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6.
죽. 오늘 하루를 죽 쒔다. 어제도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 거린다고 공부 안했는데, 오늘은 남아서 공부 좀 하고 집에 갈까 하다가 그냥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어디론가 향하는 김종인의 모습이 보이기에 몰래 뒤를 쫓았다. 어디가나 싶었더니 도서관이다. 난 도서관보다 독서실이 좋던데. 암튼 그 아이를 따라왔으니 본의 아니게 공부를 하게 생겼다. 어차피 잘된 일이다. 고등학생 주제에 요 며칠을 공부 안하고 날렸으니 앉아서 책이라도 봐야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꺼내는 걸 숨어서 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애의 옆에 가방을 내려놨다. 김종인은 옆에 누가 오든 신경 안 쓴다는 듯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다. 그래서 괜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제야 옆을 돌아본다. 손을 흔들어 안녕, 인사하고 태연하게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문제집 몇 권을 꺼내는 동안, 어이없어 하는듯한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그걸 느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뭔데.’
그랬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한참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김종인이 나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그 큰 종이엔 아주 자그맣게 딱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의외의 관심이다. 또 모른 척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얼른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쥐고 그 밑에다 답을 달았다.
‘뭐가?’
아, 난 좀 뻔뻔한 것 같다. 그 애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면서 괜히 그랬다. 진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김종인에게 노트를 돌려줬다. 그 애는 한참동안 그걸 보고만 있다가 또 무언가를 써서 나에게 건낸다.
‘너 언제부터 여기서 공부 했는데.’
내가 저를 따라 왔는지 그게 궁금한 거다. 내가 자주 보자고 집까지 찾아가고 그랬으니까, 오늘도?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잘못짚으면 민망하니까 나한테 사실 확인을 하려고. 내가 설마 집에 길에 니가 보이길래 졸졸 따라왔지! 이럴 거 같냐.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난 절대로 사실대로 알려줄 생각이 없다.
‘그게 왜 궁금한데?’
김종인은 역질문에 약하다.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또 대답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부해.’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나에게 슬쩍 보여주곤 다시 노트를 가져가는 김종인을 흘깃 쳐다보곤 고개 숙여 웃었다.
귀엽다.
날 투명인간 취급하며 옆으론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는 김종인 덕분에 의외로 아주 공부가 잘 되고 있다. 김종인 옆에서 공부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뭐랄까, 옆에 두고 있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고 해야 되나. 뭐 그래서 오랜만에 꽤 집중해서 수학 문제를 풀었다. 전에 김종인의 책상에 올려져있던 동그라미만 잔뜩 있던 개념원리 책을 기억한다. 수학 잘하는 것 같으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뻔뻔하게 물어봐야지. 그러면서 간간히 은근슬쩍 옆을 훔쳐봤는데, 공부하는 김종인을 볼 때마다 아주 작은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간질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간지럽다. 재채기를 하면 좀 시원하려나. 괜히 콧잔등을 긁으며 다시 펜을 쥐고 수학 공식을 써내려갔다.
너와 내가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하는 풍경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실컷 공부하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려고 옆을 돌아보니 김종인이 자고 있다. 얘가 자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횡재다 싶어서 나도 같이 엎드려서 잠든 옆모습을 바라보려고 했건만 내가 자세를 잡으니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까만 정수리만 보인다. 에이씨. 뭐야. 눈을 감았는데도 내 시선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건가. 김샜다. 엎드리려다말고,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김종인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봐도 되려나. 솔직히 궁금하잖아. 내 번호를 저장했는지도 궁금하고, 또 뭐가 있을지도 궁금하고. 이것저것 암튼! 보고 싶다. 아무리 자고 있다지만 무작정 건드렸다간 김종인이 잠에서 깰지도 모르는 거고, 안자고 있으면 난 진짜 큰일인거고. 자기 물건 건드리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잖아?
“야, 너 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 김종인을 불렀다. 반응이 없다. 근데 김종인은 원래 내 말 들어놓고도 못들은 척 잘 하니까 마음이 안 놓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부르며 이번엔 옆구리까지 들고있던 펜으로 콕콕 찔렀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 오호라, 진짜 자는 거 맞지? 너 진짜 자는 거지?
눈치를 보다가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홀드 버튼을 누르자마자 잠금 화면이 나를 반긴다. 아,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김종인만 자고 있으면 핸드폰을 훔쳐 볼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는데 그건 나의 망상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순 없어! 포기하지 않고 이것저것 그려봤는데 잠금 해제 패턴을 잘못 그렸다고 30초 후에 다시 시도하란다. 엉엉. 울고 싶다.
30초가 지날 동안 김종인 핸드폰을 내 손에 올려놓고 가만히 있다가, 주머니에 넣어둔 내 핸드폰을 꺼내 김종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잠시 후 김종인의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도경수]
화면엔 내 이름 석 자가 뜬다.
물어봐도 답도 없고, 모른척하더니 결국엔 번호 저장 했구나. 그냥 단순히 아무런 수식어구도 없는 달랑 내 이름 세 글자였는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봐, 날 밀어내지 않는다. 김종인은.
김종인의 핸드폰에 뜬 내 이름에 기분이 좋아져서 입 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꾸 실실거렸다. 물어보려던 문제를 넘기고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데 공부가 될 리 만무하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게 아닌데도 마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처럼 흥얼거리게 된다. 아참, 여기 도서관이었지. 조용히 해야겠다. 혼자 막 신나서 그러고 있었더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봤다. 좀 전까지 자고 있던 김종인이 언제 일어났는지 날 또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너, 그렇게 쳐다봐도 내 번호 저장한 거 다 알아. 마주보고 웃었더니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만 자고 공부 좀 해.'
이번엔 내 노트에 써서 옆으로 밀었다.
'너나 잘해.'
김종인이 무심한척 다시 나에게 내민 노트에 이렇게 적혀있다. 그걸 보고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다.
一
어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김종인이 날 버리고 튀었어. 같이 온 게 아니니 걔한테 뭐라고 할 말도 없지만 그래도 옆집인데 집에 같이 가면 좀 어때서. 괜히 심술이 났다. 이번 주는 주번이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돼서 평소보다 빨리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혹시나 김종인이랑 같이 등교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싶어 옆집을 기웃거렸지만 기대는 그냥 기대로 끝났다. 제대로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괜히 바람 맞은 기분이 든다. 문자를 보내볼까 하다가 딱히 할 말도 없어서 관뒀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백현이 데리고 김종인네 반이나 얼쩡거려야겠다. 아, 그나저나 어제 새벽까지 박찬열이랑 문자하고 놀았더니 피곤해죽겠네.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누가 등을 때렸다. 놀래서 돌아봤더니 김종인네 누나가 서있었다. 꿩 대신 닭인가. 전에 한번 보긴 했지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세게 맞아서 등이 다 얼얼하다. 아픈 등을 문지르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꾸벅 숙였더니 누나가 안녕. 인사한다.
“지금 학교 가는 길?”
“네. 누나는 어디가세요?”
“나? 난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
헐. 아침인데 지금 들어간단 소린 어제 집에 안 들어갔단 소린데. 대학생 같은데 이 누나도 어지간히 공부 안하는구나 싶었다. 어제 보니까 김종인은 되게 열심히 하던데.
“뭐야, 너 그 눈빛?”
잘못하면 한 대 더 맞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나는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나저나, 누나도 친화력이 장난이 아니다. 좀 당황스럽긴 해도 날 너무 편하게 대하니까 나도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대하게 된다. 김종인이랑 있을 때 보다 더 편한 것 같다. 가족인데 왜 이렇게 달라? 걔도 좀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니까 좀 안 어울리는 거 같다. 그리고, 김종인은 귀여우니까 봐준다, 내가. 흐흐. 혼자서 실없이 웃고있자 누나가 이상하게 쳐다본다. 요즘엔 시도 때도 없이 김종인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나저나, 너 학교 되게 빨리 간다?”
“주번이라서 이번 주만 빨리 가는 거에요.”
“아, 그래? 이야. 주번 몇 년 만에 듣는 단언지 모르겠네. 기분 이상해. 으으,”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누나가 막 팔을 벅벅 긁는다. 아니, 기분이 이상한데 팔을 왜 긁어? 보통 문지르지 않나? 좀 이상한 누나다.
“아이고, 어제 밤을 샜더니 허리가 쑤신다. 얘가 또 이상한 눈으로 보네. 내가 늙은 것 같지? 근데 너네랑 4살밖에 차이 안 난다.”
오호, 김종인네 누나는 스물둘이다. 걔가 5반인걸 알게 된 후 김종인에 대해서 또 하나를 알았다. 뭐, 본인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너네도 곧 늙어, 시간 빨리 안 갈 것 같지? 빨리 간다? 교복 입고 있을 때가 좋은 거야~ 원래, 좋은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법이거든. 아, 나도 교복 입고 싶다!”
“…아,”
“암튼, 학교 가서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담에 우리 집에 또 놀러 오구!”
“네, 누나. 안녕히 가세요!”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차, 시계를 보니 잘못하면 늦겠다 싶어서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그나저나 김종인 감기는 나았을까. 물어보고 싶었는데 하필 지금 생각나고 난리야.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꽂았다.
‘좋은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법이거든.’
왠지, 그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하다.
너와 나만의 시간
7.
꿈뻑꿈뻑.
“어이.”
스르륵, 눈이 감긴다.
“야!”
누군가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아, 왜 때려!!”
“밥 먹을 땐 눈 좀 뜨자, 어?”
“잠 와 죽겠는 걸 어떡하라고.”
“그 놈의 잠 타령. 쯧, 내가 너 어제 잠 안자고 새벽에 카톡할때부터 알아봤다.”
결국은 어제 늦잠 잤다. 밤에 잠이 안와서 단체카톡방에 뭐하냐고 보냈는데 백현이는 자는지 답이 없었고, 안자고 있던 찬열이랑 3시 맞나? 암튼 3시까지 카톡하며 떠들다가 늦게 잤는데, 수업시간에 못 자는 바람에 아직도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점심은 포기 하겠다는 날 억지로 일으켜선 끝끝내 식당까지 데려다 놓더니, 식판을 떠놓고 그 앞에서 졸고 있는 머리통을 무려 먹고 있던 숟가락으로 내려치기까지 한다. 아, 박찬열 때문에 아주 그냥 죽겠다. 난 이렇게 잠이 오는데 쟨 왜 멀쩡해? 같이 놀아 놓구선. 진짜 이해안가. 암튼.
오늘은 백현이가 아니라 내가 박찬열이랑 투닥거리고 있다. 아, 그나저나 오늘따라 변백현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원래 되게 시끄러워야 되는데.
“변백은?!”
지금까지 잠귀신이 들러붙어서 헤롱헤롱 하다가 이제야 정신 차려보니 식당에 나랑 박찬열 뿐이다. 어쩐지, 조용하다했더니 백현이가 없다.
“아, 걔 집에 갔어.”
“집?”
“어어, 며칠 전에 유인물 나눠준 거 오늘까지잖아, 그거 안 가져왔다고.”
“집 멀잖아?”
“담임이 가져오라고 보냈어.”
집까지 보냈으면 중요한 건가보네. 근데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너, 지금 백현이 없어서 나 끌고 온 거지?”
내 단잠을 깨운 이유가 이거였어. 원래 셋이서 같이 밥을 먹는데, 백현이도 집에 가고 나도 잔다 그러니까 밥은 먹어야겠는데 혼자 내려오기 싫어서. 딱, 보인다, 보여. 의외로 박찬열은 혼자 다니는 걸 싫어한다.
“내가 친구가 너네 둘 밖에 없냐?”
말을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래. 인간관계가 거기서 거기인 나랑은 달리 백현이나, 찬열이나 사교성이 좋아서 친구가 꽤 많다.
“그럼 왜 깨우냐고.”
“다 널 생각해서 데리고 온 거지.”
생각해주는 척 하기는. 어이가 없어서 뻐큐를 날렸다. 그걸 보더니 박찬열이 웃는다. 웃긴 왜 웃어. 징그럽게.
“그나저나, 이제 잠 좀 깼냐? 아깐 기절 할 것 같이 자더니만.”
“아 피곤한 걸 어쩌냐. 난 밥보단 잠이다.”
“그래놓고 또 나중에 배고프다고 찡찡거릴 거였으면서.”
“아니거든?”
“아니기는.”
“아니라니까?!”
“지랄. 밥이나 먹어라.”
아오, 저 얄미운 박찬열. 지가 먼저 시비 걸어놓고 내가 발끈하니까 발을 쏙 뺀다. 어디서 점잖은 척하고 있어. 내가 저거랑 상대하느니 차라리 밥을 한 숟갈 더 먹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얼른 수저를 들었다. 절대로, 쟤가 먹으라고 해서 먹는 거 아니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한 숟갈 퍼 올리자 순간 머리위로 큰 손이 올라온다. 누군지는 뻔하다.
“많이 쳐 먹고 쑥쑥 자라라. 우쭈쭈 내 새끼.”
“이게 진짜!”
아씨, 이게 감히 누구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언짢게 쳐다보며 박찬열의 손을 쳐냈다.
“걱정 마. 키는 군대 가서도 큰대. 아직 남았어.”
발끈했지만, 대답하기 귀찮아서 못들은 척 밥이나 삼켰다.
一
밥 먹고 점심시간에 김종인네 반에 얼쩡거릴려고 그랬는데 변백현이 없으면 찾아갈 구실이 없으므로 아쉽게 무산됐다. 뭐, 백현이가 없는 것도 이유지만 김종인이 반에 붙어 있을지도 의문이라. 전에 지켜봤더니 그 아인 점심시간에 교실에 붙어 있기보단 운동장에서 활동하는 편이었다. 나도 얼마 전 까진 그랬는데, 요즘엔 만사가 다 귀찮다. 게다가, 요 근래에 김종인 때문에 공부를 통 못한 것도 있고 그래서 점심시간에나마 앉아서 공부 하는 척 좀 하려고 일부러 안 나가는 것도 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분데 좋아하는 감정을 깨닫고 나니까 감정 소비가 장난이 아니다. 공부가 안돼. 손에 안 잡혀. 엉엉. 윤리 책을 보다가도 김종인이 뿅 떠오르고, 아까 2교시 땐 국사시간이었는데 문장 속에서 김,종,인 이렇게 세 글자를 찾아서 형광펜을 칠하기도 했다니까 글쎄. 진짜 중증이다.
백현인 점심 먹을 때부터 없었고, 박찬열은 밥 먹자마자 애들이랑 공 차러 나갔으니까 점심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이다. 음하하.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내 자리로 향했는데, 보아하니 짝지가 또 이상한 노랠 들으면서 이번엔 무려 헤드뱅잉까지 하고 있는 거다. 조금 무서워졌다. 그래서 슬그머니 방향을 돌려 완전 끝과 끝에 있는 변백현 자리로 피신했다. 책상이 엉망이다. 교탁 쪽으로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놨다. 이 새끼 이거 선생님 눈을 피해 자려고 별 짓을 다 해 놨다. 그래봤자, 교탁에서 보면 다 보여 인마. 백현이도 없는데 쯧쯧, 혀를 차며 쌓아 둔 책을 하나씩 서랍에 넣으며 정리해줬다. 이제야 좀 낫네.
영어 단어나 외울까 싶어서 변백현의 단어장을 꺼냈다. 내거랑 다른 건데 이거나 저거나 외우면 장땡이지 뭐. 한번 휙 넘겨보니까, 그래도 공부한 흔적은 있다. 특히 앞의 몇 장은 형광펜으로 칠해놓기까지 했다. 백현이도 공부를 하는구나. 신기하면서도 뭔가 기특했다. 아이고,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꼬부랑꼬부랑 글자를 보는데 머리가 다 어지럽다. 으, 완전 토 나와. 한국 사람이 한국말만 잘하면 됐지, 영어가 웬 말이냐! 근데 난 한국말도 잘 못한다는 게 함정이다. 울고 싶다. 엉엉.
몇 개를 좀 외웠을까, 벌써 지겹다. 이거 봐, 이거 봐. 이러니까 내가 항상 시작할 땐 언어를 펼치는 거다. 영어며, 수학이며 시작하자마자 비읍비읍이라니까. 언어가 없으면 사탐을 펼쳤어야했는데 내 실수다. 으으, 난 병신이야. 이럴 거면 운동장에 나가서 공이나 차던가, 공부할거라고 교실에 남아놓고 공부도 안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머리를 부여잡고 막 흔들었다. 그러다 무심코 복도 쪽으로 고갤 돌렸는데 옆 반 복도에서 친구랑 벽에 기대어 얘기하고 있는 김종인이 보인다.
날 본 것 같진 않다. 다행이다. 와, 방금까지 죽어야 된다고 자책할 땐 언제고 또 그 아일 보니까 좋다고 입 꼬리가 이만큼이나 올라가있다. 엄마, 나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건 행운이다. 찾아가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 나와 줬어!
공부할 때 집중하긴 정말 힘들다. 근데, 김종인에게 집중하는 건 순식간이다. 마법 같다. 누가 나한테 화살이라도 쐈나. 오늘도 어김없이 옆구리가 간질거린다. 어제 날 버리고 갔다고 혼자 삐쳐놓고 얼굴 한번 봤다고 금세 풀렸다. 나도 참 단순하다. 그나저나 쟨 진짜 나랑 있을 때만 말이 없는 것 같다니까? 이것 봐, 친구랑 있으니까 헤드록도 걸고 몸을 뒤로 젖히면서 크게 웃기도 한다. 박찬열이 저렇게 웃으면 병신 같던데 넌 화보다. 인정.
보면 볼수록 참 잘생겼다. 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단 소리 들어본 적은 없는데. 자꾸 보니까 나랑 서있으면 잘 어울릴 거 같기도 하고, 흐흐. 잘생겼기도 한데, 무엇보다 분위기가 대박이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분위기까지 있다. 친구랑 무슨 얘길 나누는 건진 모르겠는데 웃긴 얘기라도 하는 건지 씩 웃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따라서 웃고 있다. 헉. 누가 보진 않았겠지? 나 방금 헤벌쭉 해가지고 완전 병신 같았을 거다.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김종인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헉!”
숨을 들이키며 나도 모르게 책상위에 올려뒀던 변백현의 단어장으로 얼굴을 가렸다. 엄마, 나 지금 너무 떨려.
…아, 시발.
그래, 책으로 얼굴을 가린 거 까진 좋았어. 책을 방패로 쓴 건 좋았다고! 근데 거기서 하필 거꾸로 들건 뭐야.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걔가 얼마나 비웃었겠어. 하, 도경수 병신. 쪽팔려쪽팔려쪽팔려!!! 이건 진짜 밤에 이불을 뻥뻥 찰 만한 일이다. 아, 울고 싶다.
당분간 김종인을 피해 다녀야 될 것 같다.
一
피해 다닌다고? 피해 다니긴 개뿔이. 수업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주 자연스럽게 옆집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또 누나를 만났다. 날 보더니 엄청 반가운 얼굴로 우리 지금 피자 시켰는데 경수 너도 올래? 물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사이에 누나한테 팔을 잡혀서 그 아이의 집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또 걔네 집 소파에 앉아있었다.
교복을 갈아입었는지, 평상복 차림의 김종인이 방에서 나오더니 소파에 앉아있는 날 보고 또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별말은 안한다. 부, 부끄럽다. 아까 그 기억은 잊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얜 박찬열이 아니니까 그런 걸로 날 놀리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옆에 털썩 앉은 김종인이 날 보며 픽 웃는다. 씩 웃는 것도 아니고 픽 웃었다. 한쪽 입 꼬리만 올려서 웃은 거다.
“야, 너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누나가 김종인을 발로 툭 차면서 물었다. 그 아인 리모컨을 눌러서 채널을 돌리며 고개를 젓는다.
“알 거 없어.”
그러면서 날 힐긋 쳐다보더니 또, 픽 웃는다. 내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죽고 싶어. 엉엉. 내가 병신 같아서 웃은 게 아닐 거다. 귀, 귀여워서 웃은 거야. 귀여워서. 이렇게라도 세뇌를 시켜야 될 것 같았다. 아니면 쪽팔려서 이 집에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을 테니까. 책 거꾸로 든 거? 그게 무슨 대수라고? 누구나 한번 씩 실수는 하는 법이야. 괜찮아, 괜찮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김종인을 쳐다봤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이젠 기침 안하네. 감기 다 나았나보다. 내가 준 약, 먹었겠지? 그거 먹고 나은 거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래야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뻔뻔한 내 반응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이젠 안 웃는다. 그러면서 나를 지나쳐 누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다.
“엄마는?”
“오늘 야근이래.”
“아 맞다, 김혜인 너 어제 외박했냐?”
“너라니. 이게 죽을라구.”
김종인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봤다. 뭐랄까, 내가 김종인에 대해서 잘 몰랐고, 또 나한텐 완전 무뚝뚝하게 대하니까 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고 해야 되나.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없으면서 막연하게 신비로운 느낌이랄까. 그냥, 보통 내 나이 또래의 행동을 똑같이 할 거라곤 생각한적 없었는데. 누나를 대하는 걸 가까이서 보니까 좀 놀랬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을 한건 아니었다. 이렇게 점차 그 애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나저나, 누나 이름이 혜인이었구나. 종인, 혜인. 예쁘네.
“너 오늘 아빠가 가만 안 둔대.”
“헐? 엄마한테 말했는데, 나.”
“엄마한테 얘기했지, 아빠한테 했냐. 암튼, 아빠가 벼르고 있어.”
“이럴 수가. 망했다.”
티비를 보는 것 같다. 드라마보단 시트콤 느낌?
남매의 흔한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눈을 어떻게 데굴데굴 굴려? 표현이 좀 이상한 것 같다. 암튼, 이 남매는 날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누난 그렇다치고, 김종인은 내가 있으니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벽을 세울 줄 알았는데... 벽을 세운다고 해도, 어차피 받아주지 않는 것뿐이지 밀쳐내진 않았지만. 자주 보니까 이젠 내가 좀 편한가. 편해졌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점점 그 아이의 일상에 스며들어서 언젠가는 내가 없는 것이 허전하게끔 만들어버려야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만족하면서 씩 웃는데, 남매가 날 동시에 쳐다본다.
“아, 얘 봐. 지 혼자 막 웃네? 진짜 귀엽다.”
의도하지 않은 웃음이다. 난 항상 이렇다. 의식 없이 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껌뻑 죽는다. 보통, 여자애들이 넘어가던데 누나도 막 귀엽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난 또 당황해서 멍하니 있다. 근데, 김종인이 누나 손을 막으며 시큰둥하게 한마디 던졌다.
“귀엽기는.”
방금 뭐지? 좀 설렌다.
“야, 경수야. 너 종인이랑 바꿔라. 우리 집에서 살아!”
“오버 좀 하지마. 김혜인.”
“아, 또 이거 봐. 눈동자 막 굴려. 이야, 너 진짜 눈 크다!”
“시끄럽다고, 쫌.”
남매의 관심이 나에게 쏠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누나의 관심이 나한테 쏠렸다. 김종인은, 당황해서 얼어있는 날 슥 보더니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가선 다시 리모컨을 눌러 채널 돌리기에 바쁘다. 난 김종인을 바라보고, 김종인은 티비를 보고. 누난 날 붙잡고 김종인이랑 친구하지 말라면서 저 새끼한테 싸가지 없는 거 배우면 안 돼 하면서 설득하고 있다. 채널은 돌아가고, 피자는 안 오고.
야, 김종인,
너 지금 티비 보는 거 맞아? 홈쇼핑을 보나? 그것도 여자 속옷을?
“변태 새꺄. 뭐 이딴 걸 보고 있어?”
멍한 표정으로 티비를 주시하던 김종인이, 누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재빨리 전원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그리곤 어색했는지 큼큼,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이내 또 조용해졌다. 그 아인 지금 날 보고 있다. 그 모습이 새카만 브라운관으로 비쳤다.
날 보는 표정이 오묘하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애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와 나만의 시간
8.
뜻하지 않게 행운이 찾아왔다. 내일이 개교기념일인데 오늘은 학교 건물 보수공사 때문에 단축수업을 했다. 덕분에 4교시까지만 하고 일찍 마쳤다. 오늘, 내일 학교를 안가도 된다니! 집에 오는 길에 해가 떠 있다. 오랜만의 해 구경이었다. 하교 길은 언제나 즐겁지만 오늘은 유난했다. 변백현, 박찬열, 나. 이렇게 단체 카톡을 하는데 백현이네 집이 저녁부터 빈다고 놀러오란다. 일찍 마쳤다고 해서 공부할 생각도 없었던 나는 흔쾌히 알겠다며 답했고, 학원 간다고 튕길 줄 알았던 박찬열도 곧 오케이한다. 저녁 6시쯤에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래봐야 7시 넘어서야 제대로 모일 거다. 변백현은 동네 피시방에서 놀다가 약속시간을 까먹을 거고, 박찬열은 애가 좀 시간 개념이 없다. 집에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좀 하다가 가야겠다 싶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뒹굴 거리면서 시간낭비할거 차라리 잘됐다. 공부도 안하고, 놀지도 않으면 죄책감만 든다. 어차피 죄책감 들 거 마음껏 노는 게 속 편하다.
집에 도착하니 1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도 빨리 온 편이다. 인강을 볼 거라고 피엠피를 켰다. 컴퓨터는 손도 대면 안 된다. 인강 들을 거라고 컴퓨터 켰다간 무슨 사단이 날지 모른다. 백현이 집 가기 전까진 열공해야지!
그렇게 영문법 인강을 4개나 봤다. 그동안 잊고 까먹고 있었는데 종료 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몰아봐야만 했다. 골이 아프다. 토할 것 같다. 앞으로는 미루지 말고 봐야겠다. 그래도, 뿌듯하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가야 될 것 같아서 천천히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엄마한테 백현이 집에서 잘 거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 역시, 울 엄만 쿨 해. 백현이 집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돼서, 버스 정류장 가는 길에 또 옆집을 기웃거렸다. 혹시나, 김종인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어제는 누나랑 마주쳤는데 오늘은 김종인은 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어젠 나 혼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울 것 같던 그 아이의 표정을 보고 어색해져서 그 이후론 입을 다물었다. 셋이서 피자를 먹는데 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김종인은 내가 그 표정을 본 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좀 안 좋아서, 한 조각만 먹고 집에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김종인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요 근래 들어서는 먼저 말도 걸어주고, 비웃음이긴 했지만 웃어주기도 했는데. 어제 그 표정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생각해봤자 답은 안 나오고 머리만 아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아이를 머릿속에서 내 쫓았다.
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당연히 집에 없을 줄 알고 변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의외로 집에 있었다. 전화를 받고 문 열어줄 줄 알았는데 귀찮다고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역시 이놈은 안 될 놈이다. 어쩌자고 집 비밀번호를 막 알려줘, 알려주기를. 전에 뉴스에서 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비밀번호를 가르쳐주다가 친구한테 집을 털렸었지, 아마. 내가 그럴 거란 건 아니지만 주의를 좀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이 익숙하다. 그래도 오늘은 꽤 오랜만의 방문이다. 백현이네 아버지는 부산에서 근무를 하신다. 뭐, 어쩌다보니 주말부부를 하시는데 어머니가 종종 부산으로 가실 때마다 집에 놀러왔었다. 아무튼, 그래도 그렇지 친구가 왔는데 이건 나오질 않네. 쯧쯧, 혀를 차면서 백현의 방으로 들어갔다. 뭐하나 했더니 역시나 게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왔어?”
“야, 너 비밀번호 아무한테나 막 가르쳐주고 그럼 안 돼.”
“괜찮아, 2주에 한번 씩 바꿔. 너 저녁 안 먹었지?”
“엉. 그냥 왔는데?”
“나중에 박찬열 오면 치킨 시켜 먹자. 엄마가 카드 주고 갔어. 흐흐.”
“야, 백현아.”
“어?”
“내 맘 알지?”
컴퓨터 앞에 앉은 백현에게로 다가가 볼을 부여잡으며 뽀뽀를 하려고 달려들자 얼굴을 손으로 밀치며 욕을 한다.
“왜 안하던 짓이야! 꺼져, 미친. 존나 징그러!!”
좋아서 그르지. 얼굴이 밀쳐지고, 욕을 먹어도 좋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근데 베개에 이거 뭐야? 얼룩이 장난 아니다.
“너 베개 좀 빨지? 침 자국 쩐다.”
“야, 그거 침 흘린 거 아냐! 어제 물 먹다가 쏟은 거거든?”
“지랄.”
“야, 진짜야!!”
못들은 척 베개를 백현에게 휙 던졌다. 게임하던 주제에 그걸 또 받아내면서 이거 진짜 침 아닌데, 억울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베개를 들고 거실로 나가더니 올 때는 또 빈손이다.
“베개는?”
“니가 더럽다며! 그래서 세탁기에 넣고 왔잖아...”
침 아니라고 물 쏟은 거라고 우기더니 그걸 또 세탁기에 넣고 왔단다. 귀엽다, 어? 귀엽다 백현아. 다시 게임을 하겠다며, 알아서 놀고 있으라는 백현에게 알았다고 손짓했다. 여기서 내가 뭐 하고 놀까. 어? 친구가 왔으면 게임은 꺼야 되지 않을까? 한심하게 백현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내가 이해해야지.
팔을 베고 엎드렸다. 박찬열 오기 전까지 잠이나 잘까했지만 잠이 안 온다. 수업시간엔 잠만 잘 오던데.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박찬열에게 언제 오냐고 카톡을 보냈다. 그리곤 웹툰 정주행을 하고, 네이트 기사도 꼼꼼히 읽었다. 평소엔 연예란만 보는 편인데 오늘은 심심해서 시사, 스포츠, 연예 다 봤다. 아직도 박찬열에게 답장이 없다. 더 이상 핸드폰으로 할 것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만지면 부서질까 고이 모셨는데. 바닥에 떨어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살았는데, 이젠 내가 막 휙휙 던진다. 더 이상 재미가 없다. 익숙해져서 그런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시선이 갔다. 책도 안 읽는 게 책장만 크다. 훑어보니 위인전, 세계고전, 자기계발서, 종류별로 다 있다. 그러다 맨 위 칸을 봤는데 거기엔 졸업 앨범이 있었다. 무려, 졸업앨범! 왜, 내 껀 보여주기 싫은데 남의 껀 보고 싶은 그런 심리. 내가 지금 딱 그런 심리다. 그것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일었다. 책장에서 앨범을 꺼내며 백현일 쳐다봤는데, 입을 헤 벌리고 게임 삼매경이다. 그러다 침 떨어지겠다.
“야, 나 졸업 앨범 본다?”
“어어, 맘대로.”
저거 지금 내가 무슨 말 한지도 모를 거다. 집중하고 있는데 말 거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대충 대답한 걸 거다. 어찌됐든 봐도 된댔으니까 앨범을 펼쳤다. 백현이는 나랑 다른 중학교를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히 아는 얼굴이 보인다. 신기하다. 우와, 얘 1반에 김민석이네? 이 자식 완전 용 됐네. 이야. 김종대! 얜 그대로다. 진짜 똑같다. 대박. 얜 누구지? 루한? 잘생겼다... 좋겠네.
그렇게 훑어보다 벌써 3학년 7반이다. 한 장을 넘겼다. 손가락을 움직여 아는 얼굴이 있는지 살펴보는 사이에 앳된 얼굴의,
“…어!”
김종인이다.
백현이랑 어떻게 아는 사인가 했더니 같은 학교 출신이구나.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손으로 턱을 괴고 2년 전의 어린 김종인을 뚫어져라 봤다. 볼살이 좀 더 붙은 것만 빼면 지금이랑 똑같다. 사진이 못나온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실물이 훨씬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귀엽네, 중학생 김종인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요즘엔 그 아이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왜? 좋으니까…. 한참을 그렇게 봤다. 아, 가져가고 싶다. 훔쳐 가면 변백현이 욕하겠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가져 갈 방법도 없다. 남의 졸업앨범을 빌려간다 그러는 것도 웃기잖아. 머리를 굴렸다. 아, 사진!! 갑자기 번뜩 드는 생각에, 좀 전에 아무렇게나 던진 핸드폰을 주워와 사진을 찍었다. 오예, 득템! 찰칵, 엄청 큰 소리가 났는데도 변백현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게임 중이다.
앨범에 있는 그 아이 사진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아어어아악!!!!!!!”
아, 깜짝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변백현이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서 울듯 말 듯한 얼굴로 침대로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래서 보고 있던 핸드폰을 슬쩍 숨겼다. 백현이는 눈치도 못 채고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졌어, 졌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내 앞에 있는 졸업 앨범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뜬다.
“뭐야, 이거 내 졸업앨범!”
“내가 아까 본다 그랬잖아.”
“언제?”
“했어. 너 이렇게 입 벌리고 게임하고 있을 때.”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거 봐, 분명히 기억 못한다니까. 변백현을 보아하니 눈을 굴리는 폼이 딱 언제 그랬지? 하고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폼이다. 생각해보다가 도저히 생각이 안 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만 졸업 앨범을 들고선 몇 장 휙휙 넘긴다. 김종인 보느라 못 찾은 변백현 졸업 사진이 떡하니 보인다.
“야, 너 잘 컸다.”
“무슨 소리. 사진이 못 나온 거지, 난 그때도 한 인물 했었다.”
“지랄.”
“야, 못 믿겠냐? 진짜야!!”
“알았어, 시끄러우니까 그렇다고 치자.”
“아씨, 나 장가갈 때 이거 졸업사진 태우고 갈 거야.”
“그러든가.”
졸업 앨범을 넘기면서 백현이랑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다가 은근슬쩍 김종인에 대해 물었다. 백현이는 그 아이랑 꽤 친한 것 같으니까 물어보면 이것저것 다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박찬열 오면 이런 거 물어볼 시간도 없을테니까 지금이 기회였다.
“아, 근데 김종인 말이야….”
“김종인? 걘 왜?”
“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내 말에 백현이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어이없는 표정인가? 잘 모르겠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백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던 백현이가 걔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낯가림을 좀 한다고. 낯선 사람한텐 말 수가 적단다.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앞에선 말 수가 없는 편이니까 이 말은 즉 내가 그 아이에게 낯선 사람이란 말이 되는 거다. 내가, 낯선 사람인가…? 그 아이한테, 내가? 꽤 자주 봤다고 생각했는데..
“왜, 너한테 말 별로 안 하고 그러든?”
“아, 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보더니 백현이가 별거 아니라면서 자주 보면 나아질 거야 한다. 얼마나 더 자주 봐야 되는 거지? 아, 모르겠다. 김종인에 대해 궁금한 건 많았는데 막상 기회가 생기니까 무엇을 물어야 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백현이가 알아서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는다. 걔랑 나랑 친하다고 너도 친하게 지내라면서. 들어보니, 그 아이에 대한 칭찬뿐이다. 어지간히 좋은 앤가보다. 변백현이 칭찬을 다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갑자기, 어제 그 아이 집에서 누나랑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걔 우리 옆집 살아.”
“헐??? 진짜?”
백현이 과하게 놀란다. 뭐지? 친한 친구들이 이웃사촌이라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엉. 나 걔네 누나도 봤어.”
“누나? 혜인이 누나? 어떻게??”
“아, 뭐… 어쩌다가.”
사실은 내가 김종인 보려고 걔네 집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누나랑 마주쳤다고 할 수 없으니까. 입을 꾹 닫았다. 백현이는 그런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툭 치면서 이번엔 누나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뭐, 들어보니까 그 누나 성격 진짜 좋다고, 가끔 무섭긴 한데 중학교 때 셋이서 자주 놀았다면서 말하다가 저 혼자 향수에 젖었는지 그때가 그립다며 조만간 깜종네 놀러가야지. 하고 말한다.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응. 하고 말았다.
“야, 근데 몇 시냐? 박찬열 이 새낀 왜 이렇게 안와.”
그러고 보니 찬열이가 아직이다. 잊고 있었다. 내 카톡을 씹은 박찬열.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자마자 삑-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백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인상을 쓰며 박찬열 왔나보다. 한다. 뭐야, 찬열이한테도 비밀번호 가르쳐 준거야? 어이가 없어서 백현이를 쳐다보는데 거실로 나가버린다. 헐! 내가 올 때는 오든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박찬열 왔다고 마중 나가는 건가, 지금? 별 거 아닌데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둘 다 재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면서 백현을 따라 거실로 나가자, 양손에 검은 봉지를 든 박찬열이 우릴 보며 웃는다.
“짠!”
“뭔데?”
내 물음에, 찬열이 자랑스럽게 봉투를 열어 보인다. 그 안에는 소주 4병과 맥주 피처 두 개 그리고 안주거리가 들어있었다. 순간, 백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우린, 늦게 온 박찬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방문을 반겼다.
一
술판이 벌어졌다.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닌데, 백현이네 집이 비면 찬열이가 술을 구해온다. 그러면 마시는 거고, 아니면 말고. 술을 좋아하진 않는다. 잘 마시는 편도 아닐뿐더러 술 맛을 알고 마시는 건 더더욱 아니다. 소주는 쓰고, 맥주는 배만 부르고 맛이 없다. 그런데도 마시는 이유는 적당히 취기가 올라 올 때까지만 마시면 알딸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좋아서. 일종의 일탈인 셈이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까 이렇게 몰래 마신다. 물론, 엄마가 알면 난 죽은 목숨이지만 모르시니까 패스!
두 멍청이가 취하면 뒤처리는 내 담당이다. 보아하니, 오늘도 부어라마셔라 둘이서 신나게 달리고 있다. 그래도 둘 다 주사가 심한 편은 아니니 다행이지, 진상을 떨거나 토한다고 욱욱 거리면 진작에 버렸을 거다. 그나저나, 쟤넨 술 맛을 알고 마시는 걸까. 가끔 궁금하다.
피자는 어제 김종인네서 먹었으니 물려서 치킨을 시키자고 주장했다. 처음엔 내 의견이 무시되는 듯 했지만 카드를 쥔 백현이가 곧, 치킨엔 맥주 아니겠어? 치맥짱! 하며 내편을 들어줘서 2대 1으로 치킨을 시켰다. 박찬열은 처음엔 뚱해있다가 치킨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반겼다.
둘이서 잔을 부딪치며 술을 물 들이키듯 마시는 걸 보면서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게 쳐다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아, 맛있겠다 하면서 입으로 가져가는데, 옆에 있던 박찬열에게 다리를 뺏겼다.
“아, 뭐야?”
“닭만 먹지 말고, 술 마시라고. 술. 이거 남기면 낼 다 죽어.”
“알았으니까 내놔.”
그제야 만족스런 얼굴로 다시 다리를 돌려준다. 잔에 소주를 따라주면서 중얼거리는 게 좀 웃긴다.
“내가 이거 건진다고 누나새끼한테 얼마나 빌었는지 아냐, 엉? 아니 어차피 사줄 거면서 그냥 곱게 사주면 안 되냐고. 술 좀 사달라니까 발로 까였어. 나 여기 멍들었어. 보여?”
“헐…. 아팠겠다.”
“그치? 완전 아팠다니까. 그니까, 너넨 이거 남기면 안 돼. 내가 어떻게 구해온 술인데!”
“알았어, 알았어.”
박찬열 좀 취한 것 같다. 난 그냥 웃고만 있고, 박찬열 만큼 취한 것 같은 백현이는 우쭈쭈 하면서 달랜다. 보기 드문 광경이라서 동영상이라도 찍을까 하다가 말았다. 주절주절 거리면서도 나한테 술은 먹여야겠는지 아깐 소주를 따르더니 이번엔 맥주를 따른다. 아, 나 소맥 먹기 싫은데 내 의사 따윈 안중에 없는 건지 지 맘대로 한번 섞더니 나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빨리 안마시면 억지로 넣어버리겠단 얼굴로 계속 쳐다본다. 어쩔 수 없이 한번에 쭉 들이켰다.
“캬, 잘 먹네 우쭈쭈”
“아, 완전 써!”
“이거 먹어.”
박찬열은 좋다고 배를 부여잡고 웃고, 변백현은 나한테 닭을 물려준다. 그걸 받아 먹고 있자니, 머리가 좀 어지러워진다. 헐. 나 이렇게 술 약했어? 소맥 한잔에 훅 가나?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박찬열이 또 술이 담긴 잔을 나한테 준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억지로 또 마셨다. 그러면 백현이가 또 닭을 물려준다. 이러기를 4번 정도 반복했나, 이젠 진짜 취기가 올라온다. 머리도 어지럽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게 되고,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기분이 슬슬 좋아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좋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용기가 생긴다는 것. 나는 용감해졌다. 핸드폰을 쥐고 김종인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뭐라고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놔뒀다. 처음, 찬열에게 번호를 받고 문자 보낼 땐 그렇게 어렵더니 오늘은 굉장히 쉽다. 누르고, 전송. 이 얼마나 간단한가! 답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랑 웃고 있을 때 얼굴을 떠올리며 나도 같이 웃었다. 그 얼굴이 휙 지나가며, 나를 볼 때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우울해졌다. 이번엔, 같이 우산을 쓰고 가던 날이 떠오른다. 그땐 몰랐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그 아이와 또 같은 우산을 쓰고 집에 갈 수 있는 일이 생길까. 생겼으면 좋겠다. 그렇게 혼자서 여러 가지 표정을 만들고 있는 사이에도 역시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러면 난 또 문자를 보내고, 답장은 안 오고. 그래서 또 보내면 여전히 묵묵부답. 괜히 핸드폰만 붙잡고 있으니까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 좀 전까지 50이었는데 지금은 21이다. 내 번호도 저장했으면서. 보통, 문자가 오면 답장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내 문자가 스팸도 아닌데. 내가 보낸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안한다. 속상해졌다. 어제 김종인 그 표정은 뭐야, 대체. 왜 지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거야. 울고 싶은 건 난데. 그 아이 때문에 기분이 좋다가도 금방 곤두박질 쳐진다. 아, 힘들다. 짝사랑은 힘들어요..
더 이상 마시면 진짜로 취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자연스럽게 술잔을 들고, 곧 그것을 입 안으로 훅 털어 넣었다. 아, 쓰다. 써. 사랑이 원래 좀 쓴가봐여. 술이, 술인데. 나는 짝사랑을 해. 술도 쓰고, 사랑도 쓰다…. 뭐라는 거야. 대체.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두 손으로 볼을 탁탁 때리며 눈을 부릅떴다. 이러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그대로다.
“야, 도경수. 취했냐?”
“아아-니.”
“이 새끼, 취했네! 나 얘 취한 건 처음 봐.”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두 멍청이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 안 취했다고. 좀 어지러울 뿐이지. 그래! 이왕 이렇게 주목받은 김에, 술에 취한 척 묻고 싶다. 모든 고민이 그렇듯 내 얘기가 아닌 척 말을 꺼냈다.
“야. 너네는 문자가 왔어. 그러면 답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
“문자?”
“엉.”
“누구한테?”
“누구한테든.”
잠시 고민하던 두 멍청이가 ‘누군지 봐서 답장해야지’ 한다. 뭐지, 그 말은. 답장 하는데도 사람을 가린단 말이잖아. 김종인이 내 문자에 답장을 안 하는 건, 내가 보낸 문자라서 그런 거라고? 대체, 왜?
아, 또 슬퍼졌다. 박찬열이 마시려던 잔을 빼앗았다.
“헐. 야, 너 무슨 일 있냐?”
“아으, 쓰다!”
“이거 먹어!”
백현이가 또, 닭을 입에 넣어준다. 맛있다. 그래, 닭은 맛있어. 맛있는데…. 입안이 좀 쓰다.
“나 또,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누가, 너네가 좋다 그러면 어떨 것 같아?”
그 아이에게 묻고 싶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하면 넌 어떨 것 같냐고. 반응이 상상이 안 된다. 그치만, 왠지 마냥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던 내게 아무런 대답이 없던 너니까.
“그야, 것도 사람 따라 다르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가,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다르대?! 얘기를 들을수록 복잡해지는 것 같다. 아, 술 마시지 말걸. 괜히 머리나 아프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왜, 누가 너 좋대?”
“너 뭐 있지, 도경수? 뭔데?”
눈을 반짝이며 재촉하는 두 멍청이를 바라보며 대답 없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있긴 뭐가 있냐고. 있기야, 있지. 그치만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한다는 게 문제다. 짝사랑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 이거 왜케 어렵냐.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아님, 누가 나 좋대? 누군데, 어떤 애가 나 좋아하는데?”
내가 답이 없자, 혼자서 머리를 굴리던 백현이 말했다. 곧이어, 찬열이가 썩은 표정을 짓고 발로 백현이 다리를 툭 쳤다. 백현이가 아, 왜! 하면서 짜증낸다. 그래, 그렇지. 이게 일상이지. 이제야 좀 익숙하다. 나만 빼고 둘 다 술이 깬 것 같다. 아깐 기분 되게 좋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몹시 안 좋다. 김종인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가도 금세 가라앉는다.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종인이. 그 아이의 이름만 되새겼다. 그러다가 문득, ‘헤어지자’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그 목소리가.
그래서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내 짝사랑이 아니라는 걸.
“박찬열이, 너 좋아한대 백현아.”
내 말에, 백현이는 물론이고 가만히 있던 찬열이까지 기겁을 한다. 백현이는 놀래서 찬열이와 나를 번갈아보고, 찬열이는 굉장히 썩은 표정으로 날 본다.
“헐?????”
“미친 도경수, 지금 무슨 개소리냐?”
반응 봐, 둘 다 귀엽다. 귀여운 놈들.
“예를 든 것뿐이야.”
내 말에 백현이가 한숨을 쉬며 안도한다. 그러다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나한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아, 시발. 기분 나쁘게 왜 하필 박찬열이랑 날 엮어?”
“야, 누군 기분 좋냐?”
둘이 또 싸우네. 너무 극단적이었나.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해서 나랑 김종인의 이름을 꺼낼 순 없으니까.
“암튼, 그래서 너네 둘이 사겼어.”
“꼭 얘랑 엮어야겠냐?”
“너만 기분 나쁜 거 아니라고, 미친놈아.”
“둘 다 닥쳐. 상상하지 말고 들어.”
시끄러운 두 멍청이의 입을 각각 막았다. 그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둘이 사겼어, 아주 잠깐.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찬열이가 백현이 널 찼어. 헤어졌다? 안녕. 이렇게. 그러고, 1년이 지나서 둘이 다시 만났어. 근데, 백현이 니가 찬열이가 좋아졌어. 그래서 걔한테 친하게 지내자고 다가갔어. 그러면 박찬열은 어떤 기분일까?
말을 마치고, 두 명을 번갈아 쳐다봤다. 백현이는 꽤나 진지하게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을 하고 있고, 찬열이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 눈빛이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이라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쓸데없이 눈치 빠른 새끼. 사실, 그 아이와 날 알고 있던 박찬열은 눈치 챌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괜히 부끄러워졌다.
“아, 나 화장실 좀!!!!”
심각한 얼굴의 백현이가 급하게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실엔 나와 박찬열만 남았다. 찬열의 시선이 내 얼굴 곳곳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야, 너….”
“…너, 뭐?”
“너, 김조ㅇ……”
황급히 박찬열의 입을 틀어막았다.
“암튼, 걔. 설마, 혹시….”
알면서 묻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백현이 빨리 나오길 바랐다.
“걔도 알아? 너?”
“…아직 몰라.”
“어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걘 좀 그렇겠다.”
“…왜?”
어째서, 왜냐고 묻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찬열이 쯧쯧, 혀를 차며 말한다.
“병신아, 니 생각만 하지 말고 걔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 역지사지 오케?”
걔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라고? 역지사지? 찬열이 말을 모르겠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복잡해졌다. 그에,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백현이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 한다.
“야, 나 방금 생각해봤는데, 내가 박찬열이면 좀 열 받을 거 같다.”
연타다. 박찬열에게 한방, 변백현에게 연달아 한방.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눈만 굴려 백현이를 쳐다봤다.
“좀, 이기적이잖아.”
한마디를 툭 던지고 날개를 집어 무는 백현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이다. 갑자기 어지러워지면서 지금 보다 어린 김종인과 내가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처음 널 본 날. 그 파란 우산을 쓰고 나를 향해 웃어보이던 네 모습과 그에 비해 시큰둥한 나의 얼굴. 주말의 아침에 뜬금없이 걸려온 너의 전화. ‘헤어지자’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차례로 지나가고, 무표정으로 토마토를 내밀던 니가 떠올랐다. 널 생각하면서 웃고 있는 나와, 브라운관으로 비친 울 것 같은 표정.
그 표정을 끝으로 머릿속이 암전된 것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첫 날부터 비가 온다. 며칠 전 우산을 잃어버리고 새로 산 우산을 쓰고 가는 등굣길이 조금 낯설었다. 급한 대로 아무거나 골라서 산 우산인데 보면 볼수록 맘에 든다. 잘산 것 같다. 만족하며 버스에 올랐다.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는 집에서 좀 먼 곳이라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했다.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가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몇 정거장 못가서 버스에서 변백현과 오세훈을 만났다. 이 둘과는 중학교 때부터 친군데 이번에 같은 학교를 배정받았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여유롭게 오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둘 다 조금 들 뜬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시끄럽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덕담? 아니고, 악담을 그냥 웃으며 듣기만 했다. 유치한 장난에 같이 놀아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빗줄기가 더 세졌다. 우산이 없는 백현이 같이 쓰자고 달려들었지만 밀쳐냈다.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건 딱 질색이다. 백현이가 울상을 짓자 세훈이 우산을 씌워준다. 조금 미안했지만 싫은 건 어쩔 수가 없다. 평소, 시간 약속 잘 지키기로 유명한 세훈이 시계를 보더니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가자고 재촉해서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낯선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3층 어딘가에 누군가 서있다. 나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창가의 그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웃었다.
곧, 그 애가 커튼 뒤로 사라졌다.
“김종인, 빨리 안 오고 뭐해!”
“아,어…지금 간다.”
똘망똘망하게 생겼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이 머릿속에 남았다.
너와 나만의 시간
9.
-종인의 이야기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 명과 같은 반이 되었다. 좀 징그럽다. 새 학교 온 김에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라고 말하자 세훈과 백현이 날 한번 쳐다보더니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둘이서 자리에 앉아버린다. 졸지에 혼자 앉게 생겼다. 두 친구가 앉은 자리 바로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의 아니게 창가 맨 뒷자리다. 사실 난 별 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에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날 보고 흠칫 놀란다. 비스듬하게 앉아, 다리를 앞자리에 쭉 뻗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더니 오해를 한 모양이다. 여러 개의 시선을 느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 비행 청소년? 암튼 뭐 그런 거 아닌데… 첫 날부터 오해받아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자리 탓인가 싶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옮길 자리도 없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날 향한 시선들이 좀 부담스럽다. 머리를 긁적였다.
“야, 애들이 다 너 쳐다본다.”
“그러게. 김종인 좀 무섭게 생겼나봐. 알고 보면 허접인데.”
“닥쳐.”
둘이서 잘만 놀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 날 놀린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그냥 시큰둥하게 넘겼다. 애들이 힐끔힐끔 자꾸 쳐다본다. 애써 외면했다. 그러고 있는데, 앞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들어온다. 교실을 한번 슥 둘러본 선생님이 교탁을 한번 손으로 내려치자 이내 시끄럽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을 한번 바라보다가, 턱을 괴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하얗고 눈이 되게 큰 그 아이가 맞은편 창가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눈에 자꾸 아른거린다. 이런 걸 두고 잔상이 남았다고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그냥, 자꾸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도 당황한 듯 커지던 눈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내가 웃자, 그걸 보고 숨어버린 것 까지도. 그 아이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서 풉 하고 웃었더니 시선이 모두 내게로 집중된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마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럽다. 내심 당황했으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다시 칠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내게 집중된 시선이 흩어졌다.
혹시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창가의 그 아이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一
개학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빠르게 학교생활에 적응했다. 중학교 때보다야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공부를 지지리도 안하던 세훈이도 정신을 차렸는지 수업시간에 잠도 안자고 열심히 하는데 백현이는 그대로다. 언젠가는 정신 차릴 거라 믿는다. 그래도 우리 셋 중에 가장 활발한 편이라 벌써 친구가 많이 생긴 듯 보였다.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백현이가 인사하는 애들이 꽤 많아졌다. 그건 그렇고, 학교에 충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첫 인상 때문인지 뭔지 자꾸 좀 놀 것 같이 생긴 애들이 나한테 친한 척을 한다던가, 괜히 와서 시비를 건다던가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상대해주기 귀찮아서 대충 인상을 쓰고 쳐다보면 몇 마디 말을 붙이다가 알아서 사라지곤 했다. 아무튼, 그네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다. 내가 그렇게 양아치 같나? 심각하게 고민해봤다. 주위 환경이야 어떻든 나는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공부만 열심히 했다. 중학교 때보단 열심히 한 것 같다. 당연한 말인가. 그렇게 학교에 적응해 나가는 동안 창가의 그 아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잊을 뻔 했는데 우연히 백현이와 복도를 지나다가 그 아이를 봤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그래가지고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 줄 아냐?”
“…그래?”
“그렇다니까!”
백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들은 지는 이미 오래다. 대충 장단을 맞춰주니 또 신나서 얘기를 풀어 놓는다. 그러건 말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아이를 지켜봤다. 멍하니 복도에 빗자루를 들고 서 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보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전신을 본건 처음이지만, 키가 되게 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작다. 근데 그게 더 잘 어울린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때처럼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대를 가지고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 아이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쉽다. 어? 혼자인줄 알았는데 옆에 누군가 있다. 되게 키가 큰, …잘생긴 애다. 키 큰 애가 그 아이에게 말을 걸며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어깨를 내어주며 그 말에 대답했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 지 궁금했지만 먼 거리라 들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둘이서 마주보고 막 웃는다. 웃으니까 더 귀엽다. 그냥 귀엽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멍하니 그 얼굴만 쳐다봤다. 어깨동무를 한 채로 둘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1학년 7반.
같은 학년이네. 당연히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1학년이잖아. 근데 뭐가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나도 참 바보 같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
“지랄. 너 정신이 딴 데 가있는 거 같은데?”
“…어.”
“아, 이 새끼! 또 내 말 안 들었어!”
백현이 김빠진다는 듯 짜증을 부렸지만 무시했다. 그냥, 그 아이가 사라진 1학년 7반이 적힌 팻말만 가만히 쳐다 볼 뿐이었다.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아무 이유 없이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조금 낯선 일이다. 그래서 아직도 쫑알거리는 백현이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귀엽다는 생각은 안 든다.
“야.”
“부르지 마. 내 말 안 듣는 김종인 따위한테 대답하지 않겠어.”
“변백.”
“아, 부르지 말라잖아!”
“너, 귀엽다.”
여전히 귀엽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이상한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툭 던졌다. 그랬더니, 쫑알거리던 백현이 순간 얼음이 되어서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표정이 되게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안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백현이가 곧 표정을 풀고 내 등을 한 대 치면서 말한다.
“뭐래, 미친놈이. 존나 징그럽게! 나 방금 토할 뻔.”
“어, 농담이야.”
“이왕이면 잘생겼다고 해줘.”
“못생겼어.”
“이게.”
걘 귀여운데 변백현은 안 귀엽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 얼굴을 또 한 번 봐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작 한 번의 마주침이었을 뿐인데 그 아인 날 복잡하게 만들었다.
一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다. 오늘도 당연하게 백현이, 세훈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나오다가 백현이 신발 끈이 풀리는 바람에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었다. 세훈인 옆에서 학원 시간 늦는다고 빨리 좀 가자고 재촉하는데 백현이는 못 들은 척 다른 쪽 신발 끈까지 고쳐 묶고 있다. 이러고 있자니 처음 학교에 오던 날이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그 아이가 서 있던 창가가 딱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내가 봐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눈에 가득 들어찬다. 그때와는 달리 해가 져서 어둑어둑하고, 비도 오지 않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아이가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조금 허전하다. 저기에 똘망똘망하게 생긴 애가 서 있어야 될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올려다보면 저기서 날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 눈이 이렇게 큰 하얀 애가….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떠올리고 있다. 좀 전에 복도에서 마주치고 나서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왜 그런가에 대한 숙제를 풀지 못했다. 여전히 기분이 좀 이상하고, 마음도 복잡하다. 가방 끈을 잡은 채 한참을 그렇게 빈 창가만 바라보았다.
“야. 뭐봐! 김종인?”
백현이 이제야 신발 끈을 다 묶은 건지 세훈이가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시선을 돌려 두 명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백현인 벌써 저 만치 가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옆에서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훈에게 내가 보고 있던 창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저기가 몇 반인지 아냐?”
“저기? 1학년 7반이잖아.”
1학년 7반. 진짜 7반 맞나보다. 이번에도 왠지 모르게 그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랬더니 세훈이가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내 팔을 잡아 빨리 좀 가자고 이끈다. 그 힘에 이끌려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이번엔 몇 반인지 알았으니, 다음번엔 이름을 알면 좋을 것 같다고.
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늦게 알았다. 자석처럼 이미 그 아이에게 끌려가고 있었으면서 알아 챈 건 얼마 전이다. 그 아이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진 걸 눈치 챘을 땐 이미 마음이 한참 앞서 있었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란 걸 깨닫고 나서야 복잡하고, 이상한 마음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맞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비가 오던 개학 날, 새로 산 파란 우산을 쓰고 무심코 올려다 본 창가에 서있던 그 아이에게 첫 눈에 반한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생각 한 적은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찾아봤다. 제일 처음 국어사전 정의가 뜬다.
좋아-하다.
1. 어떤 일이나 사물 따위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가지다.
2. 특정한 음식 따위를 특별히 잘 먹거나 마시다.
3. 특정한 운동이나 놀이, 행동 따위를 즐겁게 하거나 하고 싶어 하다.
4. 남의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비웃거나 빈정거릴 때 하는 말.
4번은 절대 아닌 것 같다. 답은 1번. 좋은 느낌을 가진다니…. 그 아이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하다. 너무 쉽다.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걸 찾아보려고 했더니 이상한 것만 잔뜩 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점. 뭐, 이런 것들은 아직 알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컴퓨터를 껐다.
一
“형, 저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요.”
그래서 물었다. 과외 하던 중, 궁금한 거 없냐는 준면이 형의 질문에 뜬금없이 대답했다. 내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던 형이 이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야, 종인이 다 컸다? 벌써 여자 친구 생긴 거야?”
“여자 친구는 아니고….”
“그럼, 설마… 짝사랑?”
고개를 끄덕이자, 형이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종인이 니가 짝사랑을? 되게 의외다.”
“그냥, 처음 봤는데, 걔가 자꾸 생각났어요.”
“헐…. 거기다 첫눈에 반하기까지?”
“그런 셈이죠.”
도대체 어떤 애냐며 캐묻는 형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씩 웃었다. 아, 나 벌써 바보 된 것 같다. 그냥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인데 웃음이 자동으로 나온다. 좋아하면 다 이런 건가?
“그냥…, 눈이 되게 커요. 진짜 이만큼! 그리고 하얗고 똘망똘망하게 생겼어요.”
“많이 좋아하나보네. 말하면서 들뜬 거 봐! 아이고, 귀여운 놈.”
“근데,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난 나름 되게 진지하게 말했는데, 형이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갑자기 엄청 크게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입가에 미소만 걸친 정도였는데 지금은 소리까지 내면서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는 형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야, 너 진짜 귀엽다!”
형이 웃음을 멈추고 또 한 번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머리가 헝클어졌다. 손으로 열심히 정리했다. 그랬더니 또 헝클인다.
“여자 친구 많이 만나봤다며?”
“아, 그건… 어릴 때잖아요.”
“지금은 니가 다 컸냐?”
“암튼, 걔네하곤 달라요. 느낌이.”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 친구는 꾸준히 있어왔다. 근데,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뭐랄까… 한창 사춘기고 하니까 얼굴 좀 예쁜 애가 좋아한다고 고백해오면 그냥 다 사귀었다. 솔직히 말해서 좋아해서 만나는 것 보다는 주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사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나뿐만 아니라 여럿 그랬을 거다. 그땐. 아닌가, 아님 말고. 근데 그 아이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얼굴과 1학년 7반이라는 게 전분데 그냥 좋았다. 자꾸 생각나고, 알고 싶고, 그냥 생각만 해도 좋았다.
“어떻게 해야 된 다기 보다….”
“……?”
“그냥, 니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고 있는데, 준면이 형이 또 웃으면서 머리를 또! 헝클인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특별히 내가 해야 할 건 없다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놔두면 된단다.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다고 또 웃는다. 귀여운 건 내가 아니라…, 그 아인데.
“그나저나, 짝사랑 힘들 텐데….”
“네?”
분명 방금 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내가 못들은 척 되묻자 아니라며 고개를 흔든다.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자, 형이 또 웃으며 김종인 파이팅! 형한텐 다 털어놔도 돼. 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공부하자고 개념원리 책을 펴는 형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형! 이거 누나한테는 말하면 안돼요!”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혜인이 알면 얼마나 놀릴지 상상도 하기 싫다. 준면이 형이 비밀로 해주기로 했으니 안심이 된다. 내일은, 꼭 이름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샤프를 쥐었다.
너와 나만의 시간
10.
-종인의 이야기Ⅱ-
도경수.
이름을 알아냈다. 경수였다. 도경수. 참 바보 같지만 이름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수의 옆에 있던 키 크고 잘생긴 애 이름은 박찬열. 둘이 오랜 친구란다. 경수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혼자 서있으면 다가가려고 했는데 발걸음을 떼면 근처에서 박찬열이 나타난다. 그러곤 경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질투가 난다.
괜히 1학년 7반 근처를 자주 어슬렁거렸다. 백현이랑 세훈이가 쉬는 시간마다 어딜 그렇게 가는 거냐고 추궁했지만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왠지 경수에 대한 내 마음을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말 하고 싶지 않았다. 훨씬 짧은 거리를 7반에 들르기 위해 일부러 빙빙 돌아갔고, 어딜 가든 꼭 그 반을 지나서갔다. 어쩌다 오래 보면 기분이 좋은 거고, 못 보면 울적하고.
공부가 잘 안 된다.
수업 시간에 멍 때리는 건 다반사고, 교과서 귀퉁이에 ‘도경수’ 이름을 쓰고 나 혼자 웃었다. 그 이름을 쓴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경수의 손을 그리고 얼굴을 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키 크고 잘생긴 박찬열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키랑 얼굴은 하나도 안 부러운데 그 아이의 친구라는 게 너무 부러웠다. 가까이서 경수와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렇게 매일 몰래 훔쳐보기나 하고, 뒤에서 이름만 부르며 혼자 좋아하는 내 자신이 서글퍼졌다.
기분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승곡선을 타다가도 어느새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 아닌데 부쩍 그런다. 좋다가도 우울하고, 우울하다가 또 신난다. 좋아하면 다 이런 건가. 공부도 안 되고,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자꾸 그 애 생각만 하게 되고…. 도경수가 내 머릿속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다. 거기서 살게 된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꽤 오래 살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그게 딱 내 마음이다. 좋아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깊어져버렸다.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一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경수와 박찬열을 봤다. 그걸 보자마자 얼른 식판을 들고 그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뒤를 졸졸 쫓아오던 백현이 뭐 그리 멀리 가냐고 투덜거렸지만 못들은 척 했다.
“오늘 밥 존나 맛 없어! 진짜, 별로지 않냐?”
“그러게.”
경수가 밥 먹다 말고 박찬열이 머리를 건드리자,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을 내친다. 그러다가 곧,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물며 눈을 크게 뜬다. 맞은편에 앉은 박찬열에게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박찬열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씩 웃는다. 아, 귀엽다.
새치기를 당해 늦게 받은 세훈이 막 내 맞은편에 앉는데, 경수가 안 보인다. 짜증나. 오세훈이 다 가린다. 좀 나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딱히 둘러댈 말도 없어서 혼자 목을 쭉 뺐다가, 머리를 숙였다가를 반복했다. 좀 보일까 싶어서. 근데, 그랬더니 세훈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야, 뭐야. 뒤에 뭐 있어?”
고갤 돌려서 내가 보던 쪽을 흘깃 보던 세훈이가 다시 원위치 시키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날 쳐다본다.
“아무것도 없는데, 너 뭘 본거냐?”
“응? 김종인이 뭘 봤는데?”
우리 둘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백현이 까지 합세해서 내가 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냥, 아는 앤 줄 알았는데 잘 못 본 것 같아.”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백현이가 그럴 수도 있지 뭐, 밥이나 먹자고 한다. 세훈이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반찬을 집어 올리며 또 은근슬쩍 세훈이 너머에 있을 경수를 보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쉽다.
一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가야 될 곳이 있다고 둘러대며 백현이와 세훈이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들은 정보에 의하면 7반이 우리 반보다 늦게 마친다고 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스토커 같다. 으, 그 정도 까진 아닌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은 집에 가는 경수를 뒤따라가 볼 생각이다. 집을 알고 싶어서 찾아가는 건 아니고, 그냥 혹시나 독서실을 다닌다면 같은 곳에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 거다. 나쁜 의도는 없다. 진짜. 곧이어, 갑자기 복도가 떠들썩해지더니 애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마쳤나? 무심한 척 하면서 얼른 눈으로 경수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 사이에 경수도 있었다. 찾으려고 하자마자 눈에 띈다. 되게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데, 그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오늘은 웬일로 혼자다. 또 어딘가에서 박찬열이 나올까봐 이리저리 살폈는데도 없다. 아, 다행이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경수가 나를 스쳐지나간다. 좋은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경수는 땀 냄새마저 좋을 것 같았다. 아, 이건 좀 심했나. 혼자 또 웃었다. 나를 지나쳐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멈춰서 있다가 이러다 놓치겠다 싶어서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랐다.
다섯 발자국 쯤 뒤에서 걸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내가 뒤를 따르는 걸 눈치 챌까봐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딱 다섯 걸음 정도가 좋을 것 같았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쫄래쫄래 잘도 걸어가는 작고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보인다. 뒷모습도 귀엽다. 그래도 뒷모습 보단 앞모습을 보고 싶은데, 내가 저만치 앞서가서 자꾸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옆에서 걸을 수도 없으니 또 아쉽다. 언젠가는 옆에서 걸을 수 있겠지?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자꾸 상상하게 된다. 너와 내가 같이 걷고 있는 그 모습을. 상상력이 풍부한 편도 아닌데 내가 요즘 이런다. 너 하나 때문에.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도서관이다. 역시 경수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들렀다. 그나저나 여긴 우리 집이랑 좀 먼 곳인데…. 집에 갈 땐 어떻게 가지. 길이나 안 잃어버리면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다가, 자리 번호가 적힌 표를 들고 가는 경수의 뒤를 쫓았다. 59번이 적힌 종이를 얼핏 봤다. 얼른 58번을 뽑으려다가 62번을 찾아 손에 쥐었다. 경수와 등을 맞댄 자리다. 천천히 한 칸씩 옮겨가야지.
천천히 열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62번 자리를 찾아다니는데 이미 자리에 앉아서 책을 꺼내는 경수가 보인다. 등을 맞댄 자리. 62번이 맞다. 한 걸음 한 걸음 너에게 다가갈수록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니가 들을까 싶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렌다. 마음이 되게 간지럽다. 손이 닿으면 긁고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내려놓고 그 속에서 문제집 몇 권을 꺼냈다. 손에 땀이 다 났다. 그 아이의 곁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 온건 난데, 이제 와서 잔뜩 긴장한 모습이라니. 누가 봐도 웃길 거란 생각이 든다. 등과 등이 맞닿은 것도 아닌데, 교복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당연히, 공부는 하나도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애 생각을 하느라 정신없었으면서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있는데, 공부가 될 리가 없다. 문제집을 펴 놓고 샤프만 쥐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지만 노래는 듣지 않았다. 등 뒤에서 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따라서 한 장을 넘겼다.
바보 같다.
해가 지고 거리가 어둑어둑해지자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혹시나 날 이상하게 볼까봐 마음속으로 급하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끼이익, 마찰음이 들리자마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집을 넣을 생각도 못하고 손에 들었다. 급한 대로 가방만 어깨에 두르고 경수의 뒤를 따랐다. 도서관에서 나와 골목길을 걸었다. 여전히 경수는 앞서 걷고 있고, 난 그 뒤에서 걷는다. 급하게 나온다고 이어폰도 빼지 못한 상태다. 숨을 고르는 사이, 경수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얼른 주저앉아 운동화 끈을 만지작거렸다.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곧 멀어지는 것 같다. 보진 못했지만 느낌이 그랬다. 고개를 들자마자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 노래 부르려고 그렇게 주위를 살폈나보다. 귀엽다. 소리 내어 웃으면 경수가 민망해 할 것 같아서 입을 막고 웃었다.
“I wanna be a billionaire so freaking bad Buy all of the things I never had”
경수는, 영어 발음도 좋다. 게다가, 노래까지 잘한다.
제대로 된 목소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찔해졌다.
경수야…. 너에 대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어. 조금만 더 가까이서 널 보고 싶고, 네가 날 보면서 웃어줬으면 좋겠고, 너와 손을 잡고 이 거리를 걷고 싶어. 너를 보면 볼수록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틈만 나면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Travie McCoy의 billionaire.
I wanna be a billionaire so freaking bad
난 정말 억만장자가 되고 싶어
Buy all of the things I never had
지금까지 사본 적 없는 것들도 사고
다른 가사는 모르겠다. 그 다음 부터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 그날 밤 골목길에서 경수의 노랫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러면 난 또 웃는다. 중증이다.
一
“형, 제가 저번에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그랬잖아요….”
과외 시간이 되었다. 내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준면이 형을 보자마자 팔을 붙잡고 말했다. 형이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본다. 내 절박한 눈빛을 읽은 것일까, 형이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보라는 듯 날 쳐다봤다.
도경수. 그 아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성격도 모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말할 때 목소리는 어떤지. 아는 게 없는데도 그 이름만 들으면 떨리고, 긴장이 되고, 설렌다. 그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폭발할 것 같았다. 바라만 봐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주변을 맴돌면서 마음이 커졌다.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더 알고 싶었다. 자꾸 욕심이 난다. 이런 내 마음이 감당이 안돼서 울고 싶을 지경이다. 누군가를 붙잡고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그 애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형에게 말했다. 내 마음이 지금 어떤지, 이런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해결 할 방법을 모른다고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그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그 애가, 너무 좋아요.”
“응.”
“그냥 좋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자꾸만 마음이 커져요….”
“…….”
“울고 싶을 정도로.”
형이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 애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진짜로, 도경수가 내안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그 애에 대한 마음을 알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혼란스럽진 않았다.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자꾸 욕심이 나고, 다가가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그 애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 하던 중에 알았다. 나도 남자고 그 아이도 남자라는 걸. 나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다. 그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애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한테 욕이라도 하려나. 겁이 났다. 숨기기엔 내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 그 애에게 친구마저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남자에요.”
“…….”
“제가, 남자를 좋아해요.”
내 말에, 형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형.”
“괜찮아, 종인아.”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쥐고 있던 형의 팔을 더 세게 붙잡으며 울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던 내게 했던 준면이 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짝사랑은 힘들 거야.
짝사랑은 힘들다. 그런데, 내 짝사랑은 더욱더 힘들다.
一
아팠다. 자고 일어났는데 온 몸이 불덩이였다. 그래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어제, 과외 시간 내내 형을 붙잡고 울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형은 그런 나를 달래주지도, 혼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놔두었다. 한참을 울던 내가 울음을 멈추자, 형이 그제야 내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또 힘든 일 있으면 형한테 말해.’
형이 너무 고마웠다. 그러면서 오늘 못한 수업은 토요일에 보강하자며 죄송하다는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 하지 마.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현관을 나서면서 형이 내게 말했다.
‘나는 니가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울컥했다. 또 울까봐 아랫입술을 깨물며 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어제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가, 눈이 무겁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포기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자꾸만 그 애가 생각난다. 학교를 못 갔으니 오늘은 그 애를 못 볼 것이다. 흔한 잔병치레도 하지 않는 건강한 나인데, 이렇게 뜬금없이 아픈 걸보니 상사병인가 싶다.
상사병….
내가 남자고, 그 아이가 남자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보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이나 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는데. 내 말에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안 된다. 내 마음을 말하면 너에게서 완전히 멀어져야만 하나. 복잡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창가를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야 너 아프다며? 새끼, 힘내.]
진동음에, 핸드폰을 보니 세훈의 문자다. 힘내라는 세훈의 문자에 피식 웃으며 답장하려다가 말고 내려놓으려는 순간에 또 하나의 문자가 왔다.
[오늘 체육 완전 재밌었는데. 7반이랑 합동 수업했음.]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아프더라도 학교에 갈걸. 하고 생각했다.
마음을 부정하는 건, 힘들다.
커밍아웃을 한 남자 연예인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무심코 봤다. 기사는 꽤 좋은 내용이었는데, 몇 년 전 커밍아웃을 해서인지 이미지가 좋지 않나보다. 댓글에는 온갖 비속어가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남자를 좋아하건 말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욕먹은 것 마냥 마음이 쓰렸다.
‘더럽다.’
다른 건 모르겠고, 딱 저 세 글자가 적힌 댓글을 보자마자 그 아이를 떠올렸다. 난 마음을 정했다. 그래도 널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아이가 욕을 하건 화를 내건 상관없는데 ‘더럽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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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어서 올리려니까 참 그르네요....허헣...
아직 뒷편 많이 남아있어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