. 그 아인 이미 내 시야에서 벗어나고 없는 데도 계속 그 아이의 잔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있음….”

 

 사이드 미러에 적혀있는 문구를 조용히 읊조렸다.

 사물이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있음. 사물이, 보이는 것 보다 가까이…, 가까이 있음.

 

 

 …가까이 있었다.
 김종인이, 보이는 것 보다 더 가까이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내가 그 앨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너와 나만의 시간
5.

 

 

 그렇게, 엄마 차 안에서 사이드 미러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다 났다. 엄마가 눈치 챌까봐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쳤지만 결국 들통 나서 하품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댔다.

 

 “…좋아한다.”

 

 말의 힘은 대단하다. 난 그대로일 뿐이지만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자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음가짐과 내 행동이 그 예이다. 그 아이와 나의 관계에서 지금까진 내가 언제나 강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정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난 약자가 되었다.

 한 없이 작고 초라해졌다. 그 애 앞에선 늘 당당하던 나였는데.

 

 “넌 안 아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어딘가로 쌩하니 사라졌던 백현이 돌아와 내 등을 퍽 치며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다가 어젯밤을 떠올렸다. 설마, 김종인….

 

 “무슨 말인데.”
 “방금 깜종 보고 오는 길인데 애가 다 죽어가던데? 난 걔 비라도 맞은 줄 알았다. 근데 어제 너랑 같이 집에 갔는데 넌 멀쩡하네?”
 “걔 아파?”
 “그렇다니까, 계속 기침하고 난리도 아니더라.”

 

 어제 너네 무슨 일 있었냐며 묻는 백현에게 일은 무슨, 하며 대답했다. 옆에선 백현이 어제 그 좁은 우산에 박찬열이랑 둘이서 가는데 진짜 기분 이상했다면서 덕분에 비 안 맞고 가긴 했는데 그 새끼가 언제까지 생색을 낼지 모르겠다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김종인 생각을 했다.

 아파? 아프다고? 결국, 감기 걸려서 아프단 말이지. 걱정했는데 진짜로 아프다니까 마음이 안 좋다. 난 이렇게나 멀쩡한데. 정작 우산 주인은 아파서 골골거린단다. 미안해졌다. 약은 먹었으려나…, 요즘 날씨 덥다고 애들이 에어컨 틀고 난리도 아닌데 춥진 않을까. 체육복은 있겠지? 추우면 덮어야 될 텐데 없으면 어떡하지, 내꺼라도 빌려줄까. 나도 모르게 초조해져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랬더니 뚱한 얼굴로 얘기를 하던 백현이 내 손을 탁 때린다.

 

 “쓰읍, 야 손톱 물어뜯는 거 아니야.”
 “아, 미안.”
 “엥? 니가 나한테 미안할 건 또 뭐냐, 괜찮아, 괜찮아. 그나저나 박찬열 이건 어디 갔어? 야 경수야 얘 어디 갔는지 아냐?”
 “찬열이 아까 배고프다고 매점 갔어.”
 “걘 뭐 맨날 배고파? 근데 먹는 것만큼 안 뚱뚱해.. 먹는 족족 위로 살찌나. 하, 부러운 새끼. 아, 나 박찬열이랑 안 다닐래. 나도 작은 키 아닌데 괜히 작아 보여, 짜증나게.”
 “그건 그래.”
 “경수야, 넌 나랑 다니자. 어제 그 새끼가 자꾸 어깨동무 하고 내려다보는데…, 내가 진짜.”

 

 박찬열이 키가 크긴 크다. 찬열이 만큼은 아니지만 키가 큰 편인 김종인도 어제 날 내려다 봤는데. 나랑 백현이가 작은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작은 게 아니라 걔네가 큰 거다.
 백현이랑 얘기 한다고 잠시 잊고 있었던 김종인이 또 떠올랐다. 어제 같은 우산을 쓰고 걸었던 김종인이 아파, 아프대.

 아, 거 되게 신경 쓰이네….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 조잘거리는 백현이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 어디가!”
 “잠깐 어디 좀 갖다 올게.”

 

 그러고는, 백현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교실을 빠져 나왔다.

 

 

 

 

 

 

 

 

 

 보건실에 가서 약을 탔다. 목감긴지 코감긴지 모르겠어서 그냥 종합 감기약을 받았다. 약 봉지라고 할 것도 없이 캡슐에 들어있는 두 알을 손에 쥐었다. 내가 김종인네 반에 가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조금 긴장이 된다. 무작정 2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를 걷다가 아차 했다. 걔네 반이 어디지? 난 걔가 몇 반인지를 모른다. 헐. 좋아한다면서 그 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아는 거라곤 이름이랑 사는 곳 정도? 에이씨, 인상을 찌푸리고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찾아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왜?
 “야, 김종인 몇 반이야?”
 -김종인? 깜종? 니가 걜 왜 찾는데?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백현이 원망스럽다. 빨리 줘야 되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아 뭐 그런 게 있다고 대충 둘러댔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걔 5반. 우리 옆 반인데 지나가다 한 번도 못 봤냐?

 

 5반이었어, 걔가? 진짜 바로 옆 반인데, 지나가다 한번 볼 법도 한데 난 왜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지. 암튼 백현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곧장 5반으로 찾아갔다. 뒷문을 열자마자 김종인을 눈으로 찾았는데 안 보인다. 아무나 붙잡고 김종인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가르쳐준다. 마침 그 애는 자리에 없었다. 찾아온 김에 얼굴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쉽다. 책상엔 풀다만 개념원리 책이 올려 져 있었다. 수학 잘하네, 빨간색 동그라미가 이곳저곳 한 가득이다. 그걸 바라보자 기분이 묘했다. 책상 오른쪽 상단에 붙어있는 김종인의 이름 위에다 손에 쥔 약을 올려뒀다. 뭐라도 적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그냥 나왔다. 이거 먹고 안 아팠음 좋겠다.

 

 

 

 

 

 

 


 내가 약을 두고 왔다고 해서 그 애가 그걸 먹었을지 안 먹었을지도 모르고, 그걸 먹었다고 감기가 금방 나을 것도 아닌데 그냥 뭔가 뿌듯했다. 자리에 앉아서 내가 올려둔 약을 손에 쥐고 눈을 깜빡이는 김종인을 상상했다. 웃음이 난다. 혼자 씩 웃었더니 박찬열이 또 그걸 보고 시비를 건다. 가볍게 무시했다.

 벌써 금요일이다. 일주일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내일은 놀토라서 학교에 안와도 된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김종인을 못 봤다. 아침에 걔네 반에 찾아갔을 때 보고 왔어야 됐는데, 하필 자리에 없어가지고…, 주말엔 어떻게 보지? 혼자 시무룩했다가 그 아이가 옆집에 산다는 걸 떠올렸다. 아, 좋다. 괜히 옆집 근처를 기웃거리면 어쩌다 한번은 마주칠 수 있을 것 같고 그르네. 엄마 졸라서 뭐라도 가져다줄까, 그럼 저번처럼 걔가 문을 열고 나오려나. 어떻게 해야 주말에 김종인을 볼 수 있을까. 걘 집에서 공부하나, 독서실 다녔으면 좋겠는데…, 어딘지 알아내서 따라다니게.

 아, 맞다! 우산! 우산 가져다준다고 찾아가면 되겠다!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나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던 박찬열이 한마디 던졌다.

 

 “병신.”

 

 그래도 기분이 좋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찾아가는 건 좀 무리겠다 싶어서 점심때까지 컴퓨터를 좀 하다가, 12시가 넘자 밥 먹을 생각도 않은 채 어제 생각한대로 진짜 그 우산을 가지고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전에 그 애가 이걸 나한테 쥐어주며 너 가지라고 했었는데 내가 가져야 되나, 말아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근데 그냥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그래야만 김종인에게 찾아갈 건덕지가 생기니까.

 띵동띵동, 반응이 없기에 한 번 더 꾹 눌렀다. 그러자 철컥 하고 문이 열리며,

 

 “누구세요?”

 

 김종인과 닮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당연히 김종인 일줄 알았는데 순간 놀래서 눈만 깜빡깜빡 거렸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상대가 아래위로 날 몇 번 훑더니 씨익 웃는다. 뭐…뭐지? 좀 무섭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저, 이거….”
 “응? 이거 김종인 거네! 종인이 친구야?”

 

 우산을 보던 상대가 놀란 눈으로 우산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그 이름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친구는 아닌데…. 친구의 친구 정도? 딱히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고 해서 부연설명 없이 가만히 있었더니 문 앞의 상대가 또 한 번 씩 웃으며 난 종인이 누나야. 안녕? 하며 말했다. 닮았다 했더니 누나였구나. 내가 그 애 가족을 봤어…. 그 애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것 같아서 아무 사이도 아닌 주제에 기분이 또 좋아졌다. 누나면 잘 보여야 될 것 같아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응, 그래. 종인이 지금 잠깐 요 앞에 뭐 사러 나갔는데 들어올래?”

 

 내가, 김종인 집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 김종인 얼굴 보러 온 거긴 하지만 마주치면 좀 그럴 것 같은데…, 망설이고 있는 사이 누나가 날 끌어당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이미 김종인네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 좀 부담스럽다.

 나를 보는 네 개의 눈이 휘어졌다. 누나가 날 소파에 앉히며, 엄마! 종인이 친구 왔어, 하고 말하자 부엌에 계시던 걔네 어머니가 나오시더니 날 보며 종인이 친구야? 아이고, 잘생겼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날 가운데에 앉히고 양쪽에 어머니와 누나가 날 둘러싸고 앉아있다. 아, 음…. 김종인은 왜 안 오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친구는 이름이 뭐야?”
 “아, 저 경수요. 도경수.”
 “이름도 예쁘다. 어디 사는데?”
 “아, 여기 옆집 살아요! 전에 주신 토마토는 잘 먹었습니다. 감사해요.”
 “말도 어쩜 이리 예쁘게 해? 완전 귀엽다.”
 “아하하, 가,…감사합니다.”

 

 김종인의 가족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이 철컥 열리더니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부 사왔어. 거스름돈은 나 가진다?”
 “왔냐? 야, 니 친구 왔어!”
 “뭐라고?”

 

 누나에게 검은 봉지를 내밀며 시큰둥하게 말하던 김종인이 거실을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 소파에 앉아있는 날 보고 엄청 놀랬는지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엄청 크게. 김종인을 본 이후로 그렇게 크게 뜬 건 처음 인 것 같다. 그러면서 난 또 그 표정을 보고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고 싶은데, 찍으면 안 되겠지. 아쉽당. 누나가 멍하니 서있는 그 애를 끌어당기며 소파로 데려왔다.

 

 “너 왜 친구 옆집에 산다는 거 말 안 했어?”
 “뭐야, 너….”
 “이게, 기껏 찾아온 애한테 말 하는 거봐라. 니 우산 갖다 주러 왔어! 그치 경수야?”
 “아, 네…. 아, 안녕?”


 김종인의 시선이 현관에 있는 파란에 우산에 닿았다가 다시 나를 본다. 어느새 표정이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던 김종인이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그에, 누나와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그 앨 따라가려하자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집도 가까운데 자주 놀러 와도 된다고 하신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아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씩 웃었다.

 문을 열자, 김종인 특유의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아니아니, 냄새 아니고 향기! 과하게 뿌린 향수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과는 다른 은은한 그 향기에 기분이 좋아서 또 씩 웃었다. 처음 들어오는 김종인 방을 이리저리 눈을 굴려서 쳐다봤다. 책상은 의외로 어질러 져 있었고, 침대위의 이불도 엉망으로 구겨져있다. 컴퓨터를 하던 중이었는지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방에서 보이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여기선 내 방이 보이질 않는다. 고로, 내 방에서도 김종인 방이 보이지 않을 거다. 전에 봤던 그 불 켜진 방은 김종인 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종인 방일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다.

 김종인은 오늘도 말이 없다. 간간히 콜록거리며 기침만 할 뿐. 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아까 누나가 우산 주러 왔다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건가? 어제 나 가지라고 준 걸 내가 다시 가져왔는데도 안 궁금해?

 모니터를 끄던 김종인이 드디어 문 앞에서 뻘줌하게 서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날 슥 보더니 그제 서야 침대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구겨져있던 이불을 정리해줬다. 쪼르르 달려가 침대에 앉는 날 별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훑다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저건 무슨 의미지?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느낌상. 얼굴 봐서 좋긴 한데 오늘도 어색하다.

 사실은 조금 어색한 것도 아니고 존나 뻘줌하다.

 둘이서 말 한마디 없이 어색하게 있었다. 김종인은 나한테 말도 안 걸고 등을 보인 채 책상에 펼쳐져있던 문제집을 풀며 공부를 한다. 헝. 좋아한다고 인정한 순간부터 약자가 된 나는 김종인의 눈치를 보며 공부하는 그 애의 뒷모습만 계속 훔쳐봤다. 내 시선이 닿은 등이 따가운 건지 가끔가다 김종인이 기침을 하며 등을 긁는다. 아직 감기 안 나았나. 내가 준 약은 먹었나? 혼자 생각하다가 혹시나 돌아볼까 싶어서 얼른 핸드폰을 꺼내 딴 짓하는 척을 했다. 근데 이쯤 되니까 드는 생각이, 왠지 김종인이 내가 말 걸까봐 공부하는 척 하고 있는 것 같다.

 

 “우산 너 가지라고 했잖아.”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김종인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아, 놀래라!

 

 “응? 아, 돌려줘야 될 것 같아서….”
 “왜?”

 

 왜냐고, 물으면, 내가 대답할 말이 없다. 솔직히 말하는 건 좀 그래서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냥 웃음으로 무마시키려고 했는데 안 통한다. 다시 한 번 똑같이 물어왔다. 왜? 라고.

 

 “그럼 넌 나한테 왜 줬는데? 그것도 그렇게 뜬금없이.”

 

 그렇게 따지면 내가 더 궁금한 게 많다. 그때 나한테 우산을 던져주고 가버린 것도 궁금하고, 내 번호는 저장 했는지, 내가 준 약은 먹었는지, 이것저것 다 궁금하다. 내가 역으로 질문하자 김종인도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는지 침묵한다. 가만 보니 지가 불리할 것 같을 때만 입을 다무는 것 같다. 헐?

 

 “내가 자주 보자 그랬잖아. 그래서 왔어.”
 “…….”
 “아니, 뭐. 그냥 궁금할까봐.”

 

 끝까지 뒤를 안 돌아보네. 얼굴 보고 싶은데….

 계속 이러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하고, 뻘줌하기도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집에 가보겠다고 공부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내게, 이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한다.

 

 “감기약, 너지?”

 

 김종인은 앉아있고, 나는 서 있다. 그래서 걔가 올려다보는 게 당연한 거고 지금 그러고 있는데도 마치 그 아이가 날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강한 어조에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쓰던 김종인이 한참동안 나를 보며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또 한숨을 내쉬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 말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방을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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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ㅠㅠㅠㅠ 되게 아련하다 뭔가 오묘해여
12년 전
독자2
재미있어요 빨리 다음회 읽고싶어요
12년 전
독자3
신알신!!!!!!
12년 전
독자4
오잉? 완전 재밌어요~!!!! 이제야 반해버린 경수랑 왠지 츤데레인것같은 종인이~ 왤케 저까지 두근거리는지.. ㅋㅋ 찬열이랑 백현이두 넘 귀엽고 ㅋㅋ 다음편 있는거죠? 언능 보고싶어요 금손작가님!!!!
12년 전
독자5
우엉..너무 재밌어요 분위기넘좋구ㅠㅠㅠ캐릭터완전 마음에들어요♥♥♥담편또보고싶어요^*^
12년 전
독자6
진짜 마음이 뭔가 아련한게 ㅠㅠㅠㅠㅠㅠ 경수도 ㅠㅠㅠㅠ 종인이는 경수한테 무슨 맘일까여 ㅠㅠㅠㅠ 경수 나름용기있는 캐릭터 ㅋㅋㅋ 그래도 졸귀 ㅋㅋㅋㅋ
12년 전
독자7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머 아련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귀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2년 전
독자8
헐...너무 좋아요. 뭐죠? 완전 금손.. 댓글 잘안다는 비루한 비회원인데 너무 좋은글이라 눈팅 할 수가 없었어요 작가님 갠홈같은거나 갠블로그 있으신가요? 헝..진짜 너무좋아요 글이 내용이 카디가 ..... 정말 잘읽고 갑니다. 오랜만에 글다운 글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더:) 닉네임 잊지않을게요!
12년 전
독자8
오우 ㅠㅠㅜㅜㅜ재밋어ㅠㅠㅠ
12년 전
독자9
헐.. 재밌어.. 카디팬픽중에서 젤 글 잘 쓰시는듯.. 스스스.. 소름 너무 됴아서..
12년 전
독자10
와진짜 좋다 문체 대박 스토리 대박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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