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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 것이 실감나는지, 당신과 함께 걸었었던 이 길은 한없이 즐겁고 행복했었는데, 당신없이 혼자 걷는 이 길은 이젠 내게 너무 무겁구려.

그래도, 오늘도 나는 당신을 기다리려 이 산을 오르고 있소. 30년을 기다렸는데 여전히 오지않는 그대, 30년은 더 기다려야 그대가 오련지..

오늘도 당신없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곤 동산위에 걸터앉아있소..


1937년 6월 25일.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꼭 데리러 오겠다는 굳센다짐을 하고 떠나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내게 다가와 물망초를 꺾어다 주며 내게 물었었죠.


"안녕, 난 이재환이야, 애기는 이름이 뭐야?"


일곱살의 어린 나에게 당신은 웃음을 가져다 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나의 첫만남이었습니다.


1940년 6월 25일. 

나는 10살이 되고 당신은 18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당신은 고아원 청소를 하고있었고, 나는 친구들과 열심히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있었습니다. 

당신은 청소를 다 했는지 나를 조용히 부르곤 뒷뜰로 데려가 나뭇가지로 글자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당신덕분에 한글을 빨리 깨친 나는 당신이 써내려간 글자를 조용히 입밖으로 내뱉었습니다.


'도망가자'


나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날 보며 

'쉿'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웃어보였고,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어리둥절한 채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밤에, 아주아주 늦은 시간에, 형이랑 원식이는 숨바꼭질을 할꺼야. 고아원의 모든사람들이 술래고 우리둘이 말인거야. 

그러니까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되. 그럼 게임이 빨리 끝나잖아. 그치 애기야?"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하는 당신을 보며 숨바꼭질이란 단어를 알아들은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밤. 나를 언제 깨우러 올까, 재밌겠단 어린생각에 밤새 잠이 못들고 있을 무렵, 죽은듯이 조용한 방안으로 당신이 들어왔습니다.

당신이 챙겨온 신발을 신겨주며


"원식아, 이제부터 숨바꼭질 시작이야. 들키면 안되니까 무조건 뛰는거야. 형이 그만 할때까지. 알았지?"


나는 신나하며 당신의 손을 잡고 미친듯이 뛰었습니다. 산을넘고, 얕은 도랑도 건너며 당신이 이제그만, 됐다고 할때까지 우린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5년 6월 25일.


다른 마을로 건너온지 5년이 다 돼 갈때였을겁니다. 마음 좋은 마을 주민들덕분에 당신은 국수집밑에서 일을 배우고 셋방살이를 하고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당신을 생각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지만 답을 생각하는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습니다. 

내가 내린 답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남자끼리 껴안고있는걸 본적도 없을 뿐더러 손을 잡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나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남자와 여자였기에 나는 쉽사리 결론짓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원식아. 무슨 일 있어?"


요 며칠사이, 내 표정은 눈에띄게 안좋아졌나 봅니다. 오늘이 아니면 평생 안되겠다 싶어 나는 용기를 내어 당신께 말을 건넸습니다.


"형. 이상해.. 예전엔 형 봤을때는 그냥  아, 좋안사람이다..그래서 날 데리고 도망가줬구나..생각했는데 이제 형보면 왜 나를데리고 도망쳤지 란 생각이 들어."

"응?원식아..무슨..?"

"나도알아, 이상한거. 거리를 나가봐도, 아이를 데리고 사는 집에 가봐도, 남자랑 여자가 있는데 우린 남자,남자니까.. 이상한데.. 정말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답은 한가지야. 나 형 좋, 아니 사랑하나봐"


당당한 척 고백을 했어도, 혹여나 이런 나 때문에 당신이 나를 내치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당신은 알까요...


"우리 원식이.. 정말 많이 컸구나.애기였는데.. 형도..원식이랑 같은 맘인거 같아.. 아니, 오래전부터였는데, 그땐 원식이가 어려서. 내가 피하기만 했어. 

그런데..이렇게 먼저 말을 할만큼 우리 원식이가 많이 컸었구나.."


말을하는 당신이 너무나도 아름다워보여 당신을 꼭 안아주며 입을 맞췄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았던 당신께 나는 사랑해란 말을 수도없이 외쳐댔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날, 우리는 첫 정사를 나눴습니다.


1950년 6월25일


이제 성인이라며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에게도 국수집의 일자리를 내 주신 덕분에 우리둘은 즐겁게 일을 하고있었습니다. 일을한지 반년 정도가 흘렀을까요.

학교에서 국수집으로 바로 온 주인집 막내아들이 겁에 질려 한 말이 수통을 나르던 내 귀에 들려왓습니다. 

전쟁이 났다고..

그 시각을 기점으로 날아다니는 호의전단지와 방송들, 우리는 이것이 실제상황임을 파악하는데 그리 늦은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주인집과 재빨리 짐을챙겨 역으로 향하는데, 군인 한 분이 우리에게 다가서더니 나이가 몇이냐 물었습니다.  우리의 나이를 말하자 군인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우리를 끌고가려했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이게 무슨일이냐며 왜 내 자식들을 데리고 가냐며 군인을 붙잡고 따져물었습니다. 군인은 아주머니를 뿌리치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만 18세부터 30세까지 조사할게 있다며 따라나오라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를 안심시키고 군인을 따라가보니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기차에 우리들을 실어넣었습니다.

군용기차였습니다. 징집이라 하더군요. 

무서워서 떨고있는 내 손을 그때 당신이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때 어떻게 됬을지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습니다. 

군용지프차를 타고 내렸던 그곳의 광경은 끔찍했습니다. 

모든것이 황무지가 되버린 폐허. 아직도 내가 처음 본 시체의 모습은 눈앞에 선합니다. 같은 부.소대로 발령받은 우리. 당신은 절대 당신곁에서 떨어지지 말라하였습니다.

한 두달쯤을 공포와 압박감에 떨며 보냈을까요, 총도 어느정도 다룰 줄 알고 그렇게 넘어가지 않던 주먹밥을 겨우 한 입 삼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때,

당신은 유서를 쓰라며 전달받은 종이를 작게 찢어 나에게 글을 써 보여주고 그 종이귀퉁이를 삼켰습니다.

'숨바꼭질'

나는 당신을 쳐다봤습니다. 당신은 '쉿'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웃었습니다. 마치 내가 10살이던 그때 그 해 처럼요.

새벽녘, 10살의 난 설레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때의 난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곁에 있어서 모든걸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보초를 서는 군인은 형과 친했던 사람이였습니다.

그사람은 살짝 비켜주며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나는 그사람에게 어색한 미소를 흘려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모양으로 말을하고 우리는 다시 숨바꼭질을 시작했습니다.


1953년 7월20일


산을 넘고, 물살이 거친 강을 건너기도 하며, 우리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보이는 마을마다 멈춰서며 노숙을 하고 서리를 하기도 하며 그렇게 여러집을 전전하며, 

남한의 중반부쯤까지 왔을때였을겁니다. 죽을 고비를 겨우겨우 넘겨가며 가던 길에서..우리는 군인을 만났습니다.

앗 할 새도 없이 그 군인은 총을 겨누더니 쏴버렸습니다.


'탕-'


분명 나를향한 총구였는데 이상하게 안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소리치려던 순간 총알은 연속에서 당신을 맞췄고, 나는 망연자실한 채 당신을 쏜 군인을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쏘는 그 군인의 눈빛을 봤습니다. 아마 평범했던 사람이었나봅니다. 눈앞에서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괴감과 공포심에 물들어 있더군요.

나는 그 군인을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비극을 초래한 건 우리도, 그 군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살릴 수 있을꺼라 믿었습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마을이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업고 혹여 눈물을 흘리면 앞이 보이지 않을까 나는 어금니를 꽉 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겨우 찾아낸 마을은 인적이 드문곳이라 침을 놔주는 영감이 한 명 산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업고는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단 기쁨에 그 영감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영감은 고개를 저으며 죽은사람은 살릴 수 없다 하더군요. 나는 그럴리 없다고, 아직 당신이 살아있다 답했습니다.

영감은 한숨을 쉬며 저게 어디 산사람의 꼴이냐며 그만하라 하였습니다. 나는 허망하게 눈을 감고있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그날은 1953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7월 27일 드디어 기나긴 여정이 끝났단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당신을 이 마을의 작은 동산에 묻어주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당신을 보내고 내려오는 길, 나는 마을앞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물망초를 보았습니다.


.

.

.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동안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기만 하며 두려움 뒤에 묻어뒀던 먼지쌓인 용기를 오늘은 조금이나마 꺼내보려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된 장소, 버스를 타고 떠나 도착해 한참은 더 걸어야 나오는 외진마을.

마을은 전쟁의 쓰디쓴 향취를 덮어버린채 시골마을의 정겨움을 내게 들려주었습니다.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더군요. 

당신과 함께하던 때가 내 가슴을 치고있나 봅니다. 이렇게 아픈걸 보니..

엉엉 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것 같아 가만히 무덤속의 당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고 있자니 어디선가 조그만 아이하나가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울지마요"

아이는 내게 꽃 한송일 꺾어서 쥐여주더니 나를 등진채 산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물망초.. 아이가, 당신을 닮았더군요.

그래요. 당신을 영원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마세요.


Fin.



소재제공해주신 분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덕분에 제 경험치가 늘었어요ㅠㅠㅠ감사드려요ㅠㅠ 

아!!그리고 댓글달아주신 분들과 암호닉 페럿님,차에넨님 모두모두 사랑합니다!!!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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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흐으어어엉 재환이가 원식이를 떠났나 했더니 죽은거였군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런 전쟁의 아픔이 있는ㅠㅠㅠㅠ흡...
11년 전
천사와악마
ㅠㅠㅠㅠㅠ그렇죠ㅠㅠㅠㅠ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ㅎㅎㅎㅎㅎ
11년 전
독자2
신알신 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지짜 대박ㅠㅠ
11년 전
천사와악마
신알신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 언제들어도 기분좋은 단어네요ㅠㅠㅠㅠㅠ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3
ㅠㅠㅠㅠㅠㅠㅠ전쟁ㅇ이라니ㅜㅜㅠㅠㅠㅠㅠㅠㅠ슬프규ㅠㅠㅠㅠㅠ 지금 착한사람 노래 듣는데 뭔가맞는거ㅜ같아 더 슬프네여ㅜㅜㅠㅠㅠㅠㅠ
11년 전
천사와악마
아 정말요??ㅠㅠㅠ ㅎㅎㅎㅎ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자주 놀러와주세요 ㅎㅎㅎㅎ
11년 전
독자4
헐 진짜ㅠㅠㅠㅠㅠ너무슬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신알신하고 가요ㅠㅠㅠㅠㅠ
11년 전
천사와악마
으아ㅠㅠㅠㅠ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글 많이 읽어주세요 ㅎㅎㅎㅎㅎ
11년 전
독자5
헐ㅠㅜㅠㅠㅠㅠㅜ
11년 전
독자6
슬프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잘 쓰셨어요ㅠㅠㅠㅠㅠ 신알신 할게요ㅠ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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